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특허청에서 파올로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라는 음악대학에서 첼로 연주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보았다. 가뜩이나 감성의물통이 뜨겁게 차오르는 이때, 첼로의 선율은 표면장력으로 볼록한 수면 위에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로서 그녀를 넘쳐나게 할것이었다. 그녀는 철철 흐르며 남김없이 무너지고 싶었다. 그렇게 다 흘려보내고 나면, 무언가 새로 시작할 힘이 고일 것만 같았다.

그녀의 밤외출에 익숙해진 남편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공들여 화장을 하는 것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녀가 현관에서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컴퓨터 화면에서 머리도 돌리지 않았다.

“나 나갔다 올게.”
“어디?”
“그냥.”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몸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가 절대로 습관이 들 것 같지 않았던 그의 무관심이 이제는그녀에게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공중전화에서 파올로에게 전화를 하였다. 집에서 전화를 걸면 그의 전화번호가 전화기 자막에 남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굴함에 놀랐다. 그녀가 일 때문에 교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남편도 아이들도, 그녀가 다른남자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는 일에 익숙해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파올로와 무슨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떳떳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회오리바람 치는 그녀의 감정이 그 증거였다.

파올로는 집에 없었다. 자동응답기가 이태리어, 영어, 독일어로 그의 부재를 알리고 있었다. 세 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그의 음성이 차가운 기계를 통해서도 다정하게 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대고, 지금 음악대학 무슨 홀에서 여덟 시에 열리는첼로 연주회에 가는 길이라고, 가는 길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했노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미라는 느리고 낮은 첼로의 선율을 귀로만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연주자의 표정과 음악이 일치하는 첼로연주는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멋이 있었다. 귀로는 가슴을 굵게 긁는 선율을 들으며, 눈으로는 지상에서 가장 큰 기쁨과가장 큰 고통을 한꺼번에 견디는 연주자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예술의 절정과 성희의 절정은 필경 같은 종류의 감정일 것이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첼로 연주회는 미리 넘어질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미라를 쉽게 함락하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오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미라는 출입구의 층계에 서서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바라보며 파올로를기다렸다. 그가 그녀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행여 메시지를 들었더라도 그가 그녀를 만나러 이 빗속으로 나오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샤라면 분명히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샤라면 그녀의 메시지를 놓칠 리가 없었고,사샤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이 세상 끝까지 그녀를 찾아왔을 것이다.

밤에 혼자 서서 남자를 기다리는 미라는 쓸쓸하고 외로웠다. 요란한 장대비가 시원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지난번 클레츠머연주가 끝나고 비오는 밤을 혼자서 즐기던 기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낯선 남자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그녀는 이미자유롭고 당당한 영혼이 아니었다.

이튿날 파올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메시지를 너무 늦게 들어서 첼로 연주회에 갈 수 없었다고 하였다. 공손했으나 감정이실리지 않은 말투에선, 그래서 아쉽다거나 그가 만약에 좀 더 일찍 알았다면 그녀를 만나러 연주회에 갔을 것이라는 뉘앙스는풍겨나지 않았다. 언젠가 멀지 않은 시일 안에 다시 만나기로 막연한 약속을 하고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

저녁상을 물리고 혼자서 밖으로 나가는 미라의 습관은 근래에 남편과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영화나음악회를 미리 알아 놓고 나가는 때도 있었지만, 무작정 나가서 극장이나 문화센터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어스름이 내려앉는 도시의골목길과 한적한 이자 강변을 정처없이 거닐기도 하였다.

파올로를 만난 이후로 미라는 거의 매일같이 이자 강의 다리로 나갔다. 다리 위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강물 위로 붉게 번지는저녁놀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하늘이 주홍빛에서보라빛으로, 그리고 잿빛으로 변하고 나면 그녀는 맞은 편에 보이는 유럽특허청으로 갔다. 시커멓게 텅 빈 건물의 주위를 아무런목적도 없이 빙빙 돌며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미라는 가슴이 답답하여 한숨을 쉬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남편의 뒷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띄었다. 그는 거실에 혼자 앉아서 항상 컴퓨터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흘끗 돌아볼 때도 있었지만미동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미라는 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다른 방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그녀가 여느 날처럼 막 들어와 신발을 벗는데, 남편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걸었다.
“집에서 전화 왔었어.”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올 크리스마스에 올 거냐고.”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당신이랑 의논해 보겠다고 그랬어.”
“부모님한테 그 말 물어 봤어?”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가 비로소 머리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
남편의 표정이 복잡하였다. 어리둥절한 눈빛에 불안과 분노가 미리부터 서려 있었다.

