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은 내게 직업적으로 순조로운 해였다. 나의 본업은 문화재 건물을 실측하고 조사하는 일인데, 붕괴의 위험이 있거나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에서

사다리를 타는 일이라서 위험하고 (몇백 년 묵은 먼지와 비둘기 똥으로) 더러운 데다가 보수마저 시원찮으니 영낙없는 3D업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건축사학자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작업으로 친다. 형사가 수사를 하려면 현장에서 뛰는 게 제맛이지, 책상에 앉아서 이론적으로 추리만 한다면 그게 무슨 재미람?

프리랜서로 하는 일이다 보니 일감이 자주 끊긴다는 단점이 있는데,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하게 되면서부터 조금 먼 곳에 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일감도 안정적으로 들어왔고 남이 부러워하는 국보급 프로젝트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대형 프로젝트들은 기업형으로 돌아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누구 혼자의 힘으로 조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사업수완이 좋은 동료가 용역을 따오면 여럿이서 일을 나누거나 다시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된다. 나는 미궁의 사건을 풀기 위해 영혼을 바치는 멋쟁이 형사가 아니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집단의 조직원이 되어 시간에 쫓기고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하러 가는 아침이면 나는 침대 속에서부터 갈등했고, 일하고 와서는 식구들에게 동료를 험담했다. 지은 죄라고는 나에게 일감 준 죄밖에 없는 동료를 토끼똥 싸는 쪼잔한 녀석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프로젝트가 하나 끝날 때였다. 도면 몇 장에 담긴 나의 개가는 일하는 동안 쭈그러들었던 나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주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남에게 얘기할 때 받는 존경의 눈초리도 좋았다.

고대하던 정상에 올라와 보니 경치는 좋은데 춥고 바람 불어서 얼른 사진이나 한장 찍고 다시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는 것이 불행스럽게 느껴질 무렵, 나는 내게 묻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너는 가장 행복하지?” 대답이 금방 나왔다. 내가 자원봉사로 장애아이 모모를 돌봐주러 유치원에 가는 날이면 난 정말 행복했다. 그날 아침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치원을 오가는 자전거 위에서 난 항상 엉덩이를 들썩이며 노래를 불렀다. 내가 돌보는 모모 뿐 아니라 유치원에서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내겐 선물이었다. 저녁에 만나는 식구들은 내가 그날 어디서 일하고 왔는지 담박 알아봤다. “보름달처럼 웃는 거 보니까 오늘 유치원에 갔다 왔구나.”

내가 꼬마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일찌기 알고 있었다. 나는 평생 어렴풋한 우울증을 미열처럼 달고 살았는데 꼬마들을 대량으로 접하는 기간에는 그 증세가 사라졌다. 섬마을 학교의 국어선생이 되어 소설을 쓰며 살고 싶다는 소녀시절의 꿈을 묻어버린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선 언젠가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희망이 실낱처럼 가냘프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언젠가, 언젠가는…

내가 아이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독일 칼스루에 공대에서 유치원 설계를 방학 과제로 받았을 때였다. 여느 설계와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참고서적을 잔뜩 빌려와서 한 나절을 씨름하던 끝에 왜 설계가 자꾸 막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기는커녕 그 존재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그 건물의 주인이 될 어린이를 위해서 무엇을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길로 연필을 놓고 동네 유치원에 무턱대고 찾아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일 주일만 무보수로 실습을 하고 싶다고 하자 마침 일손이 모자라던 유치원에서는 쾌히 승낙했다.

