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샤가 탄 기차가 점점 작아져서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미라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녀는 발걸음을 떼어 라벤나행 기차에 올랐다.

라벤나는 작지만 유서 깊은 도시였다. 한때 동서로마제국을 대표하며 누렸던 영화의 발자취가 여기저기서 예기치 않게 나타나,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였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처럼 맞닥뜨린 산 비탈레 성당은 수수한 벽돌로 쌓은 평범한 건물이지만, 안으로 무심코 발을 디디면 전혀기대하지 않았던 세계가 펼쳐졌다. 벽과 천장을 온통 두르고 있는 모자이크 성화는 초기중세의 양식답게 단아하고 고적했고, 세밀하게이어 맞춘 잔잔한 돌조각들은 어스름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바티칸에서 미라의 혼을 빼놓은 바로크 양식처럼 대번에 정곡을건드리는 격정감은 없었지만, 그보다 천년 전의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세심하되 대범하고 화려하되 정갈한 동서양문화의 합성은미라를 오래오래 그 곳에 서 있게 만들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주의 절정을 또 한번 보는 듯했고,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게느껴지는 순간을 맞아 그녀는 고개를 숙여 기도를 드렸다.

서로 상관이 없게 생긴 돌조각들도 잘만 어울리면 영혼을 가진 작품이 되는 것을 보며 미라는 한국의 조각보를 떠올렸다. 자투리천조각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암만 화려해도 어딘지 소박했고, 암만 소박해도 화려한 구석이 있어서 미라가 유난히 좋아하는공예품이었다.

미라의 가슴 속에는 지적호기심만으로는 식혀지지 않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해 그녀는 거센 바람에 섞인빗방울이 얼굴에 따갑게 박히는 날 자전거를 빌려 아드리아 해안으로 나갔다. 도도한 수평선을 바늘처럼 섬세한 돛대의 무리들이겁없이 수직으로 침범하는 광경은, 벽에 걸려 눈에 익은 풍경화처럼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간 오밀조밀한 도심에 길들었던그녀의 시야에 툭 트인 바다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했고, 진회색의 하늘 아래 사납게 파도치는 검푸른 바다가 속을후련하게 해 줬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그녀는 자전거 위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하여 부두의 카페로 들어갔다. 허름한 카페엔 손님이 하나도없었다. 미라는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카푸치노를 마셨다. 하얗게 이를 들어내며 물구나무를 서는 파도를 바라보며 입술에묻은 우유거품을 빨다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샤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텅 빈 카페에 혼자 앉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안전띠를 믿고 몸을 날리는 번지점프처럼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열고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무작정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도 처음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계산을 하려고 두리번거리자, 앞치마를 입은 뚱뚱한 중년남자가 나오더니 너그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냥가보라고 했다. 그녀는 퉁퉁 부은 눈이 부끄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팽팽하던 고압의 전류가 눈물과 함께빠져나간 듯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이태리의 거리는 부활절을 맞아서 활기를 띄었다. 거리의 쇼윈도우들은 병아리나 달걀 모양의 초코렛 등 갖가지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꾸며졌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정착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향수가 오르르 솟아올랐다. 미라는 사샤를 다시 만나게 되면 주려고하얀 설탕을 입힌, 달걀 모양의 초코렛을 하나 샀다.

미라는 뜨다 만 양말에서 대바늘을 주욱 잡아 뺐다. 미완성의 양말을 코가 풀어지지 않게 잘 접어서 가방에 넣고, 새로 코를만들었다. 그녀는 쪼코렛 달걀에 씌울 모자를 떴다. 진짜 털모자처럼 가장자리는 쫄쫄이로 뜨고, 털방울도 앙증맞게 만들어 붙였다.사샤에게 이것을 전해줄 날이 과연 올는지, 사샤가 이런 장난감같은 것을 좋아할지 미지수였지만 미라는 괘념하지 않았다. 이것을만드는 동안 사샤를 생각하는 행복을 가진 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아낌없이 퍼주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베니스의 역에서 배를 탔다. 며칠 전에 사샤와 함께 섰던 갑판에 이번에는 혼자 서서 온 얼굴로 바람을 맞았다. 동화책에 나오는그림같이 생긴 도시의 실루엣이 바람을 따라가며, 이따가 다시 만나자고 그녀에게 손짓하였다. 반짝이는 물결 위에는 온통 사샤의얼굴이 떠 있었다.

