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곧 여름 학기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미라는 예전과 다름없이 성실한 대학생의 생활로 돌아왔다. 수업에참여하고, 과제를 제출하고, 도서관에 출입하는 한편 학우들과도 변함없이 잘 어울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미라가 독일의 일상생활에다시 적응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을 보고 현기증을느꼈듯이, 그녀가 십 년이나 살아 온 독일 땅이 낯설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미라는 여행 이후로 시름시름 앓았다. 몸에 미열이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고, 늘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다. 미라는 자주 침대에누워서 사샤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를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그윽히 바라보며 그 손바닥에판각된 기억을 더듬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지면 책을 꺼내들고 이태리어를 공부하였다. 그녀는 교재를 깡그리 외워버렸으므로그녀의 이태리어 실력은 빠른 발전을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운전수업을 다시 받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남자친구와 자동차로 유럽을 방방곡곡 누비려는 계획이그와의 결별로 인해 무산되면서, 귀찮아서 접어 두었던 운전면허였다. 앞으로 사샤와 사귀려면 아무래도 운전이 필요할 것 같았다.그녀는 장거리 연애에 대비하여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사샤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가 동봉한 사진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미라는 사샤의 카메라 렌즈에, 그리고 그의 눈에 그렇게 비쳤을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예쁘게 보일까?

그녀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외모에 대하여 경솔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평생 외모 덕을 볼 일은없을 거라 믿었으며,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함께 사는 남학생들은 행여 그녀가 아침마다욕실을 오래 점령해서 자기들이 매일 지각하지는 않을까하는 고민을 했다며, 자기네들보다 욕실을 빨리 쓰고 나오는 그녀에게 감탄할지경이었다. 사샤가 보내 준 사진 속의 여자를 마치 남 보듯 뜯어보며, 미라는 미인의 조건에서 이목구비는 그다지 큰 비중을차지하지 않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함께 사는 라이너와 하네스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할로, 미라! 웬 사진이야? 여행 갔던 사진 찾아왔구나? 우리도 봐도 돼?

“내가 찍은 게 아니라 누가 보내준 거야.”
미라는 하네스를 흘끗 보며 짧은 순간 망설이다가, 사진더미를 그들 앞으로 순순히 내밀었다.

“우와, 이게 다 너야? 너 알고 봤더니 굉장한 미인이구나.”
성격 좋은 라이너가 넉살 좋게 떠들었다. 사진을 보며 배경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면서도, 정작 가장 궁금했을 질문, 누가보내준 사진이냐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긴 여정을 그녀와 함께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할 법도 했건만, 남의 사생활에대한 호기심을 실례라고 여기는 독일사람답게 둘 다 침묵하였다.

미라는 결심을 하고, 방에 가서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전부 들고 나왔다. 드디어 사진을 찾아왔느냐며 반색을 하는 두 남학생에게 사진을 봉투째로 건네주고, 미라는 찻잔을 들어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마셨다.

와, 이거 교황 아냐? 너는 교황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았단 말이지? 경호가 허술하군. 올랄라, 여행 다니며 축구경기도 보러 갔었다고? 이 건물은 뭐니? 이 남자는 누구길래 이 사람 사진이 이렇게 많을까?
라이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라는 일어나서 접시를 꺼내 식탁에 늘어 놓으며 말했다.
“오늘 편지 보낸 사람이야.”
라이너가 일어나서 주전자에 물을 부어 가스렌지에 얹으며 말했다.
“옷차림새가 이태리 남자같지 않게 생겼다.”
“이태리 남자야.”
“그래? 이태리 남자들은 노상 자켓을 입드만.”
두 사람이 주거니받거니 하는 대화를 들으며 하네스는 말없이 빵을 썰었다.

차를 끓이고 냉장고에서 소세지와 치즈를 꺼내 봉투째로 식탁 위에 놓음으로써 저녁식사 준비가 끝났다. 세 사람은 버터를 바른 빵에소세지나 치즈를 얹어 먹으며,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계속하였다. 어느 가게에서 좋은 치즈를 값싸게 팔더라. 우리 생활비가얼마나 남았지? 세계적으로 에너지소비가 매년 몇 퍼센트씩 증가한다더라. 이대로 가다간 큰 일이다.

며칠 후 미라는 두 남학생에게, 사샤가 조만간 그녀를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사샤가 두 주일 예정으로 독일에 오게되면 그녀의 방에서 기거할 거라고 통고하였다. 올랄라, 그래? 알았어. 라이너가 자연스럽게 대응하며 분위기를 맞추어 주는 것에미라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날 밤에 하네스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너의 마지막 남자가 되는 거야?”
그의 어조는 온건하고 진지했다.

미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몰라. 그걸 미리 어떻게 알아?”
“그런데 내가 너의 마지막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건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지?”
역시 따지는 말투가 아닌 순수한 질문이었다.

“너한테는 내가 첫 여자친구가 될 텐데, 너는 첫 여자친구하고 결혼할 수는 없잖니?”
“왜?”
“무슨 결혼을 그렇게 쉽게 해? 사랑의 경험을 충분히 쌓은 다음에 해야지. 그리고 연애는 아름다운 거야. 너도 결혼 전에 연애를 많이 해 보기 바래.”

대뜸 결혼 얘기가 나오자, 하네스도 거기까지는 자신이 없었는지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궁금했던 점을 계속해서 물었다.
“너는 사샤랑은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야?”
“몰라. 나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냥 끌려서 시작했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하네스의 눈이 왜 자기와는 그냥 끌려서 시작할 수 없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네스, 사랑은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야. 사랑이 생기면 사귀는 거고,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한마디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너랑 사귈 수 없다는 말인줄 그도 알아들은 듯,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줄 너는 알잖아?”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나에게 내가 원하는 걸 줘. 사랑은 정복이 아니야.”

