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를 통해 하네스는 여성의 몸을 천천히 정복해 나갔다. 그녀가 그와 사귀고 싶다고 말한 그 이튿날 밤에, 그는 그녀의 입술을정복하였다.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자신의 입술과 혀로 느껴보기도 하였다. 모든 속도를 그에게 맞추기로 결심한 그녀는 그가스스로 그녀의 혀를 찾아 들어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며 욕망을 자제했다.

하네스는 그녀의 영원한 남자가 아니라 잠시 그녀의 곁에 머무르다 떠날 남자였다. 앞으로 많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남자였으므로, 그녀는 그가 고유한 섹스 스타일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그의 첫 여자로서 주는 선물이라믿었다. 그가 서두르지 않았으므로 그녀도 서두르지 않았다.

첫 키스 후 일 주일쯤 지난 날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난 미라는 집에 오자마자 욕실로 가서 젖은 옷을벗었다. 큰 수건으로 몸을 감으며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쏟아붓는 뒷마당이 장관이었다. 그녀는 욕실의 창턱에 올라 앉았다. 갑자기하늘이 찢어지더니 그와 동시에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뒤이어 섬광과 폭발음이 장마당의 사물놀이처럼 쉴새없이작열하며 사람의 혼을 뺐다. 혼이 빠져나간 가슴은 충만감으로 뿌듯하게 차올랐다.

목덜미에 따스한 숨결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젖은 옷을 벗어 버린 하네스가 그녀 뒤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시선을 하늘로 준 채로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그의 허리를 만졌다. 다시 한번천둥이 치는 틈을 타서 그의 따스한 손이 겨드랑이를 통해 수건 밑으로 들어왔다. 천둥 번개가 한번씩 칠 때마다 그들의 손길은점점 대담해졌다. 자신들이 활짝 열어젖힌 창가에서 짙은 애무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미라는 하네스의 손을 끌어 방으로갔다.

그가 그녀를 찾아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손으로 먼저 찾아 봐. 방향을 알면 쉬워.”

그는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고 곧 그들은 한 몸으로 포개졌다.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여자를 맞는 하네스의감동을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하네스는 감동을 느낄 겨를도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래, 그렇게 해 줘. 참 좋아.”
“미라, 바보같은 이 녀석이 갑자기 잠들려고 그래.”
그가 몸을 빼내며 풀이 죽어 투덜거렸다.
“어디 봐.”
그녀는 그를 반듯이 눕히고는 이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이 녀석 대신에 네가 좀 자고 있어.”

미라는 그의 녀석을 그녀가 가진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정성껏 애무하였다. 그의 녀석이 성을 내며 다시 살아났다. 그녀는 그의녀석을 좀 더 약올린 후에, 이불을 걷어내고 주인에게 인계하였다. 목적을 코 앞에 두고 급해진 그의 녀석은 이제는 주인의 명령에고분고분 복종하였다. 마지막 순간을 맞아 하네스가 숨을 죽였다. 그녀의 가슴 위에 얹힌 그의 심장이 그녀의 몸속으로 쿵쿵울리며, 때마침 두드려대는 천둥 소리와 공명하였다. 밖에서 자연이 잔치를 벌이는 소리가 그제서야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워서 이불 밑에서 서로 손을 잡았다 . 한참만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런 거였구나.”
“어땠어?”
“기분이 굉장히 특별했어. 특히 너의 애무가. 그러나 절정 자체는 그저 그랬어.”
“처음엔 다 그래.”
“미라, 너의 절정은 어땠어?”
“내 기분도 굉장히 특별했어. 절정은 없었지만.”
“내가 잘하지 못해서 네가 절정을 못 느꼈던 거지?”
“아니, 하네스. 내가 긴장해서 그랬어.”
“처음이 아닌 사람도 긴장을 하나?”
“섹스를 할 때 나는 네가 되거든.”
그녀가 웃었다. 그도 따라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여자들은 다 그렇게 복잡해?”

