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한겨레출판, 2008

건물은 살아 있다.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건축가의 꿈을 소곤소곤 들려준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외관만 지닌 건물,
텅 비어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하는 문화재라면 이미 죽은 공간이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공간에 귀를 기울여보자.
무어라 말을 걸어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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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뮌 헨 의 건 축 하 는 여 자
임 혜 지 의 공 간 이 야 기

임혜지 지음 | 신국판 전면 컬러 346쪽 | 15,000원 | 비소설/ 예술·건축/ 인문에세이
ISBN 978-89-8431-254-8 03810 | 담당 기획편집부 조사라 | 02-6383-1609 | book@hani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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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도면 위에 남기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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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의 문화재 건물 전문가이다. 오래된 건물만 보면 들어가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직업병이 있는 그녀는 지난 30년간독일 고건축 현장에서 문화재 실측조사 및 발굴연구 전문가로 명성을 떨쳐왔으며, 현재 독일 문화재청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임혜지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해 독일 칼스루에 대학교에서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 스위스관 설계 및 기획에 참여했고, 독일어 저서로 『프리드리히 바인브렌너 시대의 칼스루에주택』(2003)이 있다.

독일인 남편과 고등학생인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으며,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한국말 공부를 시작해 인터넷한겨레에 칼럼을연재하고 있다. 꼼꼼한 독일 여자의 일 이야기와 매콤한 한국 아줌마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사람을 끌어안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다

건축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건축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어려운 과제다. 건축을 학문, 공학의 한 분야,어마어마한 산업으로 생각하면 다가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을 떠올려보자. 내가 가족들과 정겨운 한때를 보내는 온화한거실, 치열하게 일하는 작업장, 사랑하는 사람과 정담을 나누는 테이블, 종이 냄새 가득한 도서관…….

임혜지는 건축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분야라고 말한다. 어떤 공간에 있을 때 편안하고 건강하고 효과적인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건축은 건축가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생활 이야기이다.

딛고 서 있는 땅과 머리 위의 하늘,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솟을대문, 작은 발코니와 편리한 부엌, 조용한 기도실과 1만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이 살았던 움집터에 이르기까지 임혜지가 전하는 살아 있는 공간 이야기를 만나보자.


Episode1 집 이야기

새로 이사한 아파트의 뒷마당이 비어 있었다. 썰렁한 뒷마당을 가꿔도 좋다는 집주인의 허락을 받은 필자는 조경 잡지를 읽고꽃시장을 부지런히 좇아다니면서 흙을 고르고 화초를 심었다. 예쁘게 꽃망울을 피워내는 마당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살던 어느날,윗집 할머니가 그를 불러세운다. 네가 건축가면 건축가지 화초에 대해선 일자무식인 것이 건방지게 군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알고보니 백 년이 넘게 대를 물려 이 집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텃세 횡포. 뮌헨으로 밀려드는 새로운 세입자들 때문에 집세가 오르고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까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독일 세대교체의 그림자를 본다.


Episode2 도시 이야기

독일 남서부 칼스루에는 전형적인 계획도시다. 도시 중앙에 영주의 성이 있고, 성의 탑을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가 부챗살처럼 나있어, 칼 빌헬름 영주가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꿈꾸며 건설했다는 ‘계획설’과 남장한 시녀들을 몰고 다니며 사냥하다가 한 채 두 채집을 지은 것이 한 도시가 되었다는 ‘우연설’이 칼스루에 건축사학계의 화두이다. 저자는 후일 칼스루에 대지 분양 도면에서 주거용대지와 농경 대지를 구분해 명쾌하게 ‘우연설’을 증명해내게 된다. 도시 중심의 탑에 기거하며 튤립을 그리는 것으로 소일했다는이삼십 명의 아리따운 시녀들이 바로 칼스루에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Episode3 현장 이야기

칼스루에 연방고등법원 뒤에는 1800년대 고전주의 주택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너무 낡아 안전에 문제가 생기자 철거를 결정하게된다. 임혜지는 이것이 고전주의 주택 연구에 좋은 기회임을 깨닫고, 철거 직전에 정부를 설득해 수십 명의 건축과 석사과정학생들을 이끌고 낡은 집 안으로 들어선다. 거친 학생들은 작업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했고, 못 미더워하던 공무원들도 차차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조사가 끝난 후, 이 주택들의 문화재로서의 엄청난 가치가 논문으로 발표되자 학계에서는 철거를강하게 반발하고, 임혜지는 자신을 도운 정부와 학계의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바로 당신에게 전하는 공간 이야기

