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소담스럽게 왔다.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쓰고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의 뺨이 소년처럼 발그스름했다. 미라는 그의 찻잔에 차를따랐다. 그는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나게 키스했다. 찻잔에서 김이 올라와 촛불에 일렁거리다가 클레츠머의선율에 흡수되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그는 문의가 들어온 건물에 대한 고문서를 발견했느냐고물었다. 그녀는 자료를 정리해서 보고서를 쓰는 중이라며, 운이 좋으면 내년에 돈을 버는 일거리로 연결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그가 손을 뻗쳐 장하다는 듯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그리고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
“응? 실수였어? 그럼 어때? 우리 마음대로 잘 살았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실력에 비해서 이 사회에서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 있어.”
“그렇지? 이 사회가 내 실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있지? 괜찮아. 그나마 실력이 있으니까 이만한 대접이라도 받고 사는 거 아냐?”

그가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더니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는 시늉을 하였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뺨에 난흉터가 크게 보였다. 공연히 가슴이 따스해져서 그녀는 그 흉터를 손가락으로 살살 만졌다. 그 옆에 깊이 패인 주름살도쓰다듬었다. 그녀는 양 팔을 그의 목에 감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우리가 인생에서 잘못한 것도 많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건 다 성공했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성공한 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거라고 개념 짓는 것일 뿐이야.”

정다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화답을 기대했던 미라는 건조한 그의 대꾸에 흥이 확 깨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자기만의 거짓말을 만들어. 자기 인생이 뜻있는 것이었다고 믿기 위해서.”

그녀가 샐쭉해서 팔을 빼며 종알거렸다.
“자기만의 거짓말이면 어떻고 거짓말이 아니면 어때? 난 그래도 행복해. 당신은 그걸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뿐이고, 나는 그걸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뿐이야.”

그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자기 목에 다시 걸었고, 그녀는 아예 그의 무릎 위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

눈이 그쳤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뽀드락뽀드락 눈을 밟으며 밤길을 걸어 산책을 갔다. 가로등에 비친 하얀 눈천지는 어렸을 때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본 동화의 나라를 연상시켰다. 미라는 고개를 돌려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골똘한 표정으로 보아 그는아마도 무슨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느꼈는지 그가 돌아보았다.

“왜 웃어? 당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이미 알아들었다. 어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로 그녀가 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딴청을 했다.
“눈이 와서 웃었어?”
“응, 눈이 쌓인 밤거리도 예쁘고, 또 당신이랑 밤에 걷는 것도 행복해서. 그리고 아직도 내가 당신에게 매력 없는 여자인가도 생각해 봤어”

언젠가 미라가 그에게 사소한 사랑의 표시를 일상에서 보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그녀에게서 다시 성적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간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사랑스럽게 대할 수없었다는 뜻이었으나 그녀는 모욕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솔직함에 고마움을 느꼈고, 그들의 관계에 희망을 느꼈다. 그들은미라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나면 춤이라도 함께 배우기로 약속해 둔 터였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매력 없다고 말한 적 없어.”

남편의 선별적 기억력을 잘 아는 미라는 선선히 넘어갔다.
“맞아, 우리는 그간 사느라고 바빠서, 자신의 매력을 거꾸로 쥐고 그걸 무기 삼아 상대방을 찌르고 있는 것도 몰랐어.”
“우리 앞으로는 잘할 거야, 미라.”
그들을 걸음을 멈추고 가벼운 키스를 나눴다.

밤산책에서 돌아온 미라는 속이 불편했다. 아까 속이 거북하여 저녁을 드는둥 마는둥 한 탓에 배가 고파서 그런가 하고 부엌으로향하던 미라는 급하게 몸을 돌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헛구역질에 속이 뒤집히고 눈물이 나왔다. 뒤쫓아온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눈으로 물었다. 그녀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
“어휴,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좀 있으면 폐경인데.”
그녀가 양치질을 하다 말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웃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자각한 여성의 몸이 막판에 호르몬을 왕창 투자하여 성공하는 것, 그게 종족보존의 자연스러운 이치 아니겠어?”
“내가 뭐 젖소인줄 알아? 종족보존만 하다 가게?”
그녀는 칫솔을 휘두르며 거울 속의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제일 잘했다고 자부하는 게 뭔 줄 알아? 당신하고 같이 아이들을 키운 것. 아이가 하나 더 생기면, 우리 또 잘 할 것 같지 않아?”
“잉, 난 싫어. 애들이 커서 난 이제 좀 살 만 하거든. 일도 하고 싶고.”
그녀가 우는 소리를 해도 그는 계속해서 빙글빙글 웃었다.
“아니, 일부러 만들자는 건 아니고, 혹시 실수로 생긴다 해도 나는 기쁘다는 말이야.”

가슴이 뜨끔하게 찔렸다. 그것이 두려움으로 이어지자, 눈 앞에 노란 불빛이 사방으로 튀며 현기증이 일었다. 미라는 남편을 향해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되도록 침착한 걸음걸이로 침실로 갔다. 무언가 심상찮은 기미를 알아챈 남편이 따라 들어왔다.그녀가 무너지듯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가 봐. 혹시 다른 병이 난 건 아닌가 검사해 봐.”
“응.”
“그리고 말이지, 내가 아까 한 말에 부담 갖지 마. 만약에 임신이라면 마지막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는 거야. 당신의 인생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테니까. 알았지?”
“응, 고마워.”

미라는 어둠 속에서 수없이 손을 꼽아 보았다. 두 남자와의 동침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연달아 일어난 일이므로, 누구의 아기인지계산으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절망감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정말로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일을 막아 준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간절히 빌었다.가능하다면 타임머신이 아닌 악마라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그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은 중년의 미라는 마치 생전 처음 산부인과에 와 보는 여자처럼 금속성의 진찰을 수치스러워하며 허둥댔다.

“축하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산부인과 의사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의사를멀뚱하니 쳐다보았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청천벽력을 듣는 것 같기도 했고,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듣는 것처럼 당연한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인 점을 고려하여 양수검사를 권장한다는 등 의사가 몇 가지를 더 얘기했지만, 모든것이 미라에게는 꿈결처럼 아득하게만 들렸다.

무슨 정신으로 옷을 찾아 입고 병원을 나왔는지도 몰랐다. 휘청휘청 길을 건너다가, 차가 바로 옆에서 급정거하는 장면을 마치 영화보듯이 무심하게 구경했다. 운전자가 자기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그냥 차에 치어서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생각했다. 가까스로 되찾은 행복이 그녀 대신 차에 치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남편이 퇴근했을 때 미라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병원에 다녀왔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보고서 쓰는 일이바빠서 아직 못 갔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일은 꼭 가 보라고 당부하듯이 말했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저녁에 남편은 그녀에게 같은 말을 물었고, 미라는 또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남편은 임신이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병이났을지도 모르는데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눈을 부라렸다.