하네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픽 웃었다.
“사랑은 당연히 정복이지.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어.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그게 가능해? 너라면 그럴 수 있겠어?”
“물론.”
둘은 이유도 없이 마주보고 웃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이해하도록 노력해 볼게. 잘 자, 구테 나하트, 미라.”
“구테 나하트.”
미라는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가 고맙기도 했다. 문득 그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에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

미라가 여행 이후로 시름시름 앓으며 키워오던 그리움은, 사샤가 온다는 편지를 받은 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심신의 조화를 뒤흔들어 어느 날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했다. 한적한 지하도를 지나가던 그녀가, 한 청년이 바닥에 무릎을꿇고 앉아서 자위를 하는 모습을 목격한, 대수롭지 않다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그 동기가 되었다. 지하도 입구에서 그녀를 밀치듯스쳐 지나갔던 어린 청년이 그녀를 조준하여 적나라하게 드러낸 검붉은 몽둥이가 그녀의 눈에는 대단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간기운이 없어서 살살 움직이던 팔다리가 갑자기 신이 들린 듯 제멋대로 움직여, 그녀를 단숨에 집으로 날라다 주었다.

온몸이 무섭게 옥죄어 오고 불덩이처럼 확확 달아올랐다. 가슴팍을 아프게 두드리던 방망이질이 금새 위로 솟구쳐 머리통을 치기시작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심하게 아플 수도 있구나. 사람의 몸이 이렇게 뜨거울 수도 있구나.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미라는 침대에 누워서 죽음을 생각했다.

그녀는 지나간 이십육 년의 인생을 떠올렸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모습이 번개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지고, 할머니가 저편에서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미라는 할머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때 할머니 앞으로 사샤의 얼굴이 커다랗게 막아섰다. 그를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았던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은 성공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당장에 죽어도 미련이 없다고고백했다.

눈물이 비오듯 흐르자 몸에 땀이 돌기 시작했다. 땀과 함께 열이 내리려는지 몸의 통증이 견딜만해졌다. 행복한 마음으로정신을 잃어갔다. 어디선가 바깥에서 새소리와 망치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은 없었으나 몸의 통증은 사라졌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쓰러졌다. 며칠이나 계속되는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점점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사샤가 독일로 올 즈음에는 그간 늘 달고 다녔던 미열도사라져 버렸고, 몸과 마음이 여행 이전의 상태로 양호해졌다. 미라는 건강이 회복된 덕에 다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중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가 키스와 함께 입에 대주던 마지막 담배의 기억은 그에 대한 그리움을 대변하였다. 그와 함께한 침대의기억보다도 더 강열했다. 미라는 그와 마주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샤를 태운 기차는 제법 날이 선 초여름 햇살을 뚫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왔다. 그의 손을 잡고 수목이 울창한 동물원뒷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면서 미라는 이게 꿈은 아닐까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그의 온기를 믿을 수 없었다.문득 그리워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의 가지런한 앞니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햇빛에 반짝였다.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집을 지척에 두고 미라는 사샤를 카페로 인도하였다. 연분홍 꽃자루를 총총히 달고 있는 마로니에 나무밑에 탁자를 놓아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작은 카페였다. 늘 하던 대로 그는 에스프레소를, 그녀는 카푸치노를마시면서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서로의 무릎을 만졌다.

드디어 그녀가 담배를 꺼냈다. 상상하며 기다리던 상황을 맞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담배 피울래?”
“오, 아니, 미라. 나 담배 다시 끊었어.”

그의 상냥한 대답이 미라의 귀에는 마치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그녀의 경악을 알 리 없는 그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간 몸이 안 좋았어. 그래서 그 김에 담배를 다시 끊었지.”

미라는 말없이 담배곽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다시 바람이 불어, 마로니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미라는 하얀 바탕에진분홍의 줄이 가느다랗게 그어진 연한 꽃잎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담배곽 위에 소복하게 쌓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가 손을 뻗어그녀의 귓볼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뺨에 대고 부볐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라이너와 하네스는 사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서글서글한 라이너는 물론 무뚝뚝한 하네스도 사샤에게 친절하게말을 건넸다. 하네스는 사샤에게 자전거 열쇠를 하나 내밀었다. 그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자전거를 한 대조립해서 갖다 두었으니 마음대로 쓰라고 하였다. 미라가 대체 어떤 남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그 남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적이 불안해 하던 사샤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나중에 복도에서 하네스와 우연히 마주친 미라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하네스는 정색을 하고, 사샤는 괜찮은 남자라고 또박또박말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미라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사샤에게 하네스에 대해서 어떤 언질도 미리 주지 않았었다. 그랬다간 맘이 여린 사샤가행여 그녀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지난 대화 이후로 미라를 보는 하네스의 눈길이 지극히 자연스럽고무심했으므로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미라는 하네스가 그녀를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고 믿을 수있었다.

그녀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샤에게만 집중하였다. 그들은 라이너와 하네스가 학교에 간 후에느지막히 일어났다. 그녀는 아침마다 금방 구운 따끈따끈한 빵을 사 왔다. 빵집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놀이터에 들러, 풀밭에서이슬을 담뿍 먹은 들꽃을 엮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빵봉지와 촉촉한 꽃다발을 품에 안고 들어서면, 사샤가그 사이에 커피를 끓여 아침상을 차려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건네주는 꽃다발을 소중하게 받아서 유리컵에 꽂아놓고,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자주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은은한 촛불 아래 그들은 서로 커피를 따라 주고 빵을 잘라 주었다.가벼운 키스를 나누다가 그가 그녀를 무릎에 안은 채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하네스가 갖다 준 자전거는 매우 유용하였다. 그들은 자전거로 소풍을 다녔다. 시내를 벗어나서는 각기 한 손으로만 핸들을 잡고,다른 한 손으론 상대방의 허리를 붙잡고 나란히 붙어서 페달을 밟았다. 같은 속도로 다리를 움직이며 그들은 마주보고 환하게웃었다. 울창한 숲을 가르며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갑자기 숲이 뚝 끊어지고, 눈이 부시게 밝은 벌판이 나왔다. 야생화가 만발한풀밭은 곧 억새풀이 사각거리는 라인 강변의 늪지로 이어졌다. 그들은 허리높이의 야생풀을 깔고 나란히 누워 새파란 여름 하늘을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하였다.