유스호스텔에 도착한 미라는 문도 열기 전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고 질려버렸다. 예약을 했다지만 정말로 자리가 있을까? 만약에 자리가 없으면, 나중에 이리로 연락하기로 한 사샤와는 어떻게 다시 만나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예약한 대로 사흘간 침대를 배정받았다. 숙박수속을 하면서, 혹시 그녀 앞으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히피 차림의 젊은 직원이 메모장을 뒤적여 보더니, 없다고 하였다. 미라는 침대 시트를 받아와 이부자리를 정리하면서 짐짓늑장을 부렸다. 되도록 천천히 관광 나갈 준비를 마치고 유스호스텔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프론트로 가서, 혹시 그 사이에전화가 오지 않았는지 물어 보았다. 히피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라는 베니스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광장을 미어터지게 채우고 있는 관광객 사이사이를, 어느 순간 갑자기 한산해져서괴기스럽기까지 한 좁다란 골목길을, 대지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서 휘돌아 흐르며 행인의 발꿈치를 끝없이 따라오는 운하를,더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물이라고 빛을 받으면 제법 운치있게 반짝이는 운하 위로 걸려 있는 날렵하거나 아담한 모양의 구름다리를,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지만 단지 이러한 그림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설명되는, 새까맣게 반짝이는 곤돌라와 겉멋이잔뜩 들은 뱃사공을 지나서 미라는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그녀가 베니스에서 가장 좋아한 것은 대낮에도 어두침침한, 주택가의 골목길이었다. 갑작스런 어두움에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면, 길의폭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높이 솟은 건물들이 양쪽으로 이마를 마주하고 서서,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골목길이 있어야할 곳에 물이 찰랑대며 물안개와 쪽배를 이고 있는 곳에서는 음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여유롭게 물에 발을 담그고 딴청을피우고 있는 건물들은 관찰자의 기분에 따라 음탕하게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게 보이기도 하고, 낭만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서로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고옥들은 마치 한 줄에 끼워진 구슬목걸이처럼 사이좋게 이웃집에 기대어 서 있었지만, 자세히뜯어보면 건물마다 제각각 태어난 시대의 양식을 고집스럽게 표현하고 있었다. 자긍심 있는 개인주의자들이 어울려 만드는 전체의조화랄까, 연륜의 자존심이랄까, 자신의 문화를 긴 세월 동안 중단 없이 이어 올 수 있었던 행운아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 끔찍하게 낡은 주택건물들은 끈끈한 생명력을 풍겼다. 속고 속이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끈질기고 의연하게 일상을 유지해 온보통 사람들의 생명력이 동그랗게 닳아 버린 문틀에서, 바스라질 듯 낡아 삐걱이는 덧창문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도시를점령해 버릴 듯 무서운 숫자로 몰려와 돈을 물 쓰듯 쓰는 관광객들 틈바귀에서, 일상의 웃음과 일상의 고통을 도도하게 지켜 내는주민의 힘이 느껴졌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풍상에 절은 가옥을 끝없이 보수하며,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낡아빠진 발코니에 빨간제라늄을 가꾸며, 도도하게 일상을 지켜내는 힘.

베니스를 떠나기 하루 전날, 미라는 아침 일찍부터 프론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녀가 프론트를 통해 전화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기회였다. 다음날 아침이면 그녀는 짐을 들고 나가야 하므로, 만약에 사샤가 베니스로 올 생각이라면 늦어도 이 아침에는 연락이 올것이었다.

정해진 시간에만 사무를 보는 직원이 프론트를 닫으려고 주섬주섬 서류정리를 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미라도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유스호스텔을 나왔다. 고개를 숙이니 눈물이 후두둑떨어졌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베니스에서 사샤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으로 여태까지 버텼는데, 몸을 던지고 보니 안전띠가 존재하지 않는 번지점프였다는걸 깨달은 듯 마음이 황량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하는 사샤와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미라에겐, 베니스의 유스호스텔이 유일한교차점이었다. 과녁과 사격수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명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이, 이제는 사샤를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전쟁터로 끌려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낙이 느낄 법한, 속수무책의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불현듯,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 그를 그리워하던 때보다 이렇게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들의 의지로 어찌하지 못하는 운명 앞에서 사샤 역시 너무 크게 절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도도하게 일상을지켜내 줄 것을 기원하였다. 그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리라는 점에선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미라는문득 자신의 이런 마음이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의 기다림이 그리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다는것도.

언제 배가 들어와서 토해 놓았는지 선착장에는 많은 인파들이 바글거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유난히 다리가 긴 남자 하나가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무서운 속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미라의 눈에는 판테온 앞으로 겅중겅중걸어가던 남자와 겹쳐졌다. 그 두 남자가 동일인물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전에 미라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사샤!”

