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한번 열어 보인 이후, 미라와 남편은 일상적인 일로 대화할 적에 가끔씩이라도 시선을 교환함으로써적대감정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외에는 다람쥐 챗바퀴 도는 일상이 평범하게 지속되었다.

밖에서 돌아온 남편이 그녀에게 책을 한 권 내밀었다. 독일의 상속법에 관한 해설집이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경우에, 부모의 유산은 죽은 자식의 배우자가 상속하는 게 아니라 손주들이 직접 상속하게 되어 있어.”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물었다.
“독일의 상속법이랑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당신도 생각하는 거야? “
“아니,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단지 우리 부모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독일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말이야.”

말투가 변명조로 흐르며 기세를 잃는 남편에게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첫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 부모님이 왜 그랬느냐는 거야. 유언장에그 대목이 무심코 들어가게 되었는지, 아니면 나에 대한 불신을 일부러 표현한 건지를 알고 싶은 거야. 당신 말대로 아무런 명시가없어도 상속법상 자동적으로 며느리인 내가 상속에서 제외되는 상황이라면, 부모님은 대체 무슨 의도에서 그렇게 백해무익한 말을 굳이써 놓으셨냐고?”
“부모님의 의도였다기보다 변호사가 임의로 작성한 양식일 수도 있잖아?”
“둘째, 그 대답을 왜 당신이 하지?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부모님께 그 이유를 직접 여쭈어보는 거였어. 솔직히 말해서 부모님의대답이 어떻게 나오건 내겐 중요하지 않아. 내게 유일하게 중요한 건 당신의 태도야.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랬어. 내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부모님에게 표현하기를 바랬어.”

오래 전부터 칼을 갈아 준비해 온 그녀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남편의 얼굴에 당황과 짜증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는 구석에 몰린 쥐의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였다.

“당신은 새디즘과 마조키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군. 내가 우리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가정 아래 이렇게 소모전을 벌일 수가 있어? 알아, 당신은 이게 원칙의 문제라고 말하겠지.”
“그래, 나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문제야. 결혼 이후 나의 존엄성은 당신 부모님에 의해 위협을 받아왔어. 당신은 항상 방관하였고.”
“또 시작이군. 나는 다 들은 얘기니까 그만 하자.”

남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라는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절규하였다.
“당신은 방관만 한 것이 아니었어. 부모님께 불손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내 편을 드는 거라고 착각하고, 또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을나와의 잠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해소했어. 당신은 양쪽에 끼인 희생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간질을 한 거야.”

남편이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표정이 난데없는 웃음으로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부모님에 대한 복수로 나를 거부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평소에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미리부터 잠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당신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 줄 알아?”

그녀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생각으로 기가 막힌 미라가 반박할 말을 준비하느라고 숨을 들이쉬는 사이에 남편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결연한 동작으로 머리를 흔들며 세차게 문을 닫았다. 미라는 멍하니 앉아서,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절망감과 싸우고 있었다. 말을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옛일이 떠오르면 나는 이렇게 이성을 잃어 버려. 이제는 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싸움도 성실하게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마음 한쪽이 자포자기가 되어 그들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파올로의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었다. 꿈에서 본 그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그를 향해일제히 일어섰던 자신의 솜털에게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그녀는 그날 파올로의 집 창가에서 멈췄던 그 순간을 마음속으로이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파올로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고, 그의 눈과 그녀의 눈이서로를 그윽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며칠 후 그녀는 파올로를 만났다. 그녀는 조금 일찍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그가 정확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서로 다가갔다. 그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뺨에 차례로 키스를 하였다. 그들은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조금 서 있다가 미라가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파올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어?”
“꼭 그런 건 아니야. 미라는?”
“나도 사실은 마음이 바뀌었어.”
둘은 얼굴을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딴 데로 가자. 뭐 마시러 갈까, 미라?”
“아니, 이자 강변으로 산책은 어때?”
“좋지.”

어둠이 내린 강변은 한적했다. 강을 끼고 걷는 오솔길은 흙바닥인데도 배수공사와 기초공사가 단단하여 늘 물기 없이 늘 보송거렸고,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빠지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길가의 풀줄기가 바람이 지나가면 일제히 누웠다가 다시 시침을 떼고 일어나,넘실넘실 길바닥을 넘보며 종아리를 간질렀다. 폭포 소리같기도 하고 자동차 소음같기도 한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옷을 가볍게 입은 그녀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가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잠바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동시에 따스해졌다. 그의 손이 아직 그녀의 어깨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그들은 마주보았다. 시선이 엉키며 두 사람의 귀에만 들리는 마른 벼락이 쳤다.

그녀는 벼락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얼른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지금 출장중이냐고 미라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것을 물어 보았다. 파올로는 엘레나가 다른 나라 어느 도시로 떠났는데 이틀 후에나 온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엘레나가 일을 너무많이 해서 건강이 걱정된다고 성의있게 덧붙였다.

그들은 어느새 강물이 폭포처럼 콸콸거리며 떨어지는 장소에 도착했다. 밤빛에 허연 거품이 선연히 보였고, 요란한 물소리가북소리처럼 고막을 둥둥 울렸다.

“파올로, 이게 바로 나의 폭포야.”
“미라의 폭포라고? 여기에 자주 오나 보지?”
“응, 어제 밤에도 왔었어.”
“밤에? 남편이랑 같이?”
“아니, 혼자.”
“밤에 이런 곳에 혼자 왔다고? 위험하지 않아? 여기에 혼자 와서 뭐했어?”
“그냥 좀 슬퍼하다가 갔어. 요즘 남편하고 대화가 잘 안 돼서.”
“오오!”

어두워서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게 들렸다. 그가 토하는 딱 한 음절이 그녀의 가슴에 퀭하니구멍을 뚫었고, 그 자리로 쉭하니 바람이 불었다. 난데없이 눈물이 핑 돌아서 흐려진 미라의 시야를 그의 가슴이 바위처럼 단단하게막아섰다. 미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이마에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미라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팔이 그녀의 등으로 돌려지더니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단단하고 포근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그녀는 정신을 놓듯이 입술을 벌려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속살을 다정하게어루만지는 그의 속살은 솜사탕처럼 보드라웠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벼락이 치며 그를 향해 아우성쳤다. 따스하고부드러운 그의 손이 그녀의 브라우스 밑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혼은 이미 그녀를 떠나서 머리 위에서 무심히 맴돌며 그들을 관찰하고있을 뿐이었으므로 그녀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토해냈다. 바람이 불면서 그들 주위의 수목들이 쏴아하며 일제히 살아났다. 폭포소리는 한결같이우렁차게 천지를 울렸다.

강변을 벗어나기 직전에, 도로의 가로등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 서서 그들은 다시 한번 보드랍고 녹진한 키스를 나눴다. 두 개의몸이 녹아들어 하나로 섞여 버리는 기분이었다. 가로등이 훤한 도로로 나와서 그들은 꼭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오밤중이라 오고가는행인도 없었지만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걸었다. 그녀 집 근처에서 그는 그녀의 양 뺨에 사샤의 키스를 해 주고 발길을돌렸다.

미라는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강변에서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돌아가며 그녀의 임의대로 느리고 빠르게, 전진 후진으로반복해서 떠올랐다. 손끝하나 꼼짝하지 않고 누웠는데도 호르몬이 저절로 반응하여 그녀는 밤에 한번 일어나 팬티를 갈아입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 파올로가 전화를 걸었다.
“잘 잤어, 미라?”
“아니, 잘 못 잤어. 너는?”
“나도 잘 못 잤어. 미라는 어제 밤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지?”
“아니.”
“죄의식이 드나?”
“내 마음을 아직 잘 모르겠어, 파올로.”
“미라, 어제 밤은 무척 아름다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지금 네 생각 많이 하고 있어.”
“나도 그래, 미라.”

