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성이 순한 사람이다. (누가 독일어 억양으로 우허허허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는 사람은 아는지 모르지만 순한 사람은 자기가 순해서당하는 억울함이나 차별을 예민하게 알아챈다. 순한 성격이라는 것은 도가 텄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호전적인면도 다분히 있다. 내가 마음 먹고 걸은 싸움에선 필히 이기기 위해서 악착을 떤다. 특히 어려서부터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외국인이라 우습게 본다는 느낌이 들면 나는 가시부터 세우고 본다.

나를 외국인이라고 가장 함부로 대하는 곳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이교류하는 일상의 장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싸구려 식품점에선 더욱 심하다. 같은 외국인끼리도 사람 봐 가면서파렴치하게 군다. 그런 점은 주로 새치기에서 나타난다. 마진이 많이 남지 않는 싸구려 식품점답게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계산대 앞에 서면 왜그런지 초조하고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한참을 기다리며 일없이 속을 끓이고 있는 내 앞으로 누가 당당하게 들어와 시선을 딱 외면하고 선다던가,누가 비굴한 웃음을 보이며 양해를 구하기라도 하면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피해의식까지 가증되어 특별히 나에게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느낌이들기도 한다. 어떤 때는 줄을 서면서부터 잠정적인 파렴치한에 대한 공격심으로 아드레날린선을 잔뜩 부풀리게 된다. 물론 이럴 때 나한테 걸리는사람은 국물도 없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해 놓고 덫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포수를 당할 짐승이 있겠는가?

나는 내 차림새에 따라사람들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일찌기 알았다. 관객모독 수준의 피부에 덧칠이라도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나서는 날엔 안경을 잡수신 덕분에이지적인 인상을 주는지 사람들이 내게 훨씬 친절하고 무례한 행동이 확실히 준다. 시험 삼아 화장을 하고 시장을 보러 가면 정말로 새치기를 당하지않는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암만 못 생겨도 그렇지, 새치기나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화장까지 하고 다닌다면 그건 정말 너무비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의 외모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지. 나는 자연미를 과시하기로 했다. (벗는다는 소리아니닷!) 나는 웃으면 예쁘다. (또 누가 독일어 억양으로 웃는다. 저걸 기냥?) 그런다고 뭐 예뻐지기야 하겠냐만 원래 작은 눈이 마치 웃어서작은 것처럼 보이면서 인상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면 화장 안 하는 죄로 활짝 웃어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하도 찡그리고다녀서 표정도 인간성도 그렇게 굳어져 버린 독일 사회에선 실없이 웃고 다니는 것이 미친 짓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독일 사회에 다 맞출 일은엄꼬.

시장 가서 실없이 웃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주인이 되기로 했다. 나는 줄에 서면 내 뒤에 있는 사람의 물건을 슬쩍본다. 계산할 물건이 과히 많지 않다 싶으면 상냥하게 웃으면서 먼저 계산하시라고 한다. 내 물건은 항상 산더미같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들이간식거리를 사러 오면 나는 꼭 양보한다. 젊은 애들은 마음이 항상 바쁘기 때문이다. 누가 비굴한 태도로 내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면 하고 많은사람 중에 나를 얕보고 내게로 온다는 생각으로 화를 내는 대신 나는 기쁜 얼굴로 기다렸다가 유쾌하게 승낙한다. 그래 봤자 5분 이상 손해 보는거 아니고 내 지갑에서 큰 돈 나가는 거 아니다. 고달픈 인생들끼리 상처 받은 자존심과 코 묻은 돈 가지고 경쟁하는 곳에서 내가 볼 수 있는물질적인 손해는 얼마나 미미한가? 내가 인생에서 정말로 큰 단위로 무섭게 손해를 보는 곳은 따로 있다. 내가 계획을 정말로 잘 세워서 무섭게싸워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 그러나 서민들이 드나드는 가게는 아니다.

가뜩이나 없는 밸을 다 빼주기로 작정한 이후 나는 과연물질적으로 얼마나 더 손해를 보고 살고 있을까? 일일이 기록하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별반 없는 것 같다. 주관적인 느낌으론 그 이후로내가 아주 큰 이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분이 좋으니 건드리는 사람도 더 없는 것 같고, 설령 누가 건드려도 내가 그걸 못 느끼니내겐 손해 나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이젠 나를 보면 먼저 웃어주니 내가 정말로 사장이나 시장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빠지기도 한다. 부와 명예를 공짜로 얻은 셈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추가:

아침에 다시 읽어보니 주제가 좀모호하게 읽히네요. 불의를 피해 가자고 마음을 편하게 먹자는 게 아니라, 쓸데 없는 일에 상처를 받아 헛힘을 쓰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상처를 입으면 건강하게 싸울 수 없으니까 나중에 잘 싸우기 위해서 쓸데 없는 상처를 줄이자고요. 상처는 대부분 주관적인 거잖아요?

불의를 보았을 때 항의하고 고발해서 개선하는 일은 스스로 받은 상처가 깊지 않아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숙제하듯이 담담하게. 그러나 저도 그런 부당한 행태에 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요. 혼자 펄펄 뛰다가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더허무하더라구요.


(2006년에 티모도에 올렸던 글입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글이라 그런지 좀 막 썼지요? 전 요즘 엄청 재미난 일로 바빠요. 그 얘기는 담에 해드리기로 하고 적적하실까봐 우선 옛날 글 하나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