“몰라서 물어?”
그녀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녀는 대꾸 없이 돌아서며 남편을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날렸다. 아이들이 슬며시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을 먹으며 그들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들의 학교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저녁엔 학교의학부모회의에 나란히 참석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부엌 식탁에 마주앉아서, 같은 테마로 계속해서 의논을 하며 서로 차를 따라주었다. 한번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그들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구테 나하트. 미라는 욕실로 가서 이를 닦았고,남편은 거실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그들은 동시에 침대에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이 먼저잠이 든 이후에야 다른 사람이 침실에 들어갔다.

며칠 후에 남편이 다시 물었다.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에 부모님한테 갈 건가?”

그녀가 대뜸 시비조로 되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어?”
“당신 부모님한테 그 말 물어 보기 전에는 나도 부모님 안 본다고 내가 말했지?”
“언제 그랬나? 그리고 무슨 말을 물어 보라는 거야?”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몰라서 물어? 당신 그렇게 거짓말 할 거야?”

남편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어? 당신 정신병잔가?”
“내가 백 번도 더 말한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정신병자 아냐? 거짓말장이가 아니라면.”
“그게 언제적 얘긴데 이제 또 끄집어 내는 거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눈은 혐오감으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대하는 미라의 눈은 싸늘한 경멸감을 담고있었다.

무언가 커다란 폭발이 있을 조짐의 살벌한 정적이 흘렀다. 미라는 가슴을 조이며 폭발을 기다렸다. 남편이 휙 돌아서서 문을 쾅닫고 나갔다. 미라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중얼거렸다.
“다 지나간 일이 아니야. 그냥 덮어두었을 뿐이야. 너무 힘들어서. 이젠 포기하고 싶어서.”

폭발을 피해서 도망간 남편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난데없이 배신감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라는스르르 방바닥으로 미끄러져 앉았다. 쪼그려 세운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눈물이 나올 듯 하다가 도로 들어갔다.

결혼 후 미라의 눈물은 서서히 말라갔다. 언젠가 그녀는 매일 밤 자다 깨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리없이 눈물만 펑펑 쏟은 적이있었다. 옆에 자던 남편이 그런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화를 내듯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다. 이튿날 아침에 남편은 그녀를 보고정신병원에 가 보라고 차갑게 말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밤에 깨어도 울지 않았다. 밤마다 깨어 울던 버릇이 사라진 이후로미라는 어떤 일이 닥쳐도 눈물이 돌지 않았다. 슬픈 일에도 그랬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버릇도아울러 사라져버렸다.

미라는 남편과 함께 시내에 나가서 아들에게 줄 생일 선물을 사왔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아들의 생일파티를준비하는 문제로 의논을 하였다. 그녀가 남편에게 그날 좀 일찍 퇴근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그날 오전근무만 할 수도 있다고대답했다. 그녀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했다.

미라는 그들 부부가 서로에게 손수건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쳐박아 두었다가 필요하면 꺼내서 사용하고는 다시 잊어버리는손수건. 그녀는 그들의 손수건이 많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세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손수건을 그냥 버리고 말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미라는 가끔씩 파올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거의 항상 집을 비웠으므로, 그녀는 그와 통화가 되기를 기대하지는않았다.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그녀는 가끔 가다가 그에게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별특별한 내용이 없는 일상적인 인사를 남기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기계 저쪽에선 어떻게 들릴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파올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그녀가 혹시 일요일에도 시간을 낼 수 있는지,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 일요일날 만나자고 해도실례가 되지 않는지 정중하게 물었다. 그녀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듯 여러가지를 차례로물어왔다.