며칠 후, 미라는 할 말을 신중하게 준비해서 그 병원에 다시 갔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인상이 온화한초로의 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나이로 보아 그런 사실이 이해가 간다며, 그녀가 원한다면 건강상의 이유를들어 합법적인 낙태를 위한 소견서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말했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겠어요. 그것을 먼저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의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그것은 기형여부를 검사하는 양수검사를 할 때 함께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임신 16주 경에나 가능하지요.”
“그렇게나 늦게요?”
“친자확인만을 위한 양수검사는 법으로 금하고 있어요.”
그녀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병원을 나왔다.

16주라면 아기의 모습이 초음파로 선명하게 잡히는 때라는 걸 미라는 기억하였다. 가방을 뒤져서, 며칠 전에 첫 진찰 때 의사가건네 준 초음파 사진을 처음으로 꺼내어 들여다 보았다. 흑백이 어지러운 가운데 달걀모양의 까만 자궁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 안에하얀 점 하나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오늘도 병원에 다녀오지 않았느냐고 시비조로 묻는 남편에게 미라는 말없이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남편은 잠깐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너무 오래 그녀를 안고 있어서 그가 우는가 싶은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얼굴 전체로웃고 있었으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축하해, 애기 엄마!”
그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코를 풀고 나서 그녀의 등을 쓸며 말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나는 당신도 기뻐할 줄 알았는데, 당신은 불안한 모양이지? 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것도 그렇고 우리 나이도 있고, 여러모로 아기를 낳아 기르기에 부적합한 상황이잖아?”
“괜찮아. 아기를 낳기에 적합한 상황이 어디 있어? 계획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저질러진 일이잖아?”
“왜 당신이 결정해? 당신은 나 보고 결정하라고 그랬잖아?”

출산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는 것이 불만스러워 그녀는 볼멘소리를 했다.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며칠 전에 당신이 그랬어. 첫눈 오던 날.”
“내가 낙태의 가능성을 얘기했단 말이야? 아이를 낳아 기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

남편이 말을 바꾸더라도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미라는 더이상 시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좀 더 절망감에빠진 기분이 들었다.

탁한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으로 며칠을 보낸 후, 미라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파올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이렇게빨리 연락하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 듯 그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라는 되도록 평이한 어조로, 할 말이 있으니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궁금해 하는 눈치였으나 더 물어보지 않고 약속장소와 시간을 의논했다.

미라는 오래간만에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집을 나섰다. 도시에 내린 눈은 먼지를 먹어 순결을 잃었으나, 난데없이 새파래진 하늘아래 비현실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파올로는 카페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걸어 오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의눈에는 그리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파올로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양 뺨에 차례로 가벼운 키스를 하였다. 예민해진 그녀의 후각에그의 냄새가 상큼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자리에 앉자 파올로는 웃음 띈 얼굴로 미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다시 만나자는 의도를 그가 달리 추측할 수도 있다고생각했으므로 미라는 그가 일상적인 인사를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파올로, 나 임신했어.”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잠깐 침묵했으나 미라에겐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으나미세하게 떨렸다.

“누구 아이?”
“몰라.”
“우리는 피임을 했잖아?”
“남편이랑도 피임을 했어.”
“날자를 계산해 볼 수 없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간격이 짧아서 불가능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느라고 말이 중단된 걸 미라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종업원이 가자 파올로가 급하게물었다.

“미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친자확인은 앞으로 두 달 후에나 가능해, 파올로.”
“누구의 아기인지 아는 게 급선무겠군. 모든 다른 일은 그 후에나 결정해야 할 것이고.”
“무슨 결정?”
그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되물었다.
“남편은 사실을 아나?”
“임신 사실만 알아. 그는 기뻐하고 있어.”
그의 얼굴이 난감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제기랄!”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격한 감정표시에 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미라. 미라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일이 복잡해져서 당황해서 그래.”
“알아, 네가 나한테 화낼 이유가 없다는 거. 나도 일이 복잡해져서 죽고 싶어.”

둘 다 남의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서로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그들은 감정을 조금 낭비한 후에야깨달았다.

“우리 일어날까, 파올로? 이제 알았으니, 각자 생각을 좀 해 보아야 하지 않겠어?”
“내가 생각해 볼 게 뭐가 있어? 내게 결정권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는 그가 그날 끝내 낙태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결정을 해야 하는 의무에서만 사람이 생각하나 뭐?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생각이 필요하잖아?”
미라가 부드럽게 말했고, 파올로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작별인사를 하면서 힘차게 부둥켜안았다. 공범이 있다는 사실은그녀를 덜 외롭고, 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가엾은 미라. 조심해.”

미라는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돌아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못해 위태롭게 보여서 미라는 그가 보이지 않게 될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며칠 후 파올로가 전화해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침착하고 단호했다. 미라는 그냥 고맙다고만 했지 그가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겠다고 말하는 건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너희들 오늘도 잘 지냈어?”
남편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그녀의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와 태아를 통틀어 너희들이라고불렀다.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기, 나 양수검사 해야겠지?”
“왜?”
“왜라니? 내 나이가 있잖아? 의사도 그렇게 말했는데.”
“양수검사의 부작용으로 태아가 다칠 확율이 자연적 기형일 확율보다 높다는 건 당신도 알지 않나?”
“내 나이가 되면 기형의 확율이 높아지잖아?”
“태아가 기형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 낙태?”
“알았어.”
그녀는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그녀는 그들이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의 일을 기억했다. 그 당시 정기검진에서 비정상적인 수치를 발견한 의사가 양수검사를 권했을때, 그들 부부는 고민했다. 만약에 양수검사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올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물어 보았다. 어떤정도의 기형은 용납하고, 어떤 정도의 기형은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달랐다. 의학서적을 들춰보거나 사례조사를 하면 할수록, 각자의 경험치가 다르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들이 지금, 살 가치가 있는기형과 살 가치가 없는 기형의 기준이 적혀 있는 카탈록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아이란출산이나 성장 과정에서 사고로 장애를 얻을 수도 있는데, 그때마다 부모가 아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의견이모아졌다. 양수검사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온다 해도 낙태를 결심하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들은 양수검사 자체를거부하기로 했다. 그 당시 그녀에게 양수검사를 권했던 젊은 의사는 그들 부부의 결정을 듣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악수를청했다.

미라는 그녀가 이제와서 양수검사를 하려는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남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이의 기형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누구의 아이인지 알아내는 게 시급한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임신을 기뻐했을 때 자신이 순간적으로 느꼈던 절망감을 상기하였다. 행여 자신이 양수검사의 부작용인 유산의위험성에도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건 아닐까하고 날카롭게 물어 보았다. 남편이 출산을 반대했다면 그녀는 못 이긴 체 그에게동조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에게초음파 사진을 내밀던 순간 아이는 지구상에 안전하게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스스로에게 주장했다.

남편은 그녀의 불안감이 그들의 부부생활이 그간 원만하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이 변했다는 걸증명하려는 듯 그녀에게 크고 작은 애정표시를 하며 자상하게 굴었다. 아이들은 동생이 생긴다고 기뻐하였다.