안정된 거처가 있다는 것은 더 큰 즐거움과 더 큰 자유를 뜻했다. 갈등이 없던 아담과 이브처럼 그들의 성희도 자연스럽게이루어졌다.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향해 키워온,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정염이 사라져버린, 편안하면서도 아직 타성이 붙지 않아늘 신선하고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그는 항상 때이르게 폭발하였지만 그녀의 몸은 항상 충실하게 연쇄반응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할 의지와 자신감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녀가 작은 불똥에도 순간적으로 타오를 수 있도록 그는그녀의 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 주었다. 그가 준비해 준 정전기를 마른 번개가 이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하마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표피의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샤의 당당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를 흥분시키는, 그의 능숙함의 비결은 그의 당당함에 있었다. 열등감이나죄의식이 없이 쾌락을 아름답게 여기는 당당함.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은 자신이 가진 약점의 보완이나 그녀에 대한 봉사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즐거움이라는 듯이 그녀를 소중하게 다루며 저 스스로황홀경에 빠져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미라의 몸이 저절로 부풀어 올랐다. 나를 보고 흥분을 느끼는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의 잃어버린 반쪽. 그 앞에서 미라의 몸은 마치 농익은 수박처럼 표피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켜,칼만 대면 갈라질 준비가 저절로 되었다.

그들은 꼭 껴안고 누워서 동시폭발의 여진을 오래오래 즐겼다. 크게 울리는 심장이 서로 맞닿으면, 폭발의 파장이 거기를 통해드나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몸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통을 조용히 주목하며 황홀감에 잦아들었다. 애무를 하는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쾌락과 자신의 쾌락을 동시에 느끼는 그들의 성희는 지상의 놀이가 아니었다. 뜀질을 거듭할 수록서로 점점 더 높이 띄워 주다가 급기야는 함께 승천하는, 에덴 동산의 널뛰기였다.

그러나 한번 쫓겨남으로서 갈등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지상의 인간들은, 에덴 동산의 평화를 잠시 흉내만 낼지언정 그곳에 영원히안주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두 주째로 접어들면서 완벽한 조화의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무심코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드는실수가 종종 발생하였고, 뼈있는 농담이 오가기도 하였다.

에덴 동산을 위협하는 적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한번 보았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옥의 티가, 늘 같은 일상이 반복되자 그제서야눈에 들어왔다. 또 하나의 적은 미래에 대한 과대망상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을 사소한 버릇도, 이제 미래의 가능성이있게 되자 비중이 달라졌다. 미리부터 나쁜 방향으로 확대해석하는 망상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편협하게 만들어, 상대방이 가진옥의 티가 시한폭탄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게 하였다.

미라는 완벽한 연인의 자질을 가졌다고 믿었던 사샤에게서 약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날씨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는다는 점이었다.밝은 햇빛 아래서는 그렇게 환하게 웃는 그가, 날씨가 연달아 흐리거나 비라도 오면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이것은 미라에게는낯선 경험이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빈곤의 그늘이 두텁게 진 시대에 태어나서 사춘기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삶이 그대를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푸쉬킨의 싯구를 담은 액자를 가는 곳마다 보며 자랐으므로, 노력에 의한 운명의 극복이란그녀에겐 절대적인 덕목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공대의 외국인 여학생으로서 남학생들과 경쟁하고 있는 터라 자신의 태생적 핸디캡을정신력으로 극복하는 일에 익숙하였다. 그래서 누가 삶도 아닌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고,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사샤가 그렇다는 사실이 그녀를 한층 힘들게 했다.

사실상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사샤의 우울이 아니라 그녀의 이유 없는 죄의식이었다. 미라에겐 상대방의 기분에 대하여 책임감을느끼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어야 할 어머니나 아버지를 대할 때 이런 현상이 특히 심했다. 그녀가 이세상에서 유일하게 죄의식 없이 대하던 사람은 돌아가신 할머니 뿐이었다. 그녀는 사샤의 날씨탓을, 그가 독일에 온 것을 후회라도하는 것처럼 아프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주범은 사샤의 약점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못했다. 미라는 사샤에게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샤에게 회의한다는 사실에 더욱 큰 죄의식을 느꼈다.

거기에다가 이 세상에 단 둘이만 존재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갈등도 가세했다. 미라의 친구들은 그녀가 여행 가서 사귀었다는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였고, 사샤도 자신의 새 여자친구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알고 싶어했으므로, 미라는 종종사샤를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미라가 사샤와 함께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저녁이었다.

“사샤, 오늘 참 재미있었다, 그지?”
”…”

그녀에겐 즐거운 하루였으므로 그녀는 예상치 않았던 그의 침묵에 당황했다.
“헤이 사샤, 왜 그래? 재미없었어?”
“너의 한국 친구들은 친절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오만해.”

미라가 보기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사샤를 홀대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사샤는 무엇엔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누가 오만했다고 그러지?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얘기한 거 아냐?”

독일 대학생들의 언동이나 사고방식은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든 이태리 청년에게는 낯설게 보이는 것 같았고, 태생으로 본다면사샤보다도 더욱 이방인이어야 할 미라가 독일 사회에 더 가까이 동화된 듯 보이는 점이 그를 외롭게 만드는 듯 싶었다. 그가독일에 온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자, 미라의 예의 그 이유 없는 죄의식이 발동하였다.

“사샤, 우리 산보 나갈까?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이런 날씨에?”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잘해 주려는 그녀에게 그가 갑자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빛에 어떤 기운이서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미라는 보았다. 그 순간, 예리한 바늘이 가슴 속 깊은 곳을 딱 한번 꼭 찌르고 지나가는 아픔이느껴졌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통증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어쩌면 전생에서나 겪었을 법한, 그런미미한 증상일 뿐인데도 왜 그런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통증은 극히 짧아서 금방 사그러들었지만 미라는 그 바늘 구멍으로무엇인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삶의 의지라도 빠져나간 듯 뒤미처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난데없이 어머니가그리워졌다.

사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고, 금방 표정을 바꾸어 그녀에게 장난을 걸었다. 미라는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미안해 하고있는 그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주고 싶었다.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손장난을 치다가 급기야는 씨름으로 번졌다. 미라의 치마가찢어지고, 사샤의 셔츠에서 단추가 튕겨나갔다. 어느새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느때보다 대담한 전희를 벌이고 있었다.

