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는 여성들과 만나서 잡담을 하던 중에 우리가 아는 어느 누구가 하루 만에 몇만 유로를 옷 사는 데 쓰더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통 크고 화끈한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였다. 웬만해선 남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는 편인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누가 나한테 그렇게 큰 돈을 주면서 기한 내에 쇼핑으로 다 쓰라고 한다면 자살할지도 몰라.” 같이 있던 사람들은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진심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하기 싫어하는 일이 바로 쇼핑이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없이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 건지, 내가 워낙 쩨쩨하거나 건조한 인간이라 그런 건지 나도 모른다. 역시 돈 안 쓰고 살아온 건 마찬가기지만 우리 남편은 또 다르다. 쇼핑 뿐 아니라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아이쇼핑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둘이 시내에 나가면 남편은 눈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살림도구를 내게 보여주며 설명하느라 바쁘고 나는 지루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장승마냥 서 있다.

그런 내가 올해 구두를 한 켤레 사야만 했다. 나는 구두 굽이 닳아 발이 한쪽으로 쏠리면 발바닥 뼈가 아프다. 발이 아파서 구두를 들여다 보았더니 굽을 갈 때가 되었는데, 굽도 굽이지만 10년 이상 매일같이 신은 까닭에 여기저기 닳아서 차라리 하나 새로 사는 게 이익일 것 같았다. 쇼핑 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지고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등산화를 신고 다니면서 쇼핑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다행스럽게 지난 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거리에서 등산화를 신고 다녀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날씨가 풀리니까 얇은 옷에 등산화를 신은 내 모습이 개미가 장화 신은 것처럼 보인다고 남편이 놀렸다.

나는 괜히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유세하면서 정말로 몇 년만에 신발가게에 들어갔다. 신발이 많기도 한데 내가 원하는 종류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내 신발 취향은 까다롭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닐 때나 먼 길을 걸어갈 때도 신을 수 있어야 하지만 사람을 만나거나 모임에 나갈 때도 신을 수 있는 다용도여야 한다. 치마와 바지를 막론하고 아무 옷에나 무난히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몇 번이고 굽을 갈 수 있는 밑창이어야 한다. 굽을 갈지 못하는 신발이라면 조만간 또 신발 사러 나가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독한 평발이라 바닥은 평평해야 하지, 발에 살은 없지만 꼭 조이면 싫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 마음에 맞는 신발을 위해서 몇 백 유로씩 척척 쓸 큰 통도 아니니 정말 신발가게 주인으로서는 최악의 손님이다.

여러 가게를 돌아본 나는 그 많은 신발 중에 굽을 갈 수 있는 신발이 거의 없다는 걸 느끼고 절망했다. 공장에선 그때그때 유행하는 모델만 만들어내는 모양인데 요즘 유행하는 모델은 다 그렇게 생긴 모양이다. 일회용 신발만 파는 세상이 다 말세로 보였다. 점원들은 유난히 자꾸만 내게로 와서 무엇을 찾으시느냐, 이걸 좀 보시겠느냐 귀찮게 굴며 요상한 모델을 자꾸 보여 주었다.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으이구, 사람 생긴 거 보면 모르냐? 나 좀 봐라. 내가 그렇게 얌체같은 신발을 신게 생겼냐? 물론 속으로만 욕했다.

거울 앞을 지나가다가 웬 우아한 여자가 하나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앗, 그게 나였다. 거울 속의 여자는 그런 얌체같은 신발을 신게도 생겼다. 이게 웬 일이냐? 사연인즉슨 이렇다.

지난 겨울에 나는 생전 처음 카드로 충동구매를 했다. 모임에 나갔다가 내가 차를 얻어타고 오기로 한 사람이 잠시 어딜 들린다기에 그냥 그러시라며 나도 따라갔다. 교외에 있는 무슨 유명메이커 매장이었는데(이름은 들어도 모른다) 싸게 파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물건을 살 생각이 없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눈요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물건의 질에 비해서 값이 싸기는 정말 쌌다. 그러다가 나는 알디(독일의 싸구려 식품점)보다 더 싼, 7유로짜리 청바지를 발견했다. 나는 육년 전에 알디에서 8유로짜리 청바지를 두 벌 사서 교복처럼 알뜰하게 입었다. 집에서 살림할 때도 입고, 학부모 회의에 갈 때도 입고, 일하러 갈 때도 입었다. 한번은 잘못 빨았는지 걸레 냄새가 나길래 버릴까 하다가 인터넷 게시판에 물어 보았더니 옥시크린으로 세탁하라는 고마운 조언을 받자와 또 몇년을 잘 입었다. 알디 청바지가 다 닳아버리면 또 사러 나가기 귀찮으니까 이번 기회에 사자는 생각으로 그 청바지를 하나 주워 담았다.

