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잘 쓴 사설을 발견했습니다. 짧고 정제된 언어로 정곡을 찌르는, 속 시원한 글입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내용인데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퍼옵니다. 부디 널리 읽혀지기를…


한겨레 [곽병찬 칼럼] 엠비, ‘더 파이퍼’

2008년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르코지, 무엇의 이름인가>라는 저서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을 ‘쥐 사나이’(Rat Man)에, 그 추종자들은 ‘쥐들’(rats)에 비유했다. 쥐 사나이는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강박신경증에 걸린 한 환자에게 붙인 코드명이었다. 환자는 내면에선 아버지가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면서, 이런 심리를 감춰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아버지의 건강을 병적일 정도로 걱정했다. 바디우는 속으로는 자유·평등·박애의 가치를 혐오하면서도, 이런 혐오를 감추려 일상적으론 엄격한 도덕주의를 표방하는 사르코지에게서 쥐 사나이를 본 것이다.

‘쥐들’은 북유럽에 전승돼온 피리 부는 사나이(The piper) 설화와 관련돼 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팝 그룹 아바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더 파이퍼’로도 유명한 이 설화는 피리소리로 쥐들을 현혹해 죽음의 호수로 끌고 가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다. 아바는 경쾌하고 싱그러운 멜로디의 춤곡으로, 당시 곳곳에서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는 파시즘과, 그들의 선동에 현혹돼 죽음의 춤을 추는 무리들을 풍자한 것이다.

아바가 1970년대 유럽 팝계를 석권한 것은 단지 뛰어난 가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과 이를 경쾌한 리듬에 담은 음악적 표현력이 그들을 당대의 전설로 만든 것이었다. “그(더 파이퍼)는 그들에게 미끼를 던졌다/ 그는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의 눈은 야망으로 불타올랐고/ 그의 손은 공포의 무기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가 계속 피리 불기를 원했다/ 그들의 영혼은 사라졌다.” 노래 속에서 반복되는, 달 아래서 열광한다는 뜻의 라틴어 후렴 ‘Sub luna saltamus’는 영혼이 없는 자들의 광기를 상징한다.

쥐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긴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정부의 검찰은 최근 ‘쥐20’ 낙서를 기소까지 했으니, 더욱 신경질적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긴장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에선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신경강박증 환자 혹은 쥐 사나이에 비유했음에도 바디우를 기소하지도, 구속영장을 청구하지도, 심지어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더군다나 쥐 사나이를 통해 그들의 주군을 떠올리게 할 의도는 더더욱 없다.

다만 설을 앞두고 그가 다시 한번 과시한, 그의 성실한 추종언론들조차 비판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낯간지러운 피리 불기와 국민 사랑을 짚고 싶을 뿐이다. 설 연휴 직전 방영된 이른바 대통령과의 대화는, 정치인이라면 한번쯤 욕심 낼 만한 이벤트다. 여론의 향배를 좌우한다는 설 민심을 잡는 데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파시즘 체제가 아니고서야 공중파 방송 전체를 일거에 정권 나팔수로 전락시킬 순 없는 일이다. 방송 3사는 ‘청와대 총국’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가 기획·연출·제작한, 감독 엠비, 각본 엠비, 주연 엠비의 엽기적인 프로그램을 그저 넋놓고 송출만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방송의 독립·공정·균형성은 공식적인 사망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피리소리에 광란의 춤을 출 자는 어릿광대 매체들밖에 없으니 딱하다. 이 대통령이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의 주치의에게 “침대에서 석 선장이 벌떡 일어나게 해달라”고 당부한 다음날, ‘일어나세요 캡틴, 여기는 조국 땅입니다’ ‘캡틴 조국서 다시 한번 여명을…’ ‘아덴만 영웅, 일어나 여명을 보라’ 따위의 낯간지러운 기사를 쏟아낸 언론들 말이다.

지난해와 비교해 채소는 3배, 돼지고기·쇠고기는 2배씩이나 올랐는데, 치솟는 전셋값 때문에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데, 전국토가 생때같은 가축들의 생매장터로 변했는데, 돌지 않고서야 누가 개헌 따위의 날라리 소리에 도취될 것인가. 그 장단에 맞춰 깨춤을 출 것인가. 덜 보이는 게,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이나마 편케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깨달을까.

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