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라인강변에 살던 사람들은 라인강을 자연이 정해준 경계선으로만 여길 뿐 감히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50년 경에 시저가 이끄는 로마군대가 라인강까지 진격했을 때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새로운 광경을 접하게되었다. 로마군대는 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라인강에 배를 띄워 군수물자를 운송했던 것이다.

로마 주둔군은 라인강변에 선박 작업장을 세우고 항구와 뱃길을 만들었다. 여기서 뱃길을 만들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강을 준설했다는 말이 아니라 강변을 따라 길을 닦았다는 뜻이다. 바닥이 평평하게 생긴 로마시대의 배 프람(Prahm)은 동력이없어서 상류로 거슬러올라갈 때는 밧줄로 묶어 사람이나 짐승이 강변에서 끌고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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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이 발명되기 전에는 육지에서 배를 끄는 직업이 있었다. 19세기 말엽 사진

군대에 의해서 항구와 뱃길이라는 인프라가 형성되자 이를 이용하는 장사꾼들이 생겼다. 새로운 운송수단으로 인해 이웃 지역과의교류가 활발해졌다. 로마군은 라인강의 곳곳에 세관을 두어 강을 오가며 장사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받아 짭짤한 수익을 챙겼다.

5세기에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 대륙은 암흑의 세계로 변했다. 도시를 지탱하던 상공업이 무너지고 도시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뿔뿔이흩어지며 살인, 강도, 약탈의 무법천지를 불렀다. 생계가 불안하니 교육에신경 쓸 수 없었고, 길 떠나기가 위험하여 지식과 정보의 교류가 정체되는 고립 현상이 일어났다. 로마군대가 남긴 항구와 뱃길은 세월 속에 파괴되고 망각되었다.

라인강에 다시 배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8세기 무렵의 일이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로마시대와 같이 강변에 오솔길을 닦아서 배를상류로 끌고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 댓가로 통행세를 챙겨 국고의 큰 부분을 충당했다. 중세에 화물운송의 주요교통수단이었던 강은 근세에 와서도 산업발전의 중추가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라인강에 증기선이 등장했다. 이는 석탄과 철강의운송을 필요로 하는 독일의 중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독일은 20세기 초반에 세계 최고의국내총생산을 기록했다. 이것이 독일의 제1 경제기적이다. 즉, 1차대전 이전의 제1 경제기적에는 라인강이 중대한 임무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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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강의 뱃꾼, 일리아 레핀, St. Petersburg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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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증기선, 1930경 사진, F.Lang

오늘날 라인강과 라인강의 샛강인 마인강을 따라 독일의 주요 도시들이 줄에 낀 구슬처럼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도시들은 2000여년의 역사 속에서 라인강의 수로교통으로 인해 생겨났거나 그와 함께 발전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또 그렇게 라인강과 함께 맞춤으로 생성되고 자란 도시들이기 때문에 라인강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2차대전 이후의 제2 경제기적과 함께 라인강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자동차 산업과 도로교통이 눈부시게 발전한 1960대 이후로 독일에서수로교통의 의존도는 현저히 감소했다. 하지만 독일의 주요 산업도시들이라인강변에 줄지어 위치한 까닭에 독일의 주요 철로와 고속도로도 라인강을 따라가며 건설되었다.

옛부터 라인강은 결코 안정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중세시대에 기승을 부리던 해적떼들은 차치하고라도 근세에 들어와서도 자연조건이배가 다니기에 썩 유리하지 않았다. 전체 길이가 1.300km가 넘는 라인강은 구간마다 지형이 달라서 배가 전혀 다닐 수 없는구간도 있었고,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에도 물길의 형태가 가지각색이었다. 쾰른 이북의 라인강 하류에는 선체가 깊고 불록한바닷배가 들어올 수 있었지만 쾰른 이남으로는 물이 얕았으므로 바닥이 납작해서 깊이 잠기지 않는 배만이 다닐 수 있었다. 그 경계에위치한 쾰른은 자연스럽게 화물을 부리고 배를 갈아타는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라인강은 원래 전반적으로 경사가 얕고 폭이 넓은 강이었다. 그래서 물의 흐름이 느리고 구불구불 여러 갈래로 갈라져가며 흘렀다. 가뭄이오면 여기저기에 바닥을 드러내며 실핏줄처럼 얽혀서 흐르다가 홍수가 나면 강변유역을 너르게 범람했다. 그러다가 물이 빠지면 이전의물길과는 다른 곳에 물길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배가 다니기엔 위험하고 불안정한 여건이어서 배가 발이 묶이는 일도 잦았다.

이런 라인강은 배에게만 불안한 존재가 아니라 유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도 무서운 자연이었다. 너르게 범람하는 홍수로 마을이 통째로사라지기도 하고, 물이 빠진 후에 물길이 멀찌감치 돌아가 다른 곳에 생기는 바람에 항구와 세관같은 생계수단을 잃는 마을도 한둘이아니었다. 그래서 중요한 항구도시인 쾰른 전방에서는 1400년 경에 벌써 강바닥을 파고 보강해서 물길을 잡아두는 공사를 벌이기도했다.

