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막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라이너가 열쇠를 빙빙 돌리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하네스도 들어와서 그들은함께 식사준비를 하였다. 라이너가 그들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우와, 미라! 너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자전거 한번 무섭게 타더라. 내가 학교에서부터 네 뒤를 쫓아왔는데, 도저히 따라갈수가 없었어. 빨간 신호등에서도 휙 지나가고, 무법천지의 망나니 같았어.”
“응, 나 배 고파서 그랬어. 빨리 집에 와서 저녁 먹으려고.”
빵에 버터를 발라 소세지를 얹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으며 미라가 대답하였다. 하네스가 미라를 건너보며 대견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오이피클을 꺼내서, 빵 먹을 때 접시 대신 쓰는 나무판 위에 하나씩 얹어 주었다.
“젓가락은 참 유용한 기구란 말이야.”
“이번 주말에 우리 뭐 해 먹을까? 또 한국돼지를 먹을까?”

라이너와 하네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물리과 학생들은 고추장 양념을 한 삼겹살을 한국돼지라 불렀다. 주말이면 이들셋이 사는 아파트에 예닐곱의 물리과 학생들이 모여서 같이 요리를 하곤 했는데, 그들은 미라의 입주와 함께 처음 접하는 한국음식을특별히 좋아하였다.

미라가 한국식으로 맵게 양념한 삼겹살이 오븐에서 지글거리며 구워질 동안 하네스는 서양쌀을 버터에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찰기없이 오돌오돌 씹히는 밥을 했다. 라이너는 다른 친구와 함께 디저트를 만든다고 초코렛을 중탕하여 녹인다, 달걀거품을 만든다, 온부엌을 어질르며 법석을 떨었다. 한편 이례적으로 마늘을 듬뿍 다져 넣고 샐러드를 만드는 친구도 있었고, 요리에는 자신이 없다고나중에 설거지를 도맡아 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식탁에 앉자 한 친구가 미리 따서 실온에 두었던 붉은 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일제히 잔을 들어 건배하고 한 모금만 마셔 맛을본 후 눈을 맞춰 와인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고 잔을 내려 놓았다. 맛있다고 서로 칭찬해 주며 식사를 하던 중에 한 친구가느닷없이 하네스에게 물었다.

“너 어제 세미나에서 교수님한테 대들었다며?”

친구의 말에 하네스가 씩 웃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미라에게 그 친구가 설명해 주었다. 고참 연구원들이 주를 이루는 무슨고급 세미나에 하네스도 끼어서 참여하고 있는데, 그 세미나의 좌장인 원로교수의 성격이 괴팍해서, 발표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무섭게 화를 내고 발표자를 함부로 깎아내린다고 하였다. 세미나의 분위기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아무도 감히 그를제재할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차에 어제 하네스가 손을 들고 일어나, 지금 여기가 학문을 위하여 세미나를 하는 곳인지, 종파를가려서 이교를 말살하려는 종교재판을 하는 곳인지를 따져물었다고 했다. 다른 참석자들은 이제 천둥 벼락이 칠 것을 예상하고 숨을죽이고 있는데 뜻밖에도 교수가 좌중에게 선선히 사과하고, 하네스에게는 지적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하네스를 놀렸다.
“너 교수님한테 굉장히 당돌하게 대들었다며? 넌 무서운 게 없냐?”

하네스가 피식 웃더니 갑자기 미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서워하는 게 딱 하나 있지.”

갑자기 그의 시선을 받고 미라는 당황했다. 설마 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얼른 하네스의 입을막으려고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머, 그러다가 세미나에서 쫓겨나면 어떡하려고 그런 소리를 했니?”
“그런 분위기 속에선 어차피 배울 게 없기 때문에 쫓겨나도 내가 잃는 건 없어.”
“너 다음 주에 발표할 차례라고 하더니, 이제 교수님에게 밉보여서 학점 못 따면 어떡하냐?”
“원래 학점이 없는 세미나야. 내가 공부하고 싶어서 그냥 참여하는 거니까.”

학교 점수에 인생을 거는, 한국의 교육풍토에서 자란 미라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점도 안 나오는 과목을 호기심에서 공부할 수있는 하네스가 신기하게 보였다.

