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한산했다. 단정한 제복을 입고, 생생한 표정으로 근무하는 공항직원들이 여행객보다 더 많이 눈에띄었다. 가끔씩 한 무리의 탑승객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고 나면 또 한참은 조용했다. 인파가 적어서 더욱 크고 으리으리하게 보이는홀에서 서성이며 미라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국발 비행기가 도착했다고 표지판이 반짝반짝 신호를 주고 있었다. 드디어 자동문이갈라지며 승무원들이 검은 가방을 돌돌 끌면서 나오고, 조금 후엔 일반 승객들이 하나 둘씩 산더미같이 짐을 얹은 밀차를 밀며나오기 시작하였다.

어쩜 비행기를 타지 못하신 건 아닐까 걱정이 들 무렵에서야 어머니는 모습을 나타냈다. 많지 않은 짐을 깔끔하게 꾸린 밀차를 밀고나오는 어머니는 기억 속의 어머니보다 훨씬 작고 말랐다. 어머니도 미라를 문에서부터 알아보았다. 미라는 어머니가 출구를벗어나기를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 쫓아가서 와락 끌어안으니 어머니의 작은 몸이 한줌에 폭 안겼다. 어머니는 고개를 뒤로 젖혀미라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머니는 미라의 얼굴이 상했다고 걱정부터 했다. 꼬챙이처럼 말라서 네 몸이 한줌에 안긴다고 혀를끌끌 찼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미라는 지난 십여 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늙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내 나이가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의 나이니까 어머니는 곧 육순이구나. 딸의 눈길을 눈치챈 어머니는 곧 시집갈 신부가 옷차림이 아직도 이게뭐냐고 타박했다. 미라는 어머니의 옷차림이 밝고 단정한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곱상한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해서마디가 굵게 튀어나온 손은 갈쿠리처럼 미라의 마음을 할퀴었다.

어머니는 미라가 새로 얻은 아파트가 너르고 번듯하다며 좋아했다. 몇 평이나 되느냐는 질문에 미라는 잠시 계산해 보고 대략 삼십 평쯤 된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신혼부부의 첫 아파트로는 너른 편이라며 흐믓해했다.

미라는 전날 대청소를 하면서 남자의 칫솔과 옷가지, 신발을 치웠다. 어머니는 딸이 식을 올리기 전에 남자와 살림부터 합치는 것을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간 두고두고 남편에게서 업신여김을 받는다고 늘 강조했다. 미라도 어머니의 그 정도 소망이야 들어드릴작정이었으므로, 결혼해서 살 집이 미리 구해졌을 때 미라만 혼자서 이사를 들어왔다. 사실은 남자도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 얻은집에서 함께 기거했지만 완전히 짐을 옮기지는 않았고, 그가 혼자 살던 방도 해약하지 않고 우선 그대로 두었다.

어머니는 조심조심 집안을 둘러보고, 부엌의 싱크대를 쓸어보았다. 미라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 식탁에 앉히고, 뜨거운 보리차를 따라 드렸다. 어머니는 비행기에서 뜨거운 물이 가장 아쉬웠다며 반가워했다. 모녀는 단정하게 마주앉았다.

“엄마, 배 고프지 않아요?”
“아니, 비행기에서 먹은 음식으로 속이 무지룩하니 거북해서, 뜨거운 보리차가 딱 제격이다. 너는 배 고프겠구나. 아침이나 먹었니? 엄마가 밥 해주랴?”

미라가 픽 웃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애기인 줄 아시나 봐.”
“그럼, 네가 내 애기지. 아니야?”

어머니도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미라는 식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괜시리 안쓰러웠다.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미라가 입을 열었다.
“엄마 피곤하지요? 좀 누울래? 내 침대에 엄마 자리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 그럴까?”

미라는 부부침대에 어머니의 잠자리를 준비해 놓았다. 한국에서 단칸방 생활을 할 때처럼 어머니 옆에서 자고 싶어서였다. 어머니는돌아서서 겉옷을 벗어 단정하게 개켜 놓고, 침대에 누웠다. 미라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드리고, 네 귀를 손바닥으로자근자근 눌렀다. 눈이 마주쳤다.

“너도 좀 눕지 그러니? 오늘 일찍 일어나서 피곤할 텐데.”

