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푸른숲 출판의 블로거들과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키워드 : 작가 임혜지
예 - 블로거들에게 자신의 소개 및 인사

이렇게 글 쓰는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평소에 한국말로 대화할 기회가 적어서 이렇게 글로나마 대화하는 걸 참 좋아해요.

간략하게 제 소개를 하자면 전 지금 36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50대 여성이고요, 문화재 연구와 고건물 실측이 한동안 본업이었어요. 지금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삶의 질을 높이고 좀 더 즐겁게 살려구요.

저는 독일인인 남편과 성년이 된 아들과 딸을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로 여기며 살고 있지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남편과 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들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키웠는데요. 그래서 딸이 시험 전날 밤에 춤추러 나가서 집에 안 들어와도 저희 부부는 쿨쿨 먼저 잡니다. 부모 사랑 듬뿍 받고, 넘치지는 않아도 모자라는 것도 없이 편안하게 자란 세대인데 자기들 인생을 오죽 잘 알아서 설계하겠냐고요. 옆에서 부모라고 괜히 믿지 못하고 걱정하는 것은 아이의 정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독일 부모들이 다 이런 건 아니에요. 독일에서도 저희 가정이 좀 독특한 편입니다.)

남편과 저는 극과 극으로 다른 사람이어요. 정서적으로 공통점이 없다 보니 이론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저희 부부 사이에서 유일한 소통의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척하면 삼천리일 사안을 가지고 저희는 늘 머리를 싸매며 갑론을박 했는데, 이런 점이 저희 관계의 매력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젊어서는 이런 상황이 참 한심하고 성가셨지만 이제 나이 먹으면서 보니 그렇게 다른 점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에게 도전이 되어주고 서로를 키워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부부는 아직도 잘 싸우지만 이젠 절망하지는 않고 쪼금 미워하다가 금방 잊어버립니다.


키워드 : 책
예 - 책에 대한 다양한 담론, 내가 쓴 책, 읽은 책, 영향을 준 책, 내가 쓰고 싶은 책 등

외국에 살면서 저는 거의 모든 독서를 독일어로 했어요. 그 중에서도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Bernhard Schlink)와 “느림의 발견” (Die Entdeckung der Langsamkeit, Sten Nadolny)이 가장 인상에 남는 책이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책이고, 아직도 가끔씩 다시 읽는 책입니다. 앗, 그러고 보니까 둘 다 독일 작가의 책이군요. 요즘은 세월이 좋아졌지만 인터넷을 알기 전에 저는 한글로 된 활자에 굉장히 굶주렸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몇 권 되지 않는 한국책은 내용이 뭐든 간에 거의 달달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지요. 저는 책을 원래 속독을 넘어 폭독에 가까울 정도로 빨리 읽어치우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에 드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늘 새로운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쓴 첫 책은 독일어로 쓴 전공서적이에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을 근년에 한국어로 썼지요. 제가 그동안 써두었던 에세이들 중에서 건축에 관한 내용만 추려서 출판한 것이 재작년에 나온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한겨레출판)“입니다. 그러고나서 시사와 일상에 대한 에세이들이 좀 남았길래 제가 출판사에 여쭤봤습니다. 사실 저는 대운하라던가 인권, 성매매 등 시사에 관한 글을 출판하기를 내심 바랬지요. 그런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푸른숲에서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모토로 소소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꼭지들을 절묘하게 조합해서 “고등어를 금하노라”로 멋지게 묶어주셨습니다.

참, 저는 소설도 썼답니다. 저의 첫 한국책인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을 준비하면서 저의 한국어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일단 중단하고 “물안개의 집”이라는 소설을 먼저 썼습니다. 내 마음 속에 떠 있는 상을 잡아내어 표현하는 연습으로는 사랑 소설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아주 혼이 났지 뭡니까? 소설을 쓴다는 작업이 아주 사람 영혼을 말리고 진을 빼더군요. 제가 초보자라서 그랬겠지만 하도 감정이입을 하다보니 소설의 주인공이 임신하니까 저까지 가상임신을 해가지고 이거 실화라고 오해받는가 싶어서 가슴이 덜컥했네요.

소설을 다 쓰고보니 제법 제 마음에 들길래 여기저기 문학상에도 내보고 여러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블로그를 만들어서 연재로 솔솔 풀어버렸지요. 많지는 않아도 뜨겁게 공감하는 독자들도 만났고 해서 저는 성공작이라고 자부합니다. 그 소설을 쓰면서 저와 남편 사이의 깊은 상처가 치유된 면도 큰 수확입니다. 초보자로서 글쓴이의 내면세계를 겁없이 드러낸 작품이라 이제는 누가 출판하자고 해도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우연이라고 믿고 있어요. 독자들이 특정 테마를 바라는 시기에 우연히 그런 책을 내면 잘 팔리는 것이고, 암만 괜찮은 책이라도 독자들이 시기적으로 외면하는 테마라면 안 팔리겠지요.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쓰는 거거든요. 작가가 독자들의 변화하는 입맛에 다 맞출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어도 그게 안 되니까 글 쓰는 사람들이 가난한 거 아니겠어요? 저는 글 쓰는 그 순간만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그 후에 잘 팔리거나 안 팔리는 건 제 덕도 탓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은 탐정소설이어요. 잔인하지 않으면서 스릴 있는… 고건물에 얽힌 글감도 많이 확보해놓았구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까지 미리 써놓았다지요. (앗, 그런데 독일어로 썼구나.) 그런데 언제 그것을 쓰게 될지는 좀 요원합니다. 요즘 제가 거의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쓰고 있는 글들은 독일 운하에 관한 칼럼 등 시의성이 있는 글들이거든요. 사대강 공사처럼 끔찍한 사건만 막고 나면 저도 한국 일에 신경을 끄고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에는 저의 문제지요. 제가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까요. 또 저랑 독일어로 전공서적을 같이 내기로 한 독일 노교수님이 한 분 계신데 제가 아마 그 약속도 거절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언젠가는 양단간에 결정이 나겠지요. 제가 의무감에서 쓰는 글을 더욱 정성껏 씀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던지, 아니면 어느 순간 의무감을 확 던져버리고 탐정소설을 쓰던지…

어쩌면 제가 탐정소설을 쓰더라도 한국어로 쓰게 될지도 몰라요. 제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다면 꽤 오랜 시간을 모국어와 작별하고 독일어에 몰입해야 할 텐데 제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요.


