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법륜 스님이 뮌헨에 오셨을 때 “좋은 직업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으로 법문을 여셨다. 첫째, 본인에게 재미있고 둘째, 돈이든 명예든 대가가 있어서 보람 있고 셋째,

세상에 해롭지 않은 않아서 의미 있는 일이란 말씀에 나는 입이 헤벌어지고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뒤에 앉은 김 선생님을 돌아보며 씩 웃어보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법문이 끝났을 때 김 선생님이 내게 한마디 하셨다. “아까 좋은 직업에 대한 말씀이 나왔을 때 자기 어깨를 툭툭 치고 싶었어.” 아응, 아까 뒤 돌아보며 자랑할 걸 그랬다.

이렇게 자타가 공인하는 나의 “좋은 직업”을 이 지면을 통해 자랑하련다. 유치원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쿵쾅거리며 복도를 내달린다. 내 이름을 부르는 꼬마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꼬마들은 매일 아침 누가 나보다 더 먼저 오는지 경쟁하느라고 엄마 아빠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우는 것도 잊어버린다.

유치원 동산에 눈이 쌓였을 때 나는 플라스틱 식탁보를 들고 나가서 꼬마들이랑 미끄럼을 탔다. 혼자서 썰매 타는 것은 택시, 여럿이 손잡고 타는 것은 기차, 대여섯명이 식탁보 위에 엉켜 앉아 소리 지르며 내려오는 것은 버스라고 부르며 놀았다. 꼬마들은 원래 좀 시끄러운데 눈미끄럼을 탈 때 보니까 내 목소리가 제일 컸다. 식탁보가 찢어져서 동료들의 눈총을 사긴 했지만 그 덕분에 썰매 타기를 무서워하던 두세 살짜리 아기들도 이젠 전부 각자 혼자서도 썰매를 탈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겐 성공적인 보육교사의 하루였다. 그날 아이들의 아이큐(지능지수)와 이큐(감성지수)는 각각 10점쯤 상승했을 것이다. 그까짓 식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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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질척하게 녹으면서 마당에 웅덩이가 생겼다. 나는 꼬마들에게 장화를 신겨서 내보냈다. 이런 날에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사람은 우리 유치원에 나밖에 없다. 꼬마들은 모래밭에 물길을 파고 댐을 만들면서 놀았다. 삽이 모자라서 나는 내가 먼저 맡은 삽을 꼬마들에게 양보하고 플라스틱 거북이로 땅을 파야했다. 그러다가 그것마저도 아이들에게 빼앗겼다. 봄이 오면 삽을 더 많이 사달라고 신청해야겠다. 얼음물에 빨갛게 젖은 고사리손은 얼음짱처럼 차가웠지만 꼬마들의 뺨은 사과처럼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보기 좋았다. 춥다고 옹송거리며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은 흙투성이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자녀들을 보며 기겁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보기 좋으냐”고 자랑스러워하자 덩달아 좋아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싶어서였을까. 뭔지 몰라도 아아들의 행복한 표정에 전염되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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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시절에는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바이에른 주 보육교사 지침서에도 명시되어 있다. 보육교사 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이론으로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내겐 그런 확신이 있었다. 내 자식들을 키울 때도 그랬지만 더 멀고 깊은 연유는 나의 성장 과정에 뿌리박혀 있다.

나는 교육과는 거리가 먼 유년기를 보냈다. 육이오 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촌 어른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아이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연을 벗삼아 사시사철을 밖에서 뛰놀며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짓도 많이 했다. 어른들이 시켰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일들도 우리는 놀이삼아 배우고 연습했다. 이렇게 우리는 어른들 몰래 온갖 위험한 짓을 다 해보면서 한계를 스스로 넘어가며 자신감을 키웠다.

전기도 없어서 등잔불에 커다란 바테리를 칭칭 동여맨 라디오를 벗삼아 밤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생리에 맞지 않는 불건강한 장난감이나 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일체의 자극이 없었다. 장난감은 없었으나,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함께 거둬 기르던 착한 마을이어서 동무들은 많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장난감인 동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개인에게 이익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쳤다.

나는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생전 처음으로 그림책을 받았다. 그때의 그 신비했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신데렐라 그림책은 아마도 그 동네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아동용 책이었으리라. 나는 어른만 보이면 책을 읽어달라고 쫓아다녀서 어느덧 신데렐라를 통째로 다 외우게 되었고, 동무들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주는 척하는 와중에 글자를 조금씩 깨쳤다.

나는 나의 혈육도 아닌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순한 성격에 몸집도 작고 목소리도 나직한 할머니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할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소위 까막눈이었지만 현명한 지성인이었다. 그때는 찬송가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교회에서 예배 볼 때 가사를 종이에 크게 써서 다 같이 보면서 찬송가를 불렀는데 할머니는 그러면서 혼자 한글을 깨치셨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나중에 소설로 쓰라면서 조근조근 벼라별 얘기를 다 해주어 나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발그스름한 아궁이 불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과 함경도 사투리의 나직한 목소리가 떠오르면 내 가슴은 아직도 따스해진다. 둥그런 아궁이 구멍으로 보이던 주황색 불꽃이 눈에 선하고 그 화력이 아직도 내 얼굴을 달구는 듯하다.

나는 평범한 아이었지만 할머니는 나란 존재를 신기하고 신비하게 여기셨다. 보통 어린아이들이 늘 하는 짓이라도 할머니는 참 재미있어 하며 자주 얘기하셨다. 할머니의 마음에 투영된 나의 상은 앞으로 채워져야 할 미완성의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 마땅한 특별하고도 괜찮은 존재였다.

나 역시 내게 맡겨진 유치원 꼬마들을 내가 교육시켜 완성시켜야 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누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육교사로서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스스로 발전하는 일을 다른 어른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 괜찮다고 여겨지는 어떤 상을 만들어 아이들을 거기에 끼워맞추려고 든다면 나는 미래를 살아갈 인간이 아닌 과거의 인간을 길러낼 수밖에 없다. 미래의 인간인 아이들은 그들의 세계를 밝고 건강하게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는데 나는 과거의 인간인 고로 그런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이들을 나의 과거식 잣대에 맞추려고 든다면 그것은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가지쳐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과거의 인간인 내가 미래의 인간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그들이 각각 풍기는 신기하고 신비한 느낌을 적절하게 표현해서 알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래를 창조하는 과업에서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뜻깊은 일은 아이들과 더불어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미래를 창조하다 지쳤을 때 따스한 추억으로 돌아와 쉬고 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창조하는 미래가 좀 더 인간적이고 따스할 수 있도록.

내게 있어서 아이들은 내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고유한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신비한 관찰 대상이자 재밌는 아이디어를 가진 놀이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과 즐겁게 놀 뿐인데도 나를 향한 그들의 사랑은 한량 없으니 난 참 복도 많다.

(월간문화지 “풍경” 3월호에 기고한 글을 다시 손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