어느덧 미라는 뱃속의 아기가 남편의 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새생명을 기뻐하고 축복하는데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고믿었다. 그녀만 그렇게 믿으면 세상 천지에 그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녀가 그렇게 믿는 한 그것은 사실이라고생각했다. 자신이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은 남편에 대한 두 번째의 배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그런 믿음은 남편에 대한미안함을 점차로 덜어주었다.

그녀의 믿음은 점점 확고해져서, 몇 주 후에 파올로가 전화로 친자확인을 거론했을 때 그녀는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피임이 허술했기 때문에 자기는 남편의 아이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파올로는 잠깐 침묵한후에, 그래도 자기는 정확하게 알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미라는 파올로의 이런 태도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처음으로 접했을 때 그가 보여 주었던 당혹감으로 미루어, 그녀는 그도 덮어두기를 바랄 것이라고 내심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라, 그러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어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혹시 내 아이가 아닌가 해서 심장이 무너질지도 몰라.”
”…”
“남자의 불안을 이해해 주기 바래. 남자들은 뻐꾸기의 알을 자기의 알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알을 알아보지도 못해.”
”…”
“듣고 있어?”
“응.”
“미라, 내가 미라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파올로가 몇 마디를 더 말했지만 미라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아버지에게 안부인사를 드릴 때가 되었다고생각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항상 색이 바래고 지쳐 보이는 존재였다. 살면서 선택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남들이 선택하고 남은길을 묵묵히 가는, 고단한 인생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사랑하는 남자 몰래 그의 자식을 낳아 기른 어머니는 독한 여자였다.그러나 미라는 돌아가신 어머니 역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갔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인생도 아버지에 의해서, 미라에의해서, 또 미라가 모르는 어떤 사건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길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미라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선택해서 어느 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데도 남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뿐이었다.

미라는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가느냐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고생각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가 옛날에 아버지를 위해서 내렸음직한 결정에 정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면서 미라는 자신의결정이 남자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죄없는 남편의 가슴에 비수를 꽂게 될 상황이 끔찍해서 가능하다면 속이고 싶었지만,그녀는 자신이 지금 내린 결정이 결국은 남자를 위한 결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경험에 의해서.

결정을 하고 나니 그녀는 앞으로 닥칠 천둥 번개가 무서워서,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인형 안에 또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의 목각인형 마트로쉬카를 떠올렸다. 인형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이 또 다른 인형 하나를 품고 있다는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의, 목각같이 꼿꼿한 등이 생각났다. 뒤미처 할머니의 따스한 등을 떠올렸고, 세상과의 충돌을겁내어 스스로를 기만하는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떠올렸다.

*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이행하는 배우처럼 미라는 남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남편은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고, 절망했다.자신이 가볍게 던진 돌이 바위가 되어 날아가 남편을 맞추는 것을 목격한 미라의 자책감이 그의 절망감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그녀를눌렀다.

미라에겐 영원처럼 느껴진 며칠간의 싸늘한 침묵 끝에 남편은 양수검사를 요구했다. 모든 일은 친자확인 후에 결정하자고 그가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자는 것인지 그는 설명하지 않았고, 그녀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양수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친자확인은 분만 후에 할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남자의 입장과 여자의 입장이다르다고 말했다. 그녀도 남녀의 입장이 다르다고 말했다.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뱃속의 아이가 나의 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태아의 안전을 우선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태아의 안녕은 나의 아이나 남의 아이나 상관없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차마하지 못했다. 그냥 미안하다고만 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당신이 나가.”
“응.”
그는 증오에 타는 눈으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좀 사이를 두었다가 그가 메마른 음성으로 물었다.
“아이는? 만약에 내 아이라면?”

내 아이라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담담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로서 양육비를 대주고, 언제든지 아이 만나러 와.”
“그 남자의 아이라면? 그 집으로 들어갈 거야?”
“아니야. 그에게 아이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권리만 인정하게 할 거야. 그 이상은 아니야.”
“왜 아니야?”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좀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는 뒤돌아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안았다.
“미안해.”

그가 그녀를 뿌리치며 말했다.
“당신은 참 여러 사람한테 죄를 짓고 있구나.”

혼자 남은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잃게 될 것들과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일은 무엇인지 헤아리며, 그 중에서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 없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이었다. 그가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없는 집에서 큰 아이들을 만나는 일도 두려웠다. 독신모의처지가 두려운 게 아니라 그, 꼭 그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녀는 그와 함께 무엇을 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특별한 일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없어서 두려울 거라는 말은 꿈에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

파올로는 그녀가 남편에게 사실을 말했고, 친자확인을 분만 후까지 미루겠다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미라. 어차피 양수검사를 하지 않을 거라면 남편에겐 나중에, 필요할 경우에만 얘기해도 되지 않았을까?어쩌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을 미라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그녀가 이해한다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편이 임신을 너무 기뻐해서 그랬어. 나는 출산 후에는 남편에게 진실을 얘기할 자신이 없어. 기다리던 아이를 품에 안고감격하고 있을 사람에게 당신의 알이 아니라는 말을 나는 죽어도 하지 못할 거야. 아마 그냥 감출 거야, 평생. 남자들은 자기알도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라며? 네가 말했잖아? 그 말이 맞아. 우리 아버지도 그랬고 남편도 그럴 거야.”
“그래, 그리고 나도.”

그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가 덧붙였다.
“아이가 친아버지를 모르고 자라게 할 수는 없어. 아이의 인생인데 어떻게 내가 내 마음대로 해?”

그는 그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이일 경우에 대비하여 몇가지 질문을 해도괜찮겠느냐고 파올로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엘레나가 이 아이를 입양하는 걸 미라는 상상할 수 있을까?”

미라는 파올로가 엘레나와 의논하지 않고 묻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성실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것을 고려해 보았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나는 아이에 대한 정과 책임감을 완전히 끊고, 너에게 맡길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야.”
“그럼 미라와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건 상상할 수 있을까?”
“나도 그 생각을 해 보았어.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 아이를 위해서 억지로 이룬 가정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아. 아이에게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냥 끌린 거랑 모든 걸 다 바치는 사랑이랑은 다르잖아?”

그가 입을 다물고 조금 생각해 보더니, 미안하지만 자기는 그런 감정의 차이를 그렇게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는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너는 확실히 아느냐고 물었다. 미라도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냥 자기가 그렇게 믿을뿐이지 사실은 자기 자신도 그렇게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고백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해 줘. 나도 아버지로서의 너의 권리를 지켜줄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간에.”
“미라가 남편과 함께 나의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도?”
“그가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올로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누구나다 인정하게 할 거야. 이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 아이들도.”

집에서 백 번도 더 연습한 말을 차분하게 하는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파올로가 갑자기 피식 실소했다.
“이거 뭐 히피들의 가족공동체도 아니고 원. 나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솔직히 말해서그간 나는 내 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어. 그런데 지금은 내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아버지와 함께 살수 없는 아이가 불쌍해서.”