마주 달려가 서로 얼싸안았다.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빙빙 돌았다. 미라는 그의 품에 안겨서도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건아닐까 겁이 더럭 났고,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 앞에서 노란 별똥이 어지럽게날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일 주일의 휴가를 받아서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출장지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는 그는, 출장을떠나는 길에 아예 여행짐을 다 꾸려 가지고 가서 휴가를 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고 했다.

그가 로마에서 오는 밤기차로 지금 막도착했다는 말에 미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사이에 또 로마로 출장을 갔었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에그는 로마에서의 일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함께 기차를 타기 위하여 일부러 집에 다녀갔다가 다시 로마로 내려갔다는것을 그녀는 그제서야 알아챘다.

“네가 조른다고 휴가를 줘? 좋은 회사네.”
안달하며 기다리던 것치고는 자신의 말이 예사롭게 나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내게도 선택이 아니었는 걸. 나는 너한테 올 수밖에 없었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미라는 그의 허리를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샤! 나도 너 많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이 가방에서 모자를 씌운 초코렛 달걀을 꺼냈다.
“부활절 선물이야. 네게 주려고 내가 만들었어.”

사샤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선물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오오, 고마워. 예쁘다, 참 예쁘다. 그리고 나도…”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세타 밑으로 손을 넣어 남방셔쓰의 윗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이때 그녀가 준 분홍빛 손수건이 함께 딸려나왔다. 그는 손수건을 도로 집어 넣고,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미라가 상자를열기를 기다렸다.

상자를 열어 보는 순간, 미라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예쁜 금반지가 하얀 솜에 파묻혀 반짝이고 있었다. 크기를 조절할 수있게 만든, 산뜻한 디자인이었다. 미라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고마워.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

그가 그녀에게 디자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마음에 꼭 들지만 너무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라는 그럴줄 알았으면 저도 좀 더 좋은 걸 선물할 걸 하는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가끔 그에게 주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친이유는 행여 그의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미라, 네 손으로 직접 만든 선물에 비하면 별로 좋은 게 아니지.”
사샤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소중하게 감싸더니 살며시 끌어 당겼다. 그녀에게 이미 익숙한 동작이어서 그녀는 스르르 눈을감으며 기다렸다.

“금은 변하지 않잖아. 나는 네게 무언가 변하지 않는 걸 선물하고 싶었어.”
말을 마치자마자 사샤는 마치 그녀의 대답을 겁내는 사람처럼 황급하게 입을 입으로 막았다. 미라는 부드럽게 그를 맞아 들이며,자신이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잠시 시간이 멎었다.

도시가 물 밖으로 태어나는 광경을 함께 목격한 사샤와 함께 보는 베니스는 미라에게 한층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사진으로만보며 상상하던 건물들은 바다를 향해 호령하는 형상으로, 또는 수영하다가 잠들어 버린 백조의 형상으로 물 위에 떠 있었다.

사샤의 손을 꼭 잡고서, 속박과 자유를 동시에 꿈꾸는 미라를 베니스는 비웃지도 얄미워하지도 않았다. 단지 동병상련의 정으로너그럽게 포용해 줄 뿐이었다. 베니스는 전통과 자유라는 상반개념을 먹고 사는 도시였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르네상스 시대까지종교권과 왕권의 지배를 받지 않은 자유도시 베니스를 세운 사람들은, 침략자를 피해 땅끝까지 도망온 농민들었다. 고생을 할망정지배받고는 살지 않겠다는 반골정신으로 개펄을 억척으로 개간해서 항구도시를 이루었다. 이런 농민의 자손들은 해상을 업으로 삼는기민한 적응력을 보이는 한편, 땅을 끔찍하게 아끼고 알뜰하게 사용하는 농부의 옛 전통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터를 가꾸고보존해왔다. 오늘의 베니스에는 이러한 양면성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끈끈하게 배어 있었다.

무섭게 붐비던 인파와 비둘기떼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한적한 산마르코 광장은 석양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났다. 어디선가에서감미로운 선율이 흘렀다. 그 음악에 맞춰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춤을 추었다. 춤추는 남녀의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볼 위로 회색머리가 나풀거렸다. 서늘해진 밤바람에서 비릿하고 싱싱한 멍게냄새가 묻어났다.

