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 손을 붙잡고 “통합 라인 프로그램” 홍보 동영상의 한국어 더빙을 위해 뮌헨행 기차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먼길에 나선 세살배기 꼬마가 잘 따라줄까? 경험도 없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직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내 아이를 흔쾌히 맡아주시겠다는 임혜지 박사님, 그리고 여태 함께 해 온 번역연대 회원들의 조언과 응원이 나에겐 믿는 구석이었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번역연대는 독일 자료를 번역해 한국에 알리는 비영리 온라인 모임이다. 독일 하천사업을 모델로 했다는 한국 4대강 사업의 허구를 고발하기 위하여 임혜지 박사님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통합 라인 프로그램”이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연방정부의 협력 아래 진행 중인 홍수조절책이다. 라인강 상류의 보 건설은 라인강 중류와 하류 지방에 홍수를 초래했고, 독일 정부에선 수많은 강변도시들을 위협하는 만성적인 수해를 막기 위하여 라인강 상류 일부를 자연으로 되돌리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통합 라인 프로그램의 홍보 동영상은 영상 자체도 무척 아름답지만, 소중한 것을 지켜 나가려는 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홍수 조절과 살아있는 범람원’ 한국어 더빙 동영상 주소
새끼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새, 범람을 피해 달팽이 위에 올라앉은 딱정벌레, 둥지가 범람원에 반쯤 잠긴 은버드나무 숲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 그 안에 깃든 노력과 정성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잘못된 하천공사가 후대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비교적 짧은 분량의 영상에 함축되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통합 라인 프로그램이 전면적으로 실현되어 홍수피해를 포괄적으로 예방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우리 아이들이 안심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마지막 말은 퍽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번역연대는 동영상의 독일어 나레이션을 글로 받아적은 뒤 곧바로 번역에 들어갔다. 독일어 뿐만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로도 소개된 동영상이라, 우리 가운데 영어에 능한 사람은 영어까지 받아적어 대조 작업도 겸할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전문용어의 정확한 뜻을 알아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빌리기도 했고 인터넷 검색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비치된 백과사전을 뒤지기도 했다. 공부한 분야와 하는 일이 서로 다른 강점을 살려 저마다 자신 있는 부분을 맡아 수정과 확인 작업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모두가 동의하는 한국어 번역 최종본이 나올 수 있었다.
동영상이니 만큼 자막을 입히거나 더빙을 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홍보 동영상 제작을 맡았던 오르카 자연영상물제작소(ORCA Naturfilmproduktion) 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동영상 저작권에 대해 문의하면서, 번역연대가 하는 일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4대강 사업의 실상을 함께 알린 터였다. 나중에 전해듣기로, 오르카 측은 그토록 아름다고 소중한 자연이 잘못된 하천공사로 파괴될 위기에 놓인 것을 알고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민 이유였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한국어 더빙 작업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우리 세대가 지켜내야 할 자연환경이, 삶의 터전이 무참히 파괴될 지경에 놓인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결연함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뮌헨에서 반가운 분을 만나고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막바지 연습으로 그날 밤을 보내고, 조금 긴장한 상태로 이튿날을 맞았다.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지하철과 택시까지 이용해 도착한 곳은 의외로 한적한 주택가였다. 길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 골목 끝에 멋진 목조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기쁘게도, 우리가 찾는 주소지였다.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나섰는데 딱딱한 회사 사무실이 아닌 가정집이라니, 아이 엄마로서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사람은 젊은 부부였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동영상 마지막 장면에 딸과 함께 얼굴을 비춘 아버지가 바로 그 남편이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안심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라는 부분이었다. 부모의 마음이었으리라. 자연의 참된 모습과 소중함을 알리는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는 젊은 부부는 자기 딸을 위하듯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바로 알리고 지키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4대강 사업의 폐해를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알아차리고 힘을 보태고자 했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녹음 작업을 하는 동안 내 아이는 한 번도 엄마를 찾지 않고 집에서처럼 잘 놀아주었다. 나처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이자 녹음을 담당한 아내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있어서 한번 터지면 잘 멈추지 않는 기침 때문에 중간중간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나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라 자꾸 혀가 꼬이는 실수를 저지르며 몇 번이고 중단을 외쳐야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덜컹거리는 책상을 움직이지 않게 두 손으로 꽉 붙잡고 길이가 짧은 마이크 앞에 바싹 붙어 앉아 녹음을 진행하면서, 도리어 재미있기까지 했다. 나도 감기가 다 낫지 않아 목이 잠겨 있어서 목캔디를 준비해 갔는데, 우리는 사이좋게 사탕을 나눠먹으며 즐겁게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의 아이들, 후손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리라. 그 한마음이라면 전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완성된 동영상이 DVD에 담겨 집으로 배송되어 왔다. 부부의 아이가 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도 한 장 들어 있었다. 크레파스로 정성껏 그린 봄날 풍경이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선물이 또 있을까. 먼길에 함께했던 내 아이에 대한 안부도 잊지 않았다. 엄마보다 더 자상하고 잘 놀아주는 “뮌헨 이모”를 독차지하고 한껏 신이 나 있던 내 아이는 지금도 가끔 뮌헨에 가자고 조른다. 이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어린아이에게도 좋은 추억이자 경험이 되었나 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이전의 나는 아이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던 못난 엄마였다. 갖가지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경꾼처럼 방관하기만 하다가 드디어 사과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이와 함께 나선 세상 구경에 아이도 나도 부쩍 자란 것만 같다. 나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뮌헨 이모, 그리고 번역연대에서 함께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