그의 입가에 떴던 실소는 그가 말을 끝낼 때쯤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목소리가 떨려서 그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그녀는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파올로.”

그녀는 남편에게 그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사를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러면 생활비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그녀는 막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고 싶지만 지금 점점 배가 불러와서 일자리가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람에게서받으라고 냉정하게 말했고,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부의 재산이 공동의 재산이라는 것을 원칙적으로 인정하고있는 남편은 그녀가 그의 인생을 망쳤다고 화를 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지금 불행하다고 해서 우리가 여태까지 이룬 일이 갑자기 다 망쳐지는 건 아니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인생을 살았어. 나는 내가 당신과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값지다고 생각해.”
“당신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망쳤어.”
미라는 아이들이라는 단어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 문제는 파올로를 알기 전부터 이미 충분히 숙고하고정리를 마친 일이라고 미라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어질러진 속마음에 비해서 그녀의 대답이 조용하게 울렸다.
“미안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꼭 이래야 해? 뱃속의 아이가 내 아이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꼭 나가야 하느냐고?”
아이들 얘기로 인해 삭풍의 문풍지처럼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감정이 그의 큰 소리에 날카롭게 찢어졌다.
“당신이 나가라고 그랬잖아?”
“내가 언제?”
“당신이 그랬어.”
두 사람은 악을 쓰다가 아이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얼른 입을 닫았다. 남편이 잇사이로 조용하게 으르렁거렸다.
“그 남자의 아이라는 게 확인되면 그때 나가. 우리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미라가 마주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당신이 날 쫓아낼 권리는 없어. 나와 헤어질 권리만 있을 뿐이야.”
“당신은 나의 행복을 깨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가 소리를 질렀고 미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당신의 행복을 깬 사람은 당신이야. 이 세상에서 당신의 행복을 깰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당신은 우리의 바가지가깨져서 물이 줄줄 새는데도, 주워 담을 생각도 안하고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어. 당신은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삭거리는 빈바가지라도 그냥 안고 살았을 사람이야. 부서진 조각을 주워서 바가지를 기운 사람은 나야.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았건 귀신의 도움을받았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 사람은 원래 남의 결정에 따라서 살게되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휙 나가려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변함없이 미안하게 생각해.”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며칠 후에 남편은 그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당장 헤어지자고 했고 그녀는 나갈 곳을 찾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에 그녀가 방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눈치챈 남편은 지금 꼭 나가야 하느냐고 화를 냈다.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그를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렇게 기분에 따라 말을 바꾸는 그의 학대를 견딜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더 크게 화를내며 방을 나갔다.

그녀가 이사갈 방을 구해 놓고 그와 의논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분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아이들에겐 아버지 다른 형제를 가지게 될경우에만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옳았지만 그래도 미라는 망설였다. 그는 이 순간엔 진실하지만, 나중에 또 말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거처를 시시때때로, 순간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일은 학대라고 단정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그러한 학대를견디어야 할 것인지 거부해야 할 것인지는 그녀 자신이 결정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근간에 그들 부부가 벌인, 사랑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통해서 사랑과 수모는 단짝으로 붙어 다니는 친구라는 것을 배웠다.하지만 일방적이고 지속적인 수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을 죽이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성들의인생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견뎌야 할 수모와 견디면 안되는 수모를 시시각각 구별하고, 결정하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그녀의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새 한숨과 함께 밖으로 새어나왔다.

“사는 거 힘들어. 사랑도 어려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남편은 그녀의 엉뚱한 소리에 그녀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렵긴 뭐가 어려워? 아주 당연하고 간단한 일이지. 당신같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만들어서 망쳐놓았을 뿐이지.”
그의 목소리엔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미라는 괘념치 않고 순하게 말을 받았다.
“사랑이 힘들지, 그럼? 살다 보면 당신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상황도 변해. 모든 것이 변수인 상태에서 사랑을 유지하는 일은커다란 도전이야.”
“그럼 사랑이란 의미 없는 사업이군. 모든 것이 변수인 방정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정답이 없는 공식은 의미가 없어.”
수학에는 자신이 있는 그의 대답이 서슴없었다. 그간 그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그녀와의 대화를 일절 피했던 것에 비하면발전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제 생각에 빠져서 말했다.
“맞아, 하지만 특정한 전제조건하에서는 정답이 있어.”
“우연이나 운명이나 미신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야.”
그의 대답이 성의 없이 툭 던져졌지만 미라는 자신의 생각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 하지만 거저 얻어지는 우연도 아니고, 미리 정해진 운명도 아니야. 전제조건을 끊임없이 찾아 가며, 모든 것이 변수인방정식을 시시각각 성립시키는 일은…음, 고도로 훈련된 감성과 이성을 요구하는…음, 이를테면 예술이야.”
“말장난이군.”
그가 말하는 내용에 비해서 그의 말투는 진지했고 미라도 진지하게 답했다.
“그래, 말장난이야. 철학이나 과학같이 세상의 이치를 알아내려는 인간의 노력은 원래 말장난에서 시작되었잖아? 그거 몰라도, 먹고살고 종족보존하는 일에 지장이 없거든.”
“그건 그렇군.”
그가 그녀를 보며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그녀가 당장에 이사를 나갈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린 척했다.

그녀는 이번 일만큼은 그에게 결정권을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남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의 그릇을 박박 긁어 거덜을 낸 그녀가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에 대한 무한정의 신뢰를 표시하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신뢰의 그릇을 다시채울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미라는 새로 구한 방의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혼하려고 하는 남편이 방세를 내 줄지 자신이 없어서 취소하겠다고하자, 전화선 저 편에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안도하는 눈치였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로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컴퓨터를 켜는 그의 등 뒤에서 그녀가 말했다.
“나 그 방 취소했어.”
그가 후딱 돌아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기색이었으므로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나가라 그러면 그때 다시 찾을게.”
그는 탐색하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당신이 취소하라 그러면 또 취소하고.” 그가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녀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데 그가 들어와 옆에 누웠다. 그가 모로 누워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느끼고 그녀는 책을 접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시선을 비껴 그의 어깨에 고정시키고, 잠자코 기다렸다.떨리는 입술에 비해서 확고한 음성으로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사랑이었나?”

그녀는 그가 물어준 것이 고마워서 목이 잠겼다. 이번에는 그녀가 입술을 떨었다.
“나는 도망가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했어.”
말을 해 놓고 보니,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설명을 보충했다.
“나는 어떤 형태로던 자신감을 되살리는 게 필요했어. 당신을 다시 유혹할 기운을 얻기 위해서.”