유스호스텔의 환하게 불을 밝힌 복도에서 사샤는 그녀의 양 뺨에 다정하게 키스하였다. 잘 자, 단꿈 꾸어. 작별인사와 함께헤어졌다. 복도가 꺾어지는 곳에서 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샤가 두 발을 얌전히 모으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시선은 거미줄처럼 날아와 그녀를 옭아매었고, 그녀는 기운이 소진한 모기처럼 꼼짝달싹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혔다. 그가 손바닥에키스를 하고 훅 불어서 그녀에게로 날려 보내는 시늉을 하였다.

침실에서는 말만한 처자들이 티셔쓰에 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옆 사람과 나지막한 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고있었다. 미라는 그들에게 인사만 하고 곧장 침대에 들었다. 사샤가 런닝셔츠바람으로, 혹은 웃통을 벗고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그녀와 한 건물 안에 누워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몸이 따스해졌다. 반듯하게 누워서, 손을 위로 들어손가락을 펴 보았다. 금반지가 반짝였다. 꿈이 아니었구나.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연장시켜 온 그들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긴 시간이 믿어지지 않았다. 행복감의 가장 친한 친구인 불안감이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에게 실망하진 않을까? 내가 그에게 실망하진 않을까? 서로가 소중하게 키워 온, 상대방에 대한환상이 깨져 버리지는 않을까? 이때 미라는 전통과 자유가 어우러지는 모순의 도시 도시 베니스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괜찮아, 괜찮아. 이내 그녀는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약속한 시간에 식당에서 만났다. 잘 잤어? 달콤한 꿈 꾸었어?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며 여행 일정을의논하였다. 사샤는 그녀에게 나폴리로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그녀가 애초에 나폴리에 가려고 기차를 탔다가 중간에로마에서 내린 것을 염두에 두었음일까? 미라는 그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기차를 타기 전에 그들은 무라노 섬으로 가서 유리 수공업장을 구경하였다. 다소 어두운 조명의 작업장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유리를 녹여 대롱을 이용해 입으로 불어서 갖가지 그릇과 소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신기했다.

태양빛을 발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유연한 유리 덩어리가 창조자의 첫 숨결에 따라 순간적으로 운명이 확정되고, 순전히 창조자의 재주에의해 품질이 정해지며, 간혹 창조자의 실수나 변덕으로 도중하차를 하기도 하지만, 일단 한번 식고 나면 그대로 굳어져 평생을견디는 유리의 일생이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재현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유리는 여차하면 남을 다치게 할 만큼 오만하지만, 어느순간 한치의 도전에 파괴로서 반응하여, 미련 없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꼭 사람의 일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열대에서 섬세하게 반짝이는 학과 코끼리, 사슴과 고래를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미라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떠올렸다.추억과 현실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고, 환상과 절망이 잔인하게 공존하는 그런 인생을 자신은 결코 살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머리를흔들었다.

역의 플랫홈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며 사샤는 노상 벙글거렸다. 커다란 배낭이 잘 어울리는 그에게는 미라와 함께한다는 사실만큼이나여행에 대한 기쁨도 커 보였다. 삶의 현장을 찍는 사진작가를 꿈꾸며, 배낭을 멘 여행객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는 사샤는먼 곳으로의 향수가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미라가 발산하는 나그네의 눈빛 때문에 그녀에게 끌렸을지도 몰랐다. 그가만약에 미라를 다른 연유로 만났더라면 어쩜 그는 그녀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사샤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앞주머니로 옮기며, 나폴리에선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씩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치한도 조심해야지. 하지만 로마의 치한은 나에게 아가씨를 선물하기도 하지.”

나폴리로 가는 밤기차는 좀 붐볐다. 다른 승객들과 함께 앉아서 가느라고, 첫 번째 밤기차의 황홀했던 기억을 재현할 수 없는 것을미라는 속으로 아쉬워했다. 그러나 단 하룻밤밖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마음이 아주 넉넉했기 때문에 서로의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며 편안한 밤을 보냈다.

미라에게는 어제부터 궁금한 일이 하나 있었다. 여행을 함께 하면서 잠자리는 어떻게 잡을 것인지, 베니스에서처럼 유스호스텔에 들어각방을 쓸 것인지, 아니면 호텔에 들어 한 침대를 쓸 것인지, 사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기차 안에서 그에게물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만약에 그가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 나폴리에 닿았다. 어느 대도시에서나 역전은 번잡하기 마련이지만 나폴리는 이태리의 여느 도시보다 좀 더 시끄럽고복잡했다. 길가의 허름한 카페의 높은 테이블에 팔을 괴고 서서 그는 에스프레소를, 미라는 카푸치노를 마셨다. 코르네토는 여전히바삭거리며 입 안에서 살살 녹았고, 사샤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유난히 좋다며 기뻐하였다.

