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16개 주 중에서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만큼 독일의 현대사를 표본적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주가 또있을까?

독일에서 2차대전 이후의 정치, 경제, 사회상은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변천해왔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동독에 갇혀버린 베를린을 대신해서 서독의 수도가 된 “본”도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에 위치해 있고, 독일 사람들에겐금시초문이지만 한국에는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알려진 독일의 경제부흥도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공업지역을 중심으로일어났다.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사양길을 걸으면서 루르 공업지역은 쇠락하기 시작했지만, 불현듯 이를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무장하여 부활함으로써 독일인의 실용성과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독일적인 것, 그리고 오늘을 지배하는 독일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를 방문하기를권한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는 뭐니뭐니 해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쾰른 대성당이다. 짓는 데만600년 넘어 걸린 건물답게 독일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고딕식 건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인 로마시대부터존재했던 고도 쾰른은 다문화를 수용하고 즐기는 개방적 사고와 현대성이 어우러진 역동의 도시로서 독일 젊은이들의 은밀한 사랑을받고 있다. 독일인답지 않게 서글서글한 쾰른 주민들의 성격은 혼자서 맥주집을 찾는 이방인의 마음을 덜 외롭게 해준다. 쾰른에서는쾰쉬(Kölsch) 맥주를 마신다. 색깔이 연하고 맑은 맥주인데 0.2 리터짜리 길고 가는 잔에 마시는 게 원칙이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에서 쾰른 대성당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뜻밖에도 루르 지방의 조그만 공업도시뒤스부르그(Duisburg)에 있는 옛 공장부지에 조성된 환경공원이다. 오랜 역사를 아름다운 예술로 보여주는 쾰른 대성당과는 달리 이곳에선20세기의 산업 역군이 작업복 단추에 민들레꽃을 꽂고 서 있는 것을 보는 느낌이 든다. 세계적인 철강기업 튀쎈(Thyssen)이전성기를 누리다가 이사 나간 후에 폐기물 취급을 받던 이 공장부지가 21세기를 1년 앞둔 시점에 난데 없이 환경공원이란이름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태어났으니, 영문을 모르는 사람에겐 생뚱맞을지도 모른다.

무용지물이 된 옛 공장 건물들이 철거되는 대신 기발한 아이디어의 새로운 문화시설로 개조되었다. 70m 높이의 용광로를 개방해서만든 전망대에 올라가면 온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대형 가스탱크는 다이빙 시설로 탈바꿈했다. 거대한 굴뚝 모양으로삐죽삐죽 솟아 있는 광석 저장소의 외벽을 이용해서 알프스 동호회에서는 인공암벽타기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극장, 야외극장, 고급 컨벤션센터로 개조된 옛 공장 건물에선 크고 작은 행사가 끊임 없이 열린다.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유명한 예술가가설치한 조명장치로 옛 공장 건물들은 오색찬란한 빛의 향연을 벌인다. 마치 밤하늘에 둥둥 떠가는 우주선 같다. 그 사이를 가이드를따라 횃불을 들고 누비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동화같은 밤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모나코 왕국보다 너른 230헥타르의 대지는 공원으로 개방되어, 관광객 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에게도 휴식처가 되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보여주고 태워주려는 젊은 부모들이 곳곳에 눈에 띄인다.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빌려서 돌아다니며 자연을만끽하고 새소리를 듣노라면 이곳에서 예전에는 요란한 소리로 기계가 돌아가고 굴뚝에서 매연을 뿜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울창하게 우거진 야생화와 거기에 서식하는 야생조를 보호하기 위하여 방문객의 입장을 통제하는 자연보호구역마저 있다. 농업체험관으로쓰이는 농가에선 닭,돼지, 염소, 소, 말 등의 수많은 가축들이 어린이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시절 인연이 변하니 굴뚝에서 매연을 내뿜던 환경 파괴의 주범이 환경 보호의 상징으로 변하고, 땀 흘려 일하던 노동의 장이스포츠, 휴식, 문화의 장으로 변했다. 예전에 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런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착찹했다. 피땀 어린 노동자의 일자리가 흥청이는 사교장으로 변하는 것이 과연 인간에 대한 예의인지 의문을 던졌다. 노동을 무엇보다도 신성하게여기는, 노동자의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토론과 숙고의 기간이따랐다. 결국 그들은 시대의 변화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의식을 변화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선 루르지방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루르지방은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업지역이다 보니 노동자의권익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었고, 그에 따르는 노동자의 신분 상승은 오늘날 독일이 첨단 산업국가로 거듭나는 일에원동력이 되었다.