그녀가 파올로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망가져 가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그것은 그녀의 첫번째 시도가 아니었다. 탈출을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번번이 포기한 뒤끝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그녀에겐 족쇄가너무 많았다. “소시민 근성, 메이드 인 저머니”라는 카탈록이야 던져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아이들이라는 족쇄와 남편과 함께 쌓은시간의 족쇄는 그녀의 가슴에 낚시바늘처럼 깊이 박혀서 빠지지 않는 족쇄였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 꼭필요했던 시점에, 그녀는 파올로를 통해서 과거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녀가 족쇄를 끌며 갈 수 있는 곳은 과거밖에없었으므로. 그녀가 과거라는 곳에 가서 찾았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가 오해할까 싶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계획해서 한 일은 아니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야.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끝까지 간 건 내 잘못이야.”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럴 기회가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미리 피해가곤 했어.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사소한감정놀음에 휘말려 당신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준 적이 없어.”

순간 미라는 예리한 바늘이 가슴 속 깊은 곳을 딱 한번 꼭 찌르고 지나가는 아픔을 기억했다. 언젠가 그녀를 향해 쏘아지던, 그의섬뜩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고 그가 말하는 그 순간, 바늘구멍만큼 작고 깊은 그녀의 상처는 다시금싱싱한 피 한 방울을 뿜어올려 동그랗게 매달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대담하게 맞받으며 대꾸했다.
“있어.”
“없어.”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대답을 듣고 미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감정을 그는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그가 감지하지 못하는 그의 감정에 대해서 그녀가 얘기한다는 건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향해 남몰래품는 호감은 그의 영혼이 가진 성스러운 자유에 속한 일이었으므로 그녀가 시비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함에도 왜 자신이 상처를받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했다.

잠시 후 그가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어제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들이 결혼생활의 본질에 대해서 대화하더라. 젊어서는 정열, 중년에는 타성, 노년에는 보살핌에 의해서결혼생활이 유지된다는군. 그러고 보니 중년이 가장 시시한 시기지?”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결혼생활?”

그녀는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결혼생활은 어느 과정에서도 거부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런 일로 따지고 말다툼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끝을 흐리며 그냥 웃어 보였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녀딴에는 마음에 없는미소까지 띄웠건만, 그는 마주 웃으려다 말고 그녀의 속엣말을 들었다는 듯이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버럭 화를 냈다.

“그렇게 사는 게 어때서 그래? 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잘만 살고 있는데, 왜 당신만 그걸 우습게 보는 거야?”
그녀가 당황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그를 달랬지만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상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치열한 것인 줄 당신이 알기나 해?”
순간 미라의 머릿속에서 징소리가 났다. 예리한 바늘로 찔리는 순간에 느꼈던, 지옥에서도 잊지 못할 모멸감의 정체를 그제서야 알것 같았다. 그 당시 남편은 다른 여성에게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호감의 성격이나 정도를 가늠해보기도 전에 그는 무조건 그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과 죄의식에 지배되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고, 그것은 엉뚱하게도 미라의 존재에대한 증오심으로 폭발되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자연스럽게 깨우쳐졌다.

남편이 그녀를 향해 쏘았던 섬뜩한 눈길에 담겨 있던 그 무엇이, 그녀가 짐작했던 대로 정말로 증오와 경멸이었다는 사실에 미라는몸서리를 쳤다.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남편이 품은 적개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그 당시 무기력의 탁한 늪으로 자신을 몰아 넣은 절망감의 정체를 그제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그녀와 함께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미라에겐 가증스럽고 모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느꼈던 모멸감의 정체가, 그녀가 부끄럽게생각했듯이, 자신의 질투심이나 의부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는 마음 놓고 목소리에 가시를 달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살란 말이지? 어떤 모순이 닥쳐도 그냥 외면하거나 순종하면서 말이지? 당신 편하라고 말이지? 당신이아무런 노력을 안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소유하라고 말이지? 당신이 나를 샀어?”

그녀는 말하는 동안 감정이 고조되어, 어느새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너그러운 미라는 남편이 다른 여성에게호감을 느끼는 일에는 관대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카탈록에 나오는 사진처럼 외형적으로만 유지되는 결혼생활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없었다. 남편이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그녀를 증오하면서도 카탈록의 목차에 따라 그들의 공동생활을 유지해 왔음에, 그녀의인생이 그녀 고유의 작품이 아니라 사실은 카탈록에 수록된 남의 사진이었음에, 그녀는 심한 수모감을 느꼈다.

그녀는 시방도 막 신선한 피 한 방울을 동그랗게 매달고 있는 묵은 상처를 그에게 들이대며, 그가 입힌 상처의 깊이를 설명하고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평생에 단 한번도 다른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뻔했고, 그가 스스로 그렇게 굳건히 믿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였다. 그가 그녀의 영혼에 입힌 섬세한 상처를알아 보기엔 그의 감성이 너무나도 성글고 거칠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그녀는 파르르 흥분해서 외쳤다.

“내가 당신 손수건이야? 당신이 필요할 때 코 한번 풀고 나서 무관심하게 쳐박아 두면 자동으로 세탁까지 되는 손수건이야? 나는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서, 뭐든지 다 참고 살란 말이지?”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랑 살면서 뭐 그렇게 참을 일이 있다고 그래? 나처럼 순하고 편한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미라는 그가 농담을 하나 싶어서, 화를 내다 말고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가 너무 확신에 찬 얼굴을하였으므로, 의견이 다른 미라는 상대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어, 아닌데, 당신 절대로 순한 사람 아닌데. 당신 오만하고 독선적인데.”

갑자기 그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니 당신 지금 농담하느냐고 물었다. 미라는 깜짝 놀랐다. 그가생각하는 자신의 상과 남에게 보여지는 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니. 그녀 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공인하는 사실인줄 알았는데, 정작 본인만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왔음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미라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데에생각이 미쳤다.

그가 한편으론 너그럽고, 한편으로 쓸쓸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당신은 내가 편하니까 나랑 결혼한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어. 내가 당신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늘 일방적으로 맞춰주니까 여태까지 당신이 나를 참아 주고 있다는 것도.”
말투로 보아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미라는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말갛게들여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신?”
“그럼. 그간 당신이 나한테 맞추며 살았다고는 할 수 없잖아?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지.”
그의 말투는 여전히 너그러웠지만, 그녀는 인내심이 바닥이 났으므로 팩하니 소리 질렀다.
“그래, 내가 당신한테 노상 맞췄으니까 우리가 이만큼이나 산 거야. 당신만큼 괴팍한 남자가 그렇게 흔한 줄 알아?”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남편은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미라는 정말로 자신이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들기 시작했다. 누가 착각을 하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가 이렇게도 서로간의 착각에 기반하여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미라는 현기증이 들었다.

하긴 이런 식으로 깜짝 놀란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 자체가 서로의 착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미라는 결혼하고나서 십 년도 더 넘어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살다 보니 뜨거운 연애보다는 지속적인 관계가 주는 정서적 안정을 그리게 되는때가 왔을 때, 미라는 그 당시 사귀던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가 그녀와의 결혼을 간절히 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특별히 묻지도 않고 결혼 절차를 의논했고, 그도 선선히 의논에 임했다.

