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밤에 Smile 데리고 올 거야.”
“엉? 밤 몇 시에?”
“몰라. 자정 넘어서.”


“그래? 그럼 집안 좀 치워야겠다야. 너도 네 방 좀 치울 거니?”
“응.”

아들이 오래간만에 제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온다는 말에 나는 부리나케 집안을 치웠다. 요즘 내가 하도 살림을 등한시해서 누가 우리집에서 자고 가면 먼지 알러지라도 걸릴 것 같았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이 마침 집에 와 있어서 목욕탕 청소를 해줬다.

아들은 저녁 즈음에 나갔다. 나가기 전에 자꾸만 자기 방 라지에터를 만지작거렸다. 아, 실내온도 18도인 우리집이 추운 게 마음 쓰이나 보구나. 아들이 나가고 난 뒤 남편이 청소를 마치고 집안을 환기한다고 아들 방의 창문을 열러 갔다가 기겁을 했다.

“엉? 이 방 라지에터가 왜 이렇게 펄펄 끓어? 온도를 최고로 돌려놨잖아?”
“앗, 그거 건드리지 마. 얘가 자기 여자친구 추울까봐 올려놨나봐.”
“그래도 그렇지… “
“야잇, 영감탕구야. 건드리지 말라니까?”

내 기세에 눌려 그냥 나왔지만 남편은 자꾸 그쪽을 쳐다봤다. 입이 비죽이 나온 걸 보니 저 머리 속에서 지금 엔진이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겠지. 겨울에 내복 두둑히 안 입고 발발 떨며 실내온도 높이는 아가씨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어떡하나 하고 오버에 오버를 하며 벼라별 상상을 다 하고 있을 것이다. 지 애인도 아니면서.

그날 밤 자러가기 전에 나는 아들 방에 가서 라지에터를 만져봤다.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앗, 그렇지. 우리집 보일러는 밤 열시면 자동으로 꺼지게 되어 있잖아. 나는 남편 몰래 보일러 스위치를 돌려서 밤새도록 난방이 되도록 해놓았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여서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담아서 아들 침대 속에 넣어두었다. 혹시 아들이 엄마가 너무 설친다고 싫어할까봐 도로 꺼냈다. 그래도 추운 거 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다시 넣었다. 남에게 무심한 듯이 보이는 아들이 자기 여자친구 춥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지만, 엄마가 아들 일에 너무 나서는 인상을 줄까봐 조심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면서 보니까 아들 방의 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 자는 사이에 들어왔구나. 남편이 깨기 전에 보일러 스위치를 살짝 원위치로 돌려놓는데 남편이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뭘 해?”
“아이, 깜짝이야. 뭘 하긴 뭘 해? 난방이 되는지 보는 거지.”
“아침 차릴까?”
“글쎄, 애들이 아침을 같이 먹을라나 모르겠네.”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빵집에 가서 아침 빵을 사왔다. 나는 Smile의 접시 위에 작은 선물을 놓았다. 며칠 전에 시내에서 젊은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수첩을 봤는데 딸아이 생각이 났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네 여자친구에게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도 괜찮겠니?” 하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해서 그 수첩을 두 개 장만한 것이다. 우리집에서는 종이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선물을 포장하지 않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예쁘게 포장했다.

아침상을 차려놓고 남편과 내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아들이 슬며시 들여다보며 일어났다는 표시를 했다.
“일어났어? 상 다 차려놨는데 아침 같이 먹을래? 너희들 아침 먹을 시간은 있니?”
아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제 밤 늦게 나갔다가 우리 부부가 잠든 후에 집에 들어와 늦잠을 잘 법한 딸도 제 오빠 여자친구를 본다고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서 함께 앉았다. Smile는 좀 수줍어했다. 우리도 좀 수줍었다. 간간이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 딸만 호랑이처럼 군림하며 제 오빠에게 올해도 자기 선물을 잊어버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호령했다. 내가 식탁 밑으로 남편 손을 잡으면서 봤더니 맞은 편에 앉은 커플도 식탁 밑으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가씨가 참으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참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니 오죽 괜찮은 여성이겠는가?

그날 오후에 남편과 둘이서 아들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그 아가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아들과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지도 모르고, 서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이인지 가볍게 생각하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게 뭐가 있는가? 우리가 믿는 아들이 좋다고 판단했으면 좋은 여성일 것이고, 어떤 인연으로든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신기하고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에 누가 내게 질문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참, 여보. 요즘 독일에서는 결혼할 때 이혼한 가정의 자녀라는 것이 다른 쪽 부모에게 단점으로 여겨져?”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치? 누가 물어보길래 나는 내가 안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독일에서 다른 부모들도 그런지는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네. 당신은 어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난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거든. 내가 결혼하는 게 아니거든. “
“응, 당신 말이 맞아.”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결혼식을 할 때 우리 부부를 기꺼이 초대하고 싶은 친구로 여겨준다면 참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