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미국 대사 실망? 괜찮아!
미국 대사가 우리 정부에게 실망했단다. 괜찮다. 계약서에 화끈하게 싸인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그로서는실망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설령 실망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제스쳐를 취해놓아야 앞으로 혹시라도 재협상이 있을 때 흥정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큰 이권이달린 문제인데 무슨 소리라도 해서 나중에 뭐 하나라도 더 얻는 게 외교관의 임무 아니겠는가?
1997년에 유럽에서 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제일 먼저 유럽산 소와 양과 고기의 수입을 금지했다. 유럽연합에서 미국에게실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 이에 개의하지 않았다. 사실 유럽 주민들도 미국의 입장을 이해했다. 자국의 건강권과 시장을지키겠다는데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미국 대사가 실망하거나 말거나 우리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개의할 필요는 없다. 싸인하기 전에 계약서를 제대로 안 읽어서, 국민들의저항이 생각보다 커서, 미국 쇠고기와 한국 자동차를 바꾸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는데 그것이 실행될 승산이 없어 보여서 등등어떤 이유에서든 계약을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면 파기하고 다시 협상할 수도 있는 일이다. 형편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이혼도 하는 게사람의 일이다. 국제 관행은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국제사회에 아직 없었으면 이참에 우리가국제 관행을 만들면 된다.
단, 계약을 파기하면서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계약을 지킬 때 오는 손익과 계약을 파기할 때 오는손익을 비교해서 결정한 후에는, 이를 다같이 감수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계약의 파기를 요구할 때는, 이에 따르는 손해를 국민들이다함께 감수하겠다는 공감대가 병행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경솔하게 계약 맺은 것을 타박할 수는 있어도, 계약 파기에 의한 손해에는국민들이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협곡으로 배를 몰고 들어간 선장을 나무랄 땐 나무라더라도, 앞으로던 뒤로던 빠져나올궁리는 다같이 해야 산다. 하지만 선장이 앞으로 운전하면서 지금 뒤로 나가는 중이라고 눈속임을 한다면, 국민이 암만 도와줘도 그배는 협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국민은 앞뒤도 구분 못하는 장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는 우리 국민이 광우병에 관해 과학적인 사실을 배우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월령 30개월 이상의 쇠고기에 대해 우리 국민이 미신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유럽인들도 미신을 믿나보다. 유럽연합은 월령 30개월 이상의 소는 한 마리도 빠짐없이, 100% 도축 검사를 하도록 규정한다 (미국에선 1% 비율로 표본검사). 소의나이에 비례해서 광우병의 전염성이 높아진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월령 24개월 이상의 소도 건강상태가 양호하지 않을 경우에는 도축검사를 해야 한다. 30개월 미만의 소를 검사하는 것은비용의 낭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검사 기준을 완화하면 소비자들의 불안으로 쇠고기 시장이 무너질것이란 우려에서 독일 정부는 남보다 강화된 기준을 고집하고 있다.
2003년에 미국에서 광우병이 처음 발생했을 때 세계 각국에서 앞을 다투어 미국 쇠고기의 수입을 중단했다. 하지만 유럽연합에선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발표했다. 왜냐면 어차피 성장호르몬 때문에 미국 쇠고기의 대부분의 부위는 유럽으로의 수입이금지된 식품이기 때문이다.
유럽 기준으로 보자면 이렇게 품량 미달인 미국의 쇠고기를 놓고 과학 운운하며 주재국 국민을 불쾌하게 만드는 대사는 다른직업이라면 몰라도 외교관으로선 절대로 자격 미달이다. 친구 사이도 아니면서 야당 대표에게 전화해서 잔소리하는 것도 예의 없는짓이다. 무식하거나 오만하거나 경솔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은 외교관 자격이 없다. 이런 외교관은 양국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미국 정부에선 당장 소환하기 바란다.
이 글은 2008.6.5일자 인터넷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링크: 인터넷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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