나는 건축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분야인지 말하고 싶다. 그래서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건전한 상식 안에서 학문의깊이를 더하고, 일반인이라면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전문가와 소통할 수 있음을 나누고 싶다. 우리집 목욕탕에 관한 일이던,나라의 물길에 관한 일이던 당당한 주인의식과 함께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지라고 넌지시 일깨워드리고 싶다. 건축은 인생과 마찬가지로그저 위대하거나 추상적인 일이 아니라, 담담히 해답을 찾아가는 탐구과정이니까. >>작가 후기

건축인 임혜지는 전문인이기 이전에 일상 생활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일반적 담론이 아니라, 자신이 건축과 도시공간을 일상의생활공간으로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체험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친구가 재잘거리는 이야기 같으면서도,따끔하고 매서운 고추 맛이 난다. >> 이석정,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전혜린의 발자취를 따라 영하의 날씨 속에서 탐방했던 슈바빙이며 영국 공원 등 내게도 생생한 ‘도시 이야기’는 특히 독자들에게권하고 싶다.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던 유럽 전역의 건축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유럽 도시 및 건축의 역사와 건축양식을 일별할 수있게 될 것이다. >> 조인숙,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소장



책 속에서

전혜린은 오늘의 뮌헨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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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거리에는 전쟁 이전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깔끔한 모습으로 보수되고 단장되어 서 있다. 가끔씩 보이는 현대식건물은 고건물 일색인 경관을 시각적으로 거스르지 않게 설계되었고 품위 있으면서도 부티를 풍긴다. 뭐 하는 곳인가 하고 가까이가서 조그맣게 달린 팻말을 읽어보면 세계 유수의 대기업인 경우도 있다.

나는 학생회관 건물을 지날 때마다 전혜린이 뮌헨에 도착한 첫날이 생각난다. 여기서 꼬불꼬불한 연필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는 그녀의월세방이 어딘지 불현듯 알고 싶어진다. ‘그 끔찍하게 낡은 건물은 학교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영국 공원에 면해 있다…방은 영국 공원과 반대쪽으로 나 있다…’라는 대목만으로 레오폴드 거리와 영국 공원 사이에서 전쟁 전에 지은, 남북 방향으로 뻗은4층 건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전혜린이 50년이 지난 오늘의 뮌헨을 보면 무어라 할지 궁금하다. 맑은 정신을 숭상하고 물질을 경멸했던 스토아적인 그녀의기준으로 보면, 오늘의 뮌헨의 거리에는 너무나도 경박스러운 돈 냄새와 신흥부자의 냄새가 날지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장치의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옛날의 슈바빙 정신이 아직도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녀가,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뮌헨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p.146~148


서양의 굴뚝, 잔혹한 유아노동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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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경의 북부 독일에서는 몸집이 작은 13~16세의 소년들이 굴뚝청소를 했으므로 굴뚝의 단면이 작았고(내부 각 변35~40센티미터), 남부 독일에서는 굴뚝의 내부 각 변을 최소 50센티미터로 정해 성인들이 굴뚝청소를 하도록 했다.

원형이 보존된 옛굴뚝을 발견하는 순간, 지붕 위에 서서 다리 하나를 굴뚝에 척 걸쳐놓고 인자하게 웃는 산타할아버지의 환영을 떠올리는 대신, 허겁지겁 기어들어가서 내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인권이다. 어린이의 인권.

크리스마스와 함께 낭만적으로 연상되는 굴뚝의 역사 뒤에는 이렇게 많은 어린 생명을 죽음으로 이끈 참혹한 유아노동의 역사가 숨어있다. 그래서 나의 뇌리에는 굴뚝이 어린이를 위한 선물의 상징이 아니라 어린이를 착취하는 상징으로 박혀버렸고, 어린이들에게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그리로 드나든다는 산타할아버지를 차마 떠올리지 못한다. p.311~317


서양 건축 양식을 쉽게 구별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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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 건축을 이루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창문이나 문 등 벽에 뚫리거나 패인 구멍의 형태를보면 된다. 피사의 사탑의 창문같이 윗부분이 둥글게 마무리되었으면 로마네스크고, 노트르담같이 뾰족하게 마무리되었으면 고딕이다.내부도 마찬가지다. 원형 천장과 회랑도 로마네스크에선 둥근 선으로, 고딕에선 뾰족 선으로 마감되어 있다.