무서운 자연에 도전장을 던져 라인강에 수술을 감행한 사람은 칼스루에의 엔지니어 “툴라”이다. 툴라는 바덴공국의 건설부장관 바인브렌너와 함께현 칼스루에 공대의 전신인 건축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예전에 2-3km씩 왼쪽 오른쪽으로 굽이치며 구불구불 흐르던 강물은59년이 걸려 1876년에 완공된 물길 공사 이후로 240 m 폭으로 좁고 깊게 패인 통로에 갖혀서 직선으로 흐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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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툴라의 도면, 오른쪽은 위성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라인강

그러나 이 공사의 원래 목적은 수로교통의 개척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이었다. 당시에 독일은 여러 개의 독립된 토호국으로분할되었는데 라인강은 몇 개의 토호국 사이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범람 후마다 물길이 바뀌어 국경선이 바뀌니 불안하고 성가셔서칼스루에에 수도를 둔 바덴공국의 영주가 이를 시정하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홍수 방지였다. 물길을 가두고 댐을쌓아 예전에 넓게 범람하던 지역을 안전한 땅으로 변화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이다.

공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강 아래쪽에 위치한 다른 토호국에서 반기를 들었다. 상류에서 막은 홍수가 하류로 내려가서 더 큰위력으로 나타나리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바덴의 영주는 “능숙한 외교”로서 이웃 영주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반대한 것은 이웃영주들 뿐만이 아니었다. 라인강에서 자자손손 고기잡이로 연명하던 주민들도 반대하여 봉기했으나 군대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본래 목적은 아니었지만 툴라의 공사로 인해 결과적으로 라인강에서 배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물흐름의 상태가 양호할 때만 배가 뜰수 있는 불안정한 뱃길이었다. 마침 증기선이 발명되어 수로를 이용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시대와 맞물려 이 구간을 전천후 뱃길로 개선시키는공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드디어 20세기 초반에는 독일의 최북단인 북해에서부터 독일의 최남단이자 스위스의 국경도시바젤까지 배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939년에 끝난 마지막 공사는 스위스와 독일의 공동투자로 이루어졌고 이로써 내륙국인스위스는 북해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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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루에를 흐르는 오늘의 라인강

자연하천 라인강을 인공의 수로로 다듬은 이 공사는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

공사가 실행된 지방에서는 실지로 홍수가 통제되었다. 그 결과 예전의 범람지역이 농경지와 주거지로 변했다. 습지였던 범람지역이 사라짐으로써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강 아래쪽에는 이웃 영주들이 우려했던 일이 당장에 사실로 일어났다. 상류에서 적당한 범람을 통해 약화되지 못하고 한 줄기로 모아져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물살은 라인강 중류에서 무서운 파괴력으로 나타났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빨라진 물살은 예전보다 많은 양의 자갈과 모래를 끌고 내려오다가 자연에게 자연스러운 지점에 쌓아놓았다. 자연에게 자연스러운 지점과 인간에게 편리한 지점이 모순되는 상황에서는 궁극적으로 자연이 이긴다. 이 토사물은 인간에게 불필요한 곳에서 수위가 올라가게 만들어 제방을 위협했다.

게다가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일어났다. 네카강, 마인강, 모젤강 은 칼스루에 하류쪽에서 라인강으로유입되는 샛강들이다. 구불구불하던 라인강이 직선으로 변하면서 그 길이가 총 80km나 짧아졌으니 상류의 물이 중류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상류에 위치한 바젤에서 중류에 위치한 코블렌츠까지 라인강의 길이는 3분의 2로 줄었다.) 예전에는구불구불 돌아내려오던 홍수물이 이제는 반듯하게 닦은 물길을 타고 순식간에 내려왔다. 예전엔 홍수가 나면 샛강에서 불어난 물이 한바탕 먼저 떠내려간 후에 조금 시간을 두고 라인강 상류에서불어난 물이 뒤따라 내려갔는데, 이제는 라인강 홍수물이 지름길로 달려오는 바람에 샛강의 홍수와 라인강의 홍수가 한 지점에서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두 강의 홍수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려와 제방을 무너뜨리고마을을 덮치니 강 아래쪽 백성들만 죽어났다. 그들의 영주가 무지했거나 부패했던 댓가를 애꿎은 백성들이 톡톡이 치른 셈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닌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것은 당대에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면 라인강 수로공사는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다음에 계속됩니다.)


참고자료
링크: 로마시대무배 발굴
링크: 중세에서 19세 까지 라인강 수로교통의 발전사
링크: 강변로, 위키페디아
링크: 스위스 항구의 역사
링크: 라인강, 위키페디아
링크: 라인강 수로교정, 위키페디아
링크: 칼스루에 도시위키
링크:SWR 교육방송
링크: 내륙수로에 대한 보고서, BUND
링크: Der Rhein, Zeitschrift
링크:라인강에 2000개의 섬이 있었을 때


사진출처
Dichter Verkehr auf dem Rhein, F.Lang, 2007,http://de.wikipedia.org/wiki/Binnenschifffahrt Treidler an der Wolga, Ilia Efimovich Repin (1844-1930),http://de.wikipedia.org/wiki/Treideln Treideln mit Pferden am Finowkanal, Dautm ca.1880 bis 1890,http://de.wikipedia.org/wiki/Treideln Seitenradschlepper, Foto um 1930 von F.Lang,http://de.wikipedia.org/wiki/Geschichte_der_Binnenschifffahrt Plan Tullas, Satellitenfoto (2006년),http://de.wikipedia.org/wiki/Rheinbegradigung,http://de.wikipedia.org/wiki/Altrheinarm Rhein Karlsruhe,http://de.wikipedia.org/wiki/Binnenschifffahrt


이 글은 2008.2.10일자 인터넷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링크: 인터넷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