미라가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합격하자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딸의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자신에게 딸이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을 미라는 나중에 독일에 와서 들었다. 아버지가 처음 받아 볼 딸의 사진에서 딸이 입고 있는일류학교의 교복은, 어머니가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웠나 하는 것을 한마디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믿었다. 덩달아 미라도,자신이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찾게 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바깥에서 왕왕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소란스럽게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내다본 라이너가 낙태금지법의 폐지를주장하는 데모대라며 화를 냈다. 피임이 가능한 오늘날, 임산부에게 낙태의 결정권을 주는 것은 살인방조라고 말하는 라이너에게하네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할 것이라고 여성 본인이 판단한다면, 누가 감히 출산을강요할 수 있겠느냐고 하네스가 주장하자, 라이너는 뱃속에 있는 태아는 한 여성의 소유물이 아니라 엄연한 인간이기에, 국가에서아동학대를 감시하듯이 태아의 생명도 지켜 줘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네스를 불렀다. 한 친구가 실수로 와인잔이 넘어뜨렸는데,유리잔의 모가지가 똑 부러졌다는 것이다. 하네스는 공구상자를 가지고 와서 접착제 두어 개를 섞어 개더니, 와인잔을 감쪽같이붙여버렸다. 미라는 하네스의 익숙하고 정교한 손놀림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문득 베니스의 유리 수공업장을 떠올렸다. 유리는한번 깨지면 그만인줄 알았는데, 유리를 붙일 수도 있구나. 유리를 붙이는 사람도 있구나.

친구들이 감탄했다.
“와우, 이 세상에서 하네스가 못 붙이는 건 없어.”

이때 하네스가 미라에게 눈을 주며 말했다.
“내가 못 붙이는 게 딱 하나 있지.”

하네스의 솜씨에 넋을 놓고 있던 미라는 후딱 정신이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하네스는 그녀를 보며, 마치 날씨 이야기나 했다는듯이 심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네스가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미라는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를 이루는 세미나에 애송이학생이 끼어서 발표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울 텐데, 교수님께 입바른 소리를 한 직후라 하네스의 입장에서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닐것이었다. 미라는 그가 발표준비에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가 방에 있을 때, 미라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거나과친구들을 불러서 떠든다거나 하는 일을 삼갔다. 장보기나 설거지같이 공동으로 하는 집안일도 그녀가 많이 맡아서 하였다. 그러나그는 밤새워 준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전혀 초조한 기색도 아니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느긋하고 무심해 보였다.

발표가 있었던 날 저녁에 미라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네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팔베개를 하고 침대에누워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발표 잘 했어?”
“응.”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교수님이 뭐라고 그랬어?”
“나중에 와서 열쇠 받아 가라고 하셨어.”
“열쇠? 무슨 열쇠?”
“연구실 하나 주신대. 앞으로 그 분 연구소에 와서 공부하래.”
“어머, 왜? 네 발표가 교수님 마음에 들었나 봐?”
“응.”
“축하해, 하네스.”
미라가 팔짝 뛸 듯 기뻐하며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하며 그제서야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고마워. 너 나 좋아하는 거 같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라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응? 왜?”

하네스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요즘 네가 나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미라는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했다.
“너 발표준비 잘 하라고 그랬어. 나는 누구라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기를 바라거든.”
“나는 공부 못해. 노력파도 아니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니까.”
“성적이 중요한가 뭐? 나는 네가 학점도 없는 과목을 자진해서 수강하는 것 보고 놀랐어. 그런 자세가 바로 자기 일을 열심히 잘하는 거지.”
“너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그러는구나. 아무래도 나랑 사귀고 싶은 거 같다?”

그는 농담같은 소리를 진담으로 했다. 그녀는 얼버무리며 그의 방을 나왔다. 그와의 대화가 한 편의 코메디 같아서 미라는 고개를설레설레 흔들었다.

미라와 어울려 다니는 건축과 학우들은, 그녀가 함께 살고 있는 물리과 학생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미라는 학교의 제도실에서밤늦게까지 설계를 하다가, 건축과 친구들과 함께 허름한 술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기득권층의 소시민성에 대해기염을 토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집착과 소유욕을 경멸하고, 새로운 모습의, 자유로운 사회를 추구하는히피들이었다. 나치의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덮어두려는 기성세대의 권위의식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봉기한 독일의 68년 학생운동은70년, 80년대에 이르러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수업시간에 뜨게질을 하는 남녀학생들에 의해 맥을 이어갔다. 남녀 젊은이들의공개적인 뜨게질은 관습과 권위에 대한 반항인 동시에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의 표시였다.