그날을 미라는 온통 파올로의 생각으로 보냈다. 그의 다정한 음성과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정중한 예절과 정직한 말씨가, 그의사회적 능력과 자신감이, 그의 회색 머리와 연륜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녀를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으로흥분시켰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그가 그녀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관찰하고, 감상하고,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가자신의 몸과 영혼에게 경이의 시선을 보낸다는 그 감동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 새 인생을펼치는 상상을 펼치기에 충분하였다.

파올로의 경이에 찬 시선에 겹쳐서 남편의 어떤 눈길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녀의 남편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어쩌다가 한번씩그녀를 적개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아, 섬뜩한 저 눈길은? 나를 미워하고 경멸하는 듯한 저 눈은? 나는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혼자서 이렇게 물으면서도 사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성에게 일말의 호감을 느끼고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성을 향한 호감의 눈짓도, 미라를 향한 증오의 눈짓도, 둘 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공기의 흐름일뿐이었지만, 그것은 날카로운 바늘로 가슴 속 깊은 곳을 딱 한번 꼭 찌르고 지나가는 아픔을 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크지는 않았지만 꽤나 깊어서, 미라를 상당히 오랫동안 무기력의 탁한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미라는 한번도남편에게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감으로만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기운에 대해서 대화한다는 것은 그들 부부 사이에선 불가능한일이라는 걸 그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느낌이 들 적이면 어김없이 그녀에게 쏟아지던 적대적인 눈길을 떠올리며 미라는 고개를갸우뚱했다. 자신의 경우, 파올로에 대한 호감이 남편에 대한 적개심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것을 이상하게여기던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남편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남편이 피곤한 얼굴로 회사에서 돌아왔다. 그녀를 보더니 얼른 외면하고 거실의 컴퓨터를 켰다. 그녀는 사과와 당근을 짜서 주스를만들어 거실로 들어갔다. 서로 말없이 주스를 마셨다. 컵을 내려 놓으며 그가 고맙다고 하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당신 지금은 피곤하지? 언제쯤 괜찮을까?”
“나 십 분만 쉬고 나올게.”
그는 좀 전에 켰던 컴퓨터를 다시 꺼버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눈이 쾡한 얼굴로 그녀 앞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나올지 겁내는 눈치였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평온한 말씨로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이번 유언장 사건이 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해 주고 싶어. 당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의 이해를 구하고싶어서 그래. 말해도 돼? 듣고 싶지 않으면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해 줘.”

그가 방바닥을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봐.”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일할 수 있도록 당신이 아이 봐 주고 살림해 준 거 나는 참 고맙게 생각해.”
“그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그때 당신이 나보다 돈을 더 잘 벌었으니까, 내가 가정을 지키는 게 합리적인 노동분담일 뿐이었지.”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초장부터 말이 어긋나는 것 같아서 초조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게 아니라…당신은 아이를 맡기자고 할 수도 있었잖아? 그러면 당신도 일할 수 있었잖아?”
“그건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야. 그 당시에는 아이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야.”

그녀가 준비하고 계획한 대로 대화가 풀리지 않았으므로 습관적으로 짜증이 솟았으나 지긋이 눌렀다.
“그리고 그때 호주에서 온 제안을 당신이 가정을 위해서 거절한 것도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건 내가 호주에 가서 살기 싫어서 그런 거고,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미래의 댓가가 불투명하다는 계산에서 그런거야. 나는 확실하지 않은 곳에 투자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당신이 고마울 것 없어.”

미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답답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무작정방을 나서고 보니 갈 곳이 막연해서 그녀는 정말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 대화의 실마리를 어떻게풀어가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론이 풀리지 않으니 본론에 들어갈 길이 요원했다.

결혼 직후에 미라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했다. 그들 부부는 잠시 난감했지만 곧 기뻐했다. 그들은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으므로,자식이란 그들의 인생에 덤으로 주어지는 또 하나의 성공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다. 그들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가지고 자식이라는새로운 과제에 함께 도전하였고, 어느덧 육아는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둘 다 자유로운 연구직에있었으므로, 각자 근무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직업과 육아를 부부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하는 새로운 삶의 모델이 가능했다.

연구직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큰 프로젝트가 그녀에게 들어왔다. 그녀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책임이 막중하고해외출장이 잦은 일이었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남편은 자기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도 아이를 돌볼 권리가 있다고주장했고, 그것은 아이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 몇 년이나 걸린 미라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갈 무렵에이번에는 남편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미라는 당연히 남편의 차례라고 생각했으나 남편은 외국의 연구소에서 제안하는, 조건이 좋고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거절했다. 댓가에 비해서 개인생활에 끼치는 희생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오랜기간을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대신 그는 발명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몇 가지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고 싶다고 했을 때, 시댁과 친정어른들은 물론 친구들까지도 철없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지만 미라는 찬성했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남의 진로에 함부로 참견할 수없다는 기본적인 예의가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남편의 자유로운 직업관을 존경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번돈이 통장에 제법 남아 있었으므로, 누구든 인생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창 손타는나이의 어린아이를 돌보면서 살림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발명에 전념할수 있도록 자기가 집에서 아이를 보겠다고 제안했다.

마침 아이에게 동생이 생기면 좋을 시기가 되었으므로 나이 터울이 더 지기 전에 그녀는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그녀는 최대한절약해서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했고, 그는 집에서 발명을 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실력과 노력으로 이룩하지못하는 일은 없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으므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아이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키우겠다는, 집념에 가까운 신념은 남편과 미라에게 공통되게 존재했다. 남편은 일상을 이루는 소소한일에 의미를 두는 버릇을 가졌으므로 이 버릇은 자식을 키우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그는 부모가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보면서 자라나는 것이 아이들에게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확신했다.

삼 년 후, 남편의 발명들은 차례로 큰 회사로 그냥 넘어가고 저축한 돈도 바닥이 났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 서로간의 신뢰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계약서와 청구서 등 서류 만지는 일을 혐오하고 회피했으므로 미라는 남편의 성격이 이런 일에 맞지 않는사람이라고 단정했고,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다. 미라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는 눈높이를 낮춰서, 성취감이 덜하더라도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을 구했다. 물론 그 이전에 그들 부부는 각자 반나절짜리 전문직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꿈이었다. 남편은 성취감 없는 직장에서 돈을 벌고, 미라는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직업에 대한 열망을 삭이는 삶이시작되었다.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았던 삶의 패턴이었으므로 그들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남편이 하루종일 직장에 묶여 있었으므로 미라는 아이들 때문에 강도 높은 프로젝트는 거절하는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일감도 끊겼다. 살림을 하는 틈틈이 그녀는 취미 삼아 연구를 계속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유일한 일이었다. 남편이 협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십대에 들자 그녀는 다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테마의특성상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기대를 받으며 직업적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여겼던 그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 혼자 가서 일하는 것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지만, 아이들이 엄마와떨어져 살기엔 아직은 어리다는 생각에서 번번이 포기하곤 하였다.