그곳에서 나는 설계를 위하여 어린이에 대한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아이들도 어른과 똑같은 개성과 인격을 가지고, 그 나름대로 심각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 유치원은 부모와 보육교사가 함께 꾸려나가는 사립유치원이었는데, 어린이의 의사를 최대로 존중하고 될 수 있으면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키우는 교육을 지향했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이 닳지 않은 본연의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각각 다르면 다른 대로 모두 아름답고 유쾌한 모습이었다. 이런 것을 보며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심이랄까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맨 엉덩이를 비비며 품으로 파고드는 어린 녀석들의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은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노처녀의 모성을 새록새록 일깨웠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아침이 기다려졌다. 이렇게 정이 들다보니 일 주일만 하기로 했던 유치원 실습을 차마 그만두지 못하고 자꾸만 연장하는 바람에 막상 유치원 설계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결국 설계를 제출하지 못하여 학점은 못 땄지만 마음은 천하를 얻은 듯 뿌듯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건축 공부를 그만둘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한번 시작한 일은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건축가가 보육교사보다 고상한 직업이라는 세속적인 평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난 내가 선택한 전공에 충실했고, 그만하면 사회에도 충분히 환원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느 도시의 고옥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헌정한 나의 전공서적은 많이 팔리지는 않았어도 문화재청에서 지침서로, 지역사회의 건축사 연구에서 필독서로 요긴하게 쓰인다니 나는 만족한다. 내가 전공분야에서 좀 더 실속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것은 직업이 인생 최고의 우선순위가 아닌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고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한국 나이로 5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 이제는 나를 위해서 즐거운 일을 하기로 했다. 결과가 보람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니라 과정이 즐거워서 좋은 일을. 내가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깨달음이 소나기를 예고하는 바람처럼 몰려와 시방 막연하게 꿈만 꾸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웅웅거렸다. 더 늦기 전에 유치원 선생이 되는 방법을 알아보기로 했다. 한국식으로 중학교 졸업에 준하는 학생들이 밟는 정규과정은 무려 5년이나 되었다. 암만 좋아도 그렇지, 5년 일하고 정년퇴직 맞으려고 5년 공부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또 다시 교실에 열지어 앉아서 가방끈을 하염없이 늘리는 일이라니. 나는 2년짜리 강도 높은 속성코스가 독일에서 유일하게 뮌헨에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4년이상 집에서 자녀를 기르고 살림을 한 전업주부의 경력이 요구되는 이 코스에서는 교육과정의 대부분이 실습과 겸용해서 이루어진다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오홋, 이거다!

문제는 해마다 스무 명씩 뽑는 이 코스의 입학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는 점이었다. 다들 몇 년씩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담당자에게 쫓아가서 선발의 기준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새로운 일을 배우기에 결코 적지 않은 내 나이가 감점으로 작용하느냐는 질문에 담당자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지요,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기다릴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가산점을 줍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감동해서 담당자를 와락 껴안을 뻔했다.

이 직업에 대한 적성과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서류들을 구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힌트를 얻은 나는 그간 아이들과 관련하여 자원봉사를 했던 모든 기관을 쫓아다니며 추천서를 받아냈다. 내가 가끔씩 실측을 지도하러 가는 대학교에선 내가 대학생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니 유치원생들도 잘 다룰 것이라는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해서 나를 감동시켰다. 하다못해 내가 30년 전에 아르바이트 겸 봉사활동을 하느라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실습을 다녔던 양로원에서 받은 일급 소견서까지 찾아놓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배운 피아노, 어깨너머로 배워 청소년 시절에 노래하며 띵똥거린 기타, 옛날 고리짝에 딴 노란띠의 태권도,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느라 남편과 함께 배우는 사교댄스, 건축을 했다니까 그냥 접어주고 들어갈 것 같은 공작 실력까지 줄줄이 읊어 적고 보니 나는 꼭 유치원 선생이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 같은 스펙이 갖춰졌다. (오모, 낯 뜨거.)

그 코스는 새해 가을에야 시작되므로 아직 시간이 1년 반이나 남았지만 나는 실측 조사를 함께 하던 동료들, 그리고 조만간 나와 함께 전문서적을 집필하려고 했던 원로 교수님께 일찌감치 이 사실을 통고하고 전업을 선언했다. 한동안 천직으로 여기고 즐겼지만 이젠 마음이 떠났는데 도면 몇 장 더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대신 나는 정신지체아 유치원에 도우미로 취직했다. 오후에는 통합교육을 하는 유치원과 어린이 음악학교에서 보조교사 노릇을 한다. 장애아와 일반아동이 한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통합교육만이 우리가 갈 길이라는 신념에서이다.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세 군데서 일을 하니, 이만하면 새 직업에 대한 나의 열정이 보이지 않을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요즘 나는 무척 피곤하지만 그만큼 행복하다. 게다가 새로운 세계의 어려운 일이라 내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나의 천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천직도, 완벽한 직업도 없다고 믿는 나로서는 향후 10년간 내가 공을 드릴 일을 발견한 것으로 기쁠 뿐이다.

