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당신의 세계
당신이 홀로 살고 있는 그 세계는 어떤 곳인지요? 참 편안하고 좋은 곳인 것 같아요. 그러길래 당신은 거기서 나오고 싶어하지 않죠.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바깥 세상에 있어서 그 사람들은 당신을 바깥 세상으로 자꾸만 유인하고 있군요. 당연하지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 두 세상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잖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들이 참 귀찮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모른 척하기도 하더군요.
그런 당신이 이해가 갑니다. 당신이 홀로 살고 있는 세계에 비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바깥 세상은 좀 저속하다는 것도 압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속임수도 많고 불투명하지요. 맑고 선하고 정직하고 주관이 뚜렷한 당신이 적응하기엔 너무나도 경박하고 뒤틀리고 꼬인 곳입니다.
그런 바깥 사람들이 당신을 감히 꿰뚫어 본다고 착각하고 당신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해댑니다. 부모가 너무 응석을 받아줘서 게으르다, 할 줄 알면서 귀찮아서 못 하는 척한다,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취급을 받을 때 당신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도 당신은 참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가도 곧 용서하고 뒤끝이 없습니다. 맘에 담아두는 것도 없고 복수도 안 해요.
요즘 당신은 제법 많은 시간을 바깥 세상에서 머물고 있네요. 그게 자폐증과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도 즐거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세계로 가는 길을 모르는 나에게는 황송한 행복이지요. 나와 눈을 맞추고 나와 함께 눈웃음 치느라고 원래 동그랗던 당신의 눈이 내 눈을 닮아 점점 가늘어져요. 당신을 위해서 내가 쌍거풀 수술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내가 기뻐하는 모습이 당신에게 보기 좋은지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많이 해줍니다. 나와 함께 하나부터 열까지 세기도 하고 그림책을 보고 단어를 발음하기도 하고 같이 노래를 하기도 하지요.
엊그제 당신은 참 사랑스러웠어요. 색깔과 크기가 다른 동그란 나무판을 막대기에 끼우는 놀이를 할 때 당신은 당신의 취향과 나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당신은 내가 바라는 순서대로 나무판을 끼워서 내게 보여주고는 까르르 웃더니 곧이어 다시 망가뜨리고 이번에는 당신이 바라는 순서대로 나무판을 끼웠어요. 당신의 마음에 흡족한 일을 하면서 당신은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미안해지려고 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바깥 세상의 순서를 굳이 가르치려고 하는 사실이 미안했어요. 그리고 내 마음을 배려해서 양보하는 당신의 너그러움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요즘 당신은 기저귀를 떼는 연습을 합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나이를 먹으면 혼자서 화장실에 다니는 게 보통이라서 여섯 살 당신도 이젠 그걸 배워야 합니다. 그게 바깥 세상에게도 좋고 당신에게도 유리한 일이라지요. 왜 그래야 하는지 지금의 당신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겠지만 당신이 앞으로 살면서 바깥 사람들의 참견을 덜 받으려면 바깥 세상의 법칙을 조금은 이해하는 게 좋을 거에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귀찮게 합니다. 시간 맞춰 당신을 화장실로 강요한지 삼 주일만에 이제서야 나는 당신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변기에 오줌을 누는지 알아냈어요.
당신은 간식 먹고 50분 후에, 바지를 그냥 내리는 게 아니라 완전히 벗겨서 변기에 앉혀야만 요의를 느낍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어야 잠시 후에 허공을 향해 분수를 뿜기 시작하는데 이때 나는 온몸으로 물벼락을 맞으며 당신의 손이 고추를 아래로 눌러 변기 쪽을 겨냥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기분이 상해서 오줌을 다시 참기도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욕을 먹어도 끈기 있기 기다리면 언젠가는 끝까지 일을 보시지요. 당신이 오줌을 눌 때마다 나는 “브라보~“하고 칭찬하는 대신에 인제는 “피피~“하고 얘기해줍니다. 당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언어가 있어야 이것에 대한 개념이 생기리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언젠가 당신은 “피피~“하는 말만 들어도 스스로 바지를 내리고 변기를 향해 조준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어야지요. 그래야 당신이 바깥 세상에서 남의 참견을 조금이라도 덜 받고 편하게 지내지요.
오늘 우리 헤어질 때 당신은 몇 번이나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더군요. 당신이 본래 외면하는 바깥 세상 사람인 나에게 그런 관심을 보여주는 것에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격했어요. 당신의 그런 지고한 사랑을 받는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요. 하루종일 당신 생각에 마음이 알알하게 좋았어요. 문방구를 사러갔다가 당신이 좋아하는 숫자가 예쁜 단추에 잔뜩 새겨져 있는 1유로짜리 전자계산기가 있길래 얼른 집어들었습니다. 이런 기계랑 얼른 친해져서 설령 당신이 평생 말을 못하게 될지라도 컴퓨터로 글도 쓰고 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 봐요. 당신은 처음에 이런 숫자들을 귀찮아 했잖아요? 처음에 낯설고 싫어도 자꾸 친해지면 언젠가는 좋아진답니다. 이제 당신은 숫자를 당신의 세계로 가지고 들어간 셈이지요. 조금씩 친해지는 것들이 많아지다보면 당신의 세계는 어느덧 바깥 세상과 비슷해질 것이며, 그러면 두 세계를 드나드는 일이 당신에게 좀 덜 피곤할 것입니다.
이제 두어달 후에 여름방학이 오면 당신과 헤어져야하는 나는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어렵사리 마음을 열어놓은 후에 다시 사라져버리는 이런 행위가 당신에겐 얼마나 이해가 안 가겠어요? 복잡하고 불투명한 바깥 세상의 전형이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믿어요. 당신은 나의 후임 도우미에게도 마음을 열어주리라는 것을. 심성이 곱고 순수한 당신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서도 장점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한 지난 일 년은 내 마음이 무럭무럭 자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