미라의 친구들은 기존의 일부일처제를 거부했다. 그 대신,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섹스하며 자유롭게 가정을 이루다가, 마음이변하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세상을 그렸다. 여러 명의 남녀가 서로를 평화롭게 공유하는 가정을 이상적인 공동체의 형태라고그들은 주장하였다. 독일의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자유가 싹트는 과정을 보며 자란 미라는 여러 면에서 그들과 공감했지만, 그들이꿈꾸는 가족공동체에는 회의적이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살면서 기분에 따라 평화스럽게 섹스파트너를 바꾸는 것까지는 나도 상상할 수 있겠어. 사랑과자유를 인생관으로 삼는 사람들 사이에선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자식이 태어나면 어떡한다?”
“미라는 어째서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누구의 핏줄이든 상관없이, 다 같이 사랑으로 키우는 거야. 자식은 그 누구의분신도 소유물도 아닌 고유한 인격일 뿐이야. 꼭 피를 나눈 부모만이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응, 나는 이 아이가 어느 남자의 자식인지를 따지자는 게 아니야. 단지 아이의 입장에선 확실한 아버지 상이 하나 있어야 하지않을까 해서 그래.”
“오늘은 프란츠가 아이의 아빠이고, 프란츠가 바쁘면 내일은 슈테판이 아이의 아빠가 되는 거야. 아버지 상이 꼭 하나여야만 한다는법이 어디 있어? 많을 수록 좋은 거지. 오히려 그럼으로써 종속관계에 대한 횡포도 줄어들 거고, 부모 자식간의 갈등도 사라질거야.”
“그러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인 프란츠가 떠나가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슈테판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는 아빠 아냐? 아,그러고 보니 엄마들도 바뀔 수 있겠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바뀌는 상황에서 아이가 사람을 어떻게 믿고 정을 붙이냐고?”
친구들은 이런 식의 대화가 처음이 아닌 듯, 자신만만한 태도로 번갈아가며 대답했다.
“일부일처제 가정에서도 이혼라는 게 있잖아? 한 사람의 엄마나 아빠만 믿고 있던 아이들의 상처가, 여러 명의 엄마와 아빠를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상처보다 더 클 거라고 미라는 생각하지 않아?”
“음, 그런가?”

미라는 친구들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서 담배불을 붙이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인간이 가정이라는 확고한 틀을 만들어 유지해온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맥주 조끼를 내려 놓으며 그녀는 석연찮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모가 가끔씩 바뀌는 현상이 과연 인간의 본성에 맞는 건지,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에 상처가 되지나 않는지 나는 확신이 안서서 그래. 기존의 가정에선 이혼할 땐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엄마와 아빠가 한 사람씩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안정감이 있잖아? “
“애초부터 기존의 틀을 깨고 자연스럽게 자라난 아이들이라면 부모에 대한 소유욕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미라, 네가 그런 생각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기존의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응? 그럴까?”

그녀가 자신이 없어서 우물거리자 친구들은 왈자지껄 웃고 떠들면서 맥주조끼를 들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가족공동체를 위하여 건배!”

그녀는 건성으로 맥주조끼를 들어 보였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그녀를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문화에서나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공통되게 존재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종족보존을 위해서남자에겐 되도록 씨를 많이 뿌리려는 본능이, 여자에겐 그 씨를 잘 키우려는 본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씨를 뿌리는횟수가 중요하고, 여자에게는 양육을 책임 있게 도와 주는 씨 임자를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존의 가족제도는여성과 아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친구들이 이미 다른 테마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라는 조금눈치를 보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이 얘기를 꺼냈다. 친구들은, 어떤 결혼생활이건 결국은 식상한 상태에서 유지될 수밖에 없기때문에 위선적인 제도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미라는 아동의 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이가 정붙이는 것과 상관없이 엄마나 아빠가 늘 바뀌는 상황을 강요하는 것또한 너희가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이때 한 녀석이 술기운에 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역시 여자라서 미라는 생각하는 게 우리랑 다르군. 자식에게 집착하는 거 보면. 여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누가 자기 자식인지알기에 그런가? 남자들은 그런 면에선 사사로운 소유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봐.”

그녀가 버럭 화를 냈다.
“남자들이 자신의 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알에 대한 책임을 전반적으로 벗겠다는 소리야?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사사로운소유욕이라고 말하는 남자들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용의가 있다는 거야, 아니면 자기 자식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야?”

그녀가 일사천리로 몰아붙였지만 친구들은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제도를 개선해서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하자는 거지, 누가 책임을 벗는다고 했나? 오히려 모든 자식들을 평등하게 책임지겠다는 거아니야?”

그녀도 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어? 남자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여자들은 사정을 하면서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더욱 힘이 없는 아이들은 버려질수도 있는 거야? 기존의 사회에서도 여성과 아동은 약자였는데, 너희들의 제도에선 더 약자가 되라는 거 아닌가? 왜 자유와 평등을추구하는 운동도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거야? 잘난 남자들이 나한테 그걸 좀 이해시켜 줘 봐.”
그녀는 분위기를 배려하여 마지막 말을 우스개 소리처럼 말했다.

친구들도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글쎄 그러니까 더 나은 제도를 만드는 일에 잘난 여자인 너도 부지런히 참여하란 말이야.”

미라는 결론이 있는 토론이 아님을 그제서야 알아보고, 혼자 열을 낸 게 멋적어서 우물우물 말을 맺었다.
“제도가 사람을 부자유하게 하나 뭐? 사람이 원래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거지.”

친구들이 화해를 바라는 말투로 농담을 건넸다.
“헤이, 우리는 미라가 페미니스트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가정적인 여자였군.”

미라는 또 따지고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지금 무슨 이념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니까. 아무리 자식이라도 남의 인생을 내 맘대로 결정하지말자는,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니까.”