인간이란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단아한 르네상스의 건물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점점 더장식을 선호하게 되고 화려한 양식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17~18세기니까 우리나라의조선시대 후기다. ……신로마네스크, 신고딕, 신르네상스, 신바로크, 신고전주의를 거쳐 19세기 후반에 가서는 절충주의라는사조까지 나왔다. 한 가지 양식을 선택하여 본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여러 양식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모티브를 여러 개 따와서조합하는 절충주의를 관찰하자면, 20세기 후반부터 우리들의 귀에 익은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p.249~253


학자의 상상력으로 한 톨의 숯조각을 남기고 싶다

나는 밤이면 자주 공사현장에 나갔다. 밤에 혼자 조사한 것은 작업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 일은 경제적으로형편없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나는 시간에 쫓긴다는 초조감과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차근차근조사할 수 있었다. 그 길만이 나의 존엄성을 되찾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말단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학술계의 구조에 대해 논하자면나도 할 말이 많지만, 시방 남의 나라 학술계의 정의실현까지 염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만약 다른 장작의 화려한 연소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불쏘시개라면, 재도 없이 타버리는 삭정이보다는 이왕이면 속이 단단한나뭇가지가 되어 한 톨의 숯조각이라도 남기기를 원했다. 상단에 오른 굵은 장작이라 할지라도 속이 무르면 불길만 요란할 뿐 숯을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남기고픈 숯은 나의 학문적 실적뿐 아니라 정신적인 실속, 즉 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는만족감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시 찾은 나는 일터에서의 행복을 되찾았다. p.335



목 차

1부: 집 이야기

저자가 새로 이사간 집을 꾸미는 과정을 통해 일반적인 독일 가정집과 독일식 주택의 구조를 엿본다. 독일인 남편과 자녀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만나게 되는 환경 건축 이야기가 흥미롭다.

건축하는 여자가 사는 집 / 가족과 손님을 위한 공간: 현관과 복도, 거실 / 실용적으로, 그러나 개성 있게: 부엌과 욕실, 침실 / 불필요한 공간은 없다: 발코니와 마당 / 쉼을 주는 공간: 중간공간과 가로수 / 평범한 가정집 들여다보기 / 뮌헨의 부자들이 사는집 / 우리집의 환경 교육 / 환경 위기 시대의 대안 건축


2부: 도시 이야기

뮌헨의 명소들을 소개하고, 뮌헨에서 공부했던 전혜린, 이미륵의 발자취를 좇는다. 칼스루에가 세워진 과정을 통해 유럽 중세건축사를 소개하며, 저자의 가슴을 뛰게 한 아이어만과 르코르뷔제의 건축물을 함께 만나본다. 유럽 건축사조를 쉽게 구별하는 특징을배운다.

마을 같은 도시 뮌헨 / 문화재를 활용한 쇼핑센터 / 전혜린의 발자취를 찾아서 / 이미륵의 묘지에서 술을 따르며 / 건축에 미친 왕 / 칼스루에의 튤립 아가씨들 / 바덴의 영화와 수모 / 베로나의 불타는 아레나 /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건축 / 르 코르뷔제와 아이어만 / 강변의 노동자 마을 / 주연이면서 조연인 건축 / 향수의 건축


3부: 현장 이야기

건축가의 작업 현장을 엿본다. 여성으로서, 동양인으로서 독일에서 건축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소회를 밝힌다. 유적 발굴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며 겪은 에피소드들, 문화재 발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여자 공대생의 화장실 노이로제 / 돌고 도는 건축 역사 / 건축가의 심리투시경 / 유적지의 황혼주 / 발굴지에서 만난 사람들 / 메소포타미아 발굴지, 차이외뉴 / 테러에 사용된 문화재 / 역사를 도면 위에 남기다 / 학자의 양심 앞에서 / 뜨거운 굴뚝 속의 아이들 / 부드러운 여장부 / 상식과 호기심과 상상력


링크: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 작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