80년대 초반에 TV생방송 중에 젊은 청년이 장관의 얼굴에 포도주를 뿌린 일이 있었다. 그 장관은 당황하지 않고 즉각 자기도포도주를 청년의 얼굴에 뿌리면서 “나는 노동자의 자식이다.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당시노동 계급의 자부심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뒤스부르그 환경 공원이 있기까지 이렇듯 외형적, 정신적으로 많은 종류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파괴하고 새로 만드는 변화가아니라 재활용을 통한용도변경이라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가장 친환경적이다. 독일인다운 철저함과 실용성이 돋보인다. 매끈한 신축 건물에 비해서재활용 건축은 확실히 투박하지만 색다른 매력이 있다. 재활용 건축은 새로운 미학의 장을 열었다.

뒤스부르그에는 비슷한 성격의 재활용 건축이 또 하나 있다. 공업문화재로 지정된 뒤스부르그 내항이다. 산업혁명의 시기에 루르공업지역 교통망의 꽃이었던 뒤스부르그 내항은 1960년대부터 내륙수로교통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점차 무용지물이 되었다. 20년동안 쓸쓸하게 방치되었던 항만 시설이 미술관, 박물관 등의 문화 시설로 개조되고 시민을 위한 휴식처, 물놀이 공원으로 거듭난것은 10여년 전의 일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퀴퍼스뮐레 현대 미술관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헤르쪽과 드메롱건축가팀은 고풍스러운 제분소 건물을 개조하고 증축하여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는데, 과거와 현재를 부드럽게 연결하면서도 대비시키는건축성이 뛰어나다. 특히 밤에 보면 환상적이다. 하늘로 물로 뻗어가며 빛나는 조명에 의해 점지되는 건축물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마음이 부자가 되는 느낌이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에는 쾰른 대성당 말고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건축물이 세 개 더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것이 에쎈의 쫄페어라인 탄광(Zeche Zollverein)이다. 1986년에 문을 닫은 쫄페어라인 탄광은 독일에서 가장아름답고 가장 효율성이 높은, 최고의 탄광으로 손꼽힌다. 루르지방의 에펠탑이라고 불리는 탄광 제반시설은 1930년대에 서양 현대건축의 모태가 되는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건축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기능을 중시하고 단정한 형태의 새로운 건축 미학을추종하는 바우하우스 양식은 당시에 대단히 진보적으로 통했다. 그래서 나치 시대에는 바우하우스 양식을 따르는 건축가들이반독일적이고 비정상적인 예술가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쫄페어라인의 건물들은 세계 유수의 건축가의 손으로 센스 있게 개조되고 보완되었다. 특히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한하얀 곽같은 학교 건물은 주변의 바우하우스 건물과 잘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론 독특한 개성을 발한다. 쫄페어라인 탄광은 이제 디자인박물관, 화랑, 디자인 학교, 편의 시설 등이 포함된,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디자인 센터로 변모했다. 애초에 공업용 건물로지어진 터프한 건물이 현대의 섬세하고 매끄러운 디자인의 무대가 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환경에 대한 의식이 변화함에따라 우리 인간의 미적 감각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순전히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이곳에 들른 방문객이라도 하루밤 쯤은 예전 광부들의 숙소에서 머물며 전직 광부의 안내로갱도에 들어가 노동의 역사를 엿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온 광부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찌기독일인들이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직종이라 하여 기피한 이 중노동을 우리나라의 광부들이 대신했던 역사가 있다.

건물과 제반시설이 아름답기로는 도르트문트의 쫄런 탄광(Zeche Zollern)도 유명하다. 쫄페어라인 탄광과 같은 시기에건축되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른 점이 흥미롭다. 진보적이고 기능적인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건축된 쫄페어라인 탄광과는 달리 쫄런탄광은 전통적인 역사주의 양식에 따라 복고풍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벽돌과 섬세한 창틀이 조화를 이루는기계관(Maschinenhalle)은 독일 최초의 공장건축 문화재이다. 이 건물 안에 남아 있는 기계들은 원형의 상태로 잘보존되어 후손들에게 당시 최고의 기술을 보여준다. 이렇게 발달한 기술도 시절이 요청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구나. 광부들을 위해서지은 주택 단지도 깜찍하니 예쁘다. 쫄런 탄광은 공업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루르지방의 영광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 외에도 시민을위한 각종 이벤트 행사장으로도 애용된다.