그들은 날씨가 화창하게 좋은 날에는 설계를 하다 말고, 혹은 지루한 강의를 빼먹고 교외의 호수로 수영하러 갔다. 시원하게 뚫린숲길을 떼지어 자전거로 달리면서, 짐칸에 엉덩이를 걸치고 서커스의 침팬지같은 모양으로 페달을 밟으며 서로 웃기기도 하고, 달리는자전거 안장 위에 두 발로 아슬아슬하게 서는 연습을 하기도 하면서 어린아이들처럼 장난을 쳤다.

호수에 도착하면 일제히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로 뛰어들었다. 수영복이나 수건도 필요없었다. 물에서 나오면 맨 몸을 그대로화창한 햇볕과 간지러운 바람에 내맡겼다. 축축한 수영복을 걸치지 않은 몸은 금새 말라서 쾌적하였다. 벌거숭이들은 함께 공놀이를하거나 기타를 치기도 했고, 풍경화나 누드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도시의 근교에는, 고속도로를 새로 내느라고 많은 양의 자갈을 채취해서 생긴 호수가 여러 개 있었다. 숲과 들판에 둘러쌓인 커다란호수들은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휴양지가 되었고, 그 중의 하나를 나체족들이 점령하여 나체호수로 만들어 버렸다. 한두 명이 옷을벗기 시작하자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보기 싫은 사람들은 그 옆에 있는 다른 호수로 발길을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나체호수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나체문화가 뮌헨의 영국공원과 이자 강변을 기점으로 등장하면서 평범한소시민들을 경악시키던 것이 점차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미라가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교외의 호수로 수영 가자고 말했을때, 미라는 처음부터 나체호수에는 안 간다고 못을 박았다. 친구들은 알았다고 선선히 대답하였다. 미라에게는 초행길이었다. 막상호수에 도착하자 친구들은 옷을 홀랑 벗더니 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어머나, 잠깐만! 여기 나체호수인가 봐?”
미라가 놀라서 외쳤지만 친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호수 안쪽으로 부지런히 헤엄쳐 도망가 버렸다.

혼자 남은 그녀는 난감하였다. 나체호수에 와서 혼자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도 실례라는 걸 아는 그녀는 망설였다. 어떡한다? 나도벗어야 하나? 그냥 집에 가 버릴까?

미라는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녀는 옷 밑에 입고 온 비키니 차림으로 물에 들어갔다. 그녀가 헤엄쳐 오자친구들이 물에서 장난을 치며 기다려 주었다. 나란히 헤엄을 치면서 그녀가 나무랐다.

“나빠. 날 속이다니.”
친구들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씩 웃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덧붙였다.
“맨몸이 훨씬 편해. 물에서도 편하고 밖에 나가도 젖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
“난 불편하단 말이야.”
“그래서 넌 수영복 입고 있잖아? 그럼 됐지 뭐가 문제니?”
“오, 나인!”
미라는 친구들에게 물을 뿌렸다. 친구들도 그녀에게 물을 끼얹었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잔디밭에 둘러앉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미라는 자신의 시선이 우연히라도 친구들의 하체에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속으로는 거북스러웠지만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였다. 친구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그녀가불안한 티를 내면 유치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체족들도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나체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미라가 입고 있는 비키니에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이란 옷과 함께 자아를 벗어 버리는 것인지 그 호수가에는 자연만이 존재했다. 자아를 벗어 버리고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간들은 선하고 자유로웠다. 몸의 결점을 감추고 보완해 주는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커다란 흉터나수술자국, 기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당연히 남에게도 너그러웠다.

그날 이후로 미라는 나체호수의 단골이 되었다. 자유를 대변하는 나체호수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비키니를 벗고나체가 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마음이 내킬 때까지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았다. 자유는 모방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그녀를 호수에 데리고 간 학우들도, 그리고 호수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도 미라가 며칠에 걸쳐 비키니를 하나씩 벗어 가는 과정에대해서 일절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에 대범했던 그들은, 그녀가 나체가 되었을 때도 아는척을 하지 않았다. 미라 역시 그 누구도 자신을 관찰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으므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있었다.

성인남자들이 조그마한 고추를 달랑거리며 뛰어다니거나 노는 모습은 미라의 눈에 신선하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로는발기된 상태의 페니스만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라는 나중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면 온 가족이 벌거벗고 살리라 상상하며 혼자즐거워하였다. 또한 그녀는 자연 속에서 벌거벗고 천진하게 노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이들과 함께 자유스러운 가족공동체를 이루는것까지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면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관계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물리과 모범생들은 미라의 그런 생활을 알고 있었다. 셔쓰의 단추를 항상 단정하게 여미는 그들 모범생들을미라가 답답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미라가 나체호수에 다니는 것을 불량하게 보지 않았다. 여름이면 맨발로다니는 미라와는 달리 샌들 안에도 꼭 양말을 신는 그들은 미라가 속한 세계는 자신들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걸 인정했다.

