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나는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졌다.

주말드라마 <황금빛 나의 인생>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방영되는 토요일이면 나는 한국드라마를 무료로 재방송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새 회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드라마가 따끈하게 새로 올라왔다는 빨간 글씨가 반짝이면 나는 부리나케 침대로 들어간다. 태블릿을 품에 꼭 안고. 감기 기운이 있어 좀 쉬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독일인 남편의 눈길에는 꿋꿋하게 “날 잡아잡수”.

하지만 고백하자면 여간 남편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남편은 이 세상 모든 드라마는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넋 놓고 드라마 보는 나같은 사람을 백해무익한 취미를 가진 의지박약아 정도로 여긴다. 실은 예전에는 나도 그랬다. 우리집에 TV가 없었던 이유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TV 앞에 앉아 시간 낭비 하는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에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바른생활 공식을 따르며 참 숨가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인터넷 서비스가 빈약했던 시절이라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씨디를 구해와서 돌려보았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몇날 밤을 새우느라 폐인이 된다고 했다. 폐인! 무서워라. 밤에 잠 안 자고 낮에 어떻게 일하나? 드라마 근처에 가지도 말아야지. 누가 드라마 씨디를 빌려준다는 말만 해도 나는 행여 폐인병이 옮을까봐 손사레를 쳤다.

그렇게 폐인병을 무서워했건만 결국 나는 폐인병에 걸렸다. 한국 드라마가 아닌 한국 사대강사업 때문에… 독일을 모델로 했다는 사대강사업은 독일에 사는 내가 보기에 처음부터 거짓투성이였고 그런 사실을 한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나는 밤 새워 글 쓰고 번역했다. 밤에는 사대강사업에 매달리고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가는 생활이 몇 년이나 지속되면서 사람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터넷을 통해 뭉친 <번역연대> 친구들이 함께 밤 새워 작업하고 낮에는 다들 헤롱헤롱 일하러 나갔다.

정부를 상대로 사대강사업 진실게임을 벌인 일은 무모했지만 자랑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는 여러가지 손해를 기꺼이 감수했는데 그 손해 중 하나는 오랜 기간 한국어를 집중해서 쓰는 사이에 나의 독일어 실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일이다. 언어체계가 완전히 한국어로 돌아서서 어디 가서 내가 독일에 40년 살았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독일어가 어눌해졌다.

사대강사업이 일단락 나면서 내 일상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의 영혼은 다시 독일로 돌아오고 독일어가 다시 나의 주요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 대신 한국말 실력이 줄었다. 평소에 한국말을 전혀 안 쓰다가 갑자기 한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면 나는 내 한국말이 어눌해서 민망했다. 언제 어디서나 독일말과 한국말을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하던 <번역연대> 친구에게 비결을 물었다.

“버들아, 너도 평소에는 독일말만 쓰고 살 텐데 어떻게 갑자기 한국말이 술술 잘 나와?” “연습해서 그래요. 한국 드라마 보면 한국말이 늘어요.” 아, 그 비결이 바로 연습이었구나. 하지만 하필이면 드라마라니… 폐인 된대매… 어떡해…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한국 드라마는 녹록치 않았다. 배우들이 한결같이 백옥같은 피부에 다들 빼박은 듯 비슷하게 잘 생겨서 누가 누군지 헷갈렸다. 늘 좋은 옷만 입고 밤에도 화장하고 자는 여배우들의 모습엔 현실감이 없었고, 내용 또한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무슨 재벌이 이리도 많은지. 재벌집 아들은 다 이렇게 멋있는 순정파인지. 내가 사춘기 때 본 만화 <캔디 캔디>를 벗어나지 못한 뻔한 스토리도 식상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폭력적이고 과장되게 느껴졌다. 툭하면 고함치고 손 올라가는 남자들과 괜한 일에 소리 빽빽 지르는 여자들의 히스테리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누가 볼까 부끄러워 볼륨을 줄였다. 남편이 지나가다 들으면 “아이아이아이, 또 무슨 난리가 났나?” 하고 비웃을 것이기에.

나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단지 어학공부하는 마음으로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3분짜리 동영상을 이것저것 마구 눌러 대화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짜릿한 묘미를 주는 장면이 발견되기도 하고, 다음 전개가 궁금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열심히 찾아서 끝까지 다 보고나서 내가 빼먹은 앞 부분이 궁금해서 처음부터 찾아보는 일도 생겼다.