나중에, 큰 아이가 열 살이나 되었을 무렵에 우연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그녀가 마지막 남자를 찾고 있다는 말로서 그의 구애를 거절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는 훗날 그녀의 구애를 청혼으로 이해했다는것이다.

미라는 그들 부부의 결혼생활이, 그녀가 중년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타성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착각에 의해서 평생 유지되었다는사실에 기가 막혔다. 부부가 평생 어긋난 박자를 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울어야 할 일인지 웃어야 할 일인지 감이 잡히지않았다. 남편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듣고 싶었다.

“우리는 생각하는 패턴이 아주 다른 사람들이지?”
“아니.”
“왜 아니야? 나는 당신이 오만하고 독선적이라고 평생 믿고 있었는데, 당신은 아니라잖아? 그리고 나는 평생 내가 맞추고 살았다고생각하는데, 당신은 반대로 생각하잖아?”
“그건 당신이 착각하는 거지, 우리가 다른 게 아니야.”

미라는 답답해서 울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말을 바꿔 물었다.
“우리는 서로 착각을 많이 하지?”
“그건 그래.”
“상대를 향해 평생 서로 다른 언어로 떠든 것도 사랑일까? 과녁이 안 보이는데도 사격이 가능하단 말이야?”
“방향만 맞으면 과녁이 안 보여도 사격이 가능하지. 총알만 많이 있다면.”
그의 말을 곰곰 생각해 보던 미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방향만 잘 잡고 무진장 쏘면 언젠가는 맞추게 되는 거구나. 그러니까 모든 것이 변수인 방정식이 성립되는 경우도 있는거구나. 그럼 당신 말이 맞네. 보이지 않는 과녁에 명중하는 일은 우연이고 운명이고 종교겠네.”
그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과녁과 사격수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방향을 바르게 잡는 확율을 높이는 몇 개의 조건을설정하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지. 쉽지 않지만 의지와 끈기를 가지고 하려고 들면 불가능한 계산은 아니야.”
그는 자기 분야의 대화에선 다변했다.
“컴퓨터로 계산하면 답이 금방 나오겠네?”
“손으로 하는 거 보다는 빠르겠지. 하지만 사람이 상황을 관찰한다면 직감이라는 게 작용하니까, 컴퓨터를 능가하는 지름길을 발견할수도 있고.”
“의지와 끈기와 직감이라. 그럼 그게 바로 예술이겠네?”
“이를테면 그렇지.”
그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럼 사랑은 예술이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미라는 순간적으로 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그의 입에서그게 사랑이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 나오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몰라서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한쪽 눈이 그의 빰에 바짝 닿았다. 그의 상처가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것이 그녀의 눈에는 과녁으로 보였다. 그 과녁에서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관통한, 무수한 총알자국을 보았다. 과녁을 보지 못해도 사격이 가능하듯이, 말이 안 통해도마음이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좋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단단하게 긴장한 그의 입술 틈새를 혀끝으로 조심스럽게더듬었다. 그의 입술근육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좋은 느낌이었다.

*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사는 하루살이의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결과를 알지 못한달 뿐이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사실은그녀가 미래를 겸허하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작품 전체에 대한 구상을 그녀는 몰랐지만 이미정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자투리 천을 다듬어 하루에 한 칸씩 잇대어 나가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지금 깁고 있는것은, 찢고 찢긴 상처를 꿰메고 덧덴 흉터가 훈장처럼 덜렁거리는 누더기였지만, 그것을 벽에 걸면 조각보가 되는 거라고 그녀는생각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다음 달부터 승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말이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근래에 사이가소원해진 탓에,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축하한다고 하자 그는 월급이 큰 폭으로 오른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그들 부부의 미래가 불투명했으므로 미라는 무작정 기쁨을 표시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때 그가 갑갑하다는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래 참았던 듯 노기가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아이 양육비는 의논이 되었나?”
좋은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던 미라는 일순 긴장했다.
“그래.”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가서 그녀는 되도록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가 독일남자 특유의, 손익을 꼼꼼히따지는 실용적인 대화를 시작할까 봐 조마조마해서 미리부터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남의 자식 위해선 단 한 푼도 쓰지 않을 거야.”
드디어 그는 그녀가 가장 기피하는 성질의 대화를, 그녀가 가장 기피하는 성질의 문장으로서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잘 벼린칼끝처럼 날카로워졌다는 걸 느끼고, 특별히 조심해서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뜨려는 몸짓을 했다. 그의 성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잡아 앉혔다.
“당신이 여기서 내 아이를 키우던, 나가서 그의 아이를 키우던 이젠 당신도 돈 벌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요즘 세상에 한 사람만벌어서 자식을 셋이나 기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당신이 나갈 경우에도, 내게서 생활비를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마.당신만 편하게 살 수는 없어.”

그녀는 두꺼운 독일제 카탈록을 보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모를 것이다. 그가 방금 한 말이 얼마나 깊은상처만을 남기는, 얼마나 도움이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만약에 그가 그것을 안다면, 그는 죽음 앞에서도 저렇게 파괴적인 말을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문득 파올로의 온화한 표정이 떠올랐다. 파올로는 돈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고도, 그녀를 의심하거나그녀에게 유세하는 인상을 주지 않고도, 아이의 양육에 대해 충분한 의사표시를 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인지되었다.

나이를 먹어 가며 남편은 부쩍 돈걱정이 늘었다. 그는 세계화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는 빈부의 격차를 남의 일로 보지않았고, 연금사정이 점점 열악해지는 독일의 노후보장제도에 겁을 먹고 있었다. 미라는 이해는 갔지만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들의인생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되게 살고 있는 이 시점에 왜 갑자기 그런 걱정을 사서 하는지, 더 가난했던 시절에도 젊음의황금기를 바쳐 모험을 감행했던 그의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저런 쪼잔한 근심걱정만 남았는지 실망스러웠다.

그는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미라에게 당신도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피가말랐다. 그녀가 결코 꿈꾸지 않았던, 남에게 얹혀 사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 그런 생활에서의탈피를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고 또 끊임 없이 계획하고 있는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이렇게몰아붙이는 그의 거친 정서가 심히 한심하고 섭섭했다.

문득, 남편이 그녀의 그러한 속마음를 알고 있으리라는 그녀의 믿음이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그녀가 남편을 통한 경제적 안정에 기꺼이 안주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름이 끼쳤다.

