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에게서 사샤의 키스를 받은 미라가 몽롱한 정신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시간이 넘어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저녁을먹는지, 부엌에선 구수한 냄새가 나고 웃는 소리에 섞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는 먼저 침실로 가서 살이 많이드러나는 얇은 원피스를 벗고 수수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욕실로 가서 화장을 지웠다.

부엌문을 열자 가족들이 저녁을 먹다 말고 돌아보았다. 평소에 무뚝뚝한 아들아이가 영화는 재미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저그랬다고 대답했다. 남편이 오목한 접시에 토마토 스프를 퍼서 아무 소리 없이 그녀 앞으로 밀어 주었다. 김이 오르는 발그스름한스프는 그녀가 숟갈을 들기도 전에 그녀의 속을 따스하게 풀어주었다.

토마토 스프와 연관된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수면에 동그라미만 그리다가 도로 들어가 버렸다. 어려서부터 먹은 음식도 아닌토마토 스프가 어째서 향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 난가느다란 흉터가 불빛에 설핏 반짝였다. 그가 놀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다치던 장면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때그녀가 그의 피를 보고 당황했던 일이 생각났다. 토마토 스프의 붉은 빛이 그때 그가 다치던 상황을 연상시켰나 보다고 혼자서짐작해 보았다.

그녀는 그 흉터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다. 그 대신, 그의 눈가에 진 주름살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남편의 얼굴을 자세히 본 것은 꽤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 당황했는지 눈을 깜박였다.

미라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어둠 속에 혼자 누워서, 파올로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그와 나눈 대화, 그의 눈빛을 되새겨 볼 뿐인데도 아랫배에 찌르르 전기가 올랐다.

그녀가 어스름 속에 혼자 누워 있는데 남편이 침대에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작은 등을 켜도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피곤해서 그냥 누워 있는 거니까 그가 불을 켜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로 누워, 책 읽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의 영혼에 무수한 상처를 입힌 사람, 내게서 무수한 상처를 입은 영혼, 곧 남남이 될 사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녀는 가슴이 한켠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언젠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얼굴 옆선을 보며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자기자신이 무서워졌다. 사랑하지 않는지 네가 어떻게 어떻게 알아? 왜 그때 사샤를 따라가지 않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사샤가 왜그때 그런 요구를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사샤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편이 책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았다. 그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책을 덮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이번 크리스마스에 가지 않겠다고."
“왜 그랬어?"
“당신이 원하지 않잖아?"
“오오, 나인."
미라는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다.

“당신 왜 또 그러는 거야?"
기다렸다는듯 폭발하는 남편의 분노가 금새 그녀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분노의 불길은 그녀 마음속에 한오라기 남아 있던 연민을 단숨에 태워 없앴다.

“당신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어. 당신 경멸스러워. 말 시키지 마.”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다. 보나마나 남편은 다시 책을 펴서 계속해서 읽고 있을 것이다. 숨이 답답해진그녀가 이불을 막 들치려는 순간, 이불이 획 벗겨졌다. 바짝 들이대고 그녀를 쏘아보는 두 눈에 서린 증오가 마치 그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했는데 왜 그러는 거야?"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이를 앙다물고 잇사이로 으르렁거렸다.
“아이들 듣게 그렇게 소리 지를래? 죽여 버릴 거야.”

그는 그녀를 흘겨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하게 함께 으르렁거렸다.
“말해 봐, 뭐가 문제야?"
“나는 당신한테 분명하게 단 한 가지만을 요구했어. 부모님이 유언장에 나에 관해서 그렇게 써 놓은 의도를 물어 보라고. 당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수도 없이 약속했고. 그런데도 번번이 당신은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묻고 있어."
“묻고 싶으면 당신이 물어 봐. 그게 내 문제야? 나는 남의 일로 부모님이랑 부딪치기 싫어."
“다시 한번 말해 봐, 남의 일이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남편은 아차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 다음부터는 침묵에 돌입했다.

“남의 일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 보라니까? “
그는 돌아누워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알았어. 아이들에게는 내가 내일 얘기하겠어. 당분간은 내가 한국에 직장이 생겨서 간다고만 말해 두는 게 좋겠어. 우리가 아주 헤어지는 거라고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말해도 나는 상관없어.”

그는 숨도 쉬지 않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럴 경우에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일은 헛수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불을끄고 돌아누웠다. 싸우다 말고 늘 이렇게 도망을 가는 비겁함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그들의 관계가 정말로 가망이 없다고생각했다. 귀나 꼬리가 떨어져나가 볼썽사납게 변한 유리동물들을 그만 와르르 바스러뜨려, 혼백의 가루로나마 해방시키고 싶다는욕망이 솟구쳤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옆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남편 역시 깨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올 것이 결국오고야 말았구나. 그녀의 뇌리에 유난히 선명하게 박혀 있는 광경 하나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녀는 갓 태어난 둘째아이를 안고, 첫 아이의 손을 잡은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가던 길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한국사람들이 음식 꾸러미를 들고, 왁자지껄 떠들며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만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에사로잡혀,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젖먹이가 딸린 가족을 버리고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었던 자신의 충동은,그녀에게 두고두고 충격으로 남았다.

