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전차에서 내렸을 때,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자, 길 저편 나무 밑에서 파올로가 손을 흔들었다.미라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려 길을 건너갔다. 그는 미라에게 악수를 청하며, 오는 길이 멀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오래기다렸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조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공원을 향하여 나란히 걸으며 미라는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귀중한 주말에 시간을 내주어서 고맙다고화답하였다. 미라는 날씨가 마침 화창해서 좋다고 말하며,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소매가 깊게파지고 기장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는 단정한 평상복에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다.

“엄마가 휴일날 외출하면 아이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배어 있다고 미라는 느꼈다.

“아이들은 다 컸는 걸요. 각자 자기들 할 일을 하느라고, 이제는 내버려 두는 걸 더 좋아해요. “
미라는, 그가 기실은 남편이 싫어하지 않는지를 묻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남편과 여가를 함께 보내지 않은지 오래 되었어요. 이젠 어디 가는지 서로 묻지 않아요.”
“저희 부부도 그렇습니다. 따로 살기 시작한지 몇 년 되었습니다.”

미라가 문득 그를 쳐다보았다. 몇 년이나 따로 살면서 왜 이혼을 안 할까? 그녀의 의문을 눈치챘다는 듯 그가 말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저희는 매일 만납니다. 휴가 여행도 늘 함께 가고요.”
그럼 왜 따로 살까? 미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갸우뚱하며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가 그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따로 살면서 각자의 자유를 즐기고 있죠.”

미라가 참다못해 외쳤다.
“그게 무슨 부부예요?”

그는 좀 무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의문이 이해간다는 듯 성의 있게 대답했다.
“예, 이상하죠? 저희는 남매같은 사이랍니다. 서로 좋아하지만 이성으로서는 끌리지 않는.”
“그러다가 누군가 한 사람이 다른 이성을 사랑하게 되면 어떡하죠?”
“제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줬지요.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바라니까요. 음, 저로 말하자면, 저는 여태까지는 다른 여자를 사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여태까지는.”
그는 마지막 단어를 힘주어 반복하고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웃었다.

미라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마주 웃었다. 다른 여자… 웃다 말고 그녀는 예리한 바늘이 가슴 속 깊은 곳을 딱 한번 꼭찌르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순식간에 지나간 통증이라 정체를 규명할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그녀에게 익숙한 통증이었다. 그와동시에 남편의 어떤 눈길이 번개같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감정을 담은, 어쩐지 섬뜩하고 어딘지 잔인한 느낌을주는 눈길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통증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겁이 나서,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남편의 생각을털어버렸다.

미라는 행여 비꼬는 투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제게는 상상이 안 가는 부부관계네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세요?”
“아니,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변화를 강구하지 않으세요?”
“제 아내가 저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미라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모르는 종류의 사랑인가 봐요.”

바로크 양식의 뉨펜부르그 성이 단아하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 앞으로 인공호수가 단정하게 뻗어 있었고, 성뒤쪽으로는 너른 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금 카페에 들어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먼저 걷고 싶다고대답하였다. 그들은 진초록 나뭇잎이 술렁이는 숲을 지나고, 융단같이 부드럽게 손질된 잔디를 끼고 돌아가는 오솔길을 걸었다. 숲속저 멀리 호수가에 억새인지 갈대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미라는 잠시 걸음을멈추고 서서 바라보았다. 정체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어떤 그리움에 가슴이 메었다. 그녀가 상념에 잠기는 것을 알아챈 그는 말을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미라는 파올로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회색 머리가 바람에 살짝 나부꼈다. 누군가 남이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세심하게알아채고, 헤아려 준 일이 대체 얼마만인가, 어쩌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닐까 싶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스쳐가는 바람처럼조용하고 섬세한 배려를 해 주는 남자의 눈이 보고 싶었지만 그는 선그라스 뒤에 숨어 있었다. 이런 남자를 남성으로서 거부하는그의 부인은 어떤 여자일까?