미라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얼른 돌아서서 청바지를 벗고, 옆자리로 들어가 누웠다. 조금 망설이다가 미라는 어머니의 이불 밑으로굴러 들어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머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팔을 감아 딸의 등을 토닥였다. 미라는문득 할머니의 손길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미라가 곁에 눕기가 무섭게 손바닥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두드리며 내 새끼라고노래하곤 했었다.

서로 시선이 엇갈린 자세로 어머니가 물었다.
“신랑 될 사람은 좋은 사람이니?”
“네.”
“너한테 잘 해줘?”
“네.”
“그댁 부모님들도 너를 귀여워하셔?”
“그럼요. “
“그럼 됐지 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엄마, 내가 외국 남자랑 결혼하는 거 싫지?”
“아아니.”

어머니의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서 마치 거짓말처럼 들렸다. 어머니도 그렇게 느꼈는지 덧붙였다.
“너를 애껴주는 남자면 됐어.”
“엄마, 엄마는 내가 독일에서 사는 게 싫지?”

어머니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미라는 아차하고 후회했다. 미라와 할머니 사이의 끈끈한 유대를 늘 불안해했던 어머니는, 어쩌면당신이 미라를 못 보는 것보다 미라의 아버지가 미라를 더 자주 보는 것을 불안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머니에겐미라의 존재가 당신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는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쩔쩔매기 시작했다.

이때 전화벨이 자지러지게 울렸다. 미라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였다. 그는 당장에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오겠다고 했다.미라는 십여 년만에 만나 아직도 서먹서먹한 모녀 사이라, 첫날만큼은 어머니와 단 둘이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가피곤해서 쉬고 싶어한다고 핑계를 댔다. 그는 자기가 어머니께 요리를 해 드리려고 장도 다 보아 놓았다며, 몇 시쯤이면 어머니가다 쉬었을지 끈질기게 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그 사람인데요. 지금 인사하러 오겠다고 그러네. 엄마 피곤하실 텐데 내일 오라고 그럴까?”

어머니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반색을 했다.
“지금 오겠다네? 그럼 오라고 해야지. 나 하나도 안 피곤하다. 비행기에서 잘 잤는데 뭐.”

미라가 수화기에 대고 다소 무뚝뚝하게 지금 오라고 말하는 동안 어머니는 부리나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매만졌다. 밖에서 인기척이 날 때마다 어머니는 몸을 움찔하며 귀를 귀울였다.

초인종을 누르라고 그녀가 미리 주의를 주었건만, 그는 깜빡 잊었는지 자기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그가 열쇠 돌리는 소리가유난히 크게 덜그럭거려서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그는 성큼성큼 들어와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어머니는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뭐라고 묻자 어머니는 얼른 딸의 얼굴을쳐다보았다. 미라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간의 의례적인 인사를 통역해 주었다. 그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어머니의 태도가 상대적으로저자세여서 미라는 마음이 상했다.

이번에 미라는 어머니께 큰절을 드리라고 그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그들이 결혼을 결심한 직후 아버지를 뵈러 가기 전에 그들은 크게싸웠다. 아버지는 가끔씩,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딸이 출가를 하면 사위에게서 큰절을 받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기때문에, 미라는 아버지 집에 가기 전에 미리 그에게 절하는 연습을 시켰다. 호기심으로 한번 따라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던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자기는 못하겠다고 했다. 이런 비굴한 자세는 평등한 인권을 방해하는 유교사상의 표본이라고성토했다. 그녀가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언급하며 논리적으로 타일러도, 내게 그것도 못해주느냐고 감정적으로 협박해도, 그는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당당하게 악수를 청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이를 갈았다.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친절하게 그를 맞았다. 그러나 미라는 새어머니 딸의 약혼자가 처음 인사를 드리러왔을 때 부모님께 한국식으로 예를 올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미라를 보고, 식사준비는 자기가 다 할테니 너는 어머니와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미라는 그가 무슨 요리를 하려나 불안해서물어 보았다. 그는 치즈요리를 한다고 했다. 치즈도 된장같은 발효식품이니 어머니 입에 맞을 거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미라는 어머니에게 통역하면서 제 의견을 보탰다.
“엄마, 이 사람이 엄마 드시라고 치즈로 요리를 한다고 그러는데. 엄마, 밥 먹고 싶지 않아? 나 김치도 담아 놓았는데? 우리 된장국 끓여서 밥 먹을까?”