루르지방의 공업시설들이 환경 문화 시설로 탈바꿈하는 사례가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정부에서적극적인 정책을 편 결과다. 산업구조의 변화의 회오리바람 속에 유럽 최고의 공업지역이 통째로 흉가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노력의 일환이다. 10년 기간의 국제 건축박람회를 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같은 취지의지역개발 계획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뒤스부르그와 에쎈 외에도 루르 지방의 총 17개의 도시가 이 정책에 포함되어 공업시설을허물지 않고 도리어 활용함으로써 친환경 생태도시, 그리고 문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버하우젠의가소메터(Gasometer Oberhausen) 처럼 가스저장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독일에서 가장 높은 전시실도 한번 볼 만하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인해 루르 지방은 2010년도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때 에쎈의 쫄페어라인 탄광이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문화수도로서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관장할 예정이다. 루르지방은 자칫 폐허가 될 뻔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가장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고 이는 성공일로에 있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은 유럽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산업이 발달하면 경제력만 커지는 게아니다. 즐길 사람이 많으니 문화시설을 지어도 수지가 맞는다. 그래서 그런지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은 문화시설이 유럽에서 가장밀집된 지역이다. 쾰른만 해도 걸어서 다니는 반경 안에 세계적인 수준의 수장품을 자랑하는 미술관, 박물관이 다닥다닥 붙어있다.그런데 쾰른같은 대도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헤어포트(Herford)라는 작은 소도시에도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개리가지은 아름다운 박물관(Marta) 건물이 나타나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객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은 산이 많지 않고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남독의 알프스를 보고 자란 사람들은 북독의 평야에 서면 시야를 다차지하는 크고 넓은 하늘에 압도되기도 한다. 구릉에 점점이 찍힌 소떼들이 평화스럽다. 먼 도보 여행을 계획하기에 안성마춤인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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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지방 토호의 성이며 농부들의 일상을 박제해 놓은 민속박물관들이 산재해 있어 걸음이 결코 지루하지는 않을것이다. 아름다운 성이 많은 뮌스터란드(Münsterland) 지방을 자전거로 섭렵하는 것도 즐겁다. 색깔이 첩첩이 겹친 평야를지나고 울창한 숲을 지나 갑자기 눈 앞을 가로막는 성이 나오면 깜짝 놀란다.

이때 마주치는 독일인들이 쾰른 주민들에 비해 사뭇 무뚝뚝하더라 당황하지 마시기 바란다. 같은 주라도 서부의 라인강 주변 주민들은성격이 쾌활하기로 독일에서도 유명하고(라인강변 지역에서는 매년 돌아오는 카니발 행사도 엄청나게 격렬하게 즐긴다), 동부의 북독 토박이들은 무뚝뚝하기로 독일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북독사람들은 대부분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서 금방 온 관광객들은 독일 음식이 짜다고들 한다.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선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반대로 독일에살고 있는 사람이 한국에 놀러 가면 염분 섭취가 많아져서 눈이 통통 붓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마도 밖에서 사먹는 음식이 유난히짤지도 모른다. 독일의 레스토랑에서 내오는 음식이 대부분 짠 이유가 음료수에 있지 않나 한다. 독일에선 음식점에서 물을서비스하지 않고 꼭 사먹어야 하는데 음료수 가격이 음식값에 비해서 꽤나 비싼 편이다. 음료수 두 잔을 마시면 음식 값 가까이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음료수를 많이 팔기 위해서 음식에 소금을 많이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독일의 다른 고장으로 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음식은 감자다. 독일의 다른 지방에비해서 감자를 주식으로 특히 많이 먹는다. 또 하나는 아침에 먹는 흰 주먹빵이다. 독일 어디 가나 다 있는 건데도 북독의주먹빵인 브뢰첸이 특히 맛있는 것 같다. 브뢰첸은 껍질이 유난히 바삭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하얀 살결에 탄력이 있고 약간짭잘해야 제맛이다.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을 여행하는 관광객으로서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불에 구운 하얀 소시지다. 그것도 꼭역전에서, 포장마차같이 생긴 키오스크에서 사먹어야 한다. 갈색으로 잘 구워진 소시지에 맵지 않은 노란 겨자를 듬뿍 찍어서 깨무는첫 맛이 일품이다. 아작하고 터지면서 고소한 고기국물이 한 입 가득히 고인다. 약간 탄 냄새가 구강을 통해 콧속으로 스민다.그리고는 브뢰첸을 손으로 뜯어서 겨자에 찍어서 먹으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아, 이제야 드디어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에도착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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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빌레펠드 역전의 하얀 소시지를 파는 키오스크

정직한 노동으로 패전독일을 일으켜 세웠던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은 역시 그들다운 정직한 실용성으로 변화에 대처하고 있다. 시대의요구에 의해 공업에서 환경으로 배를 갈아타는 과정에서도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허영이나 경박함이 없다. 신중하고 철저하니 좀늦게 도착하기는 해도, 그래서 무슨 일에나 일등으로 깃발을 꽂는 일은 드물어도, 한번 방향을 잡으면 확실하게 간다. 독일의정신이자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의 실상이 아닐까 한다.



(아시아나 기내지에 송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