미라는 자신의 감동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처음엔 두 분이 서로 사랑했을 거 아녀요? 살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거에요?”
“아닙니다. 발단은 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아내를 못마땅해 하셔서 불화가 시작되었지요. 그런데 불화가 또 다른 불화를 불러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요.”
“오, 나인!”
그녀의 난데없는 절규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녀가 다급하게 막았다.
“아, 말하지 마세요. 어머니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핑계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굳건한 관계라면제삼자의 방해에 그렇게 위협을 받을 리 없다고 남들은 말하죠. 그러나 부부관계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모래성인지, 장성한 자식을향한 노부모의 집착은 얼마나 집요한 파도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아요.”
숨가쁘게 말을 마친 그녀는 너무 쉽게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스러웠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가 서서히 사라지며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경험에서 하시는 말씀이군요.”
그의 목소리가 위로하듯 다정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머쓱한 표정이 점차로 가시면서 비밀을 공유한 사람의 특별한 미소가 떠올랐다.

파올로 부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부인도 파올로 못지않은 지위에 있는 직업여성이었다. 여러나라를 떠돌아 다니며치열하게 공부하고 경력을 쌓아 이룩한 결과였다. 두 사람 다 안정된 자리를 잡기를 기다렸다가 시도한 출산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그들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파올로는 분석했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소원이었는데 결국 이루지 못했다고 그는 좀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네 부부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자기는 무슨 일이있어도 가정을 지켰을 거라고 강조했다. 당신처럼 아이들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혼할 엄두를 낼 수 있느냐고 묻는 말이라는 걸미라는 눈치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지만 그는 마치 그녀가 농담이라도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도 시간이 가면 식지요. 불가능한 걸 기대하시는군요.”
“사랑은 변할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필연적으로 식어 없어지는 존재는 아니죠.”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자식을 낳아 가정을 이루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성스러운 사업이기 때문이죠.”
그의 말투는 온화했으나 단호했다. 미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되물었다.
“그 성스러운 사업을 수행할 힘은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서 나올까요? 관습, 체면이요?”

파올로는 고개를 숙이고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책임감?”
그는 걸음을 멈추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미라가 발끝을 내려다보며생각에 잠겼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에 시선을 주고,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책임감은 사업을 수행하는 도구일 뿐, 사업을 수행하는 힘의 원천은 아니지요.”
“그 힘의 원천은 오직 사랑입니까?”
“사랑일 수도 있고 관습과 체면일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관습과 체면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만이 유일한 원천이지요. 그래서사랑이 죽으면, 책임을 수행할 힘을 퍼올 곳이 없어져요.”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책임감은 조건 없이 존재해야 하는, 인간의 덕목이라고 보지는 않으시는지요?”
“아니요. 사랑이 없는 남녀가 지키는 가정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식들에게도 보금자리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어 보이며,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통해 이의를 표시했다.
“수많은 가정들이 계약에 의해서도 잘 유지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유지되는 가정은 가족구성원에게 두루 이익이 되니까 그러는거 아니겠습니까?”
“인간에겐 약육강식의 본능이 있잖아요? 그 본능을 깨고, 강자가 약자 앞에 무릎을 꿇기도 하는 파격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힘이 사랑 말고 또 뭐가 있을까요? 전 몰라요. 사랑이 없는 남녀가 지키는 가정은 결국은 약자의 희생에 의해 지탱되는 수밖에없겠지요.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새로 올 사랑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 주지 않는 것은 모두에 대한 죄악입니다.”
“극단적인 사랑관이군요. 저는 사춘기 소녀들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가 빙긋이 웃었고, 그녀는 약간 민망해져서 변명하듯 조그만 소리로 빠르게 대꾸했다.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드는 꽃이잖아요? 물을 주지 않는데도 시들지 않는 꽃이 있던가요? 남자는 안그런가요, 뭐?”
“납득은 안 되지만 말로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가 항복한다는 표시처럼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그녀를 향해 선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를 카페로 안내하였다. 평범한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을 지나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니, 생화와 은촛대로 고급스럽게 장식된홀이 나왔다. 천장까지 닿는 싱싱한 화초가 은은한 빛깔의 고급 식탁보와 잘 어울리는,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는 장소였다. 파올로는그녀에게 창가에 앉기를 원하는지 안쪽으로 앉기를 원하는지 물었고, 자리를 정하고 나서 정중하게 그녀의 의자를 빼 주고 밀어주었다. 그런 사소한 제스처에 미라는 처음으로 어른 대접을 받는 아이처럼 감격하였다.