사샤는 아마 네가 좋아할 거라며 그녀를 스파카 나폴리 지역으로 안내했다. 미라는 저절로 튀어나온 탄성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없었다. 역사 이래 늘 서민들의 거주지였던 스파카 나폴리의 상징은 빨래였다. 공공도로 한가운데 펄럭이는 빨래, 빨래, 빨래.울긋불긋 크고 작은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제각각 춤을 추는 모양이 장관이었다. 마치 축제의 깃발과도 같이 흥겹고도 경건했다.도로변에 마주보고 선 낡은 건물들 사이로 빨래줄이 주거니 받거니 걸쳐 있었고, 주민들은 도로 위의 빈 공간을 당당하게활용함으로써, 태양과 공기는 주민들의 공유품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주장하고 있었다. 미라는 주민들의 도도한 일상을 읽었다. 내땅이 있으나 없으나, 해가 나나 비가 오나, 밖에서 빨래를 말리며 사는 도도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훅 불어오는 바람 속에 포근한빨래냄새가 묻어나며, 갑자기 고향생각이 났다.

사샤가 행인에게 길을 물어 찾아간 곳은 언덕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원이었다. 옛 성터인듯 단단하게 다듬은 돌벽 저 밑으로 먼바다가 그윽히 펼쳐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파란 색과 회색이 변덕스럽게 어우러진 하늘 아래시퍼런 바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만 들릴 뿐, 인적도 끊기고 마치 세상이 멈춰선 듯 모든 것이평화로웠다. 바깥 세상이 마음속의 평화와 맞물리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미라는 숨을 죽이고, 가슴 속 깊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즐기고 있었다. 곁에 서서 두 손으로 돌벽을 짚고 바다를 바라보며침묵하는 사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그가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미라도 한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으며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에게 닿은 부분이 따스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그녀의눈은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가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미라의 몸에 소르르 일어난 솜털을 통해서 예민하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미라도 몸을 틀어 그를마주 안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하게 담긴 것을 보고 미라는 눈을 감았다. 이내 뜨거운 그의 숨결이 그녀의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입술이 순하게 열렸다.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변덕스러운 하늘에 눈을 주며 사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유스호스텔로 잠자리를 알아 보러 가야겠지?”
“그러자.”
사샤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미라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유스호스텔로 가자는 말에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그녀에게서 원하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모험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고, 숨이 짧은 연애를 하느라 순간의 감정에 충실히복종하는 그녀를 그가 헤프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처럼 맑은 영혼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약에 사샤가 호텔로 가자고 말했더라도, 그녀의 대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러자”였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나폴리를 시작으로 산수가 깊은 시칠리아 섬까지 돌았다. 소위 마피아의 거점이라는 지방이었지만, 미라에게는 특별히위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에 몸매가 작은 남유럽 주민들은 혈기가 왕성하고, 호기심이 많고, 친절하였다. 척박한 환경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초라하고 고집스러운 가옥들이 미라의 마음을 아프게 사로잡았다. 위협에 대항하기도하고 항복하기도 하는 와중에 그들이 묵묵하게 지켜온 인간성은 일상의 흔적으로 남아, 가옥의 여기저기서 훈장처럼 도도하게 빛나고있었다.

이제 그들은 아침이면 카페에 가는 대신에,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사고 가게에서 치즈와 소세지를 사 와서 조용한 벤치를 찾았다.그가 벤치에 앉아서 주머니칼로 솜씨 있게 빵을 자르는 동안 미라는 근처의 풀밭에서 들꽃을 꺾어 왔다. 이슬이 총총히 맺힌 작은꽃다발을 받을 때면 그는 항상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표정을 지었다. 너보다 상냥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늘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그녀가 좋아하는 치즈를 얹은 빵을 먹기 좋게 잘라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노을이 장엄하게 지는 바닷가에 서서 그들은 함께 울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을 한꺼번에 물들이는 그 천연한 빛깔을 감당할 수없어서 도움을 청하듯이 상대방을 바라보면 상대방도 눈에 눈물을 담고 있었다. 서로 끌어안으면 마치 봇물 터지듯 자연스럽게 울음이터졌다. 붉은 노을 속에 서서 그들은 키스를 나누며 눈물을 섞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서로 위로를 받는 차분한 키스였다.

