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김나지움 13학년이다.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4학년인 셈으로, 올여름이면 김나지움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시험에 해당하는아비투어가 끝난다.

일찌감치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공부를 가르칠 재목과 기술을 가르칠 재목을 분류하는 독일 학제에서 아비투어까지 무사히마치는 학생은 전독일 학생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김나지움에 가기도 힘들지만 김나지움에 갔어도 무사히 졸업하기도 힘들다.11학년인 딸의 학급 학생 28명 중에서 16명이 낙제할 위험이 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고 한다. 2년에 걸쳐 쌓은 아비투어 점수는 진로를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들은 요즘 정말 바쁘다. 그 어렵다는 학과공부 이외에도 달리 하는 일이 많아서이다. 학교의 학생회와 합창부,밴드부, 운동부 등 여러가지 특별활동에 적을 두고 있다. 게다가 학교에서 치르는모든 행사의 음향조명을 담당하는 기술자로서 정작 공연하는 날이 오면 무대에 설 수 없으면서도 아들은 매주 모든 연습에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한다. 어떤 날에는 등에 배낭 두 개를 겹쳐서 메고, 하나는 앞으로 메고, 다른 가방 하나는 자전거 뒤에 싣고 등교해서는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온다.

집에 있을 때는 늘 컴퓨터 앞에 붙어서 뭔가를 하고 있다. 혹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건 아닐까부모가 걱정을하면, 게임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게임만 하는 건 아니라고 대답한다. 부모된 우리로서는 다 큰아들을 믿어 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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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보다 두 학년 아래인 딸은 올해 가을부터 아비투어 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벌써부터 계획이 분분하다. “내가 원하는 직업과 내적성에맞는 전공과목은 무엇일까? 어떤 과목을 선택하고 어떤 과목을 포기하는 게 아비투어 성적에 유리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느라고점수에 대해 관심이 부쩍 많아진 딸이 며칠 전에 저녁 식탁에서 제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아비투어 점수를 위해서 하루에 공부를 얼마나 하고 있어?”
“전혀.”
“어머, 그럼 안 돼, 오빠. 실력만 있다고 되는 거 아냐. 이 세상 살아가려면 객관적인 성적도 중요하다구.”

부모를 대신해서 오빠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생 앞에서 아들은 말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고, 정작 부모인 우리 부부는눈을 맞추고 흐흐 웃고 말았다.

청소년인 아이들에게 집안일을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벼르다가도 졸업반이라 저렇게 바쁜 사람에게 뭘 또 시킨다는 게 미안해서 포기하곤 했는데, 학과공부에할애하는 시간이 제로라는 사실을 우리도 그날 저녁에 처음 알았다. 그럼 그간 책상에 앉아서 한 것은 뭐란말인가? 설마 컴퓨터 게임? 우리는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는 증거도 없는데다 아이의 성적이 무난한 까닭에 뭐라고 말할명분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아이가 게임중독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우리는 부모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다.마약중독, 알콜중독,게임중독 등의 각종중독현상은 적극적인 치료를 요하는 질병이므로, 어떤 이유에서건 이를 외면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부모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엎친 데 덮친다고, 다른 일로 바빠서 공부할 시간도 없다는 아들이 이젠 취직까지 하게 됐다. 예전에 실습하러 갔다가 인연을맺은회사에서 계약직 고용제의를 해온 것이다. 아직 학생인 신분을 고려하여 일 주일에 열 시간씩 일하기로 했다며 아들은 좋아했다.시급이15유로라니 한 달에 600유로를 벌면 요즘 대학생 평균 생활비는 될 것이다. 우리도 부모로서 덩달아 자랑스러웠다. 벌써 자립을하는구나. 그리고다행스러웠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한다는데 일이라도 하면 그 시간만큼은 나쁜 짓을 덜 하겠지.