음료수를 마시며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영화 이야기 끝에 그들의 대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고부갈등으로 흘렀고,파올로는 미라에게 독일의 학계에 최근에 발표된 어떤 학설을 소개해 주었다. 북독에 있는 한 마을에서 모든 주민의 가족사가 기록된교회의 고문서를 조사한 결과, 18, 19세기에 이 고장의 신생아들은 친할머니와 함께 살 경우에는 친할머니가 없는 경우에비해서 150퍼센트 높은 사망율을 보였다고 했다. 이는 임산부와 산모들의 건강상태가 시어머니와 동거할 경우에 열악해졌다는증거이고, 그 원인은 임산부와 산모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보호 소홀과 노동력 착취에 있다고 학자들은 규명했다.

이를진화론적으로 해석하자면, 시어머니의 입장에선 며느리가 가진 아기가 뻐꾸기의 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신생아의 손실이 내유전자의 계승에 필연적인 지장을 주지 않으므로, 며느리에 대한 보호가 소홀하다는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외할머니의 존재여부는친할머니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친정어머니의 입장에선 내 딸의 몸을 통해 태어난 손주라면 나의 유전자를받았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내 유전자의 계승을 위해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임산부와 산모를 보살핀다는 뜻이었다.

미라가 눈을 반짝이며 자기 생각을 보탰다. 진화론적으로 본다면, 시어머니에게 있어서 며느리의 존재는 내 아들을 이용해서 남의씨를 양육할 수도 있는 잠정적 사기꾼일 뿐만 아니라, 내 아들이 다른 여성들을 통해서 유전자를 더욱 널리 퍼뜨리는 일에 방해가되는 존재이므로 본능적인 적개심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미라가 얘기하자, 그는 타당성이 있다며 껄껄 웃었다.

미라는 이 학설을 주장한 학자가 남성이냐고 물었다. 우유부단한 남성들이 어머니 탓을 하며 모든 책임을 또 여성에게 민다고 말하자파올로가 얼핏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치고 가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은 미라는 민망해졌다. 그녀는 얼른 말을 돌려서, 작금의부계사회보다는 원시적 모계사회가 인간의 본성에 더욱 맞는 제도가 아니었을까 의견을 개진했고, 파올로는 힘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역사가 인간을 그들의 본성에서 멀어진 제도로 몰고온 건 아닐까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시종일관 미소를띈 얼굴로 미라를 유심히 관찰하고, 경청하였으며 그는 그것을 무척 즐기는 듯이 보였다. 계산을 하기 전에 미라가 이번에는 자기가낼 차례라고 말했으나 파올로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들은 공원 밖으로 나와, 성 앞의 호수에서 뻗어나가는 수로를 따라 산책을 계속했다. 가로수와 잔디가 도보를 테두르고 있는쾌적한 산책길이었다. 대화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발길은 정원수가 우거지고 화초가 만발한 동네로 들어와 있었다.잘 가꾸어진 수목 사이로 품위있는 저택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멋있는 동네군요. 건축양식을 보아하니 19세기 말엽에 생겨난 구역인가 봐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도 그때 지어졌거든요.”
“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예, 저기 보이는 저 집입니다.”
“예쁜 집이네요.”
“잠시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온화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미라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은 순간 망설였다. 그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이 어떤 식으로받아들여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황급하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숙녀에게 그런 질문을 드리다니, 제가 결례를 범한 것 같아요.”
“오해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선선히 대답했지만 그는 여전히 미안해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저도 댁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그가 혼자 사는 집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읽던 책이나 신문이 탁자와 소파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그건 사람이 살고 있다는흔적일 뿐 함부로 늘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혼자 쓰기에는 너무 커 보이는 부엌도 물자국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이, 아마도청소부가 정기적으로 다녀가는 모양이라고 미라는 혼자서 짐작하였다. 가구며 실내장식이 고급스러웠다. 미라의 가슴 속에선 문득 혼자사는 호젓한 삶에 대한 동경이 솟아올랐다.