월급이 오른 기쁜 날에 돈 얘기로써 부인에게 모욕을 주는 남편에 대한 경멸감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걸어다니는 독일제카탈록으로 보이는 그와 헤어지고 싶다는 심정으로 그녀는 독설을 뱉었다. 제 할 일 다 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말한마디를 잘못해서 고맙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남자답게,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과거의 상처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딱지를 열어,옛날의 어느 상처가 지금 받은 상처와 같은 종류인지 확인해 보고 싱싱한 피로서 다시 부활시키는 여자답게, 그들은 강한 적수로서대적했다. 그들은 팽팽하게 맞서서, 서로의 변치 않는 오만과 독선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 서로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묵은앙금을 휘저어 그의 건재를 확인하고, 그 위에 앙금을 하나 더 보태고 나서, 별 수 없이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싸늘하게 며칠이 지나간 후 미라는 남편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서, 그가 그렇게 변한 이유를 속으로 이리저리 궁리해보았다. 아이가 생겨서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일까? 그간 감추어졌던 쩨쩨한 소시민 근성이 나이를 먹으며 고개를 드는 것일까?독일제 카탈록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지? 사람은 가지면 가질 수록 그것을 빼앗길까 봐 벌벌 떤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런 속된현상일까? 나이를 먹으며 오만과 독선은 여전하면서도, 옛날에 좋았던 건 나쁘게 변하는구나.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계속 변할거면, 앞으로 같이 안 사는 게 차라리 낫겠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받았다.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떠난 아들이었다. 미라는 식탁 건너 편에 앉아서,남편이 아들과 통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의 남편의 말투는 독특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그는 마치 직장 동료와 토론하듯 아무런 양보나 배려 없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그런 말투에는 이 세상에서미라 단 한 사람만이 알아보는, 어떤 독특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아이들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미라에게조차보여주지 않는, 무어라 꼬집어 정의할 수 없는 그 독특한 감정에선 어딘지 모르게 양성적인 느낌이 났다. 마치 데미안의에바부인처럼 모성과 부성이 한 몸으로 어우러진 느낌이 난다고 미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평범한 말투가 아닌 저 말투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남편이 아이들을 대하는 독특한 말투가 독일제 카탈록에도, 한국제 카탈록에도, 그녀가 아는 어떤 카탈록에도 수록되어 있지않은 품목이라는 걸 깨달았다.

식탁 건너편에 앉아서 남편을 관찰하던 미라는, 남편의 말투가 독특해질 때 그의 시선도 함께 독특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남편이 무심코 미라를 건너다보았으므로, 미라는 그의 독특한 시선이 그녀를 향한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한꺼번에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따스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를 관통해서 아들을 보고 있던 남편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촛점을 맞추었는지, 그는 얼핏 당황하며 얼른 시선을거두었다. 남편의 독특한 시선을 즐기고 있던 미라는 일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시선을 거두는 순간의 눈빛이 싸늘했다고미라에겐 여겨졌다. 문득 그의 섬뜩한 눈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잔인한 눈길에 찔린 상처가, 아직도 가슴 속에서 빨간 피를동그랗게 매달고 있는 그 상처가 찌르르 느껴졌다. 깊고도 작아서, 가해자의 눈에는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억울한 상처라고생각했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의 눈길이 번개같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샤의 눈길이었다. 에덴 동산과 지상의 경계에서 사샤가 그녀에게 딱한번 보여 주었던 눈길이었다. 그것은 지상의 사랑을 예고하는 눈길이었다. 예리한 바늘로 가슴을 한번 꼭 찌르는 그 아픈 맛은그녀가 남편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사샤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통증의 종류라는 걸 그녀는 순간적으로깨달았다.

미라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자주 미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간혹 미라는 그 눈빛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낄 때가있었다.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어린 마음에도 자신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열심히 궁리해 보곤 했다. 어린시절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머니에게 늘 미안했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는 것을 미라는 이제야깨달았다.

가슴 깊은 곳을 바늘로 한번 꼭 찌르는 그 통증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아픔이었다. 어쩌면부정당하기도 전에 부정당할까 봐 미리부터 겁내는 아픔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입힐수 있는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지상에서는 사랑과 상처가 부부처럼한몸이었으므로, 그녀도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었다.

문득 미라의 눈에,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에 겹쳐져서 남편의 가슴에 뚫린 총구멍이 보였다. 그녀의 상처에 비하면, 그의 가슴에난 것은 정녕 총구멍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총구멍을 낸 사실은 잊어버린 채 바늘에 찔린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면서,그 문제와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우기는 미라 자신도 결코 섬세한 영혼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북을두들겼다.

그 문제와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라는 주장은 그녀의 카탈록에 수록된 문장이었다. 성실하게 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삶의지침서가 어느샌가 각종 핑계와 합리화의 카탈록으로 변해 있었다. 미라는 젊었을 때 가끔 겪었던 상황,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이상에자신이 끌려다니는 상황에 다시 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때 묻은 자신의 카탈록을 마음으로 멀리 던져 버렸다.

자신의 카탈록을 던져 버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웬 두꺼운 카탈록을 하나 더 깔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어이없게도 “소시민 근성, 메이드 인 저머니”라는 제목의, 낯익은 카탈록이었다. 그녀가 남편의 행동을 보며, 카탈록 몇 페이지에수록된 품목과 일치하는지 항상 대조하고 또 실망하기 위해서 고이 모셔둔 것이었다. 미라는 독일제 카탈록을 버려야 할 사람은남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라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돌아 그에게로 갔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보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빰에 살며시 댔다. 그가 통화를 계속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등 뒤에 서서, 그의 뺨에 있는가느다란 매듭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끝에 감지되는 그의 흉터는 그들이 공유한 시간의 훈장답게 도도했다. 남편은 실패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가 자랑스럽게여기는 그 시간들은, 남편의 오만한 당당함과 독선적인 추진력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던 남편의 성격이 바로 그의 장점이었으므로, 그의 오만과 독선을 그녀가 참을 수 있는 선에서 수용하거나거부하는 것은 그녀의 숙제일 뿐이지, 사랑의 조건은 아니라고 그의 뺨에 달린 훈장이 도도하게 말하고 있었다.

숱이 적어지고 찰기가 사라진 그의 곱슬머리가 그녀의 팔목을 간지럽혔다. 성욕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그와 섹스가 하고싶었다. 그와 한 몸으로 합쳐지고, 서로의 속살을 공유하고, 서로의 비명을 은밀하게 교환하고 싶었다.

파올로는 딱 한번 전화해서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그가 그녀를 위해서 해 줄 일은 없는지 물었다.

뱃속에 있는 아이는 이제 제법 힘차게 꼬물거렸다. 그럴 때마다 미라의 입에서는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아랫배에 두 손을대고 태동을 기다렸다. 누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남편이었다. 그녀의 고백 이후로 그녀의 불러오는 배를 악착같이 외면하던그는, 뱃속의 아기가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미라는 그렇다고 대답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녀가 얼른 지나치려는데, 그가 팔을 끌어당겨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리고는 큰 동작으로 팔을 벌려, 엉거춤춤 서 있는 그녀를안았다. 그가 한 손을 그녀의 배 위에 얹었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뱃속의 아이가 그 손을 툭 쳤다.

미라는 욕실로 달려갔다. 욕조에 더운 물을 받고 들어가 누워서 북받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문이 열렸다. 뽀얀 물안개 속으로그가 들어왔다. 그는 욕조에 걸터 앉아, 그녀의 변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부간에도 내외가 심한, 평소의 그답지 않은행동에 미라는 당황해서 몸을 오무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양수검사를 거부했을 때 나는 무척 실망했어. 수컷의 본능적인 불안을 무시하는 당신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그래서 나는 당신과 정말로 헤어지려고 했어.”

