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동네 댄스학원에서 5년째 사교춤(스포츠 댄스)을 배우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나이가 지긋한 편인 우리 커플은 춤추면서 양양거리는 걸로 유명하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남녀가 허벅지를 딱 붙이고 상체를 백합꽃처럼 벌려서 추는 유럽식 탱고에서 새로운 동작을 배웠다. 내가낭창낭창한 허리를 한껏 뒤로 제쳐 요염한 동작을 취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자꾸만 내 등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멋진포즈는커녕 내가 앞으로 고꾸라질 판이었다. 나는 빽하니 짜증을 냈다.

“아유, 여기 좀 놔. 왜 사람을 잡아당기고 그래?”
“허리를 그렇게 뒤로 제치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왜 아니야? 당신이 여자 포즈를 어떻게 알아?”
“그걸 내가 왜 몰라?”

이렇게 싸우다가 남편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에게 일렀다.
“얘가 허리를 이렇게(시범을 보임) 뒤로 제치는데 이게 맞는 건가요?”
선생님 뿐 아니라 우리 코스의 예닐곱 커플의 눈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내가 물었다.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하든지 얘가 참견할 박자인가요?”

순간 와르르 웃음이 터지며 사람들이 전부 내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보였다. 그날 집에 가면서 남편이 툴툴거렸다.

“불공평해. 사람들은 맨날 당신 편만 들어. “
“뭐가 불공평해? 당신이 레이디에게 불손한 댄스 파트너니까 그렇지.”
“뭐가 불손해? 난 그러다가 당신이 허리 삘까봐 그런 건데. 사람들이 당신 편만 드는 건 순전히 밥의 위력이라구.”

순전히 밥의 위력일 리는 없지만 우리 댄스 코스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내가 요리하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사실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우리가 속한 댄스 코스의 전원을 집으로 초대해서 돼지갈비, 야채튀김, 잡채, 닭찜을 대접했다.딸려 온 어린애들까지 합쳐서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좁은 집에 의자가 모자라서 겹쳐 앉고 포개 앉고 바닥에까지 앉아서 먹었지만모두 배를 두드리며 좋아하고 황송해했다.

공사가 분명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차가운 편인 독일인들에게 이런 단체성 초대는 드문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사람들을집으로 초대하는 파티의 여왕이냐 하면 그런 건 또 아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도 있고 살림을 그다지 잘하는 사람이 아니어서,아이들 손님 이외에는 웬만해선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같은 댄스 코스에 다닌다 뿐이지 나이대도 다르고직업군도 각양각색인,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 그들을 가끔씩 초대하는 이유를 궁금해하길래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야. 암만 친한 친구라도 매주 만나지는 못하거든. 그렇게 자주 보는사람들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엔 인생이 좀 아깝다고 생각해. 가끔 편안하게 앉아서 대화하는 기회를 가지면 우리가 매주만나는 시간이 좀 더 즐겁지 않겠어?”

그날 초대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미리 부탁한 대로 아무런 선물도 사오지 않았다. 이전에 초대했을 때 사람들이 돈을 각출해서 고급선물을 사왔는데, 정성은 고맙지만 수고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돈은 아니지만 그 돈이 좀 아까웠다. 그래서 선물 대신에 그돈으로 좋은 일을 하기로 했다. 복도에 모금함을 하나 갖다 놓고, 손님들이 각자 지갑에 동전 남은 것을 털어놓고 가면 우리가 그금액만큼 더 얹어서 핸디캡 인터네셔널(국제장애기구)에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우리는 이 기구에 돈을 보내기로 벌써 몇 달 전에 마음만 먹고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분쟁지역의 지뢰를 제거하고전쟁 피해자들에게 의족을 제공하는 일을 우리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긴 했지만, 당장 내게급한 일이 아니다보니 미루다가 흐지부지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남의 돈을 맡아놓으면 그럴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우리는그런 꾀를 낸 것이다. 또한 우리 시부모님은 금혼식이나 장례식을 치룰 때, 선물이나 화환을 일절 사양하는 대신에 초대장에 당신이지원하시는 자선단체의 계좌번호를 알려주시곤 했는데, 나는 그 가풍을 계승하고 싶었다.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손님이 떠난 후에 우리는 모금함을 흔들어봤다. 모두 만족하게 잘 먹고 잘 놀다 갔으니 그 만큼묵직하리란 기대와는 달리 가뿐하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재밌게 노느라고 다들 잊어버리고 그냥 갔나 싶어서 초조하게열어봤더니 웬 걸?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대개 기부를 잘 하는 편이지만 형편에 맞추어 큰돈은 쓰지 않는 버릇이있는데, 놀랍게도 100유로나 되었다. 남편과 나는 좋아서 환호했다. 핸디캡 인터네셔널에 한 50유로 정도 기부할 생각이었던우리는 “모금액만큼”이라는 약속을 지켜 도합 200유로를 송금하며 마음이 아주 뿌듯했다.