키워드 : 글쓰기
예 – 나의 글쓰기 습관, 버릇, 글쓰는 방법, 블로그에게 알려줄 글쓰기 팁 등

저는 평소에 한국말을 쓸 일이 없기 때문에 꿈도 독일어로 꾸고 욕을 해도 독일어로 먼저 나와요. 그런 생활 속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자니 평범한 단어가 금방 생각나지 않아 늘 애를 태우곤 합니다. 특히 독일어로 작문을 하거나 독일어 책을 읽고 나서는 한국어로 글 쓰는 일에 아주 애를 먹지요. 한 사흘 정도 엄청난 집중력을 바쳐서 씨름하고 나서야 평범한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나오는 결과에 비해서 바치는 노력이 엄청나게 큰 편입니다.

그래도 꾸준하게 글을 쓰는 이유는 글 쓰는 것이 제게 마음의 평화와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에요.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을 논리적으로 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사람이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저의 글쓰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참으로 수지 안 맞는 사업이 되겠지만 이렇게 삶의 질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공짜로 이런 기쁨을 얻는 거니까 대단히 수지 맞는 장사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언어에 관해서 재미난 경험을 하나 했어요. 모국어를 한번 잃어버렸던 경험이요. 한동안 독일어로 글 쓰고 독일어로만 생각하다 보니 한국말을 거의 다 잊어버렸지요. 지금부터 6년쯤 전에 저는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어를 다시 공부했어요. 더듬더듬 하루에 한 문장씩 써서 인터넷 모임에서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하는 사이에 한국어 실력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독일어로 글쓰는 훈련을 한 것이 한국어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되더군요.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한다는 행위기 때문에 깊이 사고하여 그것을 표현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다른 언어로도 대입이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제겐 한국어가 제1언어니까 아주 쉽게 되돌아오고 또 금방 발전하더군요.

이 경험을 통해서 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하나는 모국어를 잘 한다는 것은 자긍심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에 따라 생각하는 패턴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하는 패턴에 따라 거기에 맞는 언어가 형성되어서 그런 거겠지요. 남은 어떤지 몰라도 제게 있어서 한국어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묘사하기에 좋은 언어이고, 독일어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기분을 잘 따지고 독일 사람들은 팩트를 잘 따지는가 하고 저 혼자 웃지요.

저는 글을 써놓고 아주 오래 검토하고 만지는 습관이 있어요. 내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과 내가 써놓은 글이 일치하는지 끝없이 비교하고, 완벽하게 일치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지요. 오래 다듬을수록 글이 쉽고 간단해져요. 저도 아름다운 표현과 문장의 편안한 리듬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전달을 가장 높이 칩니다. 그래서 뜻을 명확하기 위해서라면 같은 단어를 두번 세번 반복하거나 표현이 촌스러워지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지요.

글이 어떤 때는 후루륵 잘 써지고 어떤 때는 머리를 쥐어짜듯이 힘들잖아요? 제 경우엔 힘들여 쓴 문장이 제일 좋은 문장이더군요. 잠깐 생각하고 쉽게 써내려간 글은 일단 시원해 보여도 논리의 비약이 심하고 조리가 없어서 나중에 정리하자면 애를 먹어요. 나도 잘 모르는 것을 어렴풋이 써놓았는지 겉보기에만 그럴 듯할 뿐 전달하려는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없는 문장도 있지요. 촌스러워도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쌓은 문장이 논리적으로 더 탄탄하데요. 저만 그런 건지, 글 쓰는 다른 분들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저는 글을 쓸 때에도, 다 쓰고 나서도 행여 진실이 왜곡되거나 내 존재가 미화된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고 고민합니다.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글은 나를 위해서 쓰는 거라고. 그런데 나를 속이면 글을 쓰는 이유가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언젠가 깨달았어요. 사람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일기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순간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글을 쓰는 그 순간 지나간 사건이 새로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건 자신의 고유한 시선으로밖에 사물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거라는 걸 법륜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럴수록 더욱 정직하게 쓰려고 애쓸 뿐, 글에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검토하기 위해서 쓰는 글일지라도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은 나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지요. 나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려는 이유는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함께 발전하자는 뜻 아니겠어요? 하지만 저는 남이 제게 참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저도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독자들에게 저의 삶이나 저희 가족의 모습을 세세하고 솔직하게 보여드리는 것으로써 독자들께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넌지시 보여드려고 합니다. 단지 저의 길이기 때문에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죄의식을 주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이런 길도 있다고만…

참 재미있는 건 제가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랍니다. “어휴, 저 사람들은 자동차도 없이 어떻게 사냐? 저렇게 아끼면서 어떻게 사냐?” 하는 말을 들으면 저야말로 신기합니다. “어머, 이상하다. 그냥 없이 사는 게 더 쉽지 돈 많이 벌어와서 자동차 사는 게 더 쉬운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그제서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기를 쓸 때조차 나만의 소설을 쓸 수밖에 없도록 좁은 시각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시때때로 깨닫는 것은 유익하고도 유쾌한 일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