미라가 다시 일을 하려는 의지 뒤에는, 성공에 대한 욕망보다도 돈을 벌고 싶은 집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수입이 없어서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고 한국의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 드리지 못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남편은 밖에 나가돈 버는 행위 자체를 희생이라고 생각할 뿐더러 미라가 어머니에게 품는 특별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라는 남편이 번돈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친정에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부모들은 당신의 아들을 몇 년씩이나 집에 들여앉힌 며느리를 괘씸하게 여겼고, 대학교수가 될 줄 알았던 아들이 일개 회사원이 된것을 그 탓으로 돌리고 억울해 했으며,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부인을 위해서 퇴근 후에는 가사를 돕고 아이들을 돌보는 아들을가엾게 여겼다. 시부모의 이런 태도는, 힘든 상황에 처한 젊은 부부가 각각 내면에서 남몰래 키우고 있는 피해의식을 자극하여불화를 깊게 만들었다.

화장실에 앉아서 미라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전략을 가다듬었다. 아이들을 꼭 제 손으로 기르고 싶은 엄마인동시에 성공한 직장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모순된 강박관념을 고백하고, 이번 사건이 그녀의 그런 예민한 부분이 건드려진사고임을 설명하면 그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성공한 직장여성을 꿈꾸는 자신의 추상적인 허영심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하리라결심했다. 자신와 맞바꾼 어머니의 인생에 보답하고자 돈을 벌고 싶다는 소망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했다.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을언급했다가, 남편의 입에서 유교사상에 대한 성토라던가 아니면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돈타령이라도 나오는 날엔, 그에 대한경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부사이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질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다시 방으로 가서 남편과 마주앉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말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어. 직업과 육아를 부부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하는 일에 실패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아하, 그래? 당신은 항상 내 잘못이라고 말해왔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나를 탓했지.”

남편이 이죽거렸으므로 그녀의 목소리가 습관적으로 높게 튕겨나왔다.
“언제?”
“항상!”

남편의 고집스러운 말투에 역시 고집으로 맞서던 미라는 아차하며 숨을 골랐다. 잠시 생각해 본 후 순순히 수긍하였다.
“그래,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어. 당신이 나의 능력부족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도 그렇게 말했어.”
남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당신이 항상 먼저 그랬어.”

미라는 다시금 그렇지 않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뭏든 우리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의 능력부족 탓일 수도 있고, 이 사회가 반쪽짜리 전문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아니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불경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우리가 운이 나빠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는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 대해서 나는 분노를 느껴.”

그녀가 그를 달랬다.
“우리가 무슨 실패를 했다고 그래? 우리 맘대로 살면서도, 돈이 없어서 밥을 한 끼라도 굶은 적이 있어? 전쟁을 겪지 않은것만으로도 우린 행운의 세대야.”
“우리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남자가 밖에 나가서 돈 벌어오고 여자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내가 결코 원하지 않았던 노동분담을제안한 건 바로 미라 당신이야. 그때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아나?”
“맞아, 더 오래 버티다가는 우리 가정이 이 사회에서 영영 도태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

사실은 당신이 이 사회에서 도태될까 봐 두려웠다는 말을 그녀는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그가 주장했다.
“당신이 집에서 아이들을 보면서도 당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는 최대한 도왔어. 당신은 이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있어. 명예와 성취감을 이룬 셈이지. 돈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신은 어차피 돈 벌 생각이 없지 않은가? 대체 내게서 뭘 더 바라는건가? 하루종일 남의 일을 해주는 나는 당신의 처지가 부러워.”

그녀는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 대신 나는 사회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이제는 경제력도 없어.”
“그 대신 당신에겐 자유가 있어. 당신은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어.”
“아니야, 자립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어.”
“그게 내 책임이야?”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자 미라는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니, 당신 책임이 아니야. 당신과 내가 합의해서 한 일이야. 우리가 꿈꾸었던 최소한의 이상을 좇으면서도 우리 가정이 현실에서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 동의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나의 날개를 그렇게 잘라 버리지 않았을 거야. 당신 혼자서 돈을 충분히 벌어 온다는 믿음이아니라, 당신이 돈 문제로 나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믿음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당신이 약속을 위반했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부모님이 한 일인데 왜 내 책임이야?”
“당신 부모님이 나를 차별하는 걸 당신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나한테는 배신이야.”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나도 속으로는 분개했어.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침묵한 거야.”

슬슬 인내심을 잃기 시작한 그녀의 대답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거 봐. 당신은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 당신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 문제도 아니라니까.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오직당신의 침묵이야. 당신이 부모님께 전화해서 며느리를 상속에서 제외시킨 항목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물어 보았다면, 나는 그것 이상바라는 게 없었을 거야.”
“물어 보나 마나지. 부모님이 그럼 고의였다고 말할 거 같애?”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을 수가 있나 싶어서 그녀는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참으라고 속으로는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그녀의 말투는점점 빨라지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내게는 부모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던 상관이 없다니까? 단지 나의 남편이자 부모님의 아들인 당신이 그 문제를 직접 거론한다는그 자체만이 내게는 중요한 거라니까? 왜냐고? 그것은 불시에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할 형편이 되지 않는 나의상황이 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당신도 책임을 지겠다는 표시거든. 그 표시를 나랑 부모님에게 당신이 보여 달란 말이야.”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그렇게 할 수도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서 뭐가 달라지지?”

그녀는 이렇게 소통이 없는 대화라면 차라리 대화를 그만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없다고 생각했다. 큰 폭발이 무서워서 작은 폭발을 습관처럼 달고 사는 이 상황을 끝내려면 이번만큼은 할 말을 끝까지 해야 한다고다짐했다. 어떤 식으로 끝나던, 끝이 나는 것이 현재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요즘 당신은 내가 자립능력이 없어서 날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방심하고 있어. 이건 모욕이야. 예전에 다른 여자들이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절대로 너의 자유를 사랑과 맞바꾸지 말아라, 나중에 무시당한다. 그래도 나는 막연히 믿었어, 진정한사랑과 진정한 자유는 그렇게 상반된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것들은 어쩜 같은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러나 지금이라도당신과 나 사이에서 사랑과 자유가 상반되는 개념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래서 그때 내가 당신을 믿은 게 실수였다는 확신이 들면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당신 또 나를 협박하는구나.”
“협박이 아닌데…”
“그러니까 더 나쁜 거야.”

그가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을 보며 그녀는 그가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짐승처럼 말귀를 못알아듣다가 툭하면 도망치는 남편에 대한 분노와, 그리고 말싸움에 말려들어 계획한 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 못한 자신에 대한자책으로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

미라와 파올로는 매일 통화를 하며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가 파올로에게 남편과의 대화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를이야기하면 파올로는 그녀의 편에 서서 잘 들어 주었다. 그는 조언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남자의 입장을 설명하며남편의 역성을 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파올로를 향한 인간적 호감이 점차 육체적인 열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파올로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파올로는 자신도 그렇다고 시인하였다. 그가 “나의 삶은 지금 충분히 복잡해. 더 이상 복잡해지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아.“라고말할 때마다 미라는 그가 그들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말이라고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곧이어 “하지만 인생은 짧고,아름다워.“라고 말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는 열망을 막기엔 그들의 이성 하나만으론부족했다. 그들이 각각 처한,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가족상황은 그들의 이성에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침대에 늘상 혼자 들곤 하는 미라는 밤이면 밤마다 이자 강변을 떠올렸다. 그녀의 상상력은 그날 멈췄던 부분에서부터 이어졌다.파올로가 자신을 나무에 기대어 놓고 자신의 브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는 장면이, 달빛 속에 하얗게 드러나는 자신의 가슴이그림처럼 떠올랐다. 그가 종내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녀는 몸이 절절 끓어올랐다.