문제는 아들의 의료보험이었다. 월급이 한달에 400유로가 넘으면 가족보험의 피부양자 혜택에서 벗어나 정식 경제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것이다. 의무적인 보험료는 고용인과 고용주가 대략 반반씩 나눠 내는데, 보험회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600유로월급에선 매달 의료보험으로 약 50유로(6만원 상당. 헐~ 고등학생이 알바하고 내는 의료보험료가!),국민연금과 실업보험으로 약70유로(9만원 상당), 합해서 한 달에 약120유로(15만원 상당)씩 월급에서 빠져나가고, 회사에서는 그보다 약간 많은 금액을 보태게 되어있다.

아들은 일 주일에 열 시간 일하고 480유로(월급에서 보험료를 공제한 실수입)를 버느냐, 아니면 일곱 시간만 일하고400유로(저임금의 범주에 들어, 고용주가 보험을 일괄처리함으로써 고용자는 따로 보험을 들 필요가 없음)를 버느냐를 두고저울질했다.우리는 아들에게 사회복지국가에서 보험이나 연금 내는 걸 아깝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단지 이 시점에선 시간관리에 초점을맞추라고 조언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일에 대한 성취감이 높아지는 대신 학창생활을 즐길 시간이 줄어드는 점을고려하여, 일과 삶의 균형을 지켜서 삶의 질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선택하라고 권했다.

학과 시간표와 특별활동 일정표를 들여다 보던 아들은 일을 적게 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나는 아들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아들의 선택을 두고 일에 대한 의지가 약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과 삶의균형을 유지할 줄 아는 고용인은 장기적으로 효율성 있는 일꾼이 될 것이고, 회사에서도 곧 너의 실력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아들에게 얘기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나는 아들이 달리 선택했어도 잘했다고 했을 것이고 또 그에 걸맞는 덕담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등교시간에 맞추어 아들을 깨웠다. 그랬더니 오전 중에 회사 인사과에 계약하러 간다고 학교를 빠진다는 것이 아닌가? 학생이 학교를 빼먹고 회사에 간다고? 나는 놀라서 남편에서 물어봤다.

“쟤가 오늘 학교에 안 가고 회사 간다는 거 당신이랑 의논했어?”
“아니.”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딸아이가 목욕탕에서 소리 질렀다.

“오빠 야단치지 마! 오빠는 법적으로 성인이야. 학교 결석하는 일에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구.”

누가 뭐래나? 우리끼리 물어도 못 보냐고오? 그래두 명색이 부몬디…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궁시렁궁시렁.

전반적으로 크게 빗나가지 않는 한 자식들의 사적인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교육방침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인생에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습관을 들이지 못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나는 독일에서도 숱하게 보아왔다. 곱게자란 대학생들이 특히 심했다.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독일대학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 학업을 끝내지도 그만두지도 못한 채 질질끌며 시간만 보내는 불행한 학생들을 보며 나는 학력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난독증이 있었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점수 잘 받는 일에 서툴었던 우리 아이들은 의외로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그리고 가끔씩 낙제할 기미를 보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신의 소질과 취향을 관찰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열정 없이 남 보기만 그럴 듯한 턱걸이 인생만 피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말했다. 다른 건몰라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단지성적이 된다고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큼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누누히 강조했다. 세속적인 경쟁력도 열정이좌우하지학력이 좌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면서 수 없이 체험하지 않는가?

김나지움 고학년이 된 우리 아이들은 대학교에 진학할 뜻을 세우고 있다. 아들은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몰라도 무슨 과목을 공부하고 싶은지를 알고 있고, 딸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놓고 거기에 맞는 과목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수험생으로서 취직까지 하신 우리 아들의 아비투어 성적은?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는 객관적인 점수는? 부모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자기 템포로 기분 좋게 잘 달리고 있는 말에게 꼭 제일 앞에서 달려야 한다고 채찍질을하는 건 민망스럽지 않은가? 인생선배로서 할 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