얼굴을 익힌 배우가 한둘 생기니 등장인물 헷갈리는 일도 줄어서 줄거리 파악이 쉬워졌다. 한국 드라마 특유의 전개방식과도 친해졌다. 중요한 장면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이 처음에는 만화영화같이 낯설고 우스웠는데, 이제는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장면을 알아서 다시 보여주는 제작진의 배려심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미생>을 보면서 비인간적이고 고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과장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한국의 현실이 정말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잘 몰랐던 사회상을 드라마를 통해 공부한 셈이다.

한국드라마 몇 편을 보는 사이에 시청자로서 나의 경지도 일취월장했다. 이젠 유투브에서 조각난 동영상을 맞춰보며 줄거리를 짐작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방영되자마자 인터넷에 올려주는 동영상을 통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거의 본방사수의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드라마 세상에 푹 빠져서 일상을 잊는 휴식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도 알게 됐다.

한국드라마의 휴식 기능은 참으로 뛰어나다. 숨가쁘게 전개되고 반전이 많으니 나도 모르는 새 빠져들어 다른 일은 금세 잊게 된다. 예쁜 사람, 좋은 물건, 높은 계층의 신기한 행동양식 등 진기한 눈요깃거리가 많고 기발한 대사가 흥미롭다. 살아 생전 절대 내 세상이 될 수 없는 그 세상이 마치 내 세상인 듯 몰입하는 일은 감미롭다. 좋은 사람은 잘되고 나쁜 사람은 망하는 권선징악의 동화적 요소가 동화보다 더 즉각적으로 적용되기에 보는 사람 속이 편하다. 약한 놈에게 나쁜 짓 한 놈은 더 강한 놈이 금세 나타나 응징해주니까. 게다가 해피앤딩이 보장되어 있어서 긴장하는 한편에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심장이 쫄려도 느긋하게 쫄린다.

그렇게 적응이 안 되던 한국 드라마가 내게로 들어온 것은 인생을 사는 나의 자세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틈만 나면 공부하고 일하는 숨가쁜 삶의 공식을 이제는 내려놓고, 한 박자 쉬어가는 삶을 소중히 여기려는 노년의 노력 덕분은 아닐런지?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빈다는 말이 있다. (김제동씨 미안하오. 제가 대신 사과 드립니다.) 웃으며 쉬라고 만드는 드라마를 인생 모범답안에 비추어 분석하며 죽자고 꼬투리를 잡았으니 드라마인들 나랑 친해지고 싶었겠는가? 내가 바뀌니 드라마도 이제는 내게 휴식을 선사하는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게다가 외국에서 갑자기 한국말해야 할 때 술술 잘 나오는 효과도 있다니 뭘 더 바랄까?

내겐 남이 모르는 드라마의 순기능이 하나 더 있다. <태양의 후예>가 방영될 당시 한국 남편들에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남자 주인공이 너무도 잘 생기고 남자답고 다정한 덕분에 대한민국 남편들이 그와 비교되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드라마 방영시간에 TV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부인 눈에 띄는 어리석은 남편은 가차 없이 씹다 만 오징어 취급을 받았다나? 근데 나는 좀 다르다. 멋진 남자 배우가 자꾸만 나의 남편에 오버랩되는 것이다. 외모, 성격, 실력면에서 완벽한 남성상을 그려내는 그 배우와 내 남편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나는 남편과 함께 보낸 35년 기억 창고를 뒤져서 남편이 그 언젠가 보여주었던 그 어떤 공통점을 귀신같이 발견하고 감동하는 것이다. 내가 푼수마누라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한 편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남편은? 남편은 자기가 무시하는 한국드라마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걸 짐작이나 할까? 아니다. 믿었던 마누라가 노년에 드라마 따위에 투항하는 모습에 자괴감과 배신감이나 씹고 있을 뿐, 드라마로 인한 자신의 이익에 대해선 깜깜한 것 같다.

바로 엊그제의 일이다. 중후하고 섹시한 장년의 재벌회장과 젊고 스마트한 순정파 영화감독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 때문에 나도 마음이 아주 어지러워졌다. 아, 어떡하지? 둘 다 멋있는데? 그 순간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휜칠하고 인자하게 늙은 내 남편, 바로 두 남자를 합쳐 놓은 상이었다! 나는 감격에 겨워 남편의 부드러운 턱살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꿈을 깨는 퉁명스런 버럭.

“왜 꼬집어?” “아이 깜짝이야. 꼬집은 거 아니야. 당신 좋아서 애무한 거야” “어느 놈 생각하면서?” “?” “드라마에 나오는 누구 생각했냐고?”

이크, 실수했다. 그 배우들 영상 괜히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