그를 향한 정염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밤에 미라는 파올로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반가이 그녀를 맞이하는 그에게서 샴푸냄새와 함께달콤한 향수냄새가 났다. 그의 냄새를 깊이 호흡하며 미라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촛불이 타고 있는 거실에는 애절한 클레츠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파올로는 그녀를 소파로 안내하여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의품에 포근하게 안겨서 그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며 음악을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미라, 나는 미라가 허락하는 선까지만 가겠어.”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우스의 단추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들어와서,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예민한성감대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순식간에 전기가 돌며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탁탁 튀었다. 그가 그녀의 옷을 하나씩벗기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미 절정과 실신의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파올로, 팬티는 그냥 둬.”
그녀가 몽유병환자처럼 중얼거렸다.
“알았어, 미라.”

그는 그녀의 말에 충실하게 따랐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마치 바람을 전문으로 피우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여자의 몸을 다뤘다.자기관리가 철저한 그는 체육관에서 정기적으로 단련된 아름다운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연출력에 감화되어 미라도 자신의성적환타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밤이 깊어 그녀가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해소되지 못한 욕정으로 다소 불량스럽게번쩍였다. 그가 일어서더니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녀가 그의 등과 허리를 어루만졌다. 팬티만 입은 그의 몸은 단단하고도부드러워서 그녀의 손바닥 살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찾아서 자신의 앞섶으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꿈틀대는 무서운생명력을 확인하고 미라는 나직하게 비명을 질렀다. 추억과 예감이 교차하였다. 그가 한숨을 쉬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그녀에게 외투를 입혀 주며 그는 미라에게 자동차로 집에 데려다 주랴고 물었고, 미라는 사양했다. 그는 그녀에게 작별키스를했다.

밤에 혼자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미라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남자 집에서 나와 텅빈 역전에서 혼자 떨고 있자니 무섭기도 하고,수치심과 함께 모욕감마저 들었다.

이튿날 파올로가 전화를 걸었다.
“어제 집에 잘 갔나? 아주 늦게 도착했지?”
“그래, 네가 데려다 준다고 했을 때 사양한 걸 후회했어. 혼자 집에 가면서 무섭고 기분이 좋지 않았어.”
“미안해, 미라. 내 실수야.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죄의식 때문에?”
“나도 잘 모르겠어.”
“미라, 우리가 어제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니잖아?”
“파올로, 어제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어느 선까지 갔느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
“음, 그래. 미라 말이 맞구나.”
“하지만 어제 고마웠어, 파올로. 나는 정말로 즐거웠고, 오래오래 생각날 거야.”
“나도 그래, 미라. 어제의 그 일이 반복되어 질 수 있는 행복이기를 빌어.”

며칠 후 미라는 파올로와 함께 뉨펜부르그 성에서 열린 전시회를 관람하였다. 성을 나오며 그가 물었다.
“미라, 차 한잔 할 시간이 있는지?”
“있어.”
“이 근처의 카페에서 할까,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갈까?”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로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손을 저어 보임으로써 아무런 뜻도 없다는 표시를 했으나, 그의 눈은그녀와 같은 종류의 미소를 담고 있었다.

“너의 집에 가서 마시자. 정말 차만 마시는 거야. 나는 너의 우표수집책에는 관심이 없걸랑.”
그들은 마주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그는 매우 정중하게 그녀의 외투를 받아 걸고, 거실에서 의자를 빼고 밀어 주었다. 그가 차를 끓이는 동안혼자서 기다리기가 심심해서 그녀는 그를 따라 부엌으로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청소부를 두지 않고 모든 가사를혼자서 처리한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였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미라에게 양해를 구한다는 눈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이태리어로 대화를 하는 품이 엘레나인모양이었다. 미라는 화장실에라도 가는 듯 부엌을 나와서 거실로 갔다. 그녀는 넘실넘실 넘쳐오르는 욕망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그를기다렸다.

그가 쟁반에 차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잔에 차를 따르며 그가 웃었다.
“엘레나가 지금 뭐 하냐고 물어봐서 내가 둘러대느라고 혼났네.”
“엘레나는 네가 나랑 만나는 거 몰라?”
“알아, 엘레나에게 얘기했어. 물론 모든 걸 다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엘레나에게 감춰야 할 이유가 있어?”

그녀의 질문에 그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미라도 남편에게 우리 사이의 모든 일을 얘기하진 않을 거 아닌가?”
“그래. 하지만 너희 부부는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이잖아? 엘레나도 당당하게 다른 애인을 가졌던 적이 있고. 왜 너만 감추는건데?”
“엘레나가 우리의 관계를 알면 상처 받을 거야.”
“나는 엘레나한테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 나는 너희 둘을 부부로 인정하지 않거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행복해도 좋다고 말하는너는 그녀를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건 미라의 견해일 뿐이지. 내 견해로는 그것도 사랑이야. 내 견해로는 책임감도 사랑이거든.”
“그래, 그러면 너는 죄의식을 가지렴. 나는 안 가질 테니까.”

그녀가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자 그도 마주 웃었다. 그들은 곧 클레츠머 음악에 대해서 대화를 하였고, 그는 자신이 가진음반을 들려 주었다.

그녀가 이제 가 보겠다며 일어났다. 그가 그녀의 외투를 꺼내와 다정한 동작으로 입혀 주며 물었다.
“정말 내 우표수집책 안 보고 갈래? 진기한 우표가 많이 있는데?”

성에 막 눈뜨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 여자친구를 유혹할 때 쓰는 말투를 흉내내며 활짝 웃는 그의 표정이 소년처럼 천진해 보였다.그의 살결을 기억하는 미라의 기억력이 그의 품을 향해 쓰러지라고, 그의 손길을 맞아들이라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는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원했던 건 죄의식이 없는 당당한 애무였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우리 엄마가 임자 있는 우표수집책을 조심하라고 하셨거든.”

*

며칠 후,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식사를 마친 미라는 저녁산책을 나갈까 오늘은 집에 있을까 궁리하며 저녁상을 대강 치우고 있었다.이때 남편이 부엌에 들어와 거들기 시작하였다. 세척기를 채우며 그가 말을 걸었다.
“만약에 부모님이 고의로 그런 문구를 써 넣었다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죽은 후에는 당신이 그 재산을 아이들을 잘 키우는일에 쓸 거라는 믿음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래서 당신을 건너 뛰고 아이들이 성년이 된 후에 받도록 명시하신 걸까?”

그녀가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부모님한테 직접 물어 보라니까?”
“내가 죽은 후에 당신이 유산을 가로채서 아이들을 버리고 한국으로 가버릴 거라고 생각해서?”
“글쎄. 아뭏든 나는 당신이 죽을 병에 걸리면 당신을 간호하지 않을 거야.”

그가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나면 나는 마음이 급할 거야. 당신 없이 아이들을 잘 키워야하니까 돈도 벌어야지, 할 일이많거든. 죽어가는 당신을 돌보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당신은 부모님한테 가서 죽어.”
“당신 어쩜 그런 말을…”
“같은 이치지 뭐. 부부는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타산 없이 살아온 나를 이렇게 확실하게 따돌리는 거랑 뭐가 달라? 내게돈이 필요한 시기는 아이들이 어린 시기 뿐이야. 나중에 아이들이 다 커서 제 밥벌이 할 때, 아이들에게 직접 선물로 주시겠다는것은 당신 부모님이 나를 못 믿겠다는 소리고,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부모님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당신의 가족들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것을 아니까 정이 막 떨어져. 당신한테도.”
“이해가 가. 내가 죽은 후 당신이 유산을 받아서 설령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고 해도 누가 뭐랄 수 없어.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우리 아이들을 정성으로 키울 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말야. 우리 부모님은 당신에게서 그것 이상 더 바랄 수 없어.나는 내가 죽은 후에도 당신이 외롭지 않게 잘 사는 것까지도 바랄 수 있지만.”

