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칼스루에는 전 세계 대학의 도시설계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계획도시다. 나이가 300살도 채 못 되는,유럽의 도시치고 역사가 짧은 이 도시의 건축사를 들여다보면 18세기 이후 유럽의 변천사가 읽혀진다.

국가의 절대권력 속에서부상하는 시민계급, 그에 따르는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의 발전상이 옛날 지도에 그려진 사유지의 경계선을 통해 나타난다.

옛 지도들을 시대별로 나란히 비교해보면 도심에 있는 주택지의 대지들이 하나같이 최초의 경계선을 계속해서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유지의 경계선이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재조정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이는 지난 300년의 역사 속에서 칼스루에 시민의 토지재산권이 굳건히 지켜져왔다는 증거이다.

kastadtplan15.jpg

1779년, 1898년, 2004년도칼스루에 지도


도시를 만들 적에 영주가 인적 없는 숲에다 말뚝을 막고 터를 닦았으므로 칼스루에의 땅은 처음엔 전부 국유지였다. 영주는 백성들을새 도시로 끌어들으기 위해서 적극적인 이주정책을 폈다. 집 지을 돈이 있는 사람에겐 시민권을 부여하고 대지를 무상으로 지급했다.주민의 숫자가 안정권에 들어선 이후에는 토지를 공정한 가격에 팔았지만 돈벌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도시민들은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었기 때문에 국가에선 간간이 국유지를 채마밭 용으로 값싸게 풀었다. 인구가 점차늘어남에 따라 이 채마밭들은 건설부지로 용도가 변경되어 거주지로 변했다. 이때 애초에 채마밭 용으로 분양된 대지는 집을 짓기에불편한 형태였으므로 이를 보완하느라고 이웃 간에 송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도로 환수하여 집 짓기 좋은 형태로분할하여 재분양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 사유지가 된 땅은 암만 좋은 의도에서라도 국가가 마음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당시의 유럽 사회가 인권적이고 진보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유럽은 절대왕정을 꿈꾸는 군주들이 군림하던 시대였고, 농노가존재하고, 구신교 사이에도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영주의 종교가 곧 나라의 종교였으므로, 종교가 다른 영주가 권좌에오르면 백성들도 종교를 바꾸거나 다른 나라로 피해가야 했다. 그렇게 종교적이면서도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국유화할 수 있을 만큼 국가의 권세가 등등했고, 독재가 일반화된 시대였다. (1803년의 제국의회에서 결정한 교회재산의 세속화,즉 국유화는 독일의 영주들이 나폴레옹과 타협하기 위해서 일정분의 독일 영토를 프랑스에 넘겨주고 그 손해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것으로 보상받자는 취지였다.)

그런 독재의 시대에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 상공업으로 점차 부상하는 시민계급의 사유재산이었던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굳건히 지켜진 사유지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현상이 뒤늦게 일어났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 기적이활발하던 1960-70년대에 칼스루에 도심의 주택지들이 통합되고, 그 자리에 대형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권력의 힘이 아니라자발성을 띈 돈의 힘으로 일어난 일이다. 절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땅을 지켜낸 것도, 그리고 훗날 그 땅을 포기한것도 결국은 사유재산을 지키거나 불리려는 개개인의 굳센 의지로 귀결된다. 욕심이라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본능, 그리고 패배에 대한두려움으로 이해해야하는 이 의지가 모이면 공권력이나 공익의 호소력보다 더 센 힘을 갖는다.

요즘 독일에선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라인강의 재자연화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따라 점점 강도가 세지는 홍수를방지하기 위해선 상류의 둑을 허물고 범람지를 만들어 물의 위력을 줄이는 것이 어떤 댐공사보다도 경제적이란 계산에 따른 정책이다.여기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옛날에 상류에 둑을 쌓으면서 강 가까이에 새로 형성된 거주지들이다. 일단 사유재산이 된 후에는범람지 조성을 위해서 도로 빼앗기 어렵다. 땅이란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사가 얽힌 추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뮌헨에서도 요즘 이자 강의 재자연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강변에 다시 범람지를 만들어 하류의 홍수를 예방함과 동시에 강의생태계를 보전하고 시민들의 휴양지를 조성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미 완성된 곳에 가보면 대도시의 삶이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지, 어째서 뮌헨이 독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지 실감날 것이다.