가끔 미라가 건축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놀 때, 라이너와 하네스도 자연스럽게 끼었다. 학교의 세미나에서 교수님앞에서도 줄담배를 피우는 미라의 친구들은 라이너와 하네스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집에서 간접흡연을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라이너와 하네스는 미라의 학우들을 당장에쫓아냈을 것이 분명했다.

미라의 친구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면, 평소에 클래식 음악만 듣는 하네스와 라이너는 열심히 경청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다가미라와 친구들이 음반을 걸어 놓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하네스와 라이너는 슬그머니 사라져 제 방으로 갔다. 같은 템포로쿵덕거리는 종류의 음악을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춤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놀고 싶은 만큼만 놀다가 부담없이 떠나가는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편안하게 공존하였다.

건축과 친구들과 록에 맞춰 춤을 출 때나 물리과 친구들과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나 미라의 마음은 항상 편안했다. 그래서 그녀는어느 편이 자신의 본성에 맞는 것인지 스스로 관찰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사람은 한 가지로 정해진 본성을 타고나는 존재가 아닐지도모른다고, 판테온처럼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본성을 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언제부터인가 미라의 생활에서 하네스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단둘이 있을 때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할 말은 오로지 요리이야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줄기차게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고 개발해냈다. 특별히 맛이 좋다는 선전과 함께 고급 우유가 시중에시판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가격대의 우유를 종류별로 사 와서 시식 테스트를 했다. 번갈아 눈을 가린 후 시식하고 꼼꼼히 기록한결과, 그들은 새로 나온 비싼 우유와 종래의 값싼 우유의 맛에는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실용적인 옷을 디자인하여 재단하거나 시중에선 살 수 없는 독특한 가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정서적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에게는,의식주가 지배하는 일상생활이 유일한 접점이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그들은 의식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식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또 하나의 교차점을 발견하였다. 미라가 신문광고를 보고 낡은 피아노를 값싸게 들여온 후의 일이었다.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하네스가 바이올린과 악보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서툴게 이중주를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말이 필요없는 새로운 공동작업에 두 사람은 단숨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하네스의 활이 뽑아올리는 음이 가늘게 떨리며 사라지는 순간에맞추어 건반과 페달에서 손과 발을 떼면서, 미라는 그들이 바흐의 소나타를 처음으로 제대로 연주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피아노에서 몸을 돌려,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괸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음악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불현듯 미라는 그의 품에서 바이올린을 빼내고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스스로를 자제하였다. 미라는 자신의 호감이 어느 순간에 애정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예전에 하네스에게 했던 말, 그녀는 마지막 남자를 찾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첫 여자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둘 사이의결합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네스의 앞날엔 그가 넘어야 할 크고 작은 사랑의 언덕들이 잔뜩 놓여 있었고, 미라에겐 그언덕의 하나가 되어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하고 떠나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가파른 언덕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있는 그녀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하네스가 이왕이면 완만한 첫 언덕을 만나기를 기원하였다.

*

하루는 미라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던 건축과 친구가 한밤중에 술이 취해서 그녀를 찾아왔다. 자다 깨어 잠옷바람으로 문을 열어 준미라를 밀칠 듯이 지나친 그는 그녀의 방으로 쑥 들어갔다. 그는 다짜고짜로 미라의 침대로 들어가 눕더니, 그대로 잠에골아떨어졌다. 얼떨결에 침대를 빼앗긴 미라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차가운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무례를 친구로서 너그럽게 받아 주어야 할지, 아니면 여성으로서 날카롭게 따져야 할지판단이 서지 않았다. 얇은 잠옷을 통해서 한기가 스며들어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순간 갑자기 오기가 솟았다. 어떤 이유에서건그렇게 호락호락 내 자리를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미라는 벽쪽으로 바짝 붙어서 코를 골고 있는 그에게서 이불을 잡아채서 자신의 몸에 둘둘 감고, 침대에 올라 그의 옆에 누웠다.몸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술냄새가 진동하였으므로 역겨웠다. 그러나 찬 바닥에서 덜덜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고 스스로위로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에 미라는 자신의 어깨를 애무하는 손길에 선잠에서 깨었다.
“나인.”
그녀가 확실하게 발음했다. 그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분노를 감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 원하지 않아.”
그의 손이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확 밀쳐 버리고, 벌떡 일어나 옷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지옥같은 밤이 지나고드디어 아침이 온 것에 감사하며. 그가 그런 의도를 가진 것도 모르고 긴 밤을 그와 한 침대에서 보낸 것을 생각하면 미라는자신의 뺨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커피를 끓이고 아침을 차리는 사이에 라이너와 하네스도 일어났다. 미라는 아무 소리없이 아침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난 후 방으로 가서 문을 열어 보던 미라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방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웬 날짐승의 털이 온방에 너부러져 있다가, 그녀가 문을 여는 바람에 다시 휘돌고 싶어서 들썩였다. 그녀의 베개가 칼인지 가위인지 예리한 기구로갈갈이 찢겨, 내장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간밤의 침입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미라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막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 문에 기대어 스르르 미끄러져 앉았다.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않았다. 그가 미친 듯이 흉기를 휘두르며 베개를 찌르고 찢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베개가 나로 보였겠지.흉하게 너부러진 베개 껍대기가 마치 자신인듯 느껴져서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미라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노크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기대어 앉은 문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미라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하네스였다.
“무슨 일이 있어? 아침 먹을 때 네가 이상해서.”