미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나한테 말해 줘.”
그가 이빨을 보이며 개가 으르렁거리는 흉내를 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누구와도 첫 섹스에서는 절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것은 거짓말이었으나 그녀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날 밤 미라는 문득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생각났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티칸에서 산 그림엽서를 찾았다. 서로닿을락말락하는 두 개의 손을 확대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미라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가슴에 대었다. 이튿날 그녀는 그엽서를 하네스에게 건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 가져.”

그녀는, 그녀가 로마에 갔을 때 이 그림을 보고 너를 떠올렸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하네스는 엽서와 그녀의 얼굴을번갈아 바라보더니 고맙다고 말하며, 잔뜩 어질러진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사샤가 떠난 후 그와 관련된 많은 습관들이 절로 사라져 버렸지만, 들꽃을 보면 작은 꽃다발로 묶어 누구에겐가 선물하고 싶은,강박증에 가까운 그녀의 충동은 없어지지 않았다. 미라는 이제는 사샤 대신 하네스를 위하여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녀는 매일같이물리과 건물로 가서, 들꽃을 묶은 꽃다발을 그의 자전거에 매달아 놓았다.

미라는 사샤에게 편지를 썼다. 사샤, 나 하네스와 사귀기 시작했어. 그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잘 됐구나. 축하해. 나는 너랑하네스가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해. 네가 행복하기를 기원해.

그녀는 가끔 사샤의 꿈을 꾸었다. 어떤 꿈속에선 엉뚱하게도 사샤가 아직도 그녀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런 꿈에서 깨고 나면 그녀는사샤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아른한 행복에 젖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보물을 들여다보며 흐믓해 하는 심정일 따름이었다.사샤는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추억의 방으로 확실하게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사샤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 그녀의 감성을 하네스에게쏟아붇는 일에 일말의 갈등이 없었다.

*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돌아오는 방학에 한국에 다녀가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는 물었다. 미라가 그럴 계획이 없다고 하자어머니는 말을 빙빙 돌리더니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혼기가 다 지나간다고 주위에서 자꾸 재촉을 한다. 여태까지는 내가 알아서 거절했는데, 이번에 들어온 선은 좀 아까워서그래.”
“선? 나보고 선보러 오라고요? 나 지금 시집갈 생각 없는데?”
“선을 보랬지 누가 시집 가랬니? 남자 학력이나 집안 무난한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성격이 너랑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래.네가 그냥 한번 만나나 보면 어떨까 해서.”
“결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왜 남의 집 귀한 아들을 구경해야 해요?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얘, 넌 왜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니? 평생 결혼을 안 할거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굳이 그것을 바꿀 마음이 없는 것 뿐이에요, 엄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공부가… 그리고 연애도.”
그녀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공부라는 단어로 둘러대려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조그만 소리로 연애라고 덧붙였다.
“애그, 잘났다, 이것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나중에 나한테 원망하지 말고.”

어머니는 그녀가 덧붙인 연애라는 말을 그냥 흘려들은 모양이었다. 선머슴처럼 떨어진 청바지나 입고 다니는 당신의 딸이 연애에관심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미인도 아닌데다 제 몸 하나 가꿀 줄도 모르니 남자들에게 인기는없겠지만, 다행히 공부 하나 잘하는 재주는 있으니 나중에 여차하면 제 밥 정도는 벌어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안경 낀 처녀박사가 어때서 그러냐는, 어머니의 위로 겸 자부심을 미라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끊는다. 몸조심 하고.”
“알았어요, 엄마. 몸조심 할게.”

어머니가 과년한 딸에게 늘상 당부하는 몸조심이란 말이 꼭 건강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라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녀고유의 인생이라 생각했다.

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을 그녀가 농담을 섞어가며 가볍게 얘기해 줬지만 하네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 내게는 이해가 가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야. 중매결혼도, 혼전순결도 전부 내게는 낯선 개념이야. 그래서 나는 네게 아무런말도 해 줄 수가 없어.”