미라는 자신이 충분히 흥분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폭발했을 때 그녀의 몸은 연쇄반응을 하지 못했다. 미라는 더 미안했다. 사샤는금방 다시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몸에 불을 붙이고자 노력하였고, 미라도 혼신의 집중력을기울여 그가 붙여준 불로서 활활 타오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의 몸에도 그녀의 몸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절정에 오를 듯 오를 듯 하다가 다시 스러져가기를 반복했다. 저 멀리서 또 한번 물결이 넘실넘실 밀려왔다. 미라는 이번에 오는물결도 절정의 산봉우리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으나, 파고가 산허리를 칠 무렵에 크게 신음하며 몸의 긴장을 풀어버렸다. 그 바람에 물보라가 튀며 정상을 건드렸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피곤 후의 휴식같이 달착지근한 감정이몸을 쓸고 지나갔다. 사샤가 눈으로 물었을 때, 미라는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섹스를 한 셈이었다. 몹시 피곤했다. 지쳐 떨어진사샤의 팔을 베고 누워서 미라는 몸보다도 마음이 고단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자신들이 지금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들이 함께 보내는 매순간이 사랑과 행복으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강박증, 이 귀한 시간을 한 순간도 거북한 일에 할애할 수 없다는강박증이 그들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런 강박증 안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는 일조차도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배신으로느껴졌다.

미라는 그녀가 이태리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이상에 자신이 노예처럼끌려다니는 상황에 다시 처했음을 깨달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그녀가 삶의 지침서 삼아 만들어 놓은 카탈록이 어느샌가 엄격한상전으로 변하여 그녀를 다그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튿날, 꽉 찬 물통에 마지막 물 한방울이 떨어짐으로써 물통이 넘쳐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집에서 화기애애한 저녁식사를 하고설거지까지 막 마쳤을 때였다.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벌써 부엌을 나간 라이너의 뒤를 따르다 말고 미라는 멈춰섰다. 하네스가그녀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구테 나하트, 하네스!”
”…”
“헤이, 구테 나하트, 하네스!”
이때 하네스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미라, 너 정말 그럴 수 있어? 정말 계속 이럴 거냐구?”

그의 눈이 증오를 담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입술이 실룩거렸다. 사샤 앞에서 다른 남자의 고함을 들은 그녀는 깜짝 놀랐다. 마치친구 앞에서 엄마에게 매맞은 아이처럼 모욕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하네스는 그녀를 여전히 쏘아보면서 입을 꽉 다물었다.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미라가 돌아서며 조용히 말했다.
“이따가 얘기하자. 내가 네 방에 갈게.”

사샤가 아무소리 없이 따라나왔다. 방에 들어와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사샤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묻지않았고, 미라도 하네스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녀는 마음이 지쳐서 울고 싶었다.

좀 있다가 미라는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듯이 방을 나와서 하네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감싸고 있었다. 미라는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그가 말문을 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미라, 너희들 며칠이라도 어디로 떠나줄 수 있겠어?”
“응.”
“너희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너무나 괴로워.”
“알았어.”
미라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하네스가 아니었어도 미라는 다시금 일상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남은 며칠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샤와 함께 여행을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사샤도 대찬성이었다. 마침 북해에 언니처럼 지내는 친구가 살고 있는데, 언제 한번 놀라오라고 늘말했으므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란 언니는 내일 당장 오라고 하였다. 모레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집이 비게 되었으니, 와서며칠 머무르라고 하였다. 미라는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며칠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새벽차를 타고 북해를 향해 달렸다. 일상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떠나는 마음이 가볍고즐거웠다. 가뜩이나 방랑벽이 있는 사샤는 오랫만에 배낭을 매자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서 싱글벙글하였다. 미라는 그의 어깨에머리를 기대고 흔들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두 달 전 이태리에서의 꿈같은 시간이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에 빠졌다.

기차를 갈아타고 시골 역에 도착하자 혜란 언니가 허름한 자동차로 데리러 나왔다. 독일 남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혜란 언니는바다에서 가까운 생태마을에 살고 있었다. 뽀얀 목재로 지은 자그마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그림같이 평화스러웠다.남향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은 해질녘 어스름에 수줍은 빛을 발하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수족관같이 보였다. 바람이 쏴아 불어 오면저 너머에 있다는 갈대밭에서 갈대 부딪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혜란 언니는 집안을 반들반들하게 가꾸고, 히피 성향으로 천방지축이던 남편을 가정적으로 길들이고, 똘망똘망한 아들 딸을 하나씩낳아 마치 그림책에 나오는 가족같이 살고 있었다. 미라와 사샤는 오랫만에 대하는 가정적 분위기에 취하고, 엄마와 아빠를 적당히닮은 귀여운 아이들에게 반했다. 다음날 휴가를 떠나는 와중에도 친구를 초대하는 그녀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는 아마도 지금 그녀가누리는 안정된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안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정서적 안정. 안주는 지루함의 원천이고 지루함은죄악이라고 주장해 온 미라에게도 그날만은 혜란 언니의 안주가 부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음이 지친 모양이었다.

혜란 언니네 가족이 떠나고 그곳에 혼자 남겨진 미라와 사샤는 이 세상에 단 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큰 행복을 느꼈다. 최근에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싹트기 시작했던 갈등이 하루 아침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독일에서 보낸 첫 며칠의 순정한 에덴의동산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그때보다 더욱 안정되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키워왔던 감정의 거품이 걷힌 후에, 맑게 익어가는술처럼, 그들의 관계가 이제는 투명하게 들여다 보였다. 관계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상황이 일치를 이루는,평화스러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항상 무겁게 드리워 있는 북해의 공기에 사샤는 놀랍게도 잘 적응하였다. 그는 이제는 우울해 하지 않았다. 북해에는 냉정하고척박한 기운이 도는 장엄함이 있었다. 갈대숲을 거닐며 머리를 들어 위를 보면, 시야를 거의 다 차지한 하늘이 화려하고도장열했다. 구름이 갖가지 모양과 색깔로 어우러지는 하늘은 주제였고, 땅 위의 경치는 하늘을 돋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배경에불과했다. 갈대가 쉬익쉬익 우는 소리가 마음을 서늘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요란한 무늬로 노을이라도 지는 날이면 감정을 주체하지못하고 사샤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우는 미라의 버릇은 여전하였다. 사람이 산다는 일이 이렇게 장열하고도 보잘것없는 일인가싶었다.