flaucher15.jpg

이자 강변의 재자연화 공사가 끝난 구역\


그러나 그렇게 유익한 공사도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변에 주택가가 바싹 들어선 구역에선 둑을 허무는 공사를 벌일 수 없다. 그래서그런 구간의 이자 강은 그냥 보통 여느 대도시에나 흔히 있는, 콘크리트 벽에 갇혀 흐는 거대한 도랑일 뿐이다. 강물의 흐름을되돌릴 수 없듯이, 공공의 토지가 사유로 넘어간 이후에는 국가와 국민이 모두 공감하는 일이라도 되돌릴 수는 없다.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 그린벨트가 도입된 일은 대단히 특별한 사건이다. 먹고 살기 바빴던 개발만능의 시대에 장기적 환경보전의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도특이한 일이거니와,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근세에 사유지를 뭉터기로 묶어버리는 일이 가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특별한일이다. 식민지 시대에 이어 전쟁과 난리를 연달아 겪으면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꼴을 몇 번이나 경험한 국민들이라서 그런 독재적인 정책이 통했는지는 몰라도, 후손으로선 그린벨트의 수혜자임을 인정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암만 매력적인 대도시라도 사람이 숨을 쉴 수 없고, 쉴 곳이 없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국토 중간중간에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녹지를 끼워넣음으로써 인접한 도시들이 자라서 맞붙어버리는 현상을 막는 것은 국가의 대사에 속한다. 독일의 토지이용계획을 다루는 관청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이다. 환경을 뒷전으로 하고 개발일색으로달려온 우리의 대도시들이 아직도 사람이 살 만한 이유는 그나마 그린벨트가 있어서 공기를 정화하고 쉼터를 제공한 덕분이다. 그린벨트가 사이에 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많은 도시들이 맞붙어버렸을 것이고, 공기를 정화하는 필터가 사라진 거대한 수도권의 대기오염도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엄청난 독재의 댓가를 치르고 남은 산물이라고 해도, 아니 엄청난 독재의 댓가를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그린벨트의 진가를 공정하게 평가하는것이 올바른 국민이 할 일이다. 그린벨트를 한 뼘이라도 훼손한 역대의 대통령들에게 국민은 그 댓가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물어야 한다. 그들이 그린벨트를 희생한 댓가로 진정으로 민족중흥의 업적을 쌓았는지, 아니면 단지 수치로만 나타났다 금방 묻혀지는반짝경제에 그쳤는지 조목조목 따져봐야 한다.

멀쩡하다가도 서울에만 왔다하면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프다는 사람들이 늘고, 아토피와 천식을 앓는 유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현실에서 녹지대를 더 많이 확보하지는 못할 망정 되려 축소하는 정권에겐, 국민의 건강권을 담보로 과연 어떤 경제발전을 이루었는지를 묻는 국민의 기대치가클 수밖에 없고, 국민의 평가가 냉정할 수밖에 없다.

그린벨트에 나무가 없어서 제 구실을 못 한다면 나무를 심어서 제 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에서 할 일이다. 의사가 환부를 고칠 생각은 않고 잘라낼 궁리만 한다면 장기매매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훗날 서울에서 올림픽을 유치하고자 할 때, 암만 근사한 경기장을 지어놓은들 공기가 나쁘면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할 것이다. ‘‘우리 도시에선 올림픽 선수들이 마스크를 쓰고 뛸 필요가 없다'‘고 선전할 경쟁국의 도시들은 일찌기부터 도심의금싸라기땅에 공원을 조성하고 악착같이 지켜옴으로써 대기오염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한 도시들이다. 그때 가서는 우리나라가 암만돈이 많아도 도시의 허파인 그린벨트를 다시 만들 수 없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고수하는 한 대단히 어려운일이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잠시 와서 뛰는 것도 꺼릴 만큼 심각한 오염 속에서 그간 그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건강을 위해 조깅을 하며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날,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올림픽을 유치하기는커녕, 수많은 도시민들이 그간 습관처럼 견뎌온 대기오염이 선진국 대도시의 필연적인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실책이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자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시의 허파인 그린벨트를 야금야금 좀먹게 방치한 역대 대통령들은 두고두고 원망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때 가서는 암만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그린벨트는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도시에서의 삶의 질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하향선을 그을 뿐이다.



이 글은 2008.9.23일자 인터넷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링크: 인터넷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