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팔자야. 내 인생 암만 파란만장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아니, 내 이럴 줄 알았다.

처녀 총각 시절 함께 파티에 갈 적에 멀쩡한 길 놔두고 캄캄하고 험난한 덤불숲을 자전거로 내달리는 그의 꽁무니를 뒤쫓느라 여기저기 긁히면서 난 생각했다. 얘는 마조키스트인가? 참 공연히 피곤하게도 산다. 그때는 우리가 서로 사귀기 전이었는데 나는 이런 애가 내 남자친구가 아닌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기억력이 없는 죄로 난 그 애랑 사귀다못해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는 덤불숲 파티길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우리의 신혼집을 꾸미면서였다. 보통 독일의 임대주택은 텅 빈 상태에서 세를 주기 때문에 이사 가면 가구 일체는 물론 전등까지도 새로 달아야 하는데 새신랑은 완벽한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결정을 미루느라 이삿짐을 풀 수 없었다. 난 그때 엉덩이 붙일 곳 하나 없는 그 집에서 남산만한 배를 안고 얼마나 복장이 터졌는지… 침대 장롱 등의 가구 일체부터 심지어 쟁반까지 몇 년(!)에 걸쳐 다 제 손으로 만든다고 온 집안을 공사판처럼 어질러놓은 속에서 나는 아이들(!) 기저귀를 갈며 이도 함께 갈았다. 내 다시는 이 인간이랑 이사 가나 봐라.

그리고는 사느라고 바빠서 또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 독일 통일 후의 오랜 불황기를 아슬아슬하게 보낸 남편이 드디어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을 때 난 너무나 기뻐서 칼스루에에서 뮌헨으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신혼시절의 첫 이사 후 15년만의 일이다. 이사간 집의 가구를 고르면서 남편은 또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몇 달이나 뜸을 들였다. 나는 하루종일 눈을 부릅뜨고 이사짐 상자를 뒤져 살림을 하고 식구들의 물건을 찾아주느라 지쳐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남편은 번번이 트집을 잡고 찍자를 놓았다. 몇달 째 산더미처럼 쌓인 이삿짐 상자 속에서 나는 신혼의 악몽을 기억했다. 결국 그 집의 공간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구를 설계하고 직접 만드느라고 우리는 2년 이상 정열을 바쳐 싸웠다.

그로부터 꼭 15년이 흘러 내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시점에 피날레가 왔다. 그것도 쌍으로. 이 사건을 친정나라 독자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련다.

자유로운 인생을 추구하는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내 집 장만의 계획이 없었다. 나중에 어디 가서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한정 열어놓고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우리 세대의 노후가 연금만으로는 불안하니 다른 방법의 노후대책을 병행하라는 정부의 권고도 있고, 나중에 늙어서 민폐 끼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경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자각이 들어서 우리는 드디어 내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뮌헨 시내 빅투알리엔 재래시장 근처에 있는, 우리 마음에 딱 드는 고옥을 보통보다 싸게 구입했다. 싼 이유는 그 집에 세입자가 딸려있어서 그랬다. 임대주택 건물이 분할, 매각되는 경우에 기존의 세입자들은 향후 10년간 그 집에서 살 권리를 가진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세입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날 우리는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건설회사 직원의 말과는 달리 우리의 세입자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고령의 세입자는 더욱 각별하게 법으로 보호 받는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노인들에게 특별히 힘들다는 사실을 감안해서다. 우리의 세입자는 영원히 그 집에 살 권리가 있었다. 즉, 우리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던 그 집은 우리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음을 접고 지금 살고 있는 임대주택에서 노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리 소유의 주택에서 월세 받아서 우리가 사는 임대주택 월세 내면 경제적인 손실도 별로 없거니와 독일은 세입자의 권리가 잘 보장되어 있어서 셋집에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을 터였다. 독일에선 중산층을 비롯하여 총가구의 과반수 이상이 자기 소유가 아닌 임대용 주택에 살고 있다. 독일에는 전세라는 제도가 없다. 전부 월세다. 집의 위치, 상태에 따라 월세의 적정가격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가난한 가정에는 주거보조금이 지급된다. 총 가구의 1할이 국가로부터 주거보조금을 받고 있다. 가난한 사람도 숨을 쉬고 밥을 먹어야 하듯이, 가난한 사람도 인간답게 주거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나 어떤 국가정책도 월세를 함부로 올리거나 세입자를 쫓아낼 수 없다. 독일에선 한번 이사 들어가면 보통은 강산이 변하도록 그 집에서 산다. 세입자가 바로 그 공간의 주인인 셈이다.