그들의 성희는 예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사샤는 여전히 때이르게 폭발했지만 미라가 이제는 백발백중으로 연쇄반응을 하지 못하기때문이었다. 사샤는 그것이 마치 그의 탓인양 초조해 하며 더욱 큰 정성을 기울였다. 미라는 그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금단의 기간을 거친 갈망이 사그러들면서, 그 자리를 타성과 기술이 서서히 메워가는 데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있었다. 극도의 집중력은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한 순간에 일생을 불태워 버리려는 집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잠깐씩 주어지는신의 선물이었다. 이제 그들처럼 미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미라는 깨우쳤고, 수긍했다. 타성과기술이 초반기의 정열을 능가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십 대의 미라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때때로 미라는 산봉우리를 넘지 못하는 물결을 절정처럼 받아들이며 크게 반응하였다. 사샤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겐산허리에서 넘실거리는 그런 물결도 그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사샤가 그 해일의 원천이었으므로.

“사샤, 고마워. 멋진 섹스였어.”

이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일어나서 콘돔을 처리하러 욕실로 가는 사샤의 뒷모습이 어딘지 외롭게보였다. 미라는 그의 등을 향해 마음속으로 많은 말을 하였다.

그래, 사샤, 나는 절정을 느끼지 못했어. 그러나 내게는만족스러운 섹스였어.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신성한 의식이야. 우리가 알몸을 이렇게가까이 대어 하나로 합쳐진다는 사실이 내게는 기적이고 행복이야. 아까 네가 내 몸 안에서 절정을 맞는 순간에 내가 느꼈던만족감을 나는 어떤 절정과도 바꾸지 않겠어.

그러나 미라는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언젠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들에겐 미래가있었으므로.

출발을 이틀 앞두고 사샤가 한밤중에 열을 내며 앓기 시작하였다. 편도선이 부어오르고 온몸에 통증이 온다며 손끝 하나 꼼짝하지못했다. 미라는 더럭 겁이 났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시골에 갖혀서, 아는 사람도 자동차도 없이 난감하였다. 그녀는 종합병원의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저쪽의 당직의사는 귀찮다는 말투로, 증상을 보아하니 감기인 모양인데 젊은이가 그런 일로 응급실에올 필요는 없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미라는 의사를 욕하며, 자신이 말을 좀 잘못한 것 같다고 후회했다.

좀 정신을 차린 사샤가, 이럴 경우에 그가 늘 쓰는 항생제의 이름을 안다고 하였다. 미라는 약 이름을 받아 적은 쪽지를 들고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밤중이어서 한참만에 문이 열렸다. 오가다가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던 옆집 여자가 잠옷 위에 가운을걸치고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미라는 사샤의 상태를 조금 과장해서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옆집 여자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나오면서, 신문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약국의 이름을 알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며, 부디 약국에서너를 도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시골길을 달려 적막하게 변해 버린 시내에 들어와 약국을 찾았다. 약국엔 불이 꺼져 있었으나, 문에 달린 비상종을 누르자 곧약사가 나와 손바닥만한 창문을 열었다. 잠을 잔 기색이 없이 표정이 생생한 여자 약사에게 미라는 사샤의 상태를 설명하고 그가 늘먹던 약 이름을 댔다. 불친절한 당직의사의 거부로 인해 처방전이 없는 사정을 약간 과장해서 설명하며 약을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곡히, 그러나 한 발자욱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부탁하였다. 처방전 없이 항생제를 파는 것은 불법이었다.약사는 응급실의 당직의사를 욕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현금을 받고 영수증 없이 약을 건네주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약을 구해 온 미라는 집에 돌아와 거의 탈진해 있는 사샤를 깨워서 약을 먹이고, 밤새도록 간호하였다.이튿날 아침에 다시 한번 약을 먹일 때는 열이 많이 내려 있었고, 기운은 없었지만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다. 고비는 넘긴모양이었다.

미라가 스프를 끓여서 쟁반에 받쳐 들고 방에 들어갔더니 뜻밖에도 사샤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미라는 놀래서 쟁반을 내려 놓고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사샤, 또 아파?”
“응, 심장이.”
“심장에도 병이 있어?”
그가 울다말고 벼란간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 병이 난 게 아니라 슬퍼서 심장이 아파.”

둘 다 남의 나라 언어로 연애를 하려니 애로가 많다는 생각에 미라도 저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고물어보았다.
“왜 슬픈데?”
“우리 엄마가… 엄마가…”
미라는 사샤가 왜 갑자기 엄마 생각을 하는지 의아했다. 아프니까 엄마 생각이 나나? 어린애처럼?
“미라, 너는 착한 여자야. 그런데 나는 분명히 너에게 상처를 입힐 거야. 우리 엄마 때문에… 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없어.”

미라는 사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았으므로 미라는 숟갈로 스프를 떠서 호호 불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는 곧 잠이 들었다. 미라는 이불을 덮어 주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 앉아서 창밖으로 살랑이는 화초를 보며 손톱을물어뜯었다. 자기도 모르게 물어뜯은 손톱을 바라보며 미라는 한국을 떠나오면서 사라진 옛 습관이 지금 이 순간에 왜 다시나타났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몇 시간 후에 잠에서 깬 사샤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몸이 한결 편해졌는지 빙긋 웃으며 거의 다 나은 것 같다고 했다.그녀가 말리는데도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수척하면서도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그녀의 눈에 눈부시게 아름다워보였다.

“사샤, 너 아프고 나더니 더 예뻐졌다.”
“나를 낫게 해줘서 고마워. 힘들었지?”
“천만에, 나는 너를 간호하는 일이 행복했어. 평생 하래도 기꺼이 하겠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가 민망해진 그녀가 짐짓 농담을 했다. 갑자기 그가 말을 끊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자에서일어서더니 그녀를 향해 커다랗게 팔을 벌렸다. 미라는 따라 일어나서 그의 품에 안겼다.

“다시 말해 봐. 평생이라고.”
그의 말투가 의외로 진지했으므로 미라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워 있는 동안에 생각을 많이 한듯 단숨에 말했다.
“미라,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결정해 줘. 당장 나를 따라 이태리로 가서 결혼하던지, 우리 여기서 헤어지던지.”

전혀 예기하지 못했던 청천벽력이었다. 미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말이 그녀의 귀에는 그냥 헤어지자는 소리로만 들렸다.울컥 올라오는 배신감과 섭섭함에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소용돌이 치는 감정에 비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왜 내게 그렇게 극단적인 결정을 요구하는 거지?”

