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보다 수명이 긴 아파트를 꿈꾼다. 잠시 쓰고 버리고 또 새로 짓는 소모품이 아니라 부모, 조부모의 추억이 담기고 어린 시절에 교류했던 이웃의 냄새가 배어 있어 영원한 고향이 되어주는 아파트를 상상한다.

건물은 오래되었지만 설비는 항상 최신식인 아파트, 낡은 벽체에 단열재를 두텁게 붙이고 삼중유리로 단열창을 달아서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아파트, 난방비와 전기비가 절약되어 살기에 부담 없는 아파트, 철거하고 새로 짓는 아파트보다 돈도 덜 들고 환경에도 이로운 그런 아파트…. 머지 않은 장래에 지구의 연료가 동이나기 시작할 무렵에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런 아파트에 살게될지도 모른다.

폭등하는 연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아파트 주민들은 자가용을 없애고 자동차조합을 만들 것이다. 백 가구의 주민들이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갈 때나 크게 장을 볼 일이 있을 때 빌려 쓰는 조합 자동차는 단 몇 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예전에 각 가정이 자가용을 굴릴 때에 비하면 자동차 운영비가 훨씬 덜 들어 삶에 훨씬 여유가 있을 것이고, 자동차 장만과 수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마음도 편할 것이다. 아파트 주차장이었던 자리에는 주민들이 깻잎과 오이와 고추를 심어, 저녁이면 밥과 고추장만 들고 나와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로 붐빌 것이다.

매일 저녁 아파트 앞 공터에 나란히 돗자리를 깔고 앉아 오이와 깻잎을 바꿔먹고 고추장을 권하다보면 어느새 이웃과 친구가 될 것이다. 식사 후에 젊은 부부들이 근처의 호수로 산보를 다녀오는 동안 돗자리 위에 촛불을 밝혀 놓고 아이들을 불러모아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핵가족에 길들은 아이들은 그 맛에 저녁시간을 기다릴지도 모르고, 핵가족이 외로운 노인들에겐 그 저녁시간이 일상에서 가장 즐거운 휴식시간이자 의미 있는 노동시간일지도 모른다.

저녁이면 옆집 노부부와 눈을 맞추는 아이는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가 집에 없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옆집 초인종을 누르게 될 것이다. 밖에서 일을 보다말고 헐레벌떡 돌아온 엄마는 옆집에서 간식 먹고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며, 다음에는 밖에서 일을 마저 다 보고 느긋하게 돌아올 것이다. 그 대신 노부부의 장을 봐다 주고 병원에 모셔다드릴 것이다. 윗집 아랫집에서는 청소와 피아노레슨을 교환하거나 만두와 김치를 바꿔 먹을지도 모른다.

이왕 모여사는 김에 사람이 모여 사는 덕을 제대로 보자고, 명절이면 따끈한 떡을 공동으로 뽑아와 나누고, 김장철이면 배추와 고추가루를 공동구매하고, 철철이 야채와 과일을 현지에서 날라와 나눠먹으면 얼마나 이익일까? 아이들이 학원에 가는 대신에 텅빈 지하주차장에서 공을 차거나 고무줄을 하며 놀 수 있다면, 그 한 귀퉁이에 아이들 공부방을 만들어서 부모들이 돌아가며 숙제를 봐주고 간식을 만들어준다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의 삶이 여유로워질 것이며 얼마나 많은 어린 영혼들이 제대로 숨쉬며 사는 세상이 올 것일까?

그렇게 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아파트 밖에 있는 이웃의 불우한 처지도 눈에 들어올 것이고, 그들을 공동체 안에 가볍게 포함시켜 덤으로 도와주는 방법도 떠오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좀 훤히 보이는 법이어서, 이 사회에서 부당하게 군림하는 무리에게 대항하여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나갈 것이고, 또 우리 밖에 있는 남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우리가 뭉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수와 위치에 따라 어느 아파트가 좋은 아파트인지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자치성과 적극성에 의해 그 아파트의 가치가 시시각각 변하는 아파트, 소수 열성 주민의 노력과 다수 대중의 인간성이 그들이 사는 아파트의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아파트를 나는 꿈꾼다. 막연히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지 않은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희망을 야무지게 키운다.

오늘날 유럽에서 고층아파트는 인간미 없고 값싼 거주형태로 통한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저런 한국형 아파트는 아마 세계인의 선망이 될 것이고 미래의 지침이 될 것이다. 강이고 산이고 지구의 자원이고 할 것 없이 자손 몫까지 파렴치하게 말아먹고 가는 우리 세대에서 저런 아파트의 꿈이 실현되어야 우리가 좀 덜 부끄러울 터인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잡지에서 글 하나 써주면 유기농 현미 4kg 준다길래 한국 어디 보내주고 싶은 데가 있어서 쾌히 써드린 글입니다. 요즘 제가 글을 많이 못 써서 죄송해요. 이제는 잘 쓸 시간이 없으면 일기 형식으로라도 자주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