만약에 그가 그 자리에서 그녀의 옷을 벗겼다면 그녀는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정열이 아닌 충족감,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가완벽하게 일치하는 충족감에 의해서. 이런 일은 그들이 사진 전시회에서 동생을 업고 피난 가는 어린 소년의 사진을 보았을 때나,거리에서 구걸하는 할머니 앞에서 동시에 지갑을 꺼낸 후에도 일어났다. 그들은 같은 일에 함께 감동하며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었다.

진공 유리관같이 일상에서 격리된 상황은, 그들이 공유한 자매혼이 공명할 수 있는 울림판의 구실을 해주었다. 세파에 눌려 그간빛을 잃었던 그들의 섬세한 감성은, 함께 떨려 고조됨으로써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해나가는 중이었다. 그 순간에만 충실해도 되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였고, 상대방의 그러한 행동에 영감을받았다.

충만한 시간을 함께 보낸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을 그들은 밤새 기차를 타고 올라간 국경지대에서 맞았다. 맞은 편에 보이는골짜기엔 안개가 성글게 서려 있었다.

“미라, 저기가 유고슬라비아 땅이야. 저 등성이를 넘으면 우리 친척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나와.”
“그래?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거든.”
“오오, 그렇구나.”
“우리 가 볼까? 내가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야.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
“어어, 내 여권에 공산국가 도장이 찍히면 큰일나.”

그 당시는 냉전시대였다. 난감해 하는 미라에게 사샤는 그럼 그냥 밖에서만이라도 구경하자며 손을 잡아 끌었다.

그는 그녀를 오솔길에 면한 국경으로 데리고 갔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초소를 혼자 지키고 있던 젊은 군인이, 미라와사샤가 걸어오는 것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샤가 그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젊은 군인은 사샤가 미라에게 국경너머 경치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을 관심있게 바라보다가 사샤와 눈이 마주치자 뭐라고 말을 붙였다. 그들은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는언어로 대화하였다. 사샤는 자기 또래의 군인에게 무언가 열성적으로 부탁하는 눈치였다. 군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이더니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 네 여권에 도장 찍지 않고 잠시 들어갔다 올 수 있게 되었어.”
사샤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하는 말을 들는 순간 미라는 당황했다. 추상같은 한국의 반공법을 어기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일이고 또 겁도 나는 일이었다. 그녀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사샤는 자못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미라를 재촉했다. 젊은 군인도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라의 마음속에 모험심이 불끈 일었다.

사샤는 산 아래 경치가 멀리까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피처럼 붉은 꽃송이가 자잘하게 달린 덤불이 여기저기우거져 있었다. 국경 너머의 풍광은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미라는 금지된 세계를 몰래 엿본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사람이그어 놓은 금이지만, 그 금을 넘자 사샤도 자신의 고향에 그녀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느낌이 드는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 내 고향의 경치가 마음에 드니?”
“그래. 그런데 나는 네가 이태리에서 이방인의 기분으로 사는 줄 몰랐어.”

사샤는 말없이 나무 밑에 앉더니, 미라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는 그녀를 뒤에서 보듬어 안고 그녀의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는 이방인이 아닌 기분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미라.”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이 뜨거워서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의 말이 그녀에겐 자신의 몸통을 울리며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처럼들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줄기에 닿아 불을 토했다. 그 불은 팽팽하게 얇아진 그녀의 목줄기를 단숨에 태우고, 그녀의 몸속에 불을 지폈다. 그녀의 몸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거센 불기운을 감지한 그의 손이 그녀의 봉긋한 앞가슴을 차마 넘지 못하고멈칫하였다.

미라는 그가 고향땅에서 그녀의 육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섹스는 정신적인 사랑이 익고 익어서 더 갈 데가 없을때 자연스럽게 육체화되는, 사랑의 절정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래서 만약에 사샤가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면, 그녀는 그를육체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긴 한숨과 함께 팔을 풀었다. 그녀가그의 무릎 위에서 그를 향해 돌아 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염으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듯이 속삭였다.

“나도 너를 원해.”

그들은 마치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고양이 새끼들처럼 그렇게 한참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다시 국경으로 돌아왔다. 미라는 젊은 군인에게 인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아침안개가 활짝 걷혀서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저 경치가 이제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피같이 붉은 덤불이 불꽃처럼 피어나는 저 땅은 이제 미라에게는남의 땅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였고,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에게 순결을 바친 땅이었다.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면서 사샤는 미라에게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이젠 프랑스로 갈까 해. 이태리에 너무 오래 있었거든.”
“미라, 나는 사흘 후에 베로나로 출장 가. 우리 베로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 아, 좋아. 나도 한번 가고 싶었는데 잘 됐네. 그럼 프랑스는 그 후에 가지 뭐.”
“그리고 나서 나는 몇 주 동안 오스트리아로 가.”