그의 진지함에 비해서 그녀의 말투는 가벼웠다.
“괜찮아. 나는 위로 받을 일이 없으니까.”
“너는 어머니를 속이는 게 죄스럽다고 했잖아?”
“그래,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내 뜻대로 잘 사는 것이 오히려 효도라고 생각해. 어머니가 궁극적으로 바라는것는 결국 자식의 행복이니까.”

하네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가 정말로 무엇을 바라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할지도 몰라. 단지 나는 어머니의 근본적인 자식사랑을 믿을 뿐이야. 하지만 만약에 어머니가 자식의진정한 행복이 아닌 다른 걸 원한다 해도 할 수 없어. 나는 어머니의 세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잖아?”
“그런 확신이 있는데 너는 왜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또 미안해 하니?”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좀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자기 생각을 당장에 말로 표현해야 할 때도 있고, 긴 세월을 두고 보여 주어야 할 때도 있잖아?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꽂으면서 진실을 꼭 말해야만 하는 일이 정말로 그렇게 많을까? 어쩌면 내 평생에는 한번도 없을지도 몰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스스로 다짐하듯이 말했다.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로 변해 버린 덕목들을 나는 무시하면서 살 거야.”

하네스는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대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의 손길에 위로를 느끼며 미라는 문득, 어머니가말하려던 것이 선이나 결혼이 아니라 혹시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머니는 미라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걱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남의 눈치를 보며, 죽기 전에 미라를 한번만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미라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가 이 세상에서 혈육의 정을 느낀 사람은 그녀를 길러준 할머니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도, 할머니도 떳떳하게 애정을 표시하지 못하고 늘 남의 눈치를 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젊은 날 짧은 사랑의 산물인 미라 하나와 맞바꾼 어머니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미라의 애정에 민감했다.

미라가 할머니를마지막으로 만나러 갔을 때, 할머니는 소풍 가는 손주에게 하듯이 잘 다녀 오라고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뜬틈을 타서 할머니는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말하며 입술을 떨었다.

독일에 온 후 미라는그 생각을 하며 울었다. 그녀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고분고분 서울로 오고 독일로 왔듯이 그녀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아버지에게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려운 살림에서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아버지의 입장을 알기때문이었다.

장례식이 한참 지나서야 할머니의 소식을 전해들은 미라는 그녀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무엇인지를 묻는 대신에, 남이 만들어놓은 순서만 지키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할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주장하는 지름길을 놔두고,남이 그려 주는 약도에 묵묵하게 순종함으로써 그녀의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져 버린 삶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대를 먼저충족시킨 후에 할머니를 찾아 가려던 자신의 계획이 비겁한 속임수였음을 고백하고, 세상과의 충돌을 겁내어 스스로를 기만한 자신을미워하였다. 그날 그녀는 남이 그려준 약도에 깊은 금을 그어서 잘라 버렸다.

*

성장배경과 정서가 서로 다른 미라와 하네스가 대화를 통해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 있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로 감정을 다치는일도 많았다. 그들이 파티에 초대받아 갔을 때였다. 미라는 파티에 가면 보통은 여러 사람들과 돌아가며 흥겨운 대화를 나누거나춤을 추곤 했지만, 하네스가 동행하면서부터는 대부분 그의 곁을 지켰다. 하네스는 파티 특유의 가벼운 대화를 싫어해서, 미라가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동안 그가 심심해 했기 때문이었다.

밤이 늦어 파티가 무르익었다. 음악소리가 시끄러웠으므로 그들은 남들이노는 것을 구경하며 술만 마셨다. 하네스가 그녀의 손을 찾아서 잡았다. 미라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들 주변의 소음이멀어지고 그들 둘만 무인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 그의 얼굴 옆선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문득 그들이한번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네스, 사랑해.”
“너 술 취했니?”
대뜸 돌아오는 대답에 미라는 기가 막혀서 잠잠히 있었다. 너무나 섭섭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잠시 후 그가 조그만 소리로말했다.
“미안해. 화났니?”
“조금.”
“내가 당황해서 그랬어.”
“뭐가?”
“너무나 오래 기다리던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어.”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다.
“괜찮아.”

