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밤에 춤추러 간 딸이 안 들어오길래 저 먼저 자러 들어가면서 딸 침대 속에 따끈한 물주머니를 넣어주었어요.

이튿날 아침에 딸이 좋아라고 제 침대에 들어와 부비부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기 친구의 엄마가 저를 참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더군요. 제가 겸손해서 그런다네요. “사람이 다 거기가 거긴데 잘난 척할 일이 뭐 있노?” 했더니 그래도 그렇지 엄마가 일에 관한 얘기를 너무 안 하니까 자기만 해도 엄마가 뭘 하는지 남들보다 더 모르는 것 같대요. 적어도 자식들이 남 만큼은 알도록 가끔 얘기해달라고 하겠지요. 아주 살갑게 콧소리로…

그 생각이 나서 저는 오늘 아침에 딸에게 5년 전의 신문 기사를 건네줬습니다. “니 엄마에 대한 기사야. 함 읽어 볼래?” 어제도 밤새워 춤 추고 새벽에 들어온 우리 따님은 부스스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이 쌀쌀맞게 대답하셨습니다. “응, 이따가. 나 지금은 그런 거 읽을 기분 아니거든.” 전 괜히 뻘쭘해졌지요. 망할노무 지지바, 변덕이 죽 끓듯 하누만.

민망한 마음에 저 혼자 옛날 신문을 들여다 보니 또 새롭네요. 인터뷰 한 기사를 읽을 때면 대부분 기분이 이상해지지요. 나를 잘 모르는 기자 분의 해석이 들어가게 되니까 아무래도 사실이 부정확하게 전달되는 부분도 있고, 또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부분을 읽으면 무지 쑥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에 읽어보니까 나름 재밌네요. 남의 말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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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로 읽고 싶은 분들은 사진을 클릭해서 확대해서 읽으시면 되구요, 독일어를 안 쓰시는 분들을 위하여 그때 독일에서 발행되는 한인신문에 실린 번역을 올려드립니다.

임혜지: 건축학자, 작가, 칼럼니스트
바인브렌너의 발자취를 찾는 한국 외교관의 딸

적군파 단원들은 칼스루에 시 불루멘스트리쎄에 있는 한 주택에 침입하여 주민을 결박한 후 그 곳에서 로켓포를 쏘아 연방고등법원의건물을파괴하고자 하였다. 이 테러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불루멘스트리쎄에 있는 예의 그 주택은 연방고등법원의 대지에 면해 있었다.이사건으로 인한 연방행정부의 쇼크는 너무나도 커서 당장에 그 주택들을 - 1825년대의 수공업자 주택 - 철거할 것을요구하였다. 이 주택들의 보존과 철거를 놓고 한 편에선 문화재청이, 다른 한 편에선 시청 및 연방행정부가 맞서서 벌인 줄다리기는몇년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전후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칼스루에의 이 사건도 이성의 승리가 아닌 권력의 승리로 돌아갔다. 문화재로지정된 그 주택들은 결국 희생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1977년 8월에 실패로 돌아간 테러거사 이후로 불루멘스트라쎄의 그 주택들은 폐가가 되었다.출입문과창문들은 벽돌로 차단되었다. 빈 집으로 방치된지 거의 이십 년이 지난 후 포크레인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한국인 건축가이자 건축학자인 임혜지는 그 주택들을 조사하였다. 이 한국여성이 조사한 결과는 그녀의 저서 “바인브렌너 시대의칼스루에주택건축”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남겨졌다. “연방고등법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제가 그 건물들을 조사하도록 금방 허락해주었어요.“하고 임씨는기억을되살린다. 그러나 그녀가 50여명의 건축과 학생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그 주택건물들을 경비하던 국경수비대는 이만저만 놀란 게아니었다고 한다.

