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의 이야기예요. 가족 휴가로 코르시카 섬에 다녀왔는데 그때의 에피소드입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읽어도 웃기네요.


휴가 가기 전에 쓴 글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이번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우다가 딸아이(당시 만 14세)랑 신랑이랑 왕창 붙었다. 딸아이는 우아한 해변의 휴가를 즐기고싶어하고 남편은 해변에 하루만 누워 있으면 지루해서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둘의 성향을 충족시켜줄 장소로서 내가 코르시카 섬을 제안하였다. 해변도 있고 산도 있는 곳이니까 의논해서 서로에게적당히 맞추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자전거도 가지고 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딸아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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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간다고 그래 놓고 또 슬슬 자전거 여행할 계획이구나. 난 이런 인생이 이젠 정말 지겨워 죽겠다구. 악악!”

부모의 인생관을 경멸조로 평했다고 생각했는지 보통은 순한 남편이 순간적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잊어버렸지만 남자가 버럭 소리지르는 건 좀 야만스럽지 않은가? 딸아이는 아빠가 소리를 지른 게 부당하다고 같이 소리를 질렀다.남편은 말로 해서는 자기가 지겠으니까 저녁을 먹다 말고 접시를 들고 휙 나가버렸다.

남편이 나가고 나서 내가 딸아이를 달랬다. 아빠가 소리 지른 건 나쁘지만 남의 인생관을 무시하는 듯한 너의 태도도 나빴노라고.그랬더니 딸아이는 나에게 화를 내서 결국 우리는 서로 소리 지르면서 싸웠다. 더 큰 소리로.

오늘 아침에 냉냉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딸아이가 학교에 간 후에 내가 남편을 달랬다. 딸아이가 그런 태도를 보인 건 나쁘지만남자가 소리 지르는 것은 여자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진다고. 딸아이가 훗날에 그 누구에게도 폭력스러운 대접을 받지 않으려고자기 방어를 연습하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막 나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도 남편이랑 또같이 소리 지르면서 싸웠다. 큰 소리로.

“쟤 지금 생리하지? 그래서 쟤가 지금 저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이해하란 말야. 호르몬의 작용인데 어떡해?”
“싫어! 생리하는 사람이 당신 하나였을 때도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두 배로 늘었으니 난 이젠 못 살겠어.”
”(이렇게 생억지를쓰다니 원, 누가 생리를 하는지 모르겠단 말야.) 어머, 기가 막혀서. 그렇게 여자가 싫으면 당신 다시 태어나면 남자하고 결혼햇!”

우리 식구들이 좀 푼수끼가 있는지라 그날 저녁에는 모두 사이좋게 생글거리며 저녁 먹었다. 모두 다 만족한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조금만 사바사바 서로의 비위를 맞추면 될일을 가지고 우리 집에 공주랑 왕자가 한 마리씩 있어서 가끔 시끄럽다.


휴가 다녀와서 쓴 글

코르시카 여행을 무사히 다녀왔다. 오고 갈 때 기차와 자전거를 번갈아 타느라고 고생한 거 빼놓고는 평생 처음으로 안락한 휴가를보낸 셈이다. 노상 해변의 휴가를 외쳐오던 딸아이는 대만족이었다. 해변 경치 좋고, 날씨 좋고, 방갈로도 예쁘고 편하고,친구도 사귀어서 심심하지 않았고, 뭐 걔는 평생 소원을 풀은 셈이다. 딸아이는 방갈로촌에서 제 또래 소녀를 사귀었기 때문에 걔를 해변에 놔두고 우리끼리 마음 놓고 자전거로 산행을 할 수도 있었던 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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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휴가를 가니 같이 부대끼는 시간이 훨씬 길어져서 가족 간에 여러가지 관찰과 생각이 많았다. 텐트 수준의 방갈로에서원시적으로 살림을 하다보니 평소에 집에서 가르치기 힘든 것도 가르칠 기회가 되어 좋았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은 설거지나빨래는 기계가 하는 걸로 알고 자란 세대라서 이번에 생전 처음으로 손빨래나 손설거지 하는 요령을 배웠다.

물론 싸움도 했다. 코르시카 섬에서 딱 한번 마음먹고 딸아이까지 꼬셔서 전 가족이 자전거 여행을 했다. 그간 해변에서심심하다고 주리를 틀던 남자들은 기운이 펄펄 넘쳐났다. 신이 나서 가파른 산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나중엔 나랑 딸아이가 지쳐떨어졌다. 저만치 달아나는 남자들의 꽁무니를 부지런히 따라가면서 “이거 놀러와서 뭐하는 짓이야?” 하고 슬슬 짜증이 나기시작했다. 그런데 남의 속도 모르는 간 큰 족속들이 우리를 재촉하고 비웃고 막 이러는 것이 아닌가? 맘이 넓어서가 아니라너무 힘들어서 대꾸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사람을 뭘로 봤는지 나중엔 일부러 늑장부린다고 막 고함까지 지르는 거시어따!!!

아아아아악! 터졌다!

