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공부는 그럭저럭 잘했는데, 운동신경이 워낙 둔한 탓에 체육은 늘 양가집 규수를 면하는 게 내 목표였다(수우미양가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체육 시험으로 줄넘기하는 데 한 번도 넘지를 못해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가신 적도 있을 정도니 그다음 말은 해서 뭐하랴.
그런 나를 아무도 고무줄놀이에 끼워주질 않아서 쉬는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여자아이들이 발목부터 시작해서 가슴 위로 고무줄을 올려놓고 중간에 사뿐히 뛰어넘는 재주를 부리는 걸 먼 발치에서 보고 있거나 연필 깎는 칼로 고무줄 끊으러 다니는 짓궂은 남자아이들을 망보는 거였다. 운동신경이 둔해 아무도 끼워 주지 않아서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금이야 옥이야 아껴쓰던 용돈으로 과감히 까만 고무줄을 샀다. 내가 산 고무줄은 집에서 노는 연습용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고무줄을 종아리에 걸고 너무 멀리 가는 바람에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고만 끊어져 버렸다.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동생한테 심통을 부리면서 네가 내 고무줄을 끊어먹었으니 다시 하나를 사 내라고 윽박질렀다.
엄마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셔서 형제간의 싸움엔 별 관심이 없으셨는데, 그날은 내 편을 들어주시리라 기대 하고 당당히 동생을 혼내고 있었는데, 내 편은커녕 야단만 더 맞았다. 내가 고무줄을 사기는 했지만, 고무줄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 것이라고 하셨다. 이건 엄연히 내 용돈에서 산 것이므로 내 것이라는 주장은 허무하게도, 엄마의 한 마디에 무너져 버렸다.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는데?”
한마디 더 했다가는 엄마가 하실 말씀이 너무 뻔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음 달부터 용돈 없어!”
근데 생각을 해보면 집에서 그릇을 깨 먹었을 때도 나는 엄마한테 미안해 하는 반면 엄마는 그릇을 깨고도 속상해 할 뿐 우리한테 미안해 하지는 않으셨다.
이유는 바로 엄마는 돈줄을 쥐고 계셨고, 나는 그 돈을 받아 쓰는 입장에 있었다.
안철수 교수가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기도 의회 한나라당이 안 원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예산 전액을 삭감하겠다고 했단다. 왜 안철수 교수가 사퇴해야 예산을 줄 수 있고 사퇴하지 않으면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은 2008년 정부와 경기도에서 1,425억 원을 지원받아 설립한 “공공기관” 이라고 한다.
공공기관이라고 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 아닌가. 바로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다. 돈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인데,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방식에서 무슨 개인 기업이 직원정리해고를 후다닥 서두르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인가? 어느 한 사람을 사퇴시키는 일이, 더군다나 연구원 원장이라면 그 연구원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높은 직책인데, 그 사람이 책임지고 있는 일들이 이렇게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이 넘겨받을 수 있는 허수아비 거리 밖에 안 되는가?
도대체 그 돈이 누구 돈이라고 마음대로 지원을 한다 만다 하는 건가.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의 정치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거가 끝난 다음 날 후다닥 해치울 수 있는 건가?
나는 사퇴당한 사람이 누구라는 것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을 마치 자기 돈인냥 구는 공공기관의 태도가 괘씸한 것이다.
경기도 의회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에게 어릴 적 내 가슴을 멍들게 했던 그 한마디를 하고 싶다.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