미라는 그에게 오스트리아의 무슨 도시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고 건성으로 물었고, 그도 짧막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베로나가 그들의마지막 도시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녀가 오스트리아의 근무지까지 따라가는 일은 그도 제안하지 않았지만, 미라도 결코 상상할 수없는 일이었다. 한 곳에 머무르며, 하루종일 남자를 기다리는 일은.

역으로 가는 길에 사샤가 심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미라, 내가 베로나에서 묵을 호텔에 너도 같이 예약할까?”
미라도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그러나 미라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드디어 기차가 들어왔다. 왜 그런지 그는 좀 허둥댔고,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불안해 하는 눈치였다.

“미라, 사흘 뒤에 베로나 역에서 만나는 거야.”
“응, 알아. 수요일 오후 두 시에.”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절대로 안 잊을 거야.”
“나 그때까지 너를 아주 많이 그리워할 거야.”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사샤.”
“조심해서 다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녀는 기차의 층계에 서서, 플랫홈에 서 있는 그의 목에 양 팔을 둘렀다. 마치 잠자리라도 같이한 사이처럼 그의 살이 그녀의살에 익숙하게 닿았다. 헤어질 때마다 늘 그랬지만,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몸을 껴안는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자리에 앉은 미라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지도와 책자를 꺼내들고 여행일정을 계획하였다. 앞으로 사샤없이 홀로 다니게 될 여행의 일정을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짰다. 습관이 들고 의지가 되었던 그가 곁에 없으니 허전하고 슬펐다.그러나 한편으론, 오래간만에 혼자가 되니 숨통이 틔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밤기차는 한산하여 미라는 육인용 칸을 혼자서 차지하고 편안한 밤을 보냈다. 슬리핑백을 펴 놓고, 젖은 수건까지 꺼내 말리며 쿨쿨자느라고 승무원이 와서 깨우는 것도 몰랐다. 승무원은 악의 없는 말투로 뭐라고 그랬는데, 대강 알아듣기로는 도둑을 조심하라고그런 것 같았다. 또 자기가 옆 칸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하였다. 미라는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그는 나가다 말고아무래도 미심쩍었는지, 너 여자냐 남자냐 하고 물었다. 동양에서 오는 배낭여행객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젊은 동양 여성이 밤에혼자서 경계심도 없이 쿨쿨 자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승무원이 나가자 미라는 지금 자신이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건지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

바다처럼 너른 코모 호수는 산봉우리 사이에 깊은 비취빛으로 그윽하게 고여 있었다. 종이배처럼 가벼워 보이는 배가 소리 없이떠다니고, 저 구석에선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동화 속의 그림처럼 생긴 옛마을이 호수가에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그녀가태어난 고향과는 아주 다른 경치인데도 갑자기 그녀는 콧날이 시큰해지는 향수에 시달렸다. 그녀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의 돌벽을손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난장이 집처럼 깜찍한 가옥의 창턱에서 꽃을 피우는 화초에 코를 쳐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시골에서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번쯤 다니러 왔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어머니는 서울에서 돈을 잘 벌고, 아버지는 미국에서 돈을 잘 버느라고 바쁜 사람들이라는 할머니의 설명에 그녀는 만족했다. 그시골 동네에서 가장 어른 대접을 받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그녀는 아쉬움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무렵에 그녀는 할머니의 곁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갔다. 교육은 대처에서 받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지에 의해서였다.그녀는 서울 생활이 두렵고 그녀가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낯선 여자가 무서웠지만, 한번도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그 대신 밤마다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만이 알고 있는 향수병은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 않았고,어른이 되어서도 그녀는 그리움을 고질병처럼 달고 살았다.

처음 와 보는 마을에서 느닷없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그녀는 항상 그녀 곁에 따라다니는 사샤의 환영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이방인이 아닌 기분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사샤.”
지난 번에 국경을 넘어갔을 때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방인으로 사는 게 슬프지 않아. 그렇지 않은 게 어떤 건지 내가 모르기 때문이야.”