미라는 아무 소리 없이 몸을 비켜, 그를 들어오게 하였다. 난장판을 보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며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누가 그랬어? 네가?”
“아니, 프란츠가.”
“언제?”
“오늘 아침에.”
“그가 아침에 왔었어?”
“아니, 어제 밤에. 여기서 자고 우리가 아침 먹는 사이에 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가버렸어.”

하네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나 프란츠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왜 그가 어젯밤에 나한테 쳐들어 왔는지 나도 모른다구.”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니?”
“침대에서, 그의 옆에서 잤어. 나는 그것이 불쾌했지만 그렇게 했어. 그래서 나한테 너무너무 화가 나.”
그녀가 울먹였다.
“미라, 우리 부엌으로 갈까?”

하네스는 숨만 크게 쉬어도 오리털이 풀썩이며 살아나는 광경에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 학교에가려던 참이었는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방에다 가방을 던져 넣었다.
“하네스, 학교 가던 길이었구나. 그냥 학교에 가.”
하네스는 손을 한번 저어 보임으로써 미라의 말을 일축하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라이너는 벌써 학교에 갔는지 집안이 조용하였다.

“자존심 때문에 그랬어. 그런 식으로 침대를 빼앗기고 바닥에서 잘 수는 없다는 자존심인지, 나는 이성과도 순수한 우정을 유지할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싶은 자존심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미라가 혹은 변명처럼 혹은 독백처럼 울먹울먹 늘어 놓는 소리를 들으며 하네스는 말없이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다.

“나는 프란츠가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믿었어. 우리는 호수에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면서도, 그리고 슬플 때 서로 안아주면서도 성욕이 아닌 남매애를 느낀다고 믿었어.”
“왜 그렇게 믿었는데?”
“그가 항상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랬으니까.”

하네스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라는 차를 호호 불어 마시고 잔을 내려 놓으며 진저리를 쳤다.
“이제 봤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그에게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랑 한침대에서 잤어.”

하네스가 그녀의 잔에 차를 따르며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변한 거겠지.”
“응?”
“감정은 변할 수 있는 거잖아?”

미라는 하네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들이켰다.
“앗뜨거!”
“조심해.”
“저기, 하네스. 오늘 아침에… 그가 베개를 찢었을 때… 그는 나를 죽이고 싶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의 대답이 너무나도 쉽고 무심하게 나와서 미라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방금 프란츠를 두둔하는 인상을 주었으므로, 이번에도선의의 방향으로 위로가 되는 말을 듣기를 기대하였던 그녀는 일순 당황하여 찻잔의 차를 엎지를 뻔하였다. 그녀의 경악한 모습에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탁자에 팔굽을 괴고, 두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감쌌다.

“나는 전혀 몰랐어. 그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도 없고, 나도 그에게서 친구 이상의 어떤 감정을 느낀 적도 없어.”

하네스는 위로하려는 동작으로 그녀에게 팔을 뻗치다가 멈칫 도로 거두었다. 미라는 그 누구든 남의 품에 포근히 안겨서 위로받고싶은 충동을 지그시 눌렀다.

“하네스, 너였다면 나를 죽이고 싶었을 것 같애?”
“아니. 나한테는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나는 너희랑은 다른 사람이잖아?”

그가 무안한 듯 입가에 보일락말락 웃음을 머금었다. 그를 바라보는 미라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너는 어떤 사람인데?”
“원칙과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 너와는 다르지. 너는 마치 인생하고 자유롭기 게임을 하는 사람 같아. 나는 너를 관찰하는게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네스! 나는 너야말로 제 고집대로 사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네스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래? 나는 네가 나를 답답하다고 여길 줄 알았어.”
“아니야, 하네스. 전혀.”

그들은 잠시 말을 끊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슴없는 그의 눈빛이 그녀의 가슴에 서늘하게 박혔다. 찌르는 듯한 그의 눈매를숱많은 곱슬머리가 순하게 감싸준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의 곱슬머리를 처음으로 알아 본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라는 그녀를 부르는 눈빛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를 돌아 그에게로 갔다. 그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갑자기 현기증이났다. 무너지고 싶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그를 문쪽으로 밀었다.