그녀는 그렇게 시댁에 가는 일을 무서워했다. 시댁은 그녀에게 있어서 한 권의 두꺼운 카탈록이었다. 카탈록의 표지엔 ‘‘소시민근성, 메이드 인 저머니’’ 라고 쓰여 있었고, 속을 펼치면 인간이 가진 오만가지 천박함과 모든 종류의 차별이 샘플로서 나열되어있었다. 젊은 시절에 ‘‘소시민 근성, 메이드 인 코리아’’ 라는 카탈록을 털어 버리기 위해 발버둥치던 미라가 젊음을 마감하는 날선물로 받은 것은, 표지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은 독일제 카탈록이었다.

그녀가 평생 족쇄처럼 질질 끌고 다니던, 그 무거운 카탈록을 버린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해졌다. 아울러, 더러운 채로 오랫동안주머니 속에 구겨 박아 마음이 찜찜했던 손수건을 빨 것도 없이 함께 갖다버린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그녀가 늘 가고 싶었던다른 세계로 이제는 가볍게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론 무거운 카탈록, 더러운 손수건과 함께 버려지는 긴 세월이허무하다고 느껴졌다. 고생 많이 했는데.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이만하면 아이들이 다 커서 다행이라고 자신을억지로 위로했다. 아이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뜻밖에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침대 저편에서 소리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쳐 이불 위로 손을 얹었다. 남편을 위로하기 위한행동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아까 한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닌 거, 나 알고 있어."
“…"
“당신이 일자리 때문에 한국에 연락하고 있는 것도 진작에 알고 있었어."
“…"
“나와 부모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고 하는 당신은 어리석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 당신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 일을?”

그녀의 항변에 그가 천천히 돌아누었다.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께에 얹었다. 이제 그들은 이불 위로 서로 끌어안은 형국이었다.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모른다고? 우리의 사랑은 이미 죽었다고 자신있게 주장할 줄 알았는데?"
“지금같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먹통같은 싸움을 할 때는 그런 확신이 들어.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어."
“모른다는 소리를 하다니 당신 변했구나."
“어쩌면 사랑이 죽은 게 아니라, 내가 죽여 버리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우리의 생활이 너무나 지겨워서. 도망치고 싶어서.”

사랑에 관해선 늘 단정적이었던 그녀가 자신의 심정을 의외로 솔직하게 시인하자 그도 마음을 열었는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긴독백을 했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거 나도 알아. 나도 당신에게서 많이 다쳤어. 내가 용기를 잃을 수록 나는 당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줬어. 우리 부모님이 내게는 얼마나 힘든 상대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당신만큼이나 힘든 상대라는 걸 당신은 모를거야.”

미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알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누운 쪽을 멍하니 바라보는데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그녀는 흐느끼지도 않으면서 베개를 펑펑 적셨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안았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뒤통수에 뜨겁게 닿았다. 거짓말처럼 잠이 왔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얹힌 남편의 팔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잘 때 몸에 뭐가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질색을하는 남편이, 그녀를 안은 자세로 하룻밤을 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품에 포근히 안겨서 잠을 잤다는 사실에터무니없이 감동하며, 그녀는 그런 사소한 인정을 늘 목말라하며 살아온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을 먹을 때 갑자기 발견한 그의 흉터는 사실은 그녀의 눈에 너무나익숙해서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누벼진 흉터와 주름살이 마치 그녀 자신의 소유물처럼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의 뺨에 난 흉터를 살그머니 쓸어보았다. 진작에 깨어 있었다는 듯이 그가 눈을 떴다. 슬픔과 희망을 담은 그의눈이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가 그의 흉터에 입술을 댔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이 그녀의 잠옷 밑으로 미끄러져들어왔다. 어제 파올로를 향하여 일었던 솜털들이 대번에 번개를 달고 일어섰다. 남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피부에서 따다닥불꽃이 피었다. 그 불꽃은 팽팽하게 부풀어서 터질 것같이 얇아진 감성의 껍질을 단숨에 찢어 버렸다.

남편은 전희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막바로 문을 두드렸다. 그는 정해진 수순과 습관적인 배려를 벗어 던지고, 거칠게 문을열어젖혔다. 그는 여자를 학대하는 남자처럼 행동했으나 미라는 자신이 학대받는 여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그의몸을 너무나 편안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남편의 감추어진 이면을 처음으로 엿보는, 색다른 쾌락을 느낄 뿐이었다. 아무것도배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분출되는 그의 흥분은 곧바로 그녀의 흥분으로 이어졌다. 흥분이 동시간대에 증폭되는 그들의 널뛰기는 대단히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종내 그들은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동시에 튕겨나갔다.

몸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면서 영혼까지 빠져나갔는지 머리 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그가 그녀의 뺨에 손가락을 대며 작은 소리로속삭였다.

“내가 부모님께 유언장 얘기 물어볼게.”

그녀는 눈을 감을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하였다.

그가 침대를 빠져나간 후, 미라는 아직도 몸 안에서 혈관을 간지르며 돌아다니는 쾌감을 나른하게 즐겼다. 굉장한 섹스였다고생각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열이 식어버린 남자와의, 타성 붙은 섹스가 어떻게 이렇게 성공하는 것인지 이해가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흉터에 대한 자신의 친밀감은 순간적인 정열을 능가하는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흉터에대한 친밀감은 세월이 쌓은, 정열의 축적일지도 모른다고…



(소설방에서 더 지난 글, 지난 글, 새 글의 순서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