아이들이 장성해서 집에서 나간 후 우리는 우리가 살던 임대주택을 노후의 보금자리로 꾸미기 위해 많은 돈과 정성을 들였다. 그 과정에서 회한의 순간도 많았다. “아, 건망증! 내가 뭐가 씌워서 이 남자랑 또 공사를 하는가? 결단코 내 생의 마지막 공사가 될 것이다. 난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안 나가련다.”

공사를 다 끝내고 좋아라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우리 소유 주택의 세입자에게서 등기우편이 왔다.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나가겠다는 것이다. 꿈에도 기대하지 못했던 최상의 시나리오였지만 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돈도 없고 싸울 기운도 없는데 그냥 계속 세 놓을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우리는 첫눈에 반했던 그 집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오래 손보지 않았던 집이어서 바닥, 벽 공사는 물론 가스, 수도 파이프 놓는 일까지 다 새로 해야 했다. 여태까지 셋집에서 실내장식이나 하던 수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편 성격에 기술자에게 턱 맡기고 다 알아서 해달라고 할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 전공도 아닌 분야를 자기가 다 챙기느라 신경이 곤두서서 옆에서 질문만 해도 행여 다른 의견을 제안할까봐 신경질을 버럭버럭 냈다.

남편만 괴팍했을까? 이번에는 나도 남편 못지않은 강적이었다. 내 전공이자 사랑이 고옥 아니었던가? 난 옛사랑을 만난 기분으로 내 집을 탐구했다. 천장 구조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속속들이 조사했다. 벽이 울퉁불퉁한 부분은 그 이유를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고, 그 이유를 안 후에는 기술자들이 직선으로 고쳐버릴까봐 내 손으로 직접 울퉁불퉁에 맞춰 미장을 했다. 옛날 집에는 비밀과 역사가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그 비밀과 역사를 지켜주며 현대 생활에 맞도록 공사하는 것이 후손의 미덕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어?

이렇게 남편과 나는 동시에 유난을 떨고 욕심을 내어 결정을 미루며 서로 타박을 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이젠 둘 다 가는귀가 먹어서 목소리도 천둥을 쳤다. 싸움하는 틈틈히 우리는 열심히 중노동을 했다. 기술자를 믿지 못하는 부분은 우리가 직접 손 댔다. 경험도 없으면서 기술자보다 더 잘 하려니 몸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직장에 매인 몸, 밤낮으로 일하는 사이에 반 년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일을 하면 할 수록 진척되는 속도가 줄어드니 이상한 일이었다. 기술도 늘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늘어나서 세세한 디테일에 집착하느라 그랬다. 이러다간 이사하기 전에 늙어 죽겠다 싶어서 나는 서둘러 이사 날짜를 잡았다. 남편이 펄쩍 뛰며 눈을 흘겼다. 우리 둘 다 직장 휴가까지 내고 공사에 매달렸건만 다 끝내지 못하여 우리는 결국 공사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요즘 우리는 2주일째 산더미 같은 이삿짐 상자에 둘러싸여 소파에서 잠을 자고, 욕실에서 설거지를 하고, 상자 위에서 커피를 마시고 출근한다. 렌지도 없도 냉장고도 없어서 저녁은 빵으로 때우거나 사먹거나 자식들 집에 가서 얻어먹는다. 난민이 따로 없다. 퇴근하면 벽을 미장하고 가구를 만든다. 이렇게 사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은근히 재미도 있다. 내가 우겨서 선택한 연두색 부엌 바닥에 톱밥이 뽀얗게 앉으니 정말 풀밭 같다. 욕실에는 칠하지 못해서 얼룩덜룩한 오리지널 문과 미장이 안 된 날벽이 내가 건축박람회에서 발견한 세련된 세면대와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냥 저렇게 둘까? 내 머리가 약간 어떻게 되었나? 혹시 남편에게서 옮았나? 나도 공연히 피곤하게 사는 마조키스트가 되었나?

PS 레몬트리에 이 글을 송고한지 2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공사판에서 야영 중. 약간 더 편안하고 우아하게 야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