같이 간 다른 사람들은 밀차 가득 옷을 담고도 갈 생각을 안 했다. 내가 청바지 하나만 들고 심심해서 왔다갔다 하니까 아는 언니가 70유로짜리 코트 하나를 발견하고 나를 불렀다. 짧고 가는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발견한 것만 해도 기적인데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그만하면 가격도 물론 쌌다. 내가 그 옷을 입어 보니까 동행들이 몰려 와서 이쁘다며 자기네 사이즈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같은 옷이라도 내 사이즈만 가격이 싸고 조금 더 큰 다른 사이즈는 값이 엄청 뛰었다. 나는 횡재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만큼 내 기분이 좋아져서 처음엔 별 생각이 없던 나는 결국 그 코트를 샀다.

코트를 사면서 나는 거기에 어울리는 숄을 하나 떠올렸다. 내가 15년 전에 선물 받은 좋은 숄인데 명품 좋아하는 딸아이가 주로 두르고 다녔다. 새 코트와 맞춰보니 색상이 딱 맞았다. 딸에게 빼앗겼던 숄까지 다시 건지고 나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런데 오홋! 며칠 후에 입고 나가려고 보니 새 코트의 주머니가 멍텅구리라. 주머니가 있는 척만 되어 있고 구멍이 막혀 있었다. 아이고 속았다, 싼 게 비지떡이로구만. 주머니 없는 코트는 어따 쓰는공. 지갑이며 열쇠는 어따가 가지고 다니냐고오? 이렇게 해서 할 수 없이 핸드백까지 같이 들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가격은 쌌지만 그래도 좋은 코트에 멋쟁이 숄에 핸드백까지 골고루 갖추고 나니 아예 다른 스타일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었다. 나는 거울을 별로 보지 않는 편이라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신경을 안 썼는데 신발 가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정말 그럴 듯했던 것이다. 코트 하나 샀다가 골고루 스타일 구겼다!

하루는 멀리 사는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내 코트가 이쁘다길래 나는 속아 샀다고 멍텅구리 주머니 흉을 보았다. 이 친구가 막 웃으면서 주머니의 입을 쭉 뜯는 것이었다. “어어, 암만 속아 산 싸구려라도 그렇지 남의 새옷을 막 찢으면 어떡하냐?” 당황하는 내게 친구는 주머니가 늘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박아서 파는 거라고 가르쳐줬다. 어어, 그래? 원래 그런 거야? 왜 나는 몰랐지?

아무튼 그놈의 메이커 코트 때문에 나는 그날 신발 사기를 포기하고 집에 와야 했다. 다음 번에는 빨간 등산 잠바를 걸치고 신발을 사러 나갔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도 달려들어 얌체같은 신발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도 굽을 갈 수 있는 신발은 발견하지 못했다. 신발을 하나 들고 점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 밑창은 튼튼해서 일이 년은 거뜬하게 신는다고 장담했다. 으이구, 고작 일이 년? 나는 십 년 신을 신발을 찾고 있단 말이다. 신발장수가 자기 인생의 자긍심을 잃을까봐 그런 소리는 안했다. 더 돌아다니기가 싫어서 그냥 웬만한 걸로 한 켤레 샀다.

그런데 굽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새 신발을 막 신기가 싫어졌다. 굽이 닳으면 또 사러 나가야 되잖아?

(4년 전에 티모도에 올렸던 글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에필로그

그때 산 신발을 정말 잘 신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지를 입을 때나 치마를 입을 때를 가리지 않고 막 신으며 정말 거의 매일같이 애용한다. 굽? 갈았다! 동네 구두수선 아저씨가 뒷축 닳은 곳만 삼각형으로 잘라내고 새로 붙여주었다. 구두 끈도 두 번이나 새로 샀다. 구두약 발라서 잘 닦아놓으면 아직도 새 신발 같다. 앞으로 6년은 더 신으리라. 아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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