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 발목이 잡힌 것은 순전히 닐니리맘보 때문이었다. 꽃분홍 실크 브라우스 박종선 아저씨의 닐리리맘보만 아니었어도…

한인회 회장을 맡은 순희 언니가 내게 전화해서 한인회 추석잔치를 도와줄 수 있을지 물었을 때 나는 차마 바빠서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밤근무를 하면서 한인회를 이끌고 있는 언니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독일 사람인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건강이 안 좋아서 골골하던 남편은 순희 언니네 아저씨 혼자서 그 많은 식탁과 의자를 끌게 할 수는 없다며 자기가 먼저 승낙해 버렸다.

막상 잔치날이 되었을 때 나는 미리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넘어가도록 책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4대강사업 국민소송에서 정부측 위증을 증명하는 독일 자료를 날짜 맞춰 번역하느라고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기다리다 지친 남편은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먼저 가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단 가서 준비만이라도 도와주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헐레벌떡 잔치 장소에 도착했다. 시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벌써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아까 버럭 화내면서 먼저 나간 것이 마음에 쓰여서 남편부터 찾았더니 보이지 않았다. 남편도 늦게 온 탓에 도와줄 일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순희 언니네 아저씨가 무대 위의 태극기를 반듯하게 고쳐 달면서 “그 사람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길래 마침 그 쪽 방향으로 가는 차편이 있어서 돌려보냈다”고 마치 큰형처럼 푸근하게 말했다.

남편도 못 도와줬다면 그 많은 탁자들과 의자들을 대체 누가 날랐단 말일까? 몇몇 언니들이 그 무거운 것들을 손으로 들어서 날랐는 것이다. 올해는 도와줄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일찌감치 나와서 슬슬했다며 영호 언니는 생색도 내지 않고 순하게 웃었다. 나는 언니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언니들은 구박은거녕 오래간만에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다고 나를 얼싸안았다.

홀에는 탁자며 의자들이 정렬되어 곱게 물든 단풍 장식을 이고 앉아 추석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부엌에선 잔치 음식을 커다란 쟁반에 소담스럽게 담아내왔다. 잡채, 삼색나물, 고기, 생선전, 야채전, 오징어 무침, 김밥, 김치, 깍뚜기가 뷔페 상을 가득 채웠는데도 음식쟁반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독일의 한인잔치를 빛내주는 올디 가수 박종선 아저씨가 시작 전에 몸풀이로 부르는 흘러간 옛노래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서로 어울려 나를 유혹했다. 가지 마, 가지 마.

나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4대강이 생각나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일어나려는 순간 나를 다시 주저앉힌 것은? 닐니리 니일니리 닐니리맘보오 풍짜풍짜~ 내 몸이 저절로 끄덕거렸다. 하필이면 왜 이 노래인지, 닐리리맘보가 내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기억도 안 났지만 난 순간적으로 신나게 춤추며 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 나는 원도 없이 춤을 췄다. 음악에 맞춰 사교춤을 추는 나이 지긋한 한독 거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먼저 가버린 남편을 아쉬워하던 나는 맞은편에 앉은 꼬마 총각이 음악에 맞춰 끄덕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꼬마 총각 손을 잡고 앞으로 와다다다 뛰어나가서 우아한 커플 옆에서 개다리춤을 마구 췄다. 꼬마 총각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한인회 임원 언니가 뒤에서 음료수 팔다 말고 혼자서 몸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언니를 무작정 앞으로 끌고 나왔고, 그날 처음 한인회 잔치에 나온 명주가 그걸 보고 센스 있게 얼른 쫓아가서 음료수 판매를 맡았다.

명주와 현정이는 그날 한인회 잔치에 처음 나왔다. 글을 통해 만난 우리는 서로 좋게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 만날 시간이 없어서 늘 아쉬웠다. 제대로 한번 만나자고 벼르기만 하면서 몇 년을 보내느니 일년에 두 번씩 한인회 잔치에서 얼굴이라도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 적이 있는데 그날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그냥 얼굴만 봤어도 기뻤겠지만 그 와중에 우리는 흘러간 옛 사연을 풀어놓으며 서로 남의 일에 감동해서 찔끔거리며 울기까지 했으니 한인회 잔치를 그야말로 알뜰하게 활용한 셈이다.

현정이가 물었다.
“언니, 저기 어린아이 안고 있는 젊은 부부 있지, 누군지 알아?”
“한인회 잔치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난 누군지 모르겠어.“
현정이는
”그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그 커플을 손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통성명이 이루어지고 신상정보가 교환되었다. 다음 음악이 나오자 그 부인이 와서 현정이에게 춤을 청했다. 나는 너무나도 시원하고 신선한 현정이의 태도에 존경의 눈길을 마구 퍼부었다. 몇 년이나 한 가족이 와서 혼자 놀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눈인사 외에는 따스한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독일식 예절이랄까 독일인 특유의 망설임이 어느새 내 몸에도 배어 있었다.

한국에서 산 시간의 두 배가 훨씬 넘는 37년의 세월을 독일에서 보내고 있는 나. 나는 한국인들과 늘 접촉하며 산 것은 아니지만 한인회 잔치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언젠가 친구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게 물었다. 어려서 한국을 떠나서 독일 사람처럼 살면서 한국에 대한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 보이는 내가 한인회 잔치에 열심히 쫓아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당장 내게 필요한 모임은 아니라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모임이라면 지지하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평생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한인회 잔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필요할 모임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게 당장 필요한 모임이었던 것 같다. 독일인들과 경쟁하며, 또는 그들에 동화되어 사는 동안 어느새 내 몸 안에 스며든 독일식 정서를 털어버리고 하루 저녁만이라도 옛날의 정서로 돌아가 보는 후련한 굿판이었던 것이다. 이런 굿판을 통해 정기적으로 영적인 해방감을 맛보며 다시금 독일 생활에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편인 나는 우리 아이들을 독일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키웠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은 크면서 나름대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이 한국인의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별 문제가 없다. 우리 아이들이 가볍고 따스한 한국식 정서를 한인회 잔치를 통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었다.

늙어서 치매가 들면 나중에 배운 언어를 잊어버리는 수도 있다고 한다.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평생을 함께한 독일인 배우자와 자식들도, 한국에 사는 부모 형제도 소용이 없다. 오직 같은 도시에 사는 한인들만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모국어로 말 붙여주며 김치라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고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뮌헨에서 만난 언니들, 동생들과의 인연을 각별하게 여긴다. 우리는 극한상황이 닥치면 서로에게 가족 이상으로 의지가 되어줄 사람들이다.

곧 있을 한인회 설잔치를 생각하면 나는 즐겁다. 이런저런 이익을 떠나서 그냥 즐겁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들을 만날 일이 즐겁고, 한국식 잔치 음식을 먹을 일이 즐겁고, 춤추고 놀 일이 즐겁다.

그리운 님들! 2월 12일에 뮌헨에서 만나요, 닐니리맘보~


뮌헨 한인회 설잔치는

2011년 2월 12일 토요일 오후 5 시

Pfarrsaal der Kreuzkirche in der Hiltenspergerstr. 55, 80796 München (U2 Hohenzollernplatz 하차)에서 열립니다.

신순희 회장님(Tel. 089-848532)이나 한인회 홈피(http://www.haninhoe-muenchen.de)에 문의하시면 친절하게 안내해드립니다.

지난 해 마음만 있었지 사정이 안 되어 만나지 못한 친지들과 한인회 설잔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