사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인생은 의미가 없어. 이제 내가 집에 돌아가고 나면 미라는 또 아프겠지? 나도 또 그럴 거야. 몸이이렇게 아픈데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플까?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사샤, 너는 내가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된 여자라는 거 알잖아?”
“사랑도 인생도 아름다운 거야. 나는 위대한 사랑을 원하지 않아. 나는 평범한 행복을 원해. 나는 가정을 가지고 싶어. “
“나도 언젠가는 가정을 가지고 싶을 거야. 나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 아직시간이 많이 있잖아? 나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너를 기다리며 견딜 자신이 있어.”
“우리에게 시간이 많다고? 아니야, 미라. 인생은 짧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긴인생을 나는 용납할 수 없어. 우리 결혼한다고 해서 네가 포기해야 하는 건 없잖아? 너는 베니스에서 공부를 계속하면 되잖아?”
“사샤, 내가 지금 단지 너와 헤어지는 것이 무서워서 너를 따라 이태리로 간다면, 나는 내 인생을 한 남자에게 거는 게 되겠지?너는 내 인생을 떠맡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평생 너에 대한 기대가 클 거야. 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알았어, 미라. 네가 지금 당장 나를 따라가기 싫다는 거 이해해. 나는 인생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나는 우리에게고통을 주는 상황을 끝내고 싶어. 우리 헤어지자.”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사샤.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미라!”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미라는 그를 따라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금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파랑새를 쫓아가는 일에도, 또 그 파랑새를 떠나는 일에도 절대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파랑새를 떠날 자신이 있었기때문에 파랑새를 쫓아가는 일에 그렇게 온몸을 던져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 순간 자연스럽게 깨우쳐졌다. 그의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그를 날려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라는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입밖에 내는 순간 그들의 특별한 사랑이 그들을 떠나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가 그를 따라 이태리로가던 그를 설득하여 장거리 연애를 계속하던, 그녀가 알던 사샤는 이미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특별했기 때문에한정된 시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사실을 어쩌면 사샤는 북해로 오기 전부터 알았을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질된 사랑을 지지부진 연장시키는 것은 그들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미라는 속으로 못을박았다.

“알았어, 사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그 순간 이후 그들은 말을 잃었다. 그 대신 온화한 표정과 웃는 얼굴로 의사표시를 하였고, 다정한 몸짓으로 상대를 배려하였다.

그날 밤 그들은 마지막으로 몸을 섞었다. 그들이 앞으로 평생 느끼게 될, 서로를 향한 갈증이 미리부터 화르르 마른 번개를 쳤다.그들의 몸은 잘 마른 장작같이 우뢰같은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둘 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깨기를 반복하던 새벽녘에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을 때에도 그들은 격렬하게 합쳐지고 장엄한 폭발로서 잦아들었다. 베로나에서 그들이 헤어지는날 아침에 성스럽게 거행하였던 기억의 예식 따위가 설 자리는 이제 없었다. 그들은 인생에서 공동의 미래를 지워버렸으므로.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남독의 뮌헨 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사샤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타는 것을 보고 미라는칼스루헤로 되짚어 올라갈 것이었다. 그들은 어제 이후로 말을 하지 않았으나, 베로나에서처럼 입만 열면 울음이 터질까 봐 그런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말이 빠져 버린 자리를 다정한 미소와 부드러운 애무가 들어서서 서로의 소통을 주관할 뿐이었다. 그들은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이 그간 수없이 경험했던 애절한 이별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미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가능성을 철저히 없애버린 완전한이별이라 좀 더 견디기 쉬운 것일까?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며, 그가 여자를 사랑하고 떠나는 완벽한 자유로움에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기차가 들어오자 그녀가 어제 이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태리어로 말했다.
“내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어서 고마워, 내 사랑!”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웃으면서 역시 이태리어로 대답했다.
“미라, 나 죽을 때 네 생각이 날 것 같다.”

미라가 주먹으로 그의 팔을 때리며 영어로 말했다.
“아니, 그럼 안 되지. 네가 죽을 때는 네 아내와 자식을 생각해야지. 나같으면 어림도 없다. 그때쯤이면 너를 까맣게 잊어버릴거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깔깔 웃었다.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남방셔쓰의 윗주머니에서 그녀가 준 손수건을 꺼냈다. 늘지니고 다닌 흔적이 온기처럼 남아 있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는 않아서 다림질선이 반듯한 분홍빛 손수건을 그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혹시 그가 손수건에 얼굴이라도 대고 울어버릴까 봐 미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지켜보았다. 그가 손수건을 도로 집어 넣었다. 손바닥으로 그 곳을 툭툭 치는 그의 눈이 어느새 웃고 있었다. 미라는 안도의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빠져나간 가슴에 휭하니 찬바람이 불었다.

그가 올라타자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둘 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라는 걸음을빨리하여 역 안에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대로 초코렛과 감자칩을 한아름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초코렛을 입에 꾸역꾸역 쳐넣기 시작하였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감자칩 봉지를 찢었다. 아직 초코렛이가득 들어있는 입 안에 감자칩을 한 주먹 쏟아넣었다. 단맛인지 짠맛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목이 메이며, 훅하고 눈물이쏟아졌다. 오열이 턱을 치고 올라왔다. 미라는 오열을 숨을 세 번 쉴 동안만 용납하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닦고 쓰레기통으로가서, 아직 반도 먹지 않은 초코렛과 감자칩을 봉지채 버렸다. 기차에 올라 눈을 딱 감고 잠을 청했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방에 들어와 낯익은 물건들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미라는 침대에 얼굴을묻었다. 이불보에선 사샤의 살냄새가 났다. 미라는 세상을 잊은 듯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이튿날부터 전화벨이 두어번 울리다가 끊어지는 일이 연달아서 일어났다. 미라는 사샤가 전화를 걸려다 포기하기를 반복하는 건 아닐까싶어서 거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먼저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크면 클수록 그를 편하게 보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그녀를 빨리 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샤에게 소포를 부쳤다. 그가 잘 먹던 생강잼이며 과자류를 꾸렸다. 그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누르고 열 번쯤 썼다가고쳐 쓴 편지에는 사랑이라던가 그리움에 관한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잘 지냈니? 편도선염은 다 나았니? 휴가가 끝나고 다시 일을하자니 힘들지? 주세페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인사 부탁해. 네가 맛있게 먹던 것 부친다. 나는 잘 지낸단다. 안녕!