그는 자기 집에 있는 차를 종류별로 보여 주며 그녀에게 선택하게 하였다. 그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거실에서 서성거리다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걸려 있는 사진 봐도 돼요?”
“물론이죠.”

벽의 중앙에는 화가의 사인이 있는 커다란 그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구석으로 작은 액자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좀초라해 보이는 행색의 노부부의 사진, 품위있고 당당한 포즈의 중년 부부, 남매처럼 보이는 귀여운 표정의 어린아이들, 그리고몸매가 가냘픈 여성을 멀리서 찍은 작은 사진을 담은 액자들은 아마도 그의 사생활의 징표인 모양이었다.

파올로는 차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탁자에 내려 놓고, 그녀 옆으로 왔다.
“이건 제 부모님이고요, 이건 저랑 제 아내 사진입니다. 작년에 헤이그에서 찍은 거지요.”
“부인이 미인이네요.”
“예, 매력있는 사람이지요. 성격도 강해요… 당신처럼.”
미라는 당황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마주 웃어보였다.

“이건 제 조카들입니다.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한창 귀여울 나이군요.”
“이 사진은 크리스티입니다.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죠? 저의 옛날 여자친구예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사귀었는데, 아직도독신이라고 하네요.”
“일본 여자라고 하셨던 그 분이요? 몇 년 전에 인터넷을 통해 다시 찾았다는 분?”
“예, 요즘도 연락을 매일 주고받고 있어요.”

그는 부서질 듯 얇은 찻잔에 차를 따르고, 설탕그릇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정제설탕이 아니라 보라색으로반짝이는 투명한 덩어리였다. 평소에 차에 설탕을 타지 않는 그녀는 설탕을 한 숟가락 듬뿍 떠 넣었다. 그가 과자를 권하며,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것 드십니까? 오실 줄 알았다면 좋은 과자를 준비하는 건데.”
“맛있네요. 차도 향기로워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옛날 여자친구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걸 부인이 싫어하지 않나요? “
“크리스티는 제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그건 저의 고유한 자유에 속하는 일이지요. 엘레나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파올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미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까 얼핏 들었던 느낌, 그가부인과의 정상적인 재결합을 염원하고 있다는 그녀의 직감은 어쩌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여자를 다 가진남자인지, 아니면 둘 중에 하나도 가지지 못한 남자인지 그녀는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파올로는 그가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시절에 크리스티와 사귀던 얘기를 해 주었다. 크리스티가 공부를 끝내고, 멀리 떨어진 다른도시로 이사감으로서 그들의 사랑은 불과 서너 달만에 막을 내렸다고 했다. 둘 다 공부가 끝난 직장인들이었는데 단지 거리가 멀어서헤어졌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미라가 우겼다. 그는 한풀 꺾여, 당시 자신은 직업에 대한 꿈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컸기 때문에사랑에 모든 것을 걸 형편이 못 되었다고 고백했다.