그녀는 정말로 화가 풀렸다는 표시로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코를 꾹 누르며 웃어 보였지만 마음이 어딘지 쓸쓸했다. 그녀를 그녀답게만드는 소중한 날개 하나가 꺾여져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 이어 그녀는 그들이 평생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라는사실을 상기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털어버렸다.

오만한 두 쌍의 뿔이 투닥거리고 부딪치며, 좀처럼 닳아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미라가 밖에서 어떤 일에 깊은인상을 받고 들어온 날이었다. 그녀는 하네스와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서, 하루종일 안달하며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가돌아오자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그를 붙잡고 그날 그녀가 겪은 감동을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가 쌀쌀맞은 말투로말허리를 뚝 끊었다.

“나 지금 네 얘기 듣고 싶지 않아.”
“왜? 너한테 얘기해 주려고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나는 지금 그 얘기를 들을 집중력이 없어. 네가 얘기해도 내 머리 속에 안 들어온단 말야.”
그녀는 무안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슨 예의가 그래? 너한테 소중한 사람한테 중요한 얘기인데, 노력하지도 않고 듣기 싫다고 그러면 어떡해?”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듣는 척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나는 솔직히 얘기하는 거야.”

미라가 상상하지 못했던, 불손한 언행이었지만 하네스는 자신이 솔직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다. 분위기에 맞추어 귀에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게 진정한 대화라고 생각하느냐며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마저 지었다. 미라는 그가 한국의 배려문화를 빗대어공격하는 말이라고 알아들었다. 그녀는 그의 오만과 독선에 발끈했지만,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감정의 낭비를 한바탕 주고받은끝에, 그와 소통할 점접이 없는 언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하네스가 물리학계의 새로운 발견에 관해 상기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한바탕 일장연설을 할 기색이었다. 미라는 관심도없거나와 그녀가 이해하기엔 사전지식이 부족해서 따분했지만 예의상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며칠 전의 일이생각났다. 그녀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나 지금 네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들어 봐. 인류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얘기야.”
“미안해. 내가 집중이 되지 않아서 네 얘기가 머릿속에 안 들어온단 말야.”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그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그녀가 시침을 뚝 따고 덧붙였다.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듣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솔직히 얘기하는 거야.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

그녀는 독일사람들은 솔직한 행동과 무례한 행동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네스가 갑자기 펄펄뛰었다.

“너는 나한테 지난 번 일로 복수를 하려는 거야. 유치해.”
“복수는 무슨 복수? 상대방의 기분을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을 우습게 보는 오만함에 대한 복수?”
그는 화가 나서 문을 소리나게 닫고 나가 버렸다.

그들은 취향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인생관도 달랐다.
“미라, 여자친구와 공통된 관심거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예를 들면 과학에 관해서.”

그녀의 대답이 선선하게 나왔다.
“너의 다음번 여자친구를 그런 분야에서 찾으면 되겠네.”
“누가 딴 여자를 원한다고 그랬어?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리지. 애인이 일회용품이야? 한 가지가 맘에 안 든다고 갈아치우게?”
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생글생글 웃었다.

“애인이 그럼 붙박이 장이야? 평생 벽에 붙여 놓을래? 결혼하기 전에 가구도 좀 바꿔 봐야 뭐가 좋은지 알지.”
“사랑은 어차피 금방 사라지는 건데 자꾸 바꾸면 뭐해? 결혼생활에서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함께 살겠다는의지야. 사랑은 처음에 남녀가 만나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미라는 자기와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사랑은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하하는 것이 모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목소리에 가시를 박았다.