어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띄고 대답했다.
“이 사람이 요리를 하겠다고? 대견하기도 하지. 치즈 좋다. 나 치즈 좋아해. 독일에 왔으니 독일 음식도 먹어 봐야지.”

그가 어머니의 대답을 눈치로 알아듣고, 미라에게 너는 괜히 그런다는 식으로 퉁을 주었다. 미라는 어디까지가 어머니의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예의인지 몰라서 긴가민가 물러섰다. 그녀도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고약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는 치즈요리를 먹으러 식탁에 앉으며, 미라는 자기가 좀 더 강하게 제지하지 않고 상황을 여기까지끌고온 걸 후회했다. 어머니는 미래의 사위 앞에서 벌을 서는 사람처럼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면서도 연신 맛있다고칭찬했고, 그는 자꾸 권했다. 미라에게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힘겹게 지나갔다. 밤이 깊어 그녀는 그에게 이제 그만 가 보라고재촉했다. 미라의 고마워하는 눈길을 저녁 내내 기다렸던 그는 큰 소리로 심통을 부리며 돌아갔다. 그녀는 어머니가 그의 심통을눈치챘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날 밤 모녀는 잠을 설쳤다. 어머니는 비행기 음식 탓을 하며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미라는 그에게 화가 나서 몰래 울었다.

비슷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는 모처럼 독일에 오신 어머니께 관광을 시켜드려야 한다고 우기면서, 케이블카를 타고 계곡을굽어다보는 소풍을 계획했다. 미라는 어쩐지 어머니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머니는 의외로 좋다며찬성했다. 그것 보라는 그의 눈치를 받으며 소풍길에 오른 그녀는 다시 한번 후회를 했다. 어머니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는 걸 미라는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날의 소풍은 어머니와 미라에겐 고문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어머니에게 이불을 덮어드리고 침실의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서 미라는 그에게 얘기좀 하자고 했다. 큰소리가 나면 어머니가 불안할까봐 그녀는 화를 누르고 나직히 말했다. 앞으로는 사정상 자기가 딱 부러지게거절을 못 하더라도 눈치를 봐서 우기지 말고, 그녀의 말에 따라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간 쌓였던 섭섭함을 활화산처럼폭발시켰다. 왜 너희는 말로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하느냐고, 딸인 너도 모르는 어머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서 헤아리느냐고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고 저자세를 취하는 그녀에게 그는 목소리를 점점 높혔고, 종내 그는 문을 거칠게닫고 가 버렸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은 딸을, 신랑될 사람이 험하게 다루는 소리가 행여 어머니 귀에까지 들릴까 봐 어떻게든 그를 달래 보려고현관까지 쫓아온 그녀의 귀에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울렸다. 그녀가 어머니 때문에 자유롭게대적할 수 없는 상황을 배려하지 못하는 그의 무심함에 대한 증오는, 곧 그녀의 그런 상황을 일부러 악용하는 비겁함에 대한 증오로발전했다. 살의에 가까운 증오심이 목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었다. 그의 거친 정서를 절대로 용서할 수없다고 이를 갈던 그녀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이 더 커져서 어머니가 알게 되면 어머니가얼마나 괴로워하실지 그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문 밖에서 심호흡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방에 들어온 미라는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우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일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엄마는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솔직하게자기 의사대로 살 수 없었던 어머니가 가엾어서, 그리고 어머니의 속마음을 모를 수밖에 없는 자신이 가엾어서 울음을 터뜨렸다.미라는 어머니의 억제하는 울음소리 속에서, 당신이 어렵게 기른 딸이 앞으로 남자에게서 험한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될 것이라는예감을 읽었다. 그날 모녀는 서로 부등켜 안고 오래 울었다. 그녀가 어머니의 눈물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마지막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충돌을 피하여 서로에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결혼 날짜가 다가왔다. 그들은 관청에서 결혼신고를 하는 간단한 예식 후 양가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 몇명과 함께 집에서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하기로 계획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잔치 음식을 만들어, 냉동고에 차곡차곡 재워 넣었다.어머니가 이건 어떻게 녹여서 어떻게 상에 올리라는 등 자세히,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 미라에게 수상하게 여겨졌다. 미라는어머니를 다그쳐서, 결혼식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미라는 예약을 변경하겠다고, 비행기표를내 놓으라고 펄펄 뛰었다.

