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시간에 대화를 하는 중에 딸이 갑자기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높이더니 한국말로 말했다.
“신동 끄셔어~”


“엥?"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참견하지 말란 소리라고 가르쳐준다. 아아, 신경 끄시라고? 아니, 얘가 그런 고차원적인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을까나?

딸은 히히 웃더니 요즘 한국 드라마에 빠져있다고 실토했다. 내 첫 반응은 “어머, 너 간도 크다"였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폐인이 된다고 그래서 나는 겁이 나서 절대로 안 본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자기는 벌써 드라마 폐인이 되었단다. 밤새도록 드라마보다가 이튿날 학교에서 졸았다나? 이긍, 잘났다.

“엄마, 근데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남자들은 다 마쵸더라? 버릇이 없고 여자한테 무례한 짓을 예사로 해."
“옛날 남자나 그렇겠지, 설마 요즘 젊은 남자들도 그럴라구?"
“에이, 설마 내가 늙은 남자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겠어? 그리고 드라마에서 한국 사람들은 때릴 일도 아닌데 툭하면 손이 올라가. 한국에선 남을 때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것 같애."
“어머, 그러니?”

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 근데 내가 헛짚은 부분도 있었어.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 친구랑 다툰 후에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가여자 친구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국수를 먹는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건 내 오해였던 것 같애.한국에선 소리 내면서 먹는 거 실례가 아니잖아."
우리는 눈을 맞추고 깔깔 웃었다. 나도 독일 극장에서 ‘‘화양연화'‘를 봤을 때, 남자 배우가 음식 먹는 소리가 요란한 것에 정신이 팔려서 감정이 세심하게 교차하던 미묘한 분위기를 놓쳤던 기억이 났다.

거의 독일사람으로 자라는 딸의 눈에 비치는, 드라마 속 한국인의 상이 어떤지 궁금해서 나는 그날 딸아이 앞에 찰싹 붙어서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대화를 유도했다. 딸의 설명에 의하면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여성들은 대부분 남에 의해 살아지는, 순종적인캐릭터라는 것이다. 독일의 보통 여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은 한국 드라마에서 특별히 개성 있는 여성으로 취급된다고 했다.또한 남성도 남성대로 다 비슷비슷한 것이, 한국에는 남성상에 대한 전형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다. 독일을 비롯한 서양의드라마도 어떤 전형을 보여주긴 하지만 한국 드라마에선 개성의 다양성이 적은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극중에서 좋은 사람과 나쁜사람의 구별이 뚜렷하고,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좋은 성격과 나쁜 성격의 그림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하고 질문을 던졌다.

내가 찰떡처럼 붙어 앉아서 자기 입만 바라보며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을 보고 딸은 내가 필시 글을 쓰려고 그러나보다 싶은지 신중하게한마디 덧붙였다. 자기가 보는 한국 드라마는 청소년 취향이어서 예술성이나 완성도가 낮은 수준일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자기 말만믿고 일반화하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했다. 어느 나라 드라마건 티비 드라마를 전혀 안 보는 나로서는 어차피 직접 판단할 여지가없으니 딸의 말을 고대로 옮기는 수밖에…

* * *

몇 달 후인 이번 여름에 우리는 한국에 갔다. 딸은 신촌의 기숙사에 기거하며 한국어학당에서 3주일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말도못하는 아이를 낯선 곳에 혼자 떼어 놓은 것이 불안해서 내가 가끔 전화를 하면 딸은 늘 지금 뭐 하는 중이라 전화 받기 곤란하다며 금방 끊곤 했다.그래서 나도 전화를 삼가다 며칠 후에 만났더니 딸은 한국이 별천지라고 좋아했다. ‘‘응, 놀기 좋은 곳이란 뜻이겠지.’’ 특히'‘헝대’’ 가 좋다고 했다. ‘‘응, 홍대 근처가 젤 불량스럽단 뜻이겠지. 공부는 뒷전이겠구만. 아이고, 월사금 아까버라.’’ 그런데자기가 요즘 공부를 엄청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숙제도 다 해가고 복습이란 것까지 했단다. ‘‘오오, 그랬어?독일에선 여태까지 숙제도 안 했다구? 떼끼놈!’’