“사시는 곳 근처에서 잠깐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뉨펜부르그 공원 쪽으로 올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으신지요?”
“그날 시간을 충분히 낼 수 있어요.”
“아, 좋군요. 그럼 야외에서 산책을 할까요, 아니면 실내에 앉아서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저는 둘 다 좋아요.”
“그럼 공원에서 함께 산책을 하다가, 공원 입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기로 하지요. 그 카페를 좋아하시나요?”
“저 그 카페에 한번도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요.”
“거기 분위기가 괜찮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예.”
“그날 제가 자동차로 모시러 갈까요?”
“아, 아니요, 제가 지하철 타고 갈게요.”

그녀가 사양하자 그는 그녀가 탈 지하철과 전차의 번호와 갈아타는 장소, 타는 시간과 도착 시간을 매우 상세하게 일러 주었다.

“전차에서 내리시는 바로 그 장소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곧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그날 뵈어요.”
“예, 안녕히 계십시오.”

전화를 끊고 나서 미라는 가슴이 둥둥 뛰었다.

그날 생전 처음으로 팩이라는 것을 사 왔다. 얼굴에 허옇게 회칠을 하고 거울을 보며 조금 부끄러워하였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처럼 목욕물을 받아 향기나는 오일을 듬뿍 넣고,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애무하듯 만졌다. 참으로 오랫만에사람의 손길을 받는 자신의 살갗이 이제는 불쌍하지 않았다. 무언가 알지 못할 힘이 그녀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그간 사막처럼 삭막했던 마음속에, 단비같이 절실한 기운이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직하게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는 욕조 위로 떠오르는 수증기와 섞이며 부드럽게 울렸다.

남편이 욕실 문을 빼꼼 열고 들여다보았다. 말없이 문을 닫으려는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나 등 좀 밀어 줄래?”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부쳐온 이태리타올을 건네주며 그녀는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가 그녀의 등을 밀어줄 때마다늘 말하던, 살갗을 한꺼풀 벗겨내는 잔인한 목욕 문화에 대한 농담을 생략한 채 그는 묵묵히 손만 움직였다.

“때 많지?”
“조금.”
“당신이 등 밀어준지 오래됐으니까.”

그가 손으로 그녀에 등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다 됐어. 이제 빨개.”
“고마워.”

그가 나간 후 미라는 욕조에서 나와 온몸에 로션을 정성스럽게 발랐다. 그녀가 욕실을 나와 침실로 가는데 다른 욕실에서 누가샤워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알몸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었다. 선뜻한 침대보에 맨몸이 닿자, 피부가 팽팽하게 긴장되며 배꼽에서 발끝으로 찌르르전기가 흘렀다. 남편이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맨어깨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눈으로물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눈으로 대답하였다.

그가 가운을 벗자, 그녀가 이불을 들쳐 그를 맞아들였다. 제 몸처럼 익숙한 그의 몸이 편안하게 안겨왔다. 무척 오래간만에 접하는남의 몸인데도, 마치 아침에 벗어 놓았던 잠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편안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안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서로의 몸을 안는 게 실로 몇 달만인지, 혹은 해를 넘기지는 않았는지 그도 생각해 보는 것일까?

자잘한 장애물을 진작에 극복하고, 긴 세월의 타성이 붙은 섹스는 편안하면서도 정확한 법이어서, 이십 년간 서로의 몸을 잘 알고있는 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확실한 결과에 도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타성이 붙은 전희란 아무래도심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남편의 습관적인 애무에 미라는 예민하게 반응하였고, 절절끓는 정염으로 제 몸같이익숙한 남편의 몸을 애무하였다. 드디어 두 몸이 합쳐지고, 정해진 수순을 밟아, 길고 예리한 쾌락으로 그들은 함께 불타올랐다.

잠시 후 그가 일어나서 잠옷을 입고, 자기 이불을 펄럭펄럭 털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누워서, 침대 머리에 장식으로 걸어 놓은조각보가 그 바람에 울렁거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곧 이어 남편이 그녀 옆에 누워서 몸에 이불을 꼼꼼하게 감는 모습을 그렸다.

이불깃 스치는 소리가 한참이나 나더니 바로 코 앞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었어?”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은 자세로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곧 죽을 거야.”
“오늘은 좀 겁나더라. 이러다가 구급차 부르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들은 마주보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딱 돌아누워,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