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두 양주가 송구공만한 멜론 반 토막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잤더니 잠이 일찍 깼다. 6시부터 차례로 화장실에 다녀온 후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는데 갑자기 무슨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아니고 연속해서 몇 번이나 절박하게 났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감도 못잡고 있는데 남편이 벌떡 일어나서 딸아이 방을 거쳐서 목욕탕으로 냅다 달려갔다. 나도 허둥지둥 뒤따랐다. 굳게 닫힌목욕탕 문 앞에서 남편은 나보고 들어가 보라고 했다. 나같으면 문짝을 차고 들어갔겠구만 이 상황에서도 내외를 한다.

딸은 젖은 몸으로 말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에이, 거미잖아? 얘는 어렸을 때는 거미를 손에 올려놓고 구경하더니 언제부터거미를 무서워하는 걸까? 나는 우산으로 거미를 유인해서 창문을 열고 밖에다 버리는 시늉을 했다. 딸은 나한테 엄마 아빠를 깨워서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다. 괜찮다고 하며 돌아서는 나의 망막에 하얗게 팩을 한 딸아이 얼굴이 남아서 나는 몰래 실실웃었다. 등교 준비하는 학생이 아침부터 웬 회칠이여? 저 정성을 공부에 바쳤으면 장원급제 했겠구만.

나중에 보니까 아까 그 거미가 복도 구석에서 옹송옹송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거미한테 “잘 좀 숨으셔!” 하고 그냥 지나갔다. 거미는 이로운 곤충이다.내가 싫어하는 파리, 모기, 그리고 주부가 별로 부지런하지 못하다는 증거를 노상 손가락질하며 고자질하는 하루살이들을 잡아주시니얼마나 고마운가? 나는 손님이 오기 전에만 집안의 거미줄을 걷어낸다. 이때 행여 거미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침이면 남편은 커피 당번이고 나는 빵 당번이다. 빵을 사러 나가는데 날씨가 벌써 쌀쌀했다. 날이 훤한데도 하늘에는 약간 찌그러진보름달이 말갛게 떠 있었다. 쥐색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괜히 반가워하길래 나도 다정하게 인사했다. 내가 들어도 상냥한 목소리.고양이도 내 목소리가 좋은지 졸졸 따라왔다.

빵집 앞에는 쓰레기차가 서 있고 빵집에선 오렌지색 옷차림의 청소부 아저씨들이 커피를 마시며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가슴이 따스해졌다. 아이, 이 빵집에서 일하고 싶어라.

아침 식탁에서 나는 반으로 자른 크로와쌍을 커피에 찍어 먹으며 딸에게 말했다.
“너 거미한테 실례한 거 아냐? 누가 너보고 그렇게 소리 지르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
“어우, 남 샤워하는데 빤히 쳐다보고 있는 놈이 실례한 거지. 쳐다만 봤으면 내가 말을 안 해. 꺼지라고 그랬더니 이게 슬슬 내 쪽으로 오더란 말이지. 으아아. “
옷을 벗고 있었으니 혹시 몸에라도 닿을까봐(엉덩이라도 꼬집힐까봐) 더 징그러웠나보다.

아들은 오늘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러간다. 물리과는 인원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다 신청만하면 받아준다. 그래도 학생들이 별로 많이 지원하지 않는다. 들어가 봤자 못 따라가면 마구 걸러내기 때문이다. 독일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지만, 요즘 들어선 대학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각 대학을 평가해서 점수를 공개한다. 그 평가에서 뮌헨 대학은 독일 3대 엘리트 대학의 영예를 안았는데 여기에는 근간에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과 교수의 공로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유명한 과에서 그냥 받아준다는데도 학생들이 특별히 더 몰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아들은 복도에놓인 빨래대 위에 서류들을 쭉 늘어놓고 검토하더니 뭘 빼먹었다고 옛날 고등학교에 들러서 복사해야 한단다. ‘‘에그, 진작 좀준비해두지.‘‘라는 말이 목까지 나오는 걸 꼴깍 삼켰다. 도움 안 되는 소리는 안 하는 게 이익이고 예절이다.

아이들이 식탁에서 먼저 일어난 후에 내가 남편에게 이쁘게 말했다.
“아침에 추워졌는데 우리 아침 6시에서 6시 반까지, 딱 반 시간만 보일러 틀을까? 애들 샤워하고 나갈 준비하는데 춥잖아?"
아침 실내온도가 섭씨 19도 대로 내려갔다.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자기가 지난 20년 동안 입이 닳도록 말해온 에너지파동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요즘 남편은 기세가 등등하다. 내가 그렇게 상냥하게 말했건만, 사람이 어째 아까 그 고양이보다 못하담?

나는 남편과 근래에 아이들 학교에서 한 학생이 시험에 떨어진 사건에 대해서 잠시 대화했다. 학교 측에서 부당하게 했다는 증거를내가 잡아냈다. 나는 별명이 탐정이다. 뭔가 논리적으로 어긋난 곳이 있으면 잘 집어낸다. 벽돌 하나가 삐딱하게 놓인 모양새를논리적으로 분석해서 건물 전체를 유추하는 훈련에서 나온 습관이다. 부당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부모들이 연대해서 항거하는 것이옳은 일이겠으나, 그렇게 하면 그 학생에게 해로울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고민했다. 나중에 계속해서고민하기로 하고 일어났다.

아들이 학교에 간다며 난데없이 흙 묻고 투박한 등산화를 신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샌들을 신더니? 구두가 떨어졌냐고 물었더니그건 아니고 그냥 등산화와 친해지려고 그러는 거란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자기 인생인데 자기가오죽 알아서 잘 챙길까?

딸은 허둥지둥 하더니 늦었는지 인사도 안 하고 사라져버렸다. 남편도 나가고 조용한 집안. 오늘은 밀린 집안 일을 먼저 해치운 후에내 일을 하기로 작심했다. 잠깐 이메일만 체크하려고 컴퓨터를 켠 김에 신문들을 제목만 주르르 훑어봤다. 기운이 대번에 쑥 빠졌다.

기분 좀 좋아지라고 친구 블로그를 클릭했다. 앗! 거미 사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얼른 닫았다. 거미 얘기 내가 먼저 쓸텨!

나는 신도 믿지 않고 미신도 믿지 않는데, 이 친구와 나 사이에는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글을자주 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니까 친구가 되었겠지만, 어떻게 된 것이 애들도 비슷하고(얘네들은 하는 짓 뿐만 아니라생긴 것도 비슷하다) 남편도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글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떻게 시기까지 맞아떨어지는지?글 하나 써놓고 저쪽 블로그에 갔다가 놀라서 문장을 다르게 고친 일도 있고, 상대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양해를 구한 후에 올리는 글도 있다.

아이, 궁금해. 친구가 쓴 거미 얘기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그것 먼저 읽었다가는 내 거미 얘기를 못 쓸 것 같아서 집안 일도 다 집어치우고 디립다 자판을 두드린다. 다 썼나? 친구 글을 빨리 읽어보고 싶어서 그냥 끝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