다음번에 춤추러 갔을 때 모두 우리에게 몰려와서 그날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며 감사했다. 나는 나대로 100유로나 모인것에 감사하며 그 돈을 무사히 송금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 고지식한 건 알아줘야 한다. 그날 너무 재밌게 노느라고 돈집어넣는 것을 깜빡 잊었노라고 고백하며 뒤늦게 봉투를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걸 본 다른 사람이 자기도 돈 넣는 걸잊어버렸는데 지금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미안해했다. 나는 그만하면 충분하니 다음번에 하라고 위로했다. 이때 남편이 끼어들었다. 송금 심부름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돈만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긍, 주책바가지. 무슨 농담을그렇게 진담처럼 하냐? 그런데 정말로 다음 주에 봉투가 두 개나 더 들어왔다.

집에 와서 세어보니 모두 45 유로였다. 남편이 내게 물었다.
“이것도 두 배로 만들어서 90유로 송금할 거야?”
“글쎄, 자기 맘대로 해.”
느긋한 마음에 이렇게 대답하고 생각해보니 나의 순간적인 결정에 따라 45유로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돈으로 가난한 대륙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한 아이의 인생이 결정되는 일일 수도 있다.

90유로 송금하자고 해야지. 아니, 화끈하게 100유로를 만들어 보낼까? 아니야, 그러다간 고지식한 독일제 남편에게서 원칙 없이헤픈 여자로 찍힐 염려가 있어. 10유로 때문에 남편의 신뢰를 잃어 그가 앞으로 구두쇠 작전을 펴게 되면 더 손해야.

나는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했다. 하루 저녁에 290유로를 벌어들인 나, 얼마나 장한가? 앞으로도 나만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또 그렇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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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모금함


제 계산이 좀 이상하다고 웃으시는 분들, 여기 좀 보세요. 그래요. 제가 사람들 초대하느라고 쓴 돈이 145유로는 좋이 될거에요. 어른들끼리 편하게 놀 수 있도록 애기들 좀 봐달라고 딸아이 고용한 돈까지 합치면 적어도 그만큼은 될 거라구요. 그냥 우리주머니에서 290유로가 나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시겠지요? 차라리 처음부터 그 돈을 기부했으면 하루종일 요리도 안 했어도 되니 더 효율적이었을 거라고 하시겠지요?

어휴, 그런 소리 마세요. 둘이서 크로와쌍 하나를 나눠 먹는 구두쇠 부부가 무슨 돈이 있다고 290유로나 남을 줍니까? 저도 살림하는 여잔데 무슨 배짱으로 290유로를 제 주머니에서 내주냐구요?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저 살기에 바빠서 꼭 필요한 데에만 돈을 쓰는 사람이랍니다. 예를 들어 댄스 코스 친구들을 가끔씩 그렇게 초대하면 인생이 즐거워지기 때문에 그건 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지요.

그 친구들이 제가 해준 밥이 레스토랑 음식처럼 맛있다고 그렇게 큰돈을 주고 갔는데 제가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덕분에 자기가매일같이 맛있는 레스토랑 음식을 먹는 행운아라는 사실을 자각한 남편도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설령 음식이 맛이 없었더라도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는 표시를 아낌없이 보여준 친구들이 어찌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쁨을 저희가 모금액에 얹어서 보탠 145유로에비교하겠습니까? 어이구, 손해는커녕 저희가 크게 횡재한 셈이지요.

덤으로 또 하나 횡재를 한 면이 있는데 이것도 말씀드릴까요? 사실인즉슨 이렇습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앞으로 우리 인생이 어찌될지좀 심란합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도 해외 수주가 딱 끊겼다고 연장근무를 금하고 계약직을 해고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제가 프리랜서로 하는 일도 경기를 예민하게 타는 일이지요. 이럴 때 초점을 내 인생에 맞추면 미리부터 홧병이 날라 그럽니다. 행여 패자의 그룹에 속할까 겁나고, 겨우 요 정도밖에 이루지못한 내 능력이 부끄럽고, 죄 안 짓고 살아온 나를 패자로 만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원망스럽습니다.

이럴 때 시야를 나에게서 돌려 전체를 바라보면 또다른 진실이 보입니다. 아하! 이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구나.그래도 내가 이 시스템의 수혜자였구나. 내가 이 시스템 안에서 승패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동안 그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들도있구나.

이렇게 관심을 전체로 돌리면 나 하나 어떻게 될까봐 엄살을 부릴 염치가 사라집니다. 전체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탤 열정이솟습니다. 무기 수출국인 독일에서 제가 290유로나 빼돌려 피해자 어린이들의 의족을 마련하는 사업에 힘을 보탰으니 그것도 작은성공 아니겠습니까? 제가 무작위의 원칙에 의해 이 시스템의 패자로 분류되거나 말거나, 전체를 위해서 당장 제 힘으로도 할 수있는 일이 굉장히 많다는 걸 이번에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참 기쁘네요. 이 기쁨이 바로 제 존재의 존엄성 아니겠습니까?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않는 저의 존엄성을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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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한 후에 핸디캡 인터내셔널에서 손으로 쓴 감사 카드를 받았답니다. 우리 딸이 옛날에 거기서 실습을 하고 자원봉사를 한 적이있는데 기부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보고 그걸 기억하다니(딸이랑 저는 성도 달라요),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링크:
Handicap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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