미라가 조리대를 닦다 말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앞만 보며 냄비를 닦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뒤에서 안았다. 그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오랫동안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딱딱한 그의 등은, 그녀를 한번도 업어 보지 못한 그녀 어머니의 등허리를 연상시켰다. 어머니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낳아서기른 딸을, 남의 남편이 된 아이 아버지에게로 보내는 순간 어머니가 보여 주었던 꼿꼿한 등허리가 갑자기 생각났다. 자신을 업었던할머니의 따스한 등만을 사랑이라고 기억하는 딸의 의식 속에서 어머니의 꼿꼿한 등허리는 늘 빛을 잃었다. 이성을 사랑이라고인정하지 않는 딸에게 이성밖에 줄 것이 없는 어머니가 가엾게 느껴졌다. 남편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가 손을 닦고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안았다. 서로를 향한 연민으로 한참 동안 말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그와 닿은 부분이따스해졌다. 그의 온기가 마치 상처에서 나는 열처럼 가엾게 느껴졌다. 문득 그의 상처를 핥아주고 싶은 동물적 본능이 배꼽근처에서 지르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배꼽을 남편의 몸에 바짝 밀착시켰다. 잠시 후 그의 앞섶에서 묵직하니 신호가 왔다.그의 신호가 점차 확고해졌다. 그녀는 바지 위로 그의 앞섶을 살그머니 만져 보았다. 그가 낮은 소리로 신음하였다. 그 소리가그녀에겐 슬픔처럼 아련하게 느껴지며 왈칵 뜨거운 감정이 솟았다.

샤워실에서 쏴아하고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미라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그녀가 욕실 문을 열자 그가 놀라서 돌아보았다.그녀는 싱긋 웃으며 거침없이 샤워욕조로 들어섰다. 그들은 물방울의 세례 속에 번갈아 무릎을 꿇어가며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주었다. 좁다란 샤워욕조에 갖힌 빡빡한 수증기 속에서 불편한 자세로 몸이 합쳐졌다. 잠시 후 그들은 욕실 문을 박차고튀어나왔다. 손을 잡고 복도에 철벅철벅 물자국을 내면서 침실로 뛰어들어와, 젖은 몸을 그대로 침대 위에 던졌다. 안타까운그리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한 몸으로 엮이는 순간 파르르 떨며 찢어졌다.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에 쓸려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편의 품 안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냄새가 포근하니좋았다. 미라는 남편의 팔을 베고 누워서, 아직도 미련처럼 몸 속에 남아 있는 잔잔한 물결을 즐겼다.

“누가 마루바닥에 물 흘려 놨어?”
밖에서 딸아이가 화장실에 가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했는지 날카롭게 화내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 부부는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이 학교에 간 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남편이 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얹었다.
“나 출근한다. 안녕.”

근래에는 오나가나 서로 인사가 없던 처지라 미라는 당황하여 엉겹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섰는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일어선 김에 그를 현관문까지 배웅하였다.

“안녕!”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다시 한번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미라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하려다 만말을 그녀가 그에게 대신 말했다. 정말로 그가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말하는 순간 그 말은그들의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그녀는 전화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파올로가 받았다. 반가워하는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이름을 대며 거기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하필이면 왜 그 카페인지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가 시간을 낼수 있는 날짜를 말해 주었다.

그녀는 조금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그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늘 입은 옷이 참 예쁘다고 칭찬하며그녀의 뺨에 사샤의 키스를 하는 그에게서 달콤한 향수냄새가 났다. 그녀의 목을 얼핏 스치는 그의 숨결이 유난히 따스하게느껴졌다. 그는 조금 일찍 퇴근해서 집에 먼저 들렀다가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미라는 양 손을 탁자 위로 뻗어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이 위로 가도록 손을 돌려서,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결혼반지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가늘고 밋밋한 금반지가 희미한 조명 속에 묵은 세월의 빛을 발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반지를바라보다가 시선을 그녀의 눈으로 옮겼다. 눈으로 묻는 그의 질문에 미라는 역시 눈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정이드러나지 않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정 잘 했어. 나는 미라가 남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래.”
“고마워. 그런데 남편에게 다시 시도해 보자고 통고하기 전에, 내가 해결할 것이 하나 남았어. 너와의 관계야.”
“미라, 나는 미라에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할 거야.”
“나 오늘 너랑 자고 싶어, 파올로. “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파올로가 웃을 듯 말 듯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라는 그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응, 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없애고 싶어.”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좋아. 나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아뭏든 찬성해.”
“그리고 나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파올로.”
“왜?”
“내가 남편에게 돌아간 후에도 우리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걸 나는 원하지 않아.”
“알았어, 미라.”
그가 종업원을 불러 계산을 했다.

그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미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파올로, 엘레나 때문에 주저된다면, 그건 네 문제니까 네가 알아서 결정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이미 결정했어.”

그가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정중하게 문을 잡아, 그녀가 먼저 들어가도록 도왔다. 찰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가 성급하게 그녀를 마주 안는 바람에 그의 손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그들은 복도에선 채로 급하게 서로 옷을 벗겼다. 옷을 바닥에 함부로 떨어뜨린 채로 그가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각자 마음속으로 백 번도 넘게 그렸음직한 찬란한 전희를 벌이며 그들은 열기와 신음으로 잦아들었다.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그가 동의를 구하듯 속삭였다.

“콘돔을 준비했는데 미라 생각은 어때?”
“좋아. 피임을 확실하게 해 줘. 나는 애기가 생기면 어떤 경우에도 낙태는 안 할 거니까.”
“그래? 그럼 피임을 불확실하게 할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미라도 함께 웃었다.

그들은 완숙한 중년의 남녀답게, 화려한 섹스를 침착하게 벌였다. 그는 연장과 기술을 완벽하게 겸비한 숙련공이었다. 게다가 그는여자를 오랫동안 즐겁게 해 주고 싶다는 성의를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그녀를천천히 공략하였다. 그녀가 생전 처음 맛보는 종류의 쾌락이 온몸을 흐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리하게 자극하였다.

그녀의 흥분은 극에 달했지만 이상하게도 절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절정이 올듯 하다가 금새 멀리 물러나곤 하는 것을 느끼며,그녀는 절정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를 기다리던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그녀에게서 몸을빼내려고 하였다. 미라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몸을 움직여 그를 강하게 자극하였다. 그가 그녀의몸 안에서 무서운 힘으로 폭발하였다. 방안의 공기가 붉게 달아오르고, 그가 짧고 격하게 비명을 토했다. 그 소리가 미라의귀에는, 아름다운 관계 하나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며 마침표를 찍는 소리로 들렸다.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우던 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려나가며, 고요한 만족감이 빈자리를 채웠다. 그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동안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잠이 들었거나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한숨처럼 내쉬며 일어났다.욕실에서 팬티만 입고 돌아와 그녀의 옆에 다시 누우며 그는 그녀가 절정을 맞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였다.

