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나는 고건축을 사랑하지만 잘 지은 현대 건축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근래에 본 현대건축으로는 루체른의 호숫가의문화학술센터 KKL이 특히 맘에 남는다. 주변의 수려한 풍광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컨셉으로서, 밖에서 보았을 땐 그냥 순하게가슴에 안기던 경치도 창문을 통해서 보면 벽에 걸린 예술이고, 테라스에서 보면 상하의 여백이 과감하게 잘려버린, 극적인파노라마로 변하는 센스가 돋보인다.

이 건물의 진수는 뭐니뭐니해도 연주회장일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장 누벨)과 음향전문가(러셀 존슨)의 합작품인 이 연주회장은어떤 음악에도 맞춤형으로 반응할 수 있는 완벽한 음향효과를 자랑한다.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이 공연하기를 가장 선망한다는 이연주회장은 폭, 높이, 길이가 1:1:2의 비율인 길쭉한 구두상자형으로서 옛날부터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때 적용한 수치다.역시 음향효과가 좋기로 소문난 오스리트아 빈의 음악실(Wiener Musikvereinssaal)도 구두상자형이다. (유럽 미술&건축 순례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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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KKL의테라스에서 보이는 호수 풍경

집에 돌아와 아침식탁에 앉은 나는 반으로 자른 크로와쌍을 커피에 찍어먹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아, 정말 멋졌어. 클래식 좋아하는 당신 생각이 많이 나더라. 그런데 참 이상해. 옛날부터 고전 철학에 의거한 공간 비율이 오늘에도 완벽한 음향을 내는 비결이라니!”
“공간의 비율이랑 상관 있는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역사랑 상관 있는 거 아냐? 오늘날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은 대부분이삼백 년 전에 작곡된 거잖아? 그리고 그때는 구두상자형의 홀을 지었고. 그런 옛날 공간에서 연주하기 좋도록 곡이 만들어져서 그런거 아니겠어?”
“아, 그렇구나. 음악 자체가 당대의 연주회장에 맞춤형으로 작곡된 거라서 아직도 그런 공간에서 최대효과가 나는 거구나. 아, 루체른에서 말러의 심포니를 들으면 얼마나 웅장할까? 우리 평생에 그런 고급 연주회에 갈 수 있을까?”
“이봐, 난 말이야, 당신이 우리 통장에서 몇천 유로 척척 꺼내서 필하모니 일등좌석표를 주문하고, 호텔 예약하고 남편한테 아양 떠는 여자라면 참 행복하겠어.”
“어머머?우리가 몇천 유로를 그렇게 써도 돼? 그럼 나… 저기…쉼터…”
“앗, 그건 안 돼! 하지만 거기 기부할 돈 몇천 유로는 없엇!”

우리 부부가 돈 쓰고 싶어하는 분야는 이렇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달걀 자르는 기구라던가 카푸치노 거품기 등 자잘하고신기한 주방용품 사는 걸 즐기지만 나는 돈도 아깝고 짐이 늘어나는 게 싫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다니며 말린다. 그 대신내가 우리 어디 분위기 좋은 데서 커피나 한잔 마시자고 하면 남편은 집에 가서 자기가 더 맛있게 끓여준다고 내 손목을 마구잡아끈다. 기분 전환하자고 지갑 두드리며 호기있게 나섰던 부부는 결국 빈 손에 빈 속으로 집에 돌아가면서 서로를 향해투덜거린다. 구두쇠와 결혼해서 인생이 삭막하다고 서로 툴툴거리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안도한다.

우리 부부에겐 남다른 검약의 철학이 있다.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돈 대신 시간을 선택하는 인생을 살기로 한 우리에겐 기본 생활비를 최저로 유지하는일이 관건이다. 우리는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꼭 필요한 일만 하는 일에 불편함을 못 느끼고 부끄러움이 없다. 아직도 크로와쌍하나를 둘이서 나눠 먹고,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탄다. 환경보호에 대한 신념으로 자가용이 없고, 제철 야채와 과일을사고,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생활습관도 돈을 절약하는데 한몫한다. 수입이 암만 적어도 항상 그 이하로 돈을 쓰고, 수입이 늘어도평소의 최저생활비를 유지하는 습관은 우리를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회사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을 주 37시간에서 40시간으로늘이고 월급을 올려준다고 제안했을 때, 나는 지금 버는 돈도 다 못 쓴다고 남편을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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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야채를 싹싹 긁어모아 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 소금, 후추 넣고 보르르 끓여서 스프를 만들어 그 위에 굳어버린 빵을 썰어 띄우고 치즈를 얹어서 오븐에 구으면 멋진 한끼 요리가 됩니다.