그런데 자기 옆에 앉은 일본 아이(일본에서 온 교포라는 뜻) 때문에 김이 샜다고 했다. 그 아이 공책에 자기가 모르는 단어가있길래 이거 뭐냐고 물었더니 선행 학습이라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나한테 대고 펄펄 뛰었다.
“엄마, 세상에 미리 공부하는 학생이어딨어? 혼자 다 할 수 있으면 선생님이 왜 필요하며 학교는 뭐하러 다녀? 그거 부도덕한 처사 아니야?"
난 고소하다 싶어서시침을 뗐다.
“한국에선 원래 그렇게 공부하는 거야. 여기선 숙제랑 복습만 하는 학생이 부도덕한 사람이라구."
“애해해해”

한국에 오면 부모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딸은 이번에 처음으로 혼자 돌아다니며 자신의 고유한 시각을 가지고 한국을경험했다. 딸은 한국에 홀딱 반했다. 한국 물건은 가격에 비해서 질이 좋고 디자인이 아름다우며 음식도 맛있고 서비스가 좋다는것이다. 딸의 눈에 비치는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따스하고 사려 깊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 딸에게 평균 이상으로 잘대해줬을 거라고 짐작한다. 젊음, 미모, 백인의 삼박자가 갖춰지면 우리나라에선 대접 받고 사는 것 아닐까? 딸에게 나의 생각을말했더니 좀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만난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한테 잘해줬는데행여 다른 경우엔 다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미워하란 말이야, 뭐야?”

한번은 딸이랑 둘이서 남대문 시장에 갔다. 목이 말라서 길에서 주스를 사먹는데 그 옆에 앉아서 다른 물건을 팔던 한 젊은 남자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아이 깜딱이야, 왜요?"
“이 아가씨 한국말 해요?"
“얘, 너 한국말 하냔다. 너 한국말 하니?"
딸이 한국말로 “쪼끔.” 하고 대답했다.
“이 아가씨 몇 살이요?"
“얘, 너 몇 살이냔다."
딸은 꽤나 버벅거리더니 “열여….어… 더…..“하다가 말았다.
“열여덟이래요."
“아줌마 딸이요?"
“예."
그 남자는 우리의 대답에 만족해서 자기 할 일을 계속 했고 우리도 우리 갈 길을 갔다. 가다가 둘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독일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같으면 길에서 남의 신상을 묻는 남자도 없겠지만 나도 그렇게 꼬박꼬박 대답하지 않았을것이고, 우리 딸도 그렇게 얌전하게 장단을 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남의 일이라도 호기심이 나서 궁금하면 그냥그렇게 묻고, 그것이 딱이 실례라기보다는 우호적인 관심의 표시라는 걸 딸도 나도 알고 있었다.

* * *

독일로 돌아왔다. 딸은 내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또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왜 남의 나라에는 그렇게 자꾸 간대? (돈 들게?)"
“왜라니? 한국 사람이 한국에 자꾸 가는게 뭐가 이상해? 왜 한국이 남의 나라야? 엄마 나라지."
“그래, 내 나라지, 네 나라냐?"
“우와 웃긴다. 한국이 엄마 꺼야?"
“놀순이, 한국에서 노는 데 맛들였구나?"
“놀순이라니? 내가 한국에 다녀온 후로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난 요즘 지각도 안 하고 숙제도 다 해간다구. 한번은 복습도 했어."
“(난 안 믿는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간디?) 한국말 공부는 열심히 하면서 또 간다는 거야?"
“(한국말로) 예, 티비 봐요. 한국 드라마 욜심히 봐요. 엄마는 아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미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