내가 마음을 정하기 전에는 덩달아 흔들렸던 가족들은 내가 마음을 딱 굳히자 마치 자기네들은 진작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이 대찬성을 표시했다. 딸이 내게 말했다. “난 엄마가 이왕이면 가난한 동네의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학교에 다녀보니까 저소득 소외층의 집안에 태어난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기가 어렵겠더라. 학교 다니기 전에 가정에서 배운 것에서 벌써 차이가 나. 그러니까 공부 많이 한 엄마가 유치원에서 그런 아이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면 좋겠어.”

새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딸은 요즘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아들은 관심 분야가 좁고 확실한데다가 시대적으로 운이 좋아서 적성과 장래성이 맞아떨어졌기에 전공을 택하는 일에 망설임이 적었다. 그러나 딸은 관심 분야가 너르고 다양한 사람인데다가 시대운이 없어서 적성과 현실성의 궁합이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과거 급제해서 출세했을 것이고 여자로 태어났다면 문필, 서화, 가무에 능한 기생이 되어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공부하면 나중에 굶어죽기 십상일 것 같아 고민이고 그렇다고 해서 취직을 염두에 두고 전공을 택하자니 인생이 암담해 보인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엄마인 나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엄마, 사실 나는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우잉, 엄청 재밌겠다.”
“엄마,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구. 난 대학 마치고 실업자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런 걸 미리 어떻게 알아? 뭐를 해도 괜찮아. 아무 거나 정말 하고 싶은 거 배워.”
“그걸 왜 몰라? 무슨 엄마가 이래?”
“미안, 미안. 나는 요즘 유치원 선생이 세상에서 제일 고상한 직업이란 생각이 들어서 다른 것들은 다 그게 그거인 것 같이 느껴져서 그래.”

문학소녀였던 나의 장래를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내가 건축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현실적인 과목인줄 알았던 건축은 내가 졸업할 무렵에 불경기를 타서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내가 죽은 다음에 건축이 다시 전성기를 탄다 해도 내겐 소용이 없다.) 그나마 덤으로 얹었던 건축역사가 내게 약간의 일을 주었다. 내가 문학을 공부했더라도 평생 그 정도의 돈은 벌었을 것이다.

인생을 빙빙 돌아 도착하려는 나의 다음 역은 글 쓰는 유치원 선생님. 돈으로 따지면 난 엄청나게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난 내 인생을 결과와 돈으로 따지지 않는다. 내가 건축에 열정을 쏟아부은 이유는 당시에 (입신양명을 꿈꾸었을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그 어딘가에 바친 열정이 쌓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건축에 쏟아부은 열정이 없었다면 난 오늘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다른 꿈을 꾸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그 무엇도 괜찮았겠지만, 시방 내가 갖고 싶은 건 대략 가지고 내게 필요 없는 것은 대략 가지지 않은 나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저는 조만간 원서를 냅니다. 저의 장밋빛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여러분들께서도 응원해주시겠지요? 새해에는 각자의 마음속에 장밋빛 꿈이 심어지고 또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rose15


(레몬트리 2010 신년호에 이 글의 축약본과 사진이 실렸습니다.)

PS
고민할 적에 제가 맘속으로 늘 여쭙는 법륜 스님의 말씀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산에 가기로 했으면 가라. 날씨 핑계 대지 말고 그냥 가라. 그러나 등산한다고 해서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나? 가다가 사람이 다치면 업고 내려와야지.“

법륜스님 영상법회 (드라마보다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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