독일에서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한다. 용돈같은 건 없고 공동명의의 계좌에서 각자 필요한 만큼돈을 꺼내 쓴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비슷한 수준의 씀씀이를 유지하는 것은 신뢰의 문제다. 독일 친구들 중에는 각자의 수입을따로 관리하는 부부들도 있다. 집세는 남편이, 생활비는 부인이 내기로 약속을 하거나, 공동의 지출은 공정하게 나누고 각자의씀씀이는 각자 번 돈으로 해결한다거나, 쇼핑이나 외식 한번 할 때마다 누가 돈을 낼 건지 의논하기도 하는둥 가지각색이다. 그러나이런 사실은 옆에서 짐작만 할 뿐이지 감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한다. 독일에선 남의 돈사정에 대해서 묻는 것이 굉장히 큰실례이기 때문에 우리 시부모님도 아들의 월급 액수를 모르시고, 우리 아이들도 부모의 경제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아이들은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그냥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 배웠다. 보통 아침에 먹는 주먹빵 브뢰첸보다 약간 비싼 크로와쌍은원래 반씩만 먹는 음식인 줄 알고 컸고, 나중에 다른 집에서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어려서부터 자건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다른 집 아이들이 자기네 자가용 문을 여는 것 만큼이나 쉽게 생각했으므로 오히려사회 적응이 빠른 면도 있었다. 환경보호가 무엇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자전거를 타거나전차와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해서 남의 집 자가용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아들은 만 세 살 때 벌써 돈을 벌었다. 거리의 악사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는지 하루는 집 앞 길가에 악기를 들고 나가서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아기가 그러니 얼마나 귀여운지 지나가던 행인들 뿐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일부러 차를 세우고돈을 주고 갔다. 나는 참견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집안에 있었는데, 나중에 꼬마가 모자에 수북히 담아오는 돈을 보고 기절할뻔했다. 나도 한 시간에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본 적이 없었다. 구멍가게에 동전 한 잎 들고가서 새콤달콤한 곰젤리를 낱개로사먹는 일에 막 재미를 붙인 아이에게 이렇게 쉽게 번 돈이란 불행의 씨앗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또 돈벌이에 나선 아이 뒤의 벽에다 큼지막한 종이를 하나 붙여놓았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제발 단위가 낮은동전만을 넣어주시기를 부탁하는 부모의 간절한 호소문이었다. 아이는 글을 읽을 줄은 몰랐지만 동전의 색깔이 달라진 것은 알아챘다.그래서 그랬는지 곧 그만 두었다가, 나중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돈을 벌었다. 길가에 좌판을 만들어놓고, 공원에서주워온 큼지막한 나뭇잎을 팔았다. 공원에 가면 천지로 널려 있는 게 나뭇잎인데 그걸 누가 사나 했는데 아이디어가 기막혔다.나뭇잎에 매직펜으로 하트를 그리고 이름을 써서 데이트하는 커플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친구가 옆에서 행운의 나뭇잎이래나 뭐래나바람까지 잡아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돈벌이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던 아들은 고등학생 때 벌써 회사에 취직해서 정기적으로 월급을 탈 정도로 돈과 친하다.그러나 돈벌이가 재미있는 것이지 돈 자체에는 흥미가 전혀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는 다른 부모들과 의논해서 용돈의 수준을통일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면 1주일에 5유로, 6학년이면 6유로가 당시 우리가 정한 용돈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올해 만20세로 대학생이 되는 우리 아들의 용돈은 아직도 한 달에 25유로(약 38000원)로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금액이다. 그런데그 돈도 우리가 넣어주는 대로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다. 아이가 그 돈을 이자가 좀 붙는 통장으로 옮기는 즉시 우리도 용돈을올려주기로 했는데, 벌써 몇 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도무지 돈 쓸 일이 없는 아이라서 그렇다. 남이 하는 걸 따라하지도 않고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다. 아주 오래동안자기 반에서 유일하게 시계와 핸펀 없는 아이였고, 여름 바지 두 벌로 사철을 나고 12월에도 샌들을 신고 등교하는 아이다. 그런것이야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라 우리도 참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도 딸은 얼마나 다른지? 제 오빠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도 한달 용돈은 옷값 포함하여75유로(12만원 정도)나 받는다. 정기적으로 구입해야 할 옷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놓고 자기 아빠랑 치열하게 흥정해서 3년 전에정한 가격이다. 얼마 전에 용돈을 올려달라길래, 이제 너는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아서 옷을 옛날처럼 그리 자주 살 필요가 없으니되려 깎자고 그랬다. 아이가 끈질기게 흥정을 했으면 우리도 양보할 생각이었는데 순순히 수긍하길래 용돈을 올려주지 않았다.

