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막이 오른다. 반짝이는 하얀 상자 옆에 남자가 서 있다. 여자가 등장한다.

여: 여보, 우리 냉장고 있는데 왜 또 사왔어요? 좁은 집에 이렇게 큰 걸 어디다 놔요?
남: 이게 보통 냉장고가 아니야. 요술 냉장고야. 내용물을 꺼내 쓰면 그만큼 자동으로 주문, 배달된다구. 독일에서도 엄청 인기래. 자리는 만들면 되지. 이쪽 벽을 뜯으면 되잖아?
여: 미쳤어요? 이쪽 벽을 뜯으면 애들 방이 어떻게 돼요? 그리고 난 지 맘대로 쇼핑까지 하는 건방진 냉장고는 싫우. 난 시장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사오는 게 좋아요. 아, 지금 생활비도 빠듯한데 왜 자꾸 이상한 냉장고를 사래?
남: 당신 지금 몰라서 그렇지 한번 써보면 나한테 고맙다 그럴 걸.
여: 이런 게 필요한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놓을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사오면 어떡하냐고요?
남: (버럭) 무식하면 가만 있어. 가장인 내가 오죽 잘 알아서 해줄까봐 그래?
여: (목소리 깔고) 너 집에서 나갈래?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하얀 상자를 질질 끌고 나가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2장

조명을 받고 반짝이는 하얀 상자 옆에 남자가 서 있다.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등장한다.

여: 여봇! 왜 냉장고를 도로 가져왔어요?
남: 이게 왜 냉장고야? 그릇장이지. 너 눈이 삐었니?
여: 어머, 이렇게 생긴 게 냉장고가 아니면 뭘까? 무슨 그릇장이 이렇게 밀폐되고 서늘할까?
남: 최신형 녹색성장 그릇장이라서 그래. 박테리아의 서식을 억제하는 위생 그릇장이야.
여: 아니, 이이가 사람을 놀리나? 누가 냉장고에다 그릇을 수납해요? 전기세 아깝게.
남: 그럼 전원을 꺼놓고 쓰면 되잖아?
여: 이봐욧, 밀폐된 냉장고의 전원을 끄면 곰팡내 나는 거 몰라요?
남: 그럼 문을 좀 열어놓고 쓰면 되잖아?
여: 아, 짜증나네. 왜 자꾸 냉장고를 그릇장으로 쓰래?
남: 냉장고가 아니라 다용도 수납장이라니까 그러네? 여기 독일어로 그렇게 써 있다구. 원래는 그릇장인데 전원을 켜면 냉장고도 된다고 써 있어. 이런 걸 두고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라고 하는 거야. 당신은 참 복도 많아.

이때, 삐리삐리 초인종이 울리고 청년 등장. 끌고 오는 트렁크에 항공기 수화물 밴드가 붙어 있다.

청년: 구텐 모르겐. 큰아버지 큰어머니 안녕하셨어요? 냉장고 사셨구나.
남: 아, 너 왔느냐? 그래, 독일에서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근데 이게 왜 냉장고니? 그릇장이지.
청년: 지멘스 냉장고라고 여기 써있는데요?
남: 넌 외국에 오래 살아서 모른다. 한국서는 이게 그릇장이야. 우리나라는 기후가 독특해서 말이지. 자고로 한국형 민주주의가 존재하듯이 한국형 자연법칙이 존재하느니라.
청년: 아, 그르세쎄요?
여: (나긋나긋하게) 그래요? (정색을 하고) 근데 놓을 자리가 없어욧! (나긋나긋하게) 당장 갖다주세요오~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하얀 상자를 질질 끌고 나가는 두 남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3장

어둠 속에서 쿵쿵 소리가 나고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린다. 망치를 들고 선 남자에게 조명 집중. 그 옆에서 하얀 상자가 번쩍 빛을 받는다. 다시 한번 비명이 울리며 우당탕탕 여자 등장.

여: 꺅, 당신 지금 뭐하는 거니?
남: 내가 당신을 위해서 그릇장 놓을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야.
여: 애들 방 벽을 부수면 어떡하냐고요?
남: 방이 이렇게 탁 트여야 애들이 공부를 잘 해. 통풍이 잘 되니까 뇌의 산소공급도 원활하고, 부엌이랑 통하니까 영양섭취도 직통이고.
여: 난 이딴 냉장고 필요 없다니깡? 썩 도로 물르지 못해요? 지금 애들 학비도 모자라는 판에 벽까지 뜯어가며 냉장고 들여오게 생겼어?
남: (삿대질) 그릇장이라는데 무식한 여편네가 자꾸 냉장고 냉장고 하네.
여: (삿대질) 무슨 그릇장에 전원이 달렸냐?
남: (하얀 상자에 매달린 줄을 흔들어보이며) 여기 전원이 어딨냐? 여기 플러그가 있는지 없는지 눈 있으면 봐라.
여: 플러그를 싹뚝 잘라버렸구만. 나중에 플러그만 달면 또 냉장고네.
남: 그래도 지금은 플러그가 없으니까 그릇장이야. (새끼 손가락을 걸며) 내가 당신이랑 사는 동안에는 플러그를 달지 않을 것을 약속할게. (눈물을 글썽이며) 나중에 나 죽은 후에, 행여 냉장고가 필요할 날이 오면 새 서방 보고 플러그를 달아달라고 그래. 내가 다 준비해놨기 때문에 그 사람은 플러그만 사면 돼. 돈도 얼마 안 들어.
여: (감동해서 남편의 가슴에 안긴다.)

어두워지는 조명 속에 남녀는 조용히 포옹한다.

4장

조명이 서서히 오르며 하얀 상자 옆에서 다정하게 껴안은 남녀를 비춘다.

남: (코맹맹이 소리로) 그나저나 당신, 연말 내에 어디서 돈 좀 꿔올 수 있을까? 이 그릇장이 첨단 하이텍이라 꽤 비싸거든.
여: (새침하게) 돈이 어디서 나와요? 냉장고 도로 물르세요.
남: (가슴을 치며 버럭) 냉장고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달래듯이) 우리 이렇게 합시다. 이것은 절대로 냉장고가 아니라고 합의문을 쓰고 둘이 서명합시다. 그럼 법적으로 완벽한 그릇장이 되는 거잖아? 그럼 당신이 날 의심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
여: (남편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그러다가 나중에 맘 변하면 플러그 달아서 냉장고로 쓰고?
남: (부인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모 하모.
여: 그래도 돈은 못 줘요. (허리에 손을 얹는다.)
남: 그래? 내년엔 애들 용돈이고 학비고 다 동결이닷. 생활비도 삭감이닷! 다 당신 책임이야. (허리에 손을 얹는다.)

하얀 상자를 가운데 두고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조명 흐려짐. 어둠 속에서 망치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아직 막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비극의 코메디가 계속되는 한 저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쓰겠습니다. 사실은 만화로 그리고 싶었는데 제가 그림에 자신이 없어서 글로 썼네요. 누가 좀 그려주세요~
하늘이 파랗고 황금빛 햇살이 비치는 겨울의 뮌헨에서 임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