칼스루에 주민들 중에는 이미 사라진 의사당이나 연극관의 옛 건물에 향수를 품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불루멘스트리쎄에 서 있었던살림집을아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임혜지는 그 주택건물에 기념비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많은 것을 알아내었다. “주택의역사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많이들 배우고 있죠. 그러나실상을 보면 좀 다릅니다.“라고 임씨는 말하며 곧 반문한다. “옛날 그 당시에 집을 지을 적에 과연 어떤 것이 보편적잣대였었는지,구체적으로 어떤건축기술과 또 어떤 재주가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오늘날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철거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그녀는철거노무자들과 공조하여 자유스럽게 조사를 벌였다. 19세가 초반에 지어진 건물에 처음에는 손으로 만든 수제품의석판이 사용되었다가 10년 후에 증축될 때에는 기계로 대량생산된 석판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임혜지는 발견하였다.임씨는 자신의저서에다 주택건물의 모든 디테일을 - 돌에 새겨진, 석판을 까는 순서를 정해주는 기호표시로부터 석공의 이니셜까지 - 섬세하게기록하였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 수공업자 주택들은 그 당시의 전형적인 기역자형 주택양상을 띄었다. 철거에 얽힌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그녀는 책에다 언급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한국여성이 독일의, 아니 바덴 지방의 한 건축가에 대해서, 그것도 그 발자취가 바덴 지방 어디서나 발견되지만 그밖으로는영향력이 별로없는 건축가에 대해서 책을 쓰게 되었을까? “17세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의 본으로 왔어요. 아비투어를 마치고 건축을공부하고 싶었는데 마침 칼스루에 대학에서 받아주었습니다. 저야 좋았죠.“라고 몸매가 가녀린 그녀는 말한다. “부모님의 품으로부터충분히 멀리 떨어지게 되었으니까요.”

“박사논문치고 제 논문만큼 오래 걸린 논문도 드물 거에요. 쓰는 도중에 아이들 둘을 키웠거든요.“하고 임혜지는 말한다.논문의 마지막 작업으로 그녀는 칼스루에의 고문서보관서에서 건축관련 문서를 조사하는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녀는옛날독일문자, 오늘날엔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지만 고문서 연구를 하려면 필수적인 쥐텔린문자의 해독법부터 배워야 했다.그녀가 이 장애물을 바람처럼 재빨리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녀의 성씨는 임씨가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한국여성이 아닐것이다. “고문서보관서에서의 작업은 재미있었어요. 꽉 차 있는 분위기, 옛 문서의 냄새, 그 곳에서 저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보통의 박사논문을 위해서는 고문서보관서에서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했겠지요.” 라고 임혜지는 말한다.

그러나 이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자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고, 이에 맞춰 그녀는 테마를 확장하였다. 결국 총 15년의 세월을소요한 후에 그녀는 도시의 역사적인 거리가 총망라되고 현존하는 바인브렌너시대의 건물 156 채가 정리된 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저는 이 책이 각 도서관과 문화재청에나 굴러다닐 뿐 일반독자들에게는 별로 읽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라고저자는 담담하게 잘라 말한다. 그 대신 그녀는, 문화재청의 말에 의하면, 칼스루에의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이 분야에서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를 저술한 것이다. 아뭏든 그녀의 친척이나 친지들은 이런 중요한 책을 쓴저자를 아는 것을 자랑스럽게생각한다. 그런 그들에게 임혜지는 자신의 책을 사지 말고 그 보다 더 재미있는 다른 책들을 사라고 권한다.

임혜지는 30년 이상 독일에 살고 있다. 한국의 한 신문사에서 통독 이후의 독일의 현실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칼럼을 써달라고요청하지않았다면 어쩜 그녀는 한글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뮌헨 테아티너스트라쎄의 인파에 섞이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사람인 임혜지는 지금 막 한국방문에서 돌아온 참이다. 그래서그런지 그녀에게는 한국과 독일,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진다. “한국은 독일에 비하면 훨씬 더 역동적인나라입니다. 그리고한국사람들은 독일사람보다 더 다혈질이지만 정서는 안정되었어요.” 그녀는 뮌헨에 있으면 독일인이 되고 서울에 있으면 한국인이된다. “한국에선 저는친구들이랑하루종일 웃어요. 그런데 여기선 별로.” 어쩐지 임혜지는 두 문화 사이에서 양쪽을 다 아우르려고 곡예를 하는 듯이 보인다:그녀는아이들을 유모차 없이, 한국식으로, 네 살이 될 때까지 등에 업어서 길렀다. 그녀의 집에는 자동차도 없고 TV도 없으며, 그녀의가족들은 가족음악회를 열고, 환경보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정은, 전 한국 가정의 70%가 그러하듯이,인터넷에 연결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