“사랑이 사라진 후 단순히 기능만 하는 결혼생활? 지루하고 기만적인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네스?”
“전혀. 가정의 목적은 인간이 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정감을 주는 데에 있어.”

하네스는 미라의 가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는 가시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쯤해서 미라는 그들의 차이점은사랑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는 목적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미라 자신은 서로간의 선의를 확인하는 의식으로서 대화의분위기를 중요시 하는 데 비해, 하네스는 오로지 대화의 내용에만 집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가 남녀의 차이에 있던동서문화의 차이에 있던 아뭏든 지금 자신들은 규칙이 다른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라는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선 그녀가그의 규칙에 맞추기로 하였다. 그가 그녀를 모욕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녀도 가시를 빼고 대화의 내용에 집중하였다.

“아니야, 하네스. 사랑만큼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어디 있어? 사랑은 세상의 지루함과 인간의 게으름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생명수야. 그래서 사랑이 죽은 결혼생활에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안정감을 기대할 수 없어.사랑이 죽었는데도 가정의 안정감을 기대하는 사람은 사기꾼이야.”
“아니야, 미라.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계승하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지. 사랑이라는 감정놀음에모든 에너지를 허비하는 인생은 무책임하고 소모적인 인생이라니까.”
“문명과 문화의 원천이 바로 사랑이라니까.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이룩할 에너지가 없는 거라고.”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들에게 딱이 상대방을 설득시키겠다는 의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미라에게 있어서 그들은 인연이 닿아서 잠시 만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질 사이였기때문에 서로 다른 결혼관에 대해서까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성격이 달라서 생기는 갈등만큼이나 하네스가 주는 매력도 컸다. 그는 일상의 평범한 것들을 신기하게 여기는 재능을 가진사람이었다. 그는 대를 물려 내려오는 요리법을 검토하고, 새로운 음식을 실험하거나 잊혀진 옛날의 음식을 재현했으며, 비누와샴푸를 새로운 방식으로 또는 예전의 방식으로 스스로 만들어 썼다. 시중에서 파는 치약의 성분이 어쩌니저쩌니 하더니, 이제는 치약대신에 뭘 사용하는지 이빨이 점점 누렇게 변해갔다.

그는 그가 접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의문을 품었고, 어린아이처럼 줄기찬 호기심과 부지런함을 가지고 그 대상을관찰하고 해부하였다. 미라의 눈에는 그의 그런 태도가 문화적 사명감으로 보였다. 인류의 문명은 일상을 이루는 소소한 것들을통해서 계승되고 발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라는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하찮은 돌조각과 자투리천처럼 때로는 의미 없어보이는 그의 실험에 기꺼이 참여하며 그녀는 라벤나의 모자이크 성화와 한국의 조각보가 창조되는 과정을 엿보는 감상에 젖었다.

특수한 쟁반을 만든다고 몇 주씩이나 온 방안을 각종 나무판과 페인트로 어질러 놓는 그를 보며 미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노상저렇게 살면 나중에 부인이 고생 꽤나 하겠다고 속으로 놀리며 돌아서는 가슴 한 켠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놀리는 마음 한 구석에는이렇게 재미있게 방을 어지르며 사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에 대한 선망이 숨어 있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이렇게 문화적 가치가부여된 일상을 공유하는 결혼생활이라면, 그 일상이 사소하더라도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가 그의 부인될 사람을 부러워하는 점이 또 한가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었다. 독일 중류층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그들과의 첫대면은 미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사회 현상에 대한 상식이 넓으면서도 따스한 인간미를 풍기는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우아하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 그의 첫 여자로서 그에게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남겨 주고 그의 또다른 추억을 위하여 자리를비켜 주어야 한다는 그녀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네스는 많은 연애의 언덕을 넘으며 영혼을 키워야 할 사람이었다. 그녀가만끽한 젊음의 특권을 그녀는 하네스에게서 앗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하네스를 사랑했으므로 언젠가는 그의 행복을 위해서 그를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