매를 청해서 맞는다더니 요즘 내가 꼭 그 짝이다.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운하 이야기’’ 쓰느라고 꼼짝 없이 잡혔다. 누가 하란 것도 아니고, 내가 그거 한다고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서 정성을 바친다.

한두 꼭지만 더 쓰면 내가 일단 생각했던 단락은 마치게 될 것이고, 그 후에 나는 한국 신문을 들여다보지도 않을 작정이다. 참견하면 할 수록 깊이빠지고 나 스스로 평정심을 잃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곱지 않게 늙는 징조인 것 같아서 미리 조심하련다.

소설 ‘‘물안개의 집'‘은 블로그에 3분의 2 정도 올라갔다. 소설 종결할 때까지 나의 한글 프로젝트가 다 끝나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글이 전부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그 후에는 독일어 모드로 돌아와 새로 시작할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있다. 독일어 모드로 돌아온다는 말은 나의 정신이 독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내 몸이 있는 독일에. 독일에서 내가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며칠 전에 남편이 물었다.
“그냥 한글로 계속 쓰지 그래? 한창 궤도에 오른 모양인데 아깝잖아?"
“내가 여기 생활을 잘해야 알찬 글이 나오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엉망으로 살아. 바쁘다고 문화생활도 안해서 내가 독일에서 새로 받아들이는 게 거의 없어. 지금은 저금했던 걸로 버티지만 그거 떨어지면 껍데기만 그럴 듯한 글을 쓸까봐 그래.”

이렇게 대답하고 보니 남편에게 더 큰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얘기 들어봤어? 선녀가 목욕하는 사이에 나무꾼이 날개옷을 감춰서 데리고 살았다는 얘기?"
“아니. 도둑놈이네?”

나는 남편에게 선녀와 나무꾼 얘기를 해줬다. 아이 셋을 낳기까지 날개옷을 주지 말라는 대목에서 갸우뚱하던 남편은 엄마가 아이 하나씩 팔에 끼고 날아올랐다는 대목에서 눈에 물기까지 서렸다. 절대로 아이를 두고는 가지 못하는 모성에 감동받은 모양이었다.

내게는 한글이 날개옷인 것 같다. 손으로 만지며 얼굴에 비벼보고 냄새를 맡으면 행복한데 그게 도가 지나쳐서 한번 입어보고 싶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랬다간 다시 벗지 못하고 그냥 날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애들은 다 커서 무겁기도 하거니와 인제는 나보다 잘하는 것이 더 많은데 내가 굳이 안고 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 나는 날개옷을 다시 접어서 장롱 깊숙히 쳐박으려는 것인지도모른다.

여기서 나무꾼은 비단 남편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에 살고 있는 나 역시 나무꾼의 일부이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온전한 사람, 있는 곳에 정성을 바침으로써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나. 있는 곳이 험난한 땅이라도 몸과 마음이 일치하고 꿈과 현실이 일치하는데 천상이 부러울 것인가?

나는 이런 말은 쏙 빼고 남편에게 생색을 냈다.
“나 기특하지 않아? 나무꾼이랑 평생 같이 살려고 날개옷을 태워버리는 선녀같지 않아?”

남편은 감동하기는 커녕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리 말어.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마다 옆자리를 봐. 당신이 내 옆에 누워 있으면 ‘‘오늘도 기적이 일어났구나’’ 그래."
“뭐? 아직도?"
“그래."
“내가 자기 정말 사랑하는 거 아직도 몰라?"
“사랑은 변하는 감정이라며? 그거 당신 논리잖아?”

나는 이 남자가 괜히 심술 부리나 싶어서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치 저녁 식단이라도 의논했다는 듯 아주 평이한 표정이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늘에서 날개옷 입고 내려온 선녀가 아니라 평생 나무꾼을 괴롭혀온 지옥의 사자가 아닌가?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우리 남편 눈에 씌인 건 콩깍지도 보통 두꺼운 콩깍지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짚새기도 짝이 있다고, 그렇고 그런 선남선녀들이 만나 1 더하기 1은 5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비법이 아닌가 싶다. 불합리해서 창조적인 사랑의 힘. 눈 감고도 제 집 찾아오듯이 자기에게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무심코 아는 힘. 황송하게 어루만지던 날개옷을 다시 접어 넣을 수 있는힘. 사람이 한두 푼에 코가 꿰어 하루종일 지구를 말아먹다가도 저녁에는 문득 사과나무를 심는 불가사의한 행동은 바로 이 콩깍지로 설명되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