며칠의 두문불출 후 미라는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설계 마감일이 다가와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처음으로 바깥 출입을 하기 시작한 날 저녁에 하네스가 미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직도 사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이 나간상태여서 하네스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미라는 예의바르게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미라, 이제 좀 괜찮아?”
“응.”
“나 그때 그 일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겠어?”
“응.”
“나는 너희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나는 사샤가 나에게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무슨 말을?”
“내가 너를 좋아했잖아.”

미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매사에 덤덤한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상사병을 앓는 사람같지도 않았거니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특권이아니지 않는가?
“사샤는 그런 사실을 몰라. 내가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너랑 사귄 것도 아닌데 왜 사샤가 네게양해를 구해야 하지?”
미라는 말을 하면서도 필경 그는 머리가 아주 나쁜 사람이거나, 사고하는 구조가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미라, 내가 생각해 보았어. 네가 저번에 한 말,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준다는 말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말이야. 진정으로사랑한다면 그냥 보내 줄 수 없다고 생각해.”
“내 말 들어 봐, 하네스. 사샤가 이별이 고통스럽다고 당장 결혼을 해서 합치던지 아주 헤어지자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그를보내 주기로 했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행복을 위해서. 이래도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하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뭐? 너 사샤랑 벌써 결혼했어?”
“아니, 내가 금방 아니라고 그랬잖아. 결혼할 수 없어서 헤어졌다고.”
“왜 그와 결혼할 수 없는 거니?”
“내가 아직 확신이 없으니까.”
“그럼 내 말이 맞네. 네 사랑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를 보내준 거지.”
“그건 그렇네.”
미라는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이런 상태로 계속 사귀자고 요구하지 않은 건 사랑 때문이야. 나는 그걸 원했지만 그러면 그가 힘들다고그래서.”

갑자기 비죽비죽 눈물이 나왔다. 하네스가 일어나서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대단히 어색한 자세였지만 미라는 위로를 받는기분이었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며칠 후에 미라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려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부터인지 자전거 앞바퀴에 바람이 조금씩 빠져서, 타기 전에는늘 새로 바람을 넣어 주어야 했는데 그날은 바람을 넣으려고 보니 바퀴가 탱탱한 것이었다. 머리를 갸우뚱거리다가 그냥 자전거를타고 나갔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그녀는 하네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로! 혹시 내 자전거…”
“응, 구멍을 때우려고 튜브를 꺼냈더니 튜브가 많이 낡았더라. 그러면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거든. 그래서 아예 새 튜브로 갈아버렸어. 브레이크는 이제 잘 듣니? 그것도 닳았길래 새로 갈았다.”
“오, 그것도 손 봤어? 어째 오늘은 삑 소리가 나지 않더라니. 고마워. 어떡한다지? 재료비는 주고 싶은데.”
“주고 싶으면 줘. 네 마음 편한대로 해.”
그의 선선한 대답이 벌써 미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지금 시간 있어, 하네스? 내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 나가자.”
“좋아.”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동물원 뒷길을 걸었다. 하네스와는 항상 실질적인 내용으로 대화가 풀렸다. 그들은 아이스크림 만드는방법과 치즈 띄우는 원리에 대해서 골똘하게 토론을 나누었다. 하네스는 어디서 들었는지, 메주 띄우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싶어했다. 미라는 다음 번에 아버지 집에 다녀올 때 알아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메주는 냄새가 하도 고약해서 아파트에서쫓겨날까 봐 아버지는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다니면서 길에서 발효시킨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들은 함께 웃었다. 미라는 오래간만에잡담을 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며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미라, 나도 너를 놓아 줄게. 다시는 사귀자고 말하지 않을게. 네가 그걸 원한다면.”
미라는 갑자기 웬 엉뚱한 소리냐 싶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

사샤에 대한 그리움은 물결처럼 주기를 타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였다. 그의 가슴팍을, 웃음을, 음성을 구체적으로 갈망하며, 그를단 한시간만이라도 다시 소유하기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편집증에 휘말리는 때가 있었다. 이런 주기가 오면 그녀는 어쩔 줄을몰라 방안을 뱅뱅 돌다가, 혹시 그 사이에 그의 편지가 와 있지 않을까 해서 한밤중에 잠옷바람으로 공공계단을 내려가기도 하였다.이런 시기에, 전화벨이 울리다가 끊기고 또 울리다간 끊기는 일이 반복되면 미라는 거의 미친 상태에 다다르곤 하였다.

성난 파도의 주기가 지나가고 나면 잔잔한 물결의 주기가 찾아왔다. 그러면 팽팽한 긴장감이 끊임없이 흐르는 고압선같은 관계에서해방된 것이 홀가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사샤의 말대로, 이렇게 완전히 끝장을 낸 것이 그와의 해후를 기다리던 때보다훨씬 더 견디기 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혜란 언니는 가끔 미라에게 전화를 걸어 미라의 동태를 살폈다. 혜란 언니는 미라가 사샤와 그렇게 헤어진 것이 불만이었다. 말투가직설적인 그녀는 대놓고 야단을 하였다.

“망할 것, 노상 시시한 남자만 사귀더니, 내가 보기엔 제일 나은 남자였는데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차 버리면 어떡해?”
“아니야, 언니, 사샤가 나를 거부한 거야. 그가 먼저 헤어지자고 그랬어.”
“시끄럽다, 얘. 네가 결혼은 못 하겠다고 했다며? 남자가 그러면 헤어지잔다고 금방 그래 알았어 하는 바보가 어딨니? 사람이결혼하자고 말하면서 그런 소리도 못하니? “
“언니, 그거 그 사람 진심이란 거 나는 알아.”
“너 그런 소리 들었다고 삐져서 끝낸 거지? 그를 설득해 볼 노력이나 했어?”
“아니, 안 했어. 나도 관계를 이런 상태로 지속시킬 자신이 없어서 그랬어.”
“그런 소리 말고 다시 연락해서 만나. 그 사람도 지금 너 보고 싶을 거야. 얘는 사랑이 뭐 별나라에서 온, 이상하고 고귀한물건인 줄 아나 봐.”