“어떻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도 안 보고 가겠다는 거야?”
“식이 뭐 중요하니? 너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사는 거 보고 가면 되었지. 나는 여한이 없다야.”
“내 결혼식인데 엄마가 없으면 내가 섭섭하잖아?”
“네가 섭섭할 게 뭐가 있니? 양가 부모님들이 버젓하게 다 참석하시는데.”

미라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고민을 알아챘다. 어머니는 신부의 어머니가 두 명이 참석하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신부어머니가 둘이 되든 셋이 되든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결혼식에 아버지만 오시고새어머니는 참석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제안에 어머니는 조용히, 그러나 엄하게 타일렀다.

“너도 여잔데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그 양반도 팔자가 사나워서 서방의 배다른 자식을 돌봤는데, 이제 와서 네가 새엄마를따돌리면 벌 받는다. 니 아버지 입장을 생각해 봐라. 가정이 흔들리면 아버지가 말년에 얼마나 고생하시겠니?”
“엄마는 왜 맨날 남의 입장만 헤아려요? 엄마 딸이 결혼을 하는데 왜 엄마가 사라져 줘야 해요?”

미라의 울먹이는 항의에 어머니는 딱 잘라서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게 엄마 마음에 제일 좋으니까.”

미라는 더 이상 어머니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미라는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엄마, 엄마는 아버지를 아직도 사랑하나 부다, 그지?”

모녀간에 금기처럼 되어 있는 아버지를 언급하는 딸의 응석어린 콧소리에 어머니는 픽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아버지는 어머니가 독일에 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미라는 내심 그럴 만한 사정이 있나 보다, 그래도결혼식 때에는 두 분이 만나게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결혼식 전에 귀국한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미라는 어머니 몰래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미리 떠나려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수화기 저 편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미라는 갑자기 의심이 들어서, 독일어머니는 한국어머니가 오신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말없이한숨만 쉬었다. 미라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어머니가 불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울다 보니 아버지도 불쌍했다.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는 날, 예비사위는 어머니를 공항에 함께 모셔다 드리고 싶어했지만 미라가 제지했다. 모녀간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공항으로 떠나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가 일어나서 문을 여니 뜻밖에도 아버지가서 있었다. 허청허청 따라 들어오는 아버지는 금방 허물어질 허수아비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미라는 후딱 어머니를 돌아보았다.육중한 소파에 파묻혀 한줌밖에 안 되는 어머니는 금방 사그러질 재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무거운 정적 속에 아무도 손가락 하나까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약간 모로 비껴서서 아버지를 향해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도 깊히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는 둘 다 시선을 깔아 바닥을 보았다.

참을 수 없는 정적을 깨기 위해 미라는, 우리가 벌써 떠났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 먼 길을 연락도 없이 오셨느냐고 아버지를 향해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했고, 그는 아버지에게 급히 자리를 권하느라 불필요하게 의자를 끄는 소음을 냈다.

아버지는 예비사위를 보며, 어머니를 공항에 모셔다 드리려고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딸을 보며, 그럴 필요는없는데 이렇게 수고를 하신다고 중얼거렸다. 미라는 두 분만의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주장을 뚜렷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순간 그들은 쉽게 합의를 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두 노인네가 나란히 앞자리에 앉았다. 어머니의 벨트를 매드리며 미라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멀미를 하실지도 모르니 중간에 쉬어서 가시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앞만 보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도 앞만 보며 괜히 괜찮다고 했다.

차가 움직였다. 뒷창을 통하여 두 사람의 머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뚜기처럼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멀어져 가는 자동차가 마치 종이로 만든 장난감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미라는 저 차가 무사히 공항에 닿을 수 있을지, 어머니는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그리고 나서 각자의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미라의 어깨에손을 얹으며 네가 걱정을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사고는 없으니 그냥 잊으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미라는 거짓말처럼 위로를받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정작 자신은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미라는 뿌연 시야로 탁자를 돌아가다가, 쌓아 놓은 책무더기를 건드려서 쓰러뜨렸다. 책갈피 사이에서 낡아빠진 그림엽서가 한 장팔랑팔랑 떨어졌다. 두 개의 손이 닿을락말락 하는 그림이었다. 오래 굴러 다녀서 때가 타고 귀퉁이가 말린 이 엽서의 가장자리가미라의 눈에는 아까 떠난 자동차의 뒷창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