미라는 자신도 비슷한 이유로 사샤와 헤어졌다고 말하려다가 주춤했다. 자신은파올로와는 달리 사랑에 모든 것을 걸 용의가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그때 사샤를 따라가지 못했을까? 그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까?그와의 사랑이 처참하게 깨질 것이 두려워서, 차라리 그와 헤어지는 편을 택한 건 아니었을까? 사랑을 추억으로나마 구하기 위해서사람을 버린 건 아니었을까? 미라는 저 혼자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라의 속을 모르는 파올로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그녀가 속해 있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 제가 자신이없었던 것 같아요.”

미라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어쩜 사샤도 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저랑 헤어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당신이었지 않나요?”
“그는 제가 거절할 것이 확실한 제안을 한 거지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당사자인 그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고요.”

그의 말에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지되었던 그녀의 표정이 풀리기시작했다.
“맞아요. 그리고 정확한 이유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제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그와 함께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거든요.”
그들은 스스로의 대화에 만족해서, 공범들이 성공한 거사 후에 지을 법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그는 예쁘게 깎은 나무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것은 웃음의 상자라고 설명하였다. 화려하게 조각된뚜껑을 열어 보이며 그는 미라에게 여기다가 웃어 보라고 말했다. 미라는 빈 상자를 향해서 활짝 웃어 주었다. 그는 그녀만큼 크게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상자의 이중 바닥을 열고 작은 쪽지를 하나 꺼내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미라 킴의 웃음” 이라고써 넣었다. 쪽지를 이중 바닥에 다시 넣고 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그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천진하게 좋아했다.

밖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 창문을 통해 느껴졌다. 미라는 그만 일어나겠다고 말했다. 그가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잠시만기다리라고 말하고, 화장실에라도 가는지 잠시 방을 비웠다. 혼자 남은 미라는 거실의 창턱에 팔을 괴고 바깥을 내다 보았다.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목이 시선을 끌었다. 이 구역이 주거지로 개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 있던 나무일것이다. 뒤틀린 밑둥에 비해서 제법 울창하게 우거진 싱싱한 잎새 사이로, 막 지려고 하는 태양이 그녀에게 마지막 윙크를 보내고있었다. 날씨가 맑아서 그런지 하늘은 보일듯 말듯 불그레한 물감을 수줍게 풀었을 뿐이었다.

강한 자석이 옆에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파올로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파올로가 그녀 옆에 서서, 그녀와같은 자세로 창턱에 팔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 머리가 나무잎 틈새로 흔들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갑자기 정전기가 일며 그녀 몸의 솜털이 그 쪽을 향해 일제히 일어섰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솜털들은 저마다 예리한 번개를 하나씩달고 있었다.

긴장을 참다 못한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나무가 아름답네요.”
“예.”
“오늘은 노을이 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마치 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고즈녁했다. 긴장이 가시기는커녕 더욱고조되었다. 미라가 참지 못하고 몸을 휙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이제 나갈까요? 오늘 참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그는 꿈에서 깨어나듯 가볍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저도 덕분에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단조로운 저의 일상에 이런 일은 좋은 선물이죠. 저도 나갈 준비가 다끝났습니다.”

그들은 집을 나서서 전차정류장을 향하여 나란히 걸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괜찮다면 앞으로도 종종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미라는 우리 다음 번에 만나서는 서로 말을 놓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그는 찬성의 표시로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손바닥 감촉이 찰떡처럼 보드라웠다.

전차가 스르르 밀려들어왔다. 그녀는 작별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그들은 자석처럼 서로를끌어당겼다. 그가 그녀의 양 뺨에 차례로 입술을 댔다. 이십 년 전에 그녀를 함락시켰던 사샤의 키스. 사샤와 공유하였던 모든순간이 그 키스 하나로 압축되어 그녀에게로 스며들었다. 뺨에선 꽃이 피고 눈에선 별이 날았다. 정신이 아득하고 팔다리에서 기운이쑥 빠졌다. 무슨 정신으로 전차에 올랐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전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라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샘물이 졸졸 흐르며 고이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