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밖에 나가서 술 마시고 놀았다. 아는 언니가 정취 있는 아삼 골목에서 피자를 사준다고 불러낸 것이다. 그간 내가 독일 운하 이야기를 쓴 보답이라는데 난 영 부끄러웠다.

막상 만났더니 그 언니는 청명한 하늘을보니까 갑자기 맥주가 무지하게 땡긴다고 비어가든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뮌헨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재래시장인빅투알리엔 마르크트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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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가에 있는, 세련되고 아늑한 아삼 골목. 저녁에 앉아서 놀면 특히 예쁘다.


마로니에가 우거진 장터의 탁자를 빡빡하게 메운 도시의 활기여! 우리는 시장의 생선가게에 먼저 들러서 청어 샌드위치를 샀다.커다란 맥주 조끼를 하나씩 들고 긴 탁자 사이를 누비며 자리를 찾았다. 긴 탁자의 끄터머리에 빈 자리를 발견하고 먼저 앉아 있는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불량하게 생긴 차림새와는 달리 상냥하게 자리를 나눠주었다. 이런 것이 바로 모르는 사람들과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는 비어가든의 정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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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가 우거진 빅투알리엔 시장의 비어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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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맥주는 아우구스티너. 1리터에 6.20 유로.


술이 쎄고 뮌헨의 맥주에 정통한 언니는 빅투알리엔 시장의 맥주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뮌헨에서도 드물게 나무통에다발효시키는 맥주를 파는 곳인데, 다른 곳보다 술값이 50센트나싸다고 했다(1리터에 6.20 유로~만 원). 언니는 아우구스티너 맥주를, 나는 라들러(맥주와 사이다를 섞은 음료수. 고건축을 연구하는사람들이 현장에서 하루 일 끝나고 즐겨 마심.)를 마셨다. 우리는 저녁 겸 안주로 청어 샌드위치를 주머니칼로 먹기 좋게 잘라서손으로 집어먹었다. 동그랗게 구운 빵 속에 들어 있는, 소금에 절여 삭힌 날 청어는 비릿하면서 깊은 맛이 났고 아삭한 양파의시원한 맛과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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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서 왼쪽부터 식초에 절인 청어, 소금에 삭힌 청어, 훈제 연어로 만든 샌드위치


언니는 술도 못하는 사람이 쓰는 글을 읽으실 나의 독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뮌헨의 맥주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많이 줬다. 자칭비어가든 순례자인 언니의 그다지 크지도 않은 가방에선 미니 방석, 접시, 주머니칼, 물티슈 등 별별 물건들이 요긴한 순간마다줄줄이 나왔다. 점심에 먹고 남았다는 김밥 꽁다리도 나왔다. 뮌헨 비어가든에는 셀프서비스로 음료수만 사먹으면 각자 들고온 음식을먹어도 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비어가든 매니어들은 수저에서 식탁보까지 피크닉 장비를 지참하고 다닌단다. 단, 같은비어가든이라도 탁자에 식탁보가 덮혀 있는 구역은 종업원들이 술과 음식을 주문받고 서비스해주는 곳이므로 가져온 음식을 먹을 수없다.

날이 어두워진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무성한 마로니에 잎 사이로 비치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정다웠다. 가끔씩 마로니에 씨앗인지 어린 잎인지 하늘하늘 떨어지며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 머리에 떨어진 씨앗을털어주며 언니는 언제부터 네 머리가 이렇게 셌냐며 괜히 속상해했다.

우리는 귀신 얘기도 하고 불법 얘기도 했다. 사람이 잠깐 화를 내더라도 그 순간에는 그 존재의 전부가 화덩어리란 말을 언니가했다. 정말, 쓸데없이 바르르 화내지 말고 살아야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화난 순간에 죽은 사람에겐 그가 평생 괜찮게 살았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만났다가 헤어져 까맣게 잊혀버린 인연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내 글을 우연히 읽은 독자들과 나 사이엔 어떤 인연이 존재하나?나는 뮌헨에 다녀가시는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의 독자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에서 언급한 장소를 지나실 때 나와 공감하실까? 우연히 내 책을 읽고, 우연히 뮌헨 쪽으로 다녀가는독자들과 교차함으로써 하나의 점으로 찍어지는 인연이 우리의 인생에 별로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길가에 핀 풀한포기와 그를 스쳐가는 바람이 주고 받는 사소한 인연의 연속이 아닐는지? 내 책을 선택해준 인연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는 뮌헨시내만이라도 함께 돌면서 건축사를 통해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가을에 한번 날을 잡아 볼까? 반나절 정도 어디를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까 구상하는 내게 언니는 반나절로는 택도 없다고, 하루종일 해도 모자란다고 윽박질렀다.아이고 성님, 좀 봐주소.내 성격에 반나절만 해도 준비가 엄청나오.

밤이 깊었다. 언니는 먹다 남은 빵조각, 생선 조각, 양파조각이 흩어진 봉지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엇, 언니! 그거 버리려고 그래?”
“아니! 나도 너 못지 않다. 내일 먹을 거야.”
우리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우리는 뮌헨 시내의 골목길을 걸어갔다. 길가의 화분에 핀 하얀 줄장미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자지러졌다. 밤에 핀 하얀 장미는 알딸딸한 술기운에 일렁거리며 나를 옛날의 어떤 장면으로 단숨에 몰고갔다.

서로 굉장히 좋아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그 싸이클이 맞지 않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내가 그를 미치게 좋아할 때 그는 그런 것도몰랐고, 나중에 그가 나를 좋아했을 때는 나는 마음이 떠난 뒤였다. 그후 아쉬워서 내 마음이 다시 방황할 때 그는나를 잊겠다고 아주 멀리 가버렸다. 그런 와중에 딱 하루저녁 동안 싸이클이맞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만나서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는 밤길을 걸었다. 주택가 정원의 야트막한 담장 위로 하얀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어둠 속의 흰 장미라니, 이런 낭비가 다 있나? 취한 내 눈에 둘로 보였다 셋으로 보였다 하던장미꽃 송이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맨손으로 잘 꺾어지지 않았던지 그는 이빨로 장미 줄기를 물어서 끊었다. 장미꽃을 문 그의붉은 입술이 내 망막에 일렁일렁 흔들렸다.

컷!

나는 추억 속의 일렁거림을 증폭하려고 장미에 초첨을 맞추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한 순간의 일렁거림으로 압축되어버린 엄청난 감정의 낭비여! 어둠 속의 하얀 장미가 내게 종알거렸다. “그럼 어때? 그럼 어떠냐구?” 장미! 너 자꾸 까불면 물어뜯을거야. 그걸 누가 모른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