미라는 남편에게 그녀가 친자확인을 미룬 일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보다 더 실망스러웠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그렇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사고를 낼 수 있어. 중요한 건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이 얼마나 성실한가에 있지. 이번에 당신이 사고를 수습하는 태도는나에 대해 무책임하고,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어.”
내용은 신랄했지만 미라는 그가 마음을 열어 준 것이 고마웠다. 그녀도 마음을 열고,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욕조위에서 상체를 지탱하느라고 뼈가 하얗게 비치는 그의 마른 손을 따스하게 불은 자신의 손으로 만지며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수컷에겐 자신의 유전자를 되도록 많이 퍼뜨리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한다는 거 인정해. 나는그것이 남자들이 인간적으로 속이 좁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암컷에겐 누구의 씨건 자신의 몸을 빌려 태어난 자식을끝까지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잖아?”
“암컷의 본능이 수컷의 본능 이상으로 보호받아야 하나? 어떤 경우에도? 이번 일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한 경우에도?”
“그래. 왜냐하면 암컷의 본능은 이 세상에 살아 남으려는 자식의 본능까지 대변하기 때문이야.”

그는 한참 침묵했다. 그녀는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수컷의 불안을 경멸하지 않아. 그래서 당신이 남의 자식에게 물질적으로 한 푼도, 정신적으로 한 순간도 투자하지않으려는 마음을 우습게 보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갑자기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미라는 잠시 기다려 마음을 진정시킨 후 또박또박 말했다.
“거 봐. 당신도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잖아? 여태까지 가정을 지켜온 당신의 의지가 단지 타성이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거 기쁘게 생각해. 여태까지 나를 적극적으로 선택해 줘서 고마워.”

출산 후에 그들이 헤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해두는 마음의 인사였다. 미라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에 비해서 그의 대답이 쉽게튀어나왔다.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야. 내가 타성과 필요의 의해서 당신이랑 계속 살았던 점도 있어. 당신이 끓여 주는 된장국은 마약이거든.”
농담처럼 들리는 말을 진담으로 하는 그를 미라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타성도 사랑이야.”
”…”
“당신은 그걸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뿐이고 나는 그걸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뿐이야.”

그녀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온화하게 말했다.
“남자들은 손해를 보는 쪽이 아니라서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야. 많은 여자들이 거기에 속아서 손해를 보며 살고 있어.”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많은 여자들이야?”
“아니.”
“그럼 됐지, 뭘 그래?”

미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비누거품을 모아다가 욕조에 얹힌 그의 손등 위에 소복하게 쌓아 올리기시작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고는, 이번에는 그의 손등 위에서 비누거품을 쓸어내리고 물을 끼얹었다.갑자기 목이 막혔으므로 그녀는 목소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아까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나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아기이기를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있어. 처음으로…”
미라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호흡을 억제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가침묵을 깼다.

“등 밀어줄까?”
그녀는 울음이 터질까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앉았다.
“때가 많군.”
“그래?”
“내가 당신 등 밀어준지 오래됐으니까.”
그가 손으로 그녀에 등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다 됐어. 이제 빨개.”
“고마워.”

그녀가 침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맨어깨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이마주쳤다. 그녀가 가운을 벗자, 그가 이불을 들쳐 그녀를 맞았다. 그의 체온과 그의 냄새가 아까 그녀가 몸을 담궜던 목욕물처럼친근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둥근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배를 마치 자신의 물건처럼 마음 놓고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어. 그것도 수컷의 본능이야.”
마치 국수 삶는 방법이라도 논하듯이 심상한 말투로서 그는 그녀에게서 상처받은 지난날을 가볍게 용서하고 있었다. 미라는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비죽비죽 눈물이 나왔다. 잠시 후 그가 그녀의 눈에 촛점을 똑바로 맞추고 물었다.
“나 당신의 아기와 만나고 싶어. 괜찮아?”
당신의 아기라는 말에 미라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담은 채로 웃었다.
“그럼, 괜찮고 말고.”

그는 팔꿈치로 자신의 상체를 굳건히 받친 자세로 먼저 그녀의 속살과 화해하고, 그리고 나서 그녀의 아기와 만났다. 그의 행동은그가 예전에 초면의 장인과 장모에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던 모습처럼 침착하고 당당했다. 미라는 자신의 몸 안에서여러 사람의 눈물이 은밀하게 섞이면서 태고적 본능을 한 발자욱 벗어나는 진화의 순간을 조용히 구경하였다.

이튿날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나가서, 신생아용품 일습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다른 방에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신생아 안아 주는 법을 설명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자궁 안에서 헤엄치던 아기가 엄마 몸 밖으로 태어나는 순간은,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돌아와 우주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랑 같은거야. 너희들도 사진으로 보았지?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면 우주비행사들이 들것에 실려나오는 거 말이야. 무중력상태에선 몸을받치는 근육이 퇴화되거든. 그래서 신생아들도 목을 가누지 못하는 거야.”

미라는 혼자 누워서, 다른 방에서 가족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뱃속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이기를빌었다. 어제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성별이나 장애 여부에 따라 태아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비에따라 태아를 차별하지 않으려는 어미의 본능으로 미라는 그간 누구의 아이일까 하는 추측 자체를 머리에서 추방시켰었다. 누구의아이이기를 바란다는 소망 자체가 한 생명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제 남편이 그녀의 아이를 제 자식처럼 기를 수 있다는 의지를 시사한 이래 미라는 이제 아이의 일은 한숨 놓게 되었다. 어미로서가장 중요한 자식의 일이 해결되자, 그제서야 그녀가 그동안 억제하고 있었던 여자로서의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남자의 수컷 본능에 상처를 입힌 것이 안타까워서, 그녀는 진작에 양수검사를 했더라면 결과가 어떻든 그의 고통은 덜어졌을 거라며,검사를 미룬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자존심을 다친 것이 안타까워서 그녀는 파올로와의 정사를, 이자 강변에서의애무를 후회했다. 그녀는 혼자 누워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참회의 예식을 올렸고, 그것이 다소 가식적이고 연극적이란 걸 알면서도소나기를 맞은 후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어디선가 바깥에서 새소리와 망치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현관에 서서 그녀를 보고 말했다.
“우리, 할 수 있어.”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때 그 당시 남편이 말했는지 그녀가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녀의 귀로 들은 말이었다. 그가 구두끈을 매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바보짓은 안 해.”
그가 구두끈을 다 매고 허리를 펴고 서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할 말을 더 담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의다음 말을 기다렸다.
“타협도 사랑이야. 그리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당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랑은 정복이야.”
그녀는 사랑은 정복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는데, 그 대신 그녀의 입에서 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해.”
왜 이 순간에 그렇게 가식처럼 들리는 말이 나왔는지 스스로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소리를 들은 사람의표정을 지었다.
“알아, 당신은 사랑 없이는 내 곁에 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