“너 이제 학교에 가야지.”
하네스는 꿈에서 깬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나가자 미라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무너지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한 순간 외롭다고 관계를시작하는 건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고 미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하네스와 사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다른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미라는 잘 알고 있었다. 미라가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포옹을 기다리고 있을 동안, 하네스는 포옹은 고사하고 미라가 우는 것과 노을이지는 것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하네스는 하네스대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끊임없이요구하는 그녀에게 지칠 것이 분명했다.

*

학교의 제도실에 쳐박혀 설계를 하는 사이에 어느덧 가을이 깊어졌다. 마지막 몇날 밤을 꼬박 새운 끝에 과제를 제출하고 나오는길에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미라는 탄성을 질렀다. 새파랗게 깊은 빛이 꼭 한국의 가을하늘 같았다. 불현듯, 저빛깔에 어울리는 단풍이 보고 싶어졌다. 주말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와서 그녀는 하네스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하네스가 벙글거리며 뛰어들어왔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룩셈부르크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초대 받아서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산에 함께 가자고 하려고 그를 기다렸던 미라는 갑자기 바람이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좋겠다며 언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친구가 차를 가지고 와서 지금 밖에서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며, 칫솔을 챙기고 잠옷을 꾸려 재빨리 짐을 쌌다.

“안녕, 미라!”
“안녕, 하네스! 재미있게 놀다 와.”

그가 훌쩍 몸을 돌리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없다고 너무 슬퍼하기 없기.”

그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쿵쾅쿵쾅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혼자 남은 미라는 몸에 기운이 쑥 빠져서 그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내가 없다고 너무 슬퍼하기 없기. 어떻게 알았지?

그 주말은 지루했다. 미라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가기는 했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단풍의 분위기는 느꼈지만, 정작 단풍 자체는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하네스 없이 그녀혼자서 관찰하는 세상은 어딘지 평면적이었다. 무엇을 보고 싶다는 자신의 희망은 하네스의 눈을 통해 보고 싶다는 뜻이었나 싶어서미라는 혼자 당황했다.

그가 없는 일상은 심심하였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일이, 그와 함께 음악을 듣는 일이, 그와 함께 가만히앉아 있는 일이 그녀에게는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일.

그가 돌아왔을 때 미라는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것으로 반가운 마음을 전달했다. 네가 없어 허전했노라는 말은 꿈에도 하지않으리라 다짐하였다.

하네스는 환경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가 속한 단체에선 자전거 도로망의 개선과 확장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는 한편,자전거 수리점을 무료로 운영함으로써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편의를 도왔다. 자전거를 고쳐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연장과공구를 갖추어 놓고 시민들에게 자전거를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주목적이었다. 하네스는 매주 한 나절을 자전거 수리점에나가서 자원봉사를 하였다.

미라가 방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데 하네스가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들어왔다.
“할로, 미라. 오늘 잘 지냈어?”
“할로, 늦게 오네.”
“나 지금 자전거 수리점에서 오는 길이야.”
“그래? 오늘 거기 가는 날이던가?”
“아니, 원래는 어제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은 왜?”
“여자애를 기다리러 갔었어.”

미라는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연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하네스의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어제 한 여자애가 자전거를 고치러 왔었어. 바퀴가 휜 걸 교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내가 방법을 가르쳐 주니까 금방 잘따라하더라. 손재주도 있고, 똑똑해 보이는 여자였어.”

그는 여자를 묘사하는 대목에선 빙그레 미소까지 떠올렸다. 아마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 여자애가 네 마음에 들었나 봐?”
“응. 그래서 그 애에게 나 다음 날도 여기 있을 거라고, 또 오라고 말했어. 그런데 오늘 걔는 거기 오지 않았어. 나는지금까지 기다리다 오는 길이야.”
그가 풀이 죽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 어떡하니? 이름이나 주소도 몰라?”
“몰라.”
“그럼 내일도 나가서 기다릴 거야?”
“아니.”
“왜?”
“그녀가 올 가능성이 희박해서.”
“그래도… 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며?”
“마음에 드는 거랑 가능성이랑은 다른 문제지. 마음에 들어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면 할 수 없는 거 아냐?”
그는 그녀와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풀렸는지 씩 웃기까지 했다.

“그건 그렇네.”
하며 미라도 마주 웃었다. 사샤와 함께 마지막 일 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목숨을 거는 만남을 경험한 그녀였지만, 그런 말을하네스에게 꺼내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는 너랑은 다른 사람이잖아”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여자애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이가 어린 여자인 것 같았다. 미라는 하네스가 그의 나이에 걸맞는, 순수하고 순한 여자를 첫애인으로 사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였다.

“하네스, 다음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내일 여기 있을 거라고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지금 당장 같이 나가자고 그래봐.”
미라가 진지하게 말했지만 하네스는 쑥스러운지 손을 저으며 씩 웃고 말았다.