“미안해. 내가 미라의 몸을 잘 몰라서 너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구나.”
“아니야, 나는 정말 만족했어. 여자는 절정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 그리고 네 탓이 아니야. “
그를 위로하며 미라는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는데 왜 절정에 이르지 못했을까?
“미라가 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오오, 파올로. 나도 너랑 헤어지기 싫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봐. 한편으론 관계가 정리되어서 홀가분하지?”
“흐음, 그래.”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서, 기오라 화이트만의 클레츠머 연주를 끝까지 들었다. 한 덩어리로엉긴 기쁨과 슬픔이 한 가닥의 가느다란 클라리넷 음율로서 뽑혀지느라 예리하게 가슴을 저몄고, 그 상처는 아프고 달콤하였다.

집을 나서기 전에 그는 오디오에서 시디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가 그녀를 집 근처까지 자동차로 데려다 주었다. 자동차 안에서마지막으로 포옹하며 서로의 행운을 빌어 주었다. 담담하려고 둘 다 노력하였다.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머리를 숙여 그녀의 양 뺨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차오, 미라. 나중에 감정이 정리되면 다시 만날까?”
“물론이지, 파올로. 안녕!”

*

파올로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 며칠을 미라는 멍한 상태에서 보냈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나날이 흘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고, 그와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아쉬움에 가슴이 탔다.

미라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와서 거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 부모님께 유언장 건으로 말씀드렸어. 그 문장을 별뜻 없이 그냥 써 넣으셨다고 해.”
“고마워.”
“그런데 부모님이 진실을 얘기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상관없어. 당신이 부모님께 말했으니까 이제 됐어. 고마워.”

그녀의 담담한 대답에 갑자기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다 된 거라고? 이렇게 쉽게 될 일을 가지고 당신은 그렇게 난리를 친 건가?”
“누가 할 말을? 그러게 진작에 물어 보지 그랬어? 전화 한 통화면 해결될 일을 이렇게까지 질질 끌은 사람이 누구게?”
“아아,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남편이 절망스러운 소리를 냈다. 미라도 절규하였다.
“아아, 당신이라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미라는 다 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문득 다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설명을 반복하고 싶은 욕망을 지그시눌렀다. 그가 접시를 식탁 위에 소리나게 놓고, 부엌에서 나가려는 시늉을 하였다. 미라가 그를 잡았다.

“가지 마.”
“나 당신 독설 또 듣고 싶지 않아.”
“나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녀가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그를 껴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의외라는듯 엉거주춤 서 있었는 남편의 심장에대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우리 도망가지 말자, 응?”
한참만에 그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저녁식사 후, 미라는 버릇처럼 이자 강변으로 나갔다. 강변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콸콸거리며 인사하는 그녀의 폭포에게 말을걸었다.

정말로 이것이 사랑인 걸까? 사랑은 이렇게도 끔찍한 일일까? 서로 찢고 찢긴 상처를 꿰메고 덧덴 흉터가 훈장처럼 덜렁거리는누더기를 나는 지금 사랑이라고 보듬고 있구나. 사샤와 함께 에덴 동산의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를버리는 일에도 주저가 없었던 내가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움켜쥐고 있구나.

사샤,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니?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며 구원했던 사랑의 이상형을 이 세상 누구와 함께 나누며 살고 있는지?너를 한번 만나고 싶다. 만나서 너 역시 현실에서 누더기를 기우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위로받고 싶다. 나의 누더기를 보여 주며,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노라고 자랑하며 너를 위로하고 싶다.

폭포는 수다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과묵하기도 해서 줄기차게 한가지 소리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녀는 폭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여느때처럼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미라는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등 뒤에서안았다. 까끌한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그의 온기를 느껴 보았다. 남편은 감전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미라는 마우스에 얹힌 그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쨍하고 금속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그가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한참 들여다 보더니, 서서히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는 그녀의 손에 마우스를 쥐어 주고 방을 나갔다. 모니터에는 방금 그가그녀에게 쓴 편지가 떠 있었다.

“사랑하는 미라!

내가 얼마나 당신의 도망을 두려워하며 평생을 살아왔는지 당신은 상상하지 못 할 거야. 당신은 처음부터, 우리가 사귈 때부터 곧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였어. 당신은 이혼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결혼같은 건 하지 않았을 사람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버리는 일에 당신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 이념을 위해서 인간성을 저버리는혁명가들과 뭐가 달라?

그러나 당신의 그런 점이 나를 계속 흔들어서 깨어 있게 했음을 고백해. 빛이 바래지 않는 사랑을 구하려는 당신의 노력은 내인생에도 활력소가 되었어. 하지만 이제 난 지쳤어. 당신의 경멸을 견디는 것도, 당신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어.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당신과의 잠자리를 피했다고 말했지. 그간 당신을 불행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일부러 그런건 아니야. 나는 당신의 복수가 두려워서 그랬어.

사랑에 관한 한 당신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야. 당신 식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고, 꼭같은 사랑을 나에게 요구하지. 그러나그런 사랑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의 일이기에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사랑을 줄 수가 없어. 하지만 당신과 함께 늙고 싶다는 나의염원도 사랑이야.

가려면 가. 하지만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어져서 간다고는 말하지 마. 나는 내 식의 사랑을 주었는데 당신이 그것을 외면했을뿐이니까.”

그의 편지는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말수가 적은 남편이 영혼을 짜내어 쓴 편지였다. 오해로 점철된 지난 이십 년을 정리하려는그의 성의였다. 자판 위로 후두둑 듣는 물방울에 놀라서 미라는 후딱 물러나 앉았다.

남편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를 등 뒤에서 안았다. 그의 마른 등에 머리를 대자 다시눈물이 쏟아졌다. 불현듯 어머니의 마른 등이 가여웠다. 남편은 자신의 등이 뜨겁게 젖어오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속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사랑하는 분위기를 사랑했지만 당신은 사람을 사랑했어.”

그러나 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그런 어휘는 그를 불안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 대신 이렇게 말했다.
“가정을 유지하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타성이라고 얕본 거 용서해 줘. 당신이 그것을 당신 식의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나도 그렇게생각하겠어.”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를 두었다가 그가 어려운 말을 하듯이 입을 열었다.
“미라, 나의 삶에서 섹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는 건 당신도 알고 있지?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잠자리에서 나를모욕할까 봐, 그래서 내가 당신 앞에서 나의 남성을 상실할까 봐 두려웠어. 그건 아마도 내 삶의 의지를 꺾는 치명타가 되었을거야. 어쩌면 나는 벌써 남성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고, 다음 섹스에선 그것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을피했던 거야.”

미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남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놀라웠다. 미라는 그의 눈을 보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고개를 앞으로 뺐다. 그러나 그가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냥그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미안해. 나는 그런 줄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생각에 빠졌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체의 변명과 설명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나는 사랑이 없으면 말라서 죽는 샘물이야. 나와 함께 늙고 싶다는 당신의 염원만으로는 부족해.나도 당신과 함께 늙고 싶다는 염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그녀는 그녀 안에 끊임없이 고이는 샘물을 퍼 주는 대상이 되어 줌으로써 샘이 마르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을 그에게 하고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그에게 생소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바꿨다.