딸은 늘 돈이 떨어져서 쩔쩔맨다.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기 때문이다. 유행에 따라 옷 사는 것도 즐기고친구들과 어울려 카페나 디스코텍에 다니려니 씀씀이가 헤프다. 햇볕이 쨍한 날씨에는 돈을 꿔서라도 아이스크림을 사먹어야 인생이 좀아름답게 보인단다. 자기 오빠 졸업식에 갈 때도 빚을 내어 옷을 샀다. 왜 남이 졸업하는데 자기가 새 옷을 사는지 우리 식구의개념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올 가을에 열리는 뮌헨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에 갈 때 입는다고 바이에른 전통의상도 한 벌미리 사뒀다. 그런 것에도 유행이 있는 줄을 우리는 딸이 아니었으면 모를 뻔했다.

딸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청소해서 돈을 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벌지 미리 벌어두려는 생각은 꿈에도 안 한다. 딸이 우리와는달리 돈도 좀 쓰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 내 눈에는 좋아보인다. 그러나 돈이라는 건 도깨비 방망이에서 필요한 만큼 솟아나는 물건이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정해진 수입에 맞게 지출하는 요령을 터득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우리는 딸아이 앞에서 약간의 쇼를 한다.꿔준 돈은 꼬박꼬박 다 받고, 그 많은 돈을 어디다 다 썼느냐고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1-2유로 주면서 엄청나게 생색을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나는 청소값을 후하게 쳐주고 가끔은 슬그머니 돈을 쥐어준다.

사실 우리 부부가 딸아이보다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있는 만큼 즐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게 아주재밌다고 굳세게 믿고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하는 짓이 궁상과 노망의 경계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그래서 조심하는 차원에서 가끔씩 호기를 부린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차마 못하고 꼭 남에게 호기를 부린다.

몇년 전에 남편이 내게 무슨 기념으로 좋은 시계를 하나 사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내게 보여주며 어떠냐고 묻는 시계를 보니1000유로(백오십만 원 상당)나 하는 게 아닌가? 비싼 시계라고 더 정확한 것도 아닌데?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다른 시계를 집어들고 “이쁘고 튼튼하게 생겼다. 이거사줘.“하고 아양을 떨었다. 그때 산 35유로(오만 원 상당)짜리 시계를 볼 때마다 나는 남편의 1000유로짜리 진심을고마워한다. 나는 그 돈으로 남편에게 루체른의 콘서트를 선물하고 싶다. 몰래 알아봤더니 1000유로면 숙박까지 충분히 해결될 것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뭐 거기까지 가냐? 뮌헨에도 콘서트 많은데.” 할 것 같아서 걱정이다.



PS: 레몬트리 10월호에 이 글의 축약본과 다양한 사진이 실렸습니다. 인터넷에 사진 올리는 것은 딸에게서 허락받지 않았기에 아주 작습니다만, 맨 위에 딸이 뮌헨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위해서 산 바이에른 지방의 전통의상에서 앞치마가 보이지요? 앞치마의 매듭으로 여성의 신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매듭을 앞의 오른쪽으로 매면 기혼, 왼쪽으로 매면 미혼, 뒤에 매면 과부랍니다. 혹시 옥토버페스트 기간에 뮌헨에 오시는 남자분들께선 참고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