힘들어서 천천히 가는 거지 니네 골려줄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아냐? 능력껏 달리고 있는 말에 채찍질하면 더 빨리 간다냐?이것들이 자기네들 기분 좋으라고 좀 맞춰줬더니 아주 안하무인이로구나. 가만히 보아하니 순 마초들이네? 운동 잘하고 수학 잘하면잘난 인간이고 그 외에 다른 능력들은 다 쓰잘데기 없는거라고 생각하지? 그건 철저히 남성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이제 니네들끼리산에 다녀라. 나도 사실은 해변이 더 좋다. 솔직히 말해서 밥 팔아서 똥 사먹을 짓이지, 돈 주고 배 타고 해변에까지 와서 왜자전거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냐?

욕을 바가지로 해줬더니 남정들은 퍼뜩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또 어디 산으로 간다면서 남편이 내 눈치를 봤다.남편은 어디든지 나랑 같이 다니는 걸 좋아기 때문이다. 나는 한마디로 동행을 거절했다. 그랬더니 이 남정들이 자기네들도 힘들어서꾀가 나는지 자꾸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하루 코스로는 좀 무리가 아닐까, 지금 떠나면 오늘 밤 안으로 돌아올수 있을라나 어쩌고 저쩌고 자꾸만 핑계를 대며 미루었다.

나: 약자가 안 간다니까 뽐내는 재미가 없어서 가기 싫지? 가! 빨리 가!
딸: 우리만 없으면 남자들끼리 날아갈 듯 속도를 낼 수 있다며? 자기네도 힘들면서 괜히 우리 핑계만 대다가 핑계거리가 없으니까 안 가려고 그러는 거지? 가! 빨리 가!

이렇게 등 떠밀어 두 남자를 보내고는 여자 둘이서 뒹굴거리며 환상적인 하루를 보냈다.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산보를 나갔더니 세상에, 산이몇겹으로 첩첩이 드리워진 위로 하얀 구름이 사뿐 얹힌 경치가 그제서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전에는 미친 속도로 디립다 페달만밟느라고 앞에 가는 남자들 엉덩이 외에는 하나도 못 보았는데. 에그, 나는 한평생을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렇게 남자들 흉내만내며 미친년처럼 살았구나 싶어서 회한이 왔다.

“이 날이 길었으면… 오늘 해가 지지 말았으면…“하고 기원하면서 평화를 아끼며 즐기고 있는데… 악,저녁도 되기 전에 남자들이 벌써 들이닥쳤다. 그 난코스를 신기록으로 마쳤다고 의기양양해서. 우리 먹으라고 아이스크림까지사가지고 왔다며 뽐냈다.

딸: 흥! 그 새 산의 정상까지 갔다 왔겠어 뭐 ? 그냥 옆 동네에 가서 물에 발 담그로 조금 놀다가 창피하니까 아이스크림이나 사왔겠지.
아들: 이게? 너희들이 집에서 게으름 피울 동안 우리는 이렇게 많은 수고를 했단 말야. 오늘 저녁 요리하고 설거지는 집에서 논 사람들이 다 해.
신랑: 맞아, 맞아. 우리의 초인적인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해 달란 말야.
딸: 이 더운 날씨에 시원한 물을 놔두고 산으로 뻘뻘 올라가는 게 존경받을 짓이냐? 뇌가 죽은 짓이지.
아들과 신랑: ….. (대답 못 함)
나: (므흣)

(암만 생각해도 그날 남편과 아들이 그런 코스를 그렇게 빨리 다녀온 것이 불가사의하다. 아마 우리 여자들이 빠지자 남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장년인 아버지와 청년인 아들이 본능에 쫓겨 불꽃 튀기는 달리기 시합을 벌인 것 같다. 오오 가엾은 남자들이여! 우리 여자들이 없으면 니네들은 뜀박질만 하다가 죽을 거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에게 만족스런 휴가였다. 가족이 딸린 이상 엄마에게는 집과 비슷한 상황일 것 같지만 그래도 일상을 벗어나니까좋았다. 내가 혼자서 호젓하게 즐길 시간이 집에서보다는 훨씬 많았다. 남편도 오랫만에 가족들과 잘 놀면서 잘 쉬었다고 좋아했다.아들(당시 17세)만 심심해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가족들이 친구들만 못할 나이 아닌가? 집에서 좀 심심해야 나중에 여자 친구생기면 고마운 줄 알겠지.

거기서도 애완동물이 있었다. 프리츠와 드롤리. 프리츠는 보송보송하게 생긴 벌이다. 우리가 베란다에서 밥만 먹으면 어김없이 날아와서 인사하고는 우리눈 앞에서 고기 덩어리를 뚝 끊어서 입에 물고 뒤뚱뒤뚱 무겁게 날아갔다. 드롤리는 작고 귀여운 쥐새끼다. 쪼끄만 게 거실로부엌으로 쪼르륵 굴러다녔다. 행여 실수로 발에 밟힐까봐 우리 모두 살살 걸어다녔다. 사실은 이 방갈로가 원래 프리츠와 드롤리네집일 텐데 우리가 와서 허락 없이 막 쓰는 거겠지. 그래서 우리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서 그들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사이좋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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