“나는 에로틱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야. 이성적으로 당신의 사랑을 믿더라도, 당신의 애무가 없으면 나의 감성이 시들어 버려.나는 지금 섹스를 말하는 게 아니야. 나는 관심을 말하는 거야. 밖에서 돌아오면 내 눈을 한번만이라도 쳐다봐 줘. 침대에누우면, 이불을 둘둘 말고 돌아눕기 전에 나를 한번만 안아 줘. 애무는 전희가 아니야. 내가 당신이 좋아서 당신의 몸을 만지면,섹스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귀찮아 하지 말아줘.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표시로 여기고 그냥 기뻐해 줘.”
“어떻게 그렇게 항상 표시하면서 사나? 당신은 내 진심을 알잖아?”
“나는 당신이 필요할 때만 꺼내서 사용하고 다시 주머니에서 넣어 두는 손수건이 아니야. 나는 당신의 애인이야. 연애할 때처럼뜨겁지는 않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잔잔하게 유혹하고 싶고, 당신의 잔잔한 유혹을 받고 싶어.”

그가 앞만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도 나를 손수건으로 여겼으면 좋겠어. 서로 필요할 때에만 편안하게 사용하고, 죄의식 없이 넣어둘 수 있는.”

미라는 시비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물었다.
“그래? 그러면 손수건 세탁은 누가 하지? 너무 더러워지면 언젠가는 빨기도 싫어질 텐데, 우리 둘 중에 누군가가 손수건을 버리고싶으면 어떡하지?”
“버리긴 왜 버려? 필요한 물건인데?”
“너무 더러우면 세탁하는 것보다, 버리고 새로 사거나 일회용 티슈로 대체하는 게 경제적일 수도 있거든.”

그제서야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당신은 그러고 싶을 것 같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에 따라선. 그리고 당신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몰라. 손수건이 너무 더러우면. 내가 손수건 빠는 일을 그만두면, 당신쪽에서 먼저 손수건을 버릴지도 몰라.”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랑 다른 사람이잖아? 그걸 이해 못하니?”

그녀도 한숨을 쉬었다.
“나도 너랑 다른 사람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같이 늙기로 했잖아?”

그가 침묵하였으므로 그녀도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는 종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등이 발산하는 온기를 그녀는 믿었다.

그의 등에 머리를 대고 앉은 그녀의 시야에, 벽에 걸린 조각보가 들어왔다. 알록달록하게 기워진 삼각의 무늬가 마치 훈장처럼화려하게 보였다. 그것을 보며 그녀는 오늘 그들이 자신들의 누더기에 훈장을 하나 더 달아주었다고 생각했다. 서로 찢고 찢긴상처를 꿰메고 덧덴 흉터가 바로 그들의 훈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그들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불 밑에서 그의 손을 찾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곧 늙을 거야. 어쩜 이젠 자면서 코를 골게 될지도 모르고 몸에선 노인네 냄새가 날지도 몰라. 피부엔 저승꽃도 필 거고몸도 미워질 거야. 그런데 우리가 서로의 몸을 너무 오래간만에 보거나 만지게 되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 상대방이 미워진 것에정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상대방이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면서 화가 날지도 몰라. 상대방이 변해가는 것이 낯설게 보이지 않도록우리 좀 더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순하게 물었다.
“자주 보고 자주 만지면 코 고는 소리가 안 들려? “
“들려도 내 소리 같아서 듣기 싫지 않아. “
“그런 게 어딨어? 시끄러우면 누구나 다 잠이 깨는 거고 짜증이 나는 거지. 오죽하면 우리 어머니는 종교의 힘으로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를 극복하셨을까?”

그들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했다.
“어떤 때는 당신 몸이 내 몸 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 당신 냄새가 좋고, 당신 방귀 뀌는 소리가 사랑스럽고, 당신 코 고는소리가 자장가 같이 들려. 그런데 항상 그런 건 아니야. 내 몸이 당신 몸하고 친할 때만 그래. 당신 몸이 낯설어지면 당신의냄새나 소리도 낯설게 느껴지고 불쾌해. 그리고 언젠간 나도 당신한테 그렇게 불쾌하게 느껴질까 봐 불안해.”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난 한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으니까.”
“우리 더 늙으면 대소변을 받으며 상대방을 간호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 어쩌면 서로의 노망끼를 견뎌야 할지도 몰라. 우리그때를 대비해서 서로의 몸을 친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냥 머리로만 좋아해도 냄새가 싫고, 소리가 싫고, 촉감이 싫으면 소용이없잖아?”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미라는 저 혼자 열심히 떠든 것이 머쓱해져서 입을 닫으며 덧붙였다.
“당신에겐 이런 얘기가 귀찮겠지만.”

예상 외로 그가 금방 대답했다.
“귀찮지 않아. 진지하게 듣고 있어.”

그들은 이불 밑에서 손을 잡은 채로 천장을 응시하였다. 너무 긴 시간이 흘러서 혹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변한 것 같애.”

그가 고개만 돌리고 그녀를 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할 수가 있니? 자식에게 기저귀를 갈아 주고,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과정에서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할 수가 있니? “
“당신이 변한 걸 내가 여태까지는 왜 몰라 봤지?”
“우리 그간 힘들었잖아? 궁지에 몰리면 시야가 좁아지잖나?”

그의 심상한 대답은 그녀의 지난날을 가볍게 용서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클라리넷의 예리한 선율이 가슴을아프게 저몄고, 그 상처는 미안함으로 화끈거렸다.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구테 나하트, 미라.”

그리고는 이내 돌아누워서 이불을 둘둘 말았다. 미라는 머쓱한 마음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변하긴 뭐가 변했어?” 그러나 어찌된일인지 화가 나는 대신 빙긋 웃음이 나왔다.
“구테 나하트.”

*

이해와 오해를 반복하는 삶이 고단하게 계속되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베니스의 주민들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낡은 가옥을끝없이 보수하며,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발코니에 빨간 제라늄을 가꾸는 끈질김을, 나폴리의 주민들이 도로 위에서 빨래를 말리며사는 도도함을, 시칠리아의 주민들이 초라한 가옥에 척박한 일상의 훈장을 달아주는 의연함을 기억했다. 미라는 머리와 마음을 텅비우고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을 외치며 무심하고 단순하게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자칫 기운을 잃으려던 어느 저녁에 미라는 혼자서 영화를 보러 나갔다. 파올로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베니스의 추억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태리 영화였다. 오래간만에 듣는 이태리말이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만든사람들에 대한 자막이 끝없이 올라가고, 마지막에 이태리 국영방송국의 작품이라는 글씨가 크게 떠서 움직이지 않을 무렵에 그녀는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올로의 얼굴이 오락가락 하였다. 그 사이로 난데없이 이태리 국영방송국의 이니셜이 떠오르고, 내쳐 그이니셜이 찍힌 카메라 앞에서 일하던 사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뒤이어 파올로가 자기는 옛사랑 크리스티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찾았다며, 너도 사샤를 그렇게 찾아 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튿날 그녀는 추억에 대한 감상에 아른하게 젖으며, 검색사이트에 사샤의 이름과 그가 근무하던 방송국의 이니셜을 쳤다. 그의이름이 들어 있는 사이트의 링크가 대번에 몇 페이지나 주르륵 떴다. 아, 역시 그는 성공했구나. 그렇게 정열적으로 일을 하더니결국 인정을 받았구나. 미라는 오랫만에 그의 이름을 보니 눈물이 날듯이 반가웠다. 대부분의 제목이 이태리어로 쓰여 있었지만,“국경없는 기자”라는 불어 고유명사가 자주 눈에 띄였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대로 그는 현장을 찍는 사진작가로 성공했고, 또종군기자로도 이름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기자상도 있는 것을 보니, 영혼이 맑은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에많지 않은 나이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이 틀림없었다.