그날 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저 달이 저렇게 밝으니 잠이 올 리가 없지”하며 미라는 창에커튼을 달지 않은 걸 후회하였다. 그녀는 엎치락뒤치락 뒤척이다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하네스의 방문앞에 잠시 서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러웠다.

그녀는 기대어 있는 방문을 살며시 밀어 보았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잠시 귀를 기울이자, 규칙적으로 쌔근거리는 그의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의 방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들였다. 그의 숨소리가 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발짝만 더들어가면, 벽 뒤에 붙여 놓은 그의 침대가 보일 터였다. 그가 평온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일 터였다. 그러나 미라는 거기서멈춰서서 한참 동안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썼는데도 그녀의 귀에는 아직도 그의 숨소리가들렸다.

이튿날, 잠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미라는 영 기운이 없었다. 하네스와 라이너가 극장에 가자고 하는 걸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날 밤에도 미라는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 하네스의 방문을 살며시 밀고 그의 숨소리를 듣다가 나왔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도미라는 하네스를 피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미라는 집에 혼자 남아서, 창문으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손톱을 물어 뜯으며 혼자서 끊임없이 묻고대답하였다.
“너는 왜 그와 사귀기를 거부하는 거니?”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그냥 그에게 기대고 싶을 뿐이야.”
“만약에 하네스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를 위해 기뻐하고 축하해 주겠어.”
“네 마음은 어떨까?”
“아주 슬플 거야. 호된 실연의 고통을 겪을 거야.”
“실연은 사랑 후에 오는 거지?”
“뭐? 그렇구나. 나는 이미 사랑하고 있구나.”
“그를 사랑한다고? 이제 어떻게 할 거지?”
”….”
“그가 너의 마지막 남자가 되는 거야?”
”….”

그녀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자전거에 올라타고 무서운 속력으로 달렸다. 공원을 지나고 숲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 억새밭에닿았다. 자전거를 던져 버리고 억새밭에 큰대자로 누웠다가, 금방 벌떡 일어나서 다시 페달을 밟았다. 울퉁불퉁한 길을 날아갈 듯이달려서 라인 강변에 닿았다. 갈색으로 넉넉하게 흐르는 강을 대하니, 그제서야 무작정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서 놓여났다.

“그를 사랑한다고?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마음속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모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마음속의 목소리는 삐졌는지 이제는 그녀에게 물어보지않고 저희들끼리 속닥거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맞지 않는 커플이야. 나중에 후회할 거야.”
“감성을 믿어 봐. 감성은 순간적인 판단이 아니야. 감성에는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이 녹아있어. 이성은 부분적인 판단이고 감성은전체적인 판단이야.”
“그래도 정서가 너무 달라.”
“정서가 같은 사샤와는 낭만이 있었지만, 그 대신 그것은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사랑이었지. 완벽한 사랑은 어차피 없어. 각기다른 사랑이 있을 뿐.”
“이번 사랑도 또 실패할 거야. 지겹지도 않니?”

미라는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에게 변명하듯 말을 건넸다.
“나는 사샤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아. 몸을 던지는 사랑을 했다가 깨지더라도 그렇게 손해나는 건 없더라.”

마음이 넉넉한 강물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지금 뭐가 무섭니?”
미라는 강물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전거 위에서 맞는 맞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억새의 손짓에 미라는 자전거를 멈췄다. 억새밭에 누워서, 얼기설기한줄기 사이로 저녁하늘을 보았다. 억새들이 사각거리며 물었다.

“그가 너의 마지막 남자가 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러나 이젠 상관없어. 사랑한다면 사랑에 따르는 이별의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네가 그의 첫여자로서, 그를 떠나갈 때 그에게 주는 상처는 어떡하고?”
“그건 그의 몫이야.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댓가를 치르는 건 그의 몫이야.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그런데 왜 여태까지는 그 이유로 그를 거부했어?”
“그땐 사랑하기 전이니까. 사랑하기 전에는 그런 것들이 크고 중요하게 보여.”

그녀가 집에 돌아오니 라이너와 하네스가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하네스가 그녀의 방에 왔다.
“미라,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아직도 피곤해?”

그녀가 그의 눈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하네스, 나 너랑 사귀고 싶어.”

하네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원한다면.”

하네스는 한참 침묵하다가 조용하게 한숨을 쉬듯이 대답했다.
“나는 한 순간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어.”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시선이 부딪치며 불꽃이튀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기운에 끌려 서로의 시선을 맞받았다. 애원하듯 학대하듯 강열한 기를 담은 시선이 교차되었다.감성과 이성이 서서히 화해하기 시작하였다. 시선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어느덧 향수와 그리움의 눈길로 피어났다. 콧등이 시큰해지며오금이 저려왔다. 격렬한 정사 후에나 올 법한, 깊고 그윽한 만족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뒤이어 밀려오는 엄청난 피로감에 그들은 말없이 일어섰다.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마음이 충만했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헤어졌다. 그날 밤 미라는 모처럼만에 숙면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