미라는 그들의 사랑은 별나라에서 지구로 잠시 소풍 나온, 특별한 사랑이었다고 속으로 대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소리내어말했다면, 혜란 언니는 특별한 사랑이 밥먹여 주느냐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고, 미라는 가슴에 간직한 특별한 사랑이 밥보다 더 좋은것을 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가 떠난지 한 달쯤 지나서 미라가 성난 파도의 주기를 홍역처럼 호되게 치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라그녀를 삼켜버릴 것같이 숨통을 조여오는 밤이었다. 미라는 불을 끄고 방바닥에 큰대자로 누워서 메피스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단 한 시간만 사샤에게 데려다 주고 그 댓가로 그녀의 영혼을 받아갈 메피스토를.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의 창백한 빛이 마치 달빛처럼 느껴졌다. 베에토벤의 월광곡을 틀었다. 미라는 월광곡을 들으며 달밤에알몸으로 백마를 타는 여인을 상상했다. 달빛을 받으며, 꽃잎으로 하얗게 덮힌 호수가를 달리는 여인.

음이 나른하게 이어지는 첫 악장에서는 여인이 말을 끌고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맨발에 밟히는 부드러운 풀, 밥알처럼 잔잔한꽃송이들, 수면 위로 드리워진 수양버들의 연한 잎사귀를 그녀의 어깨가 건드리자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며 부서지는 물거울. 둘째악장에서는 그녀가 말 위에 앉아서 말과 함께 리듬있게 출렁이고 있었다. 말은 자꾸만 더 빨리 달리고 싶어하고 그녀는 속도를부드럽게 억제하는 듯 하였다. 세째 악장에선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정열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여인의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속으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정열과 달리기 경주를 하는 여인.

메피스토, 나를 사샤에게 데려다 줘!

눈을 감고 월광곡 속에 피어나는 야경에 몰입해 있었으므로 미라는 그녀의 방으로 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뒤돌아나가는 발자욱의 울림이 나무바닥을 통해 등으로 느껴졌다. 눈을 번쩍 떴더니 하네스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헤이!”
“어, 음악 듣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우리 지금 수영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리과 남학생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은 허구헌날 떼를 지어 몰려와선 함께 요리를 하고, 공부를 하고,토론을 하고, 음악을 들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꼭 공부하듯이 진지하게 하는 그들은 미라가 사귀던 건축과 히피들과는 좀 다른,건전하고도 건조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들은 늦게까지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오밤중에 갑자기 수영을 간다는 것이었다. 미라는 벌떡일어나서 따라나섰다.

예닐곱 대의 자전거가 숲 속의 밤길을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달렸다. 속도를 보아하니 아마도 하네스가 앞장을 섰을 것이었다.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구름 뒤로 숨어 버린 것 같았다. 양옆으로 새까맣게 도열해 있는 나무들 사이로 뚫린뿌연 하늘을 목표삼아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미라의 머리 속에서는 아직도 월광곡이 울리고 있었다. 맨발을 통해 느껴지는 페달의깔깔한 감촉이 시원했다.

한 시간의 숨가쁜 밤경주 끝에 물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호수는 어둠 속에 갇혀서 숨을 죽인 채, 반짝일 엄두도 내지못하고 냄새로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던져버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원한 물은 확확 달아오른육체를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그토록 서둘렀건만 굶주린 모기떼들이 어느새 알아채고 앵앵거리며 따라붙었다. 모기떼를 떨쳐 버리기위하여 빠른 속도로 헤엄을 치다가 가끔씩 자맥질을 하였다.

자신의 팔이 물을 가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미라는 자신이 물에서 수영을 하는지하늘에서 수영을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온몸을 매끈하게 훑고 지나가는 물의 감촉이 좋았다. 사샤가 물에서 분리되어 그녀의 나신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미라는 사샤의부드럽고 차가운 애무를 받으며 그와 함께 물결치기 시작하였다. 좀 더 깊이 좀 더 깊이. 그녀는 사샤의 속삭임에 따라 숨을멈추고, 자맥질을 시작하였다. 좀 더 깊이 좀 더 깊이. 사샤가 자꾸만 속삭였다. 미라는 사샤를 쫓아 점점 더 깊이 잠수를하였다.

사샤, 가지마. 나는 너를 사랑해.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가슴이 답답해 오며 어지러웠다. 정신이 혼미해서 사샤만찾으면 그의 품에서 잠들리라 생각했다. 사샤, 어디 있어?

갑자기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쫓아온 것은 사샤가 아니라메피스토였다. 그녀는 그레첸이 되어 애타게 사샤를 불렀다. “하인리히, 하인리히.” 메피스토가 소리쳤다. “그녀는 처형당했다.“미라는 몸을 솟구쳐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수면을 뚫자 밤하늘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구원받았다.”

사샤의 환영을 호수 속에 장사지내고 물가 쪽으로 헤엄쳐 오니, 남학생들이 모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물속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서로 이름을 불러 확인을 한 후, 그들은 요란한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젖은 몸 위에 옷을 뒤집어 쓰는데 단 몇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모기떼를 떨쳐버리기 위하여 울퉁불퉁한 돌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자전거의 진동이 심할 때마다 다리에힘을 주어 안장에서 엉덩이를 들어주는 품새가 정말로 말을 타는 것 같았다. 달도 없는 밤하늘엔 월광곡의 제 삼 악장이 가득 차있었지만, 사샤의 환영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이튿날 미라는 사샤의 편지를 받았다. 그의 편지는, 우리가 이번 여름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묻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녀를 만나러 오겠다고 하였다.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이 빠진 건조한 문체여서 미라는 그의의도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 완벽한 자유인인 사샤는 나와의 사랑을 벌써 극복하고, 이제는 친구로서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다고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너를 잊지 못했는데.

미라는 이제 막 호된 그리움의 홍역을 치르고 난 뒤끝이었다. 어제로서 사샤의 환영을 수장하고 지금부터 그녀의 인생을 새로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무너질 자신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그에게 오지 말라고 썼다. 나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않았어, 사샤. 내 상처가 다 아물면 그때 와. 그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먼 훗날에 갈게.

먼 훗날에, 이십 년 후에, 사샤의 때이른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나서, 그때 그가 보냈던 편지의 진의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그때 그는 그녀에게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고,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다시 사랑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 편지 이후로 미라는 이별을 서서히 극복해 갔다. 그 편지 이후로 전화벨이 울리다가 끊어지곤 하는 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