미라는 마음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오래 잊고 있었던 그의 수려한 용모와 날씬한 몸매가 다시 떠올랐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를 그에게 한시바삐 알리고 싶었다. 그의 연락처를 찾고자 여기저기 많은 링크를 열어 보았다. 전부 이태리어사이트였으나 그의 메일주소가 뜨는 곳은 없었다. 어지간한 대화가 가능했던 그녀의 이태리어 실력은 그와 헤어진 후 이십 년 동안방치되는 사이에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그녀는 내용을 읽을 염도 하지 않고 골뱅이 표시만 찾아 빠른 속도로 훑으며, 수없이많은 사이트를 열고 닫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연락처 정도는 인터넷으로 찾아질 텐데.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사진을 컴퓨터로 손을 본 듯, 밝은 금발과 붉은 기가 도는구렛나룻이 검은 색으로 변해서 마치 체 게바라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서 그의 얼굴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이사샤, 반가워. 너 하나도 늙지 않았구나. 이십 년이 지났는데.

모르테라는 단어가 무심코 눈에 들어왔다. 모르테? 모르테? 죽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열고 닫은 모든 사이트를지배했던 단어였다. 갑자기 아까 후딱 닫았던 어떤 사이트에 떴던 장례식 사진이 생각났다. 기억을 더듬어 그 사이트를 다시 찾아보았다. 이태리 국기가 휘날리고 수많은 인파가 군집한 정면에 보이는 까만색의 관이 유난히 인상적인 사진이었다. 사진 설명에는그의 이름과 37세라는 단어가,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단어들 속에 섞여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전문을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형편없는 언어실력에도 기적처럼 몇가지 단어가 이해되었다.보스니아, 이태리 방송팀, 유탄, 전원 사망.

그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서서 방송카메라를 익숙하게 다루던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그녀에게옛 유고슬라비아의 경치를 보여주고 싶어서, 국경에서 군인에게 간곡히 부탁하던 열성적인 모습도 떠올랐다.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앉아서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을 때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우던 붉은 덤불. 그 땅에서 그가 죽다니.

숨이 막히도록 놀란 미라는 오타를 거듭해가며 파올로에게 이메일을 썼다. 파올로, 사샤가 죽었나 봐. 이 사이트 좀 읽어보고확인해 주면 고맙겠어.

그녀가 메일을 보낸지 10분도 안되어 전화벨이 울렸다. 파올로였다. 그는 특유의 침착한 어조로, 사샤가 죽었다는 기사라고말했다. 전쟁터 어린이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방송을 제작하기 위하여 전쟁이 한창이던 보스니아로 파견된 방송팀 전원이, 병원에 홀로남겨진 어린 환자들을 촬영하던 중에 유탄에 맞아 숨졌다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은 그녀 스스로도 쓴 단어였지만, 남의 입을 통해들으니 참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침묵하자 전화선 저쪽의 파올로도 침묵하였다. 미라는 무어라 횡설수설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사샤의 가슴팍이, 허리가, 어깨선이 구체적으로 생각났다. 그가 어디를 다쳤는지, 고통은 없었는지, 그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니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북해에서 그가 앓아 누웠을 때, 그녀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던 일이떠올랐다. 그의 주검이라도 그녀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면 그가 위로를 받을 것 같은 망상이 들었다.

죽는 순간에 그의 눈에 밟혔을 그의 아이들, 그의 아내. 미라는 사샤의 뒷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가 결혼하여 가정을이루고 살았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마음씨가 따사로운 그는 단란한 가정의 행복을 꿈꾸었다. 그의 아내를 생각하니기가 막혔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와 단 몇 주를 사귀다 헤어진 후에, 그가빠져나간 자리를 견디지 못해 거의 빈사상태로 쩔쩔매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미라는 서랍을 뒤져서, 사샤가 로마에서 사다 준 금반지를 찾았다.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것을 주고 싶다던 그의 바람대로 그의금반지는 그 긴 세월 동안 전혀 퇴색하지 않은 채 변함없이 반짝였다. 그녀는 반지를 소중하게 손가락에 끼었다.

“엄마, 웬 반지야? 새로 샀어?”
눈썰미가 밝은 딸아이가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아니, 옛날에 남자친구한테서 받은 반지야.”
미라는 심상한 듯 대답했다.

“예쁘다. 엄마, 이리 좀 줘 봐.”
딸아이는 제 손가락에 끼고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더니 도로 돌려 주며 물었다.
“토마스가 선물한 거야?”
“아니, 사샤가.”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미라는 옆에 앉은 남편을 의식해서 말을 이었다.
“사샤가 죽었대. 오늘 인터넷 검색해서 알았어.”

남편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보스니아에 종군기자로 갔다가 유탄을 맞았대. 벌써 10년 전에 그랬다니까 마흔도 못 채우고 갔네.”
미라는 그가 무슨 대답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딸아이가 끼어들었다.
“어머, 가엾어라. 그런데 엄마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은 게 다행이야. 그랬다면 벌써 과부가 되었을 텐데.”
“그래, 그랬겠네.”
딸아이의 천진한 발상에 미라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때 뜻밖에 남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야, 사샤가 엄마랑 결혼했으면 아마 안 죽었을 거야. 사샤는 엄마같은 여자를 두고,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거야.”
미라는 놀라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컵에 쥬스를 따르며 그녀를 흘끗 보았다. 미라는 얼핏 얼굴 근육을 당겨 웃는 표정을지어 보였다.

각자 딴 생각에 잠겨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남편은 왜 그런지는 몰라도, 사샤가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사샤가 가정을 이루었으리라는 미라의 믿음도 딱이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샤가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말한 마지막 문장이떠올랐다. 미라, 나 죽을 때 네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녀는 불쑥, 자기가 사샤에게 준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남방셔쓰 윗주머니에 들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분홍손수건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고이 접힌 채로, 그의 피를 담뿍 머금고 마지막으로 제 구실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접시를 개수대에 담가 놓은 채 미라는 밖으로 나갔다. 이자 강변의 결이 고운 잔디밭 위에 가을 수목이 긴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그녀의 폭포는 많은 양으로 우렁차게 떨어지며 하얀 거품으로 끓어올랐다.그녀는 그 폭포수 앞에 뿌리를 내린 아름드리 고목의, 둥그렇게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터앉았다. 휘장처럼 드리운 나뭇가지 사이로폭포가 보였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어 두 손을 맞잡아 턱에 대고 그녀는 왈왈거리며 물보라를 하얗게 피워내는 폭포에게 말을걸었다.

사샤, 겨우 그거 살고 갈 거면서 그렇게 생가지를 찢었니? 너 보내고, 나 사실은 많이 아팠다. 너도 힘들었지? 그리고 나선행복하게 살았니? 좋은 여자 만나서, 예쁜 아기들 낳고 잘 살았니? 그랬으면 좋겠어. 그랬다면 나는 너랑 헤어지고 아팠던 것도괜찮고, 네가 다시 시작하자고 했을 때 몰라본 것도 덜 미안할 것 같구나.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면, 행복하라고 두말없이 너를보내준 나를 속이고 불행하게 살았다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사샤, 미안하다. 네가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으면, 그때너를 따라가는 건데. 너의 곁에서 너의 짧은 인생을 좀 더 아름답게 지켜 주는 건데.

그녀의 가슴을 단단하게 막고 있던 둑이 갑자기 툭 터지며, 오랜 세월 갇혀서 곰삭은 간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자 강의폭포소리가 그녀의 폭포소리를 삼켜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놓고 목놓아 울었다.

며칠 후 그녀는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설방에서 더 지난 글, 지난 글, 새 글의 순서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