사샤와 만나기로 한 날, 미라는 하마터면 베로나행 기차를 놓칠 뻔했다. 역으로 가던 버스가 사고로 서 버리자 미라는 눈 앞이캄캄해졌다. 택시도 보이지 않았고, 이태리에선 어떻게 택시를 잡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무조건 손을 들어 지나가는 자동차를세웠다.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사샤가 베로나의 어디에서 일하는지, 어느 호텔에묵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샤를 약속한 장소에서 약속한 시간에 꼭 만나야만 했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그녀 앞에 멈춰섰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중년 남자에게 다급하게 기차역이라고 소리쳤다. “스타치오네!“이태리 말로 뭐라뭐라 하더니 손짓으로 타라고 하는 걸로 보아, 역까지 가지는 않아도 방향은 같은 모양이었다. 중년 남자는 미라를역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려 주며, 아무 차에나 타지 말라고 서툰 영어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까지 걸어가기엔 먼거리였지만, 차량이 드문 거리에서 다시 자동차를 세우다간 오히려 시간을 더 잡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배낭을 단단히매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숨이 막히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녀는 뛰다가 죽으면 죽었지 기차는 놓칠 수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시계바늘이 기차의 출발시각을 잔인하게 넘어가며 째깍거렸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출발시각을 훨씬넘겨서 역에 도착했다. 베로나행 기차가 이제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호루라기를 불던 승무원이 미라의 필사적인 뜀박질을 보고기다려 주었다.

가까스로 기차에 올라 탄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내렸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쓰러지려는 상체를 가까스로 버티며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헛구역질이 나고 혀가 안으로 말리면서 침이 주루룩 흘렀다.

이번에도 성공했구나. 그제서야 그녀는 그들의만남이 매번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샤 역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차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일이 있을지도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들이 엄청난 결단력과 의지를 동원하여 한 번씩, 또 한 번씩 아슬아슬하게 만남을 연장시켜 온이유는 보고 싶다는 감정 단 하나였다. 공과를 비교해서, 수지가 맞는 일인지를 이성적으로 따져 보는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게임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기차가 베로나 역에 들어와 서행을 하다가 멈춰섰다. 미라는 창밖으로 사샤를 보았다. 그는 두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서서, 고개를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손이 갑자기 와들와들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만나기 위하여모든 것을 다 바쳐 도박을 벌이는 사이에 그를 향한 그리움이 부쩍 자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그에게로천천히 걸어갔다. 아까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던 것과는 달리 그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그녀의 뺨에 키스하며,아무 소리 없이 그녀의 배낭을 벗겨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었다. 첫 발을 떼다 말고 우뚝 멈춰서더니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들여다보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가 호텔의 프론트에서 숙박 절차를 마치는 동안 미라는 좀 떨어져서 딴청 피우듯 서 있었다. 층계를 오르고 긴 복도를 지나사샤는 번호표가 달려 있는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미라는 쭈뼛쭈뼛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그가 방문을 닫고 배낭을내려놓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한발 다가왔다. 큰 동작으로 팔을 벌려, 아직도 엉거추춤 서 있는 그녀를 안았다.

“웰컴.”

그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미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의 가슴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녀의 귀 밑에서그의 심장이 쿵쿵하며 크게 뛰었다.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미라가 입을 열었다.

“사샤, 네 심장이 아주 큰 소리로 뛰어.”
“그게 이상한 일일까?”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보내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여 그를 깊숙히 받아들였다. 국경에서의 뜨거운 포옹에 비하면 훨씬 더 부드럽고 은근한 키스였다. 그녀를다른 목적지로 안내하는 유혹의 키스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 몸의 다른 곳에서도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손은매우 부드럽게, 그러나 자신있는 동작으로 그녀의 앞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미라는 혼이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그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그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었다. 옷 위로그의 몸을 만지자 그가 가늘게 전율하며 신음을 토했다. 포옹을 풀지 않은 자세로 사샤가 웅얼거렸다.

“누가 먼저 욕실을 쓸까? 우리, 같이?”
“우리, 같이.”

그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급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미라는 그의 남방셔쓰의 단추를 하나씩 열어 내렸다. 그녀가 황홀한 표정을지으며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는 동안 그는 셔쓰에서 팔을 뽑아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티셔쓰를 머리 위로 단숨에 벗겨 올렸다. 그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다 말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같은 순간에 미라도 그를꽉 껴안았다.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서서 맨살에 닿은 맨살의 감촉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돌아서서 바지를 벗었다. 상대방의 벗은 몸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은 서둘러서 샤워 욕조로 들어섰다.간유리로 된 문을 닫으니 일인용 욕조가 꽉 찼다. 사샤가 샤워 꼭지를 내려서 자기 손바닥에 대고 물의 온도를 조절하는 동안미라는 장소가 좁아서 시선이 자유스럽지 못함을 다행으로 여겼다. 따스한 물이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떨어졌다. 금새 수증기가피어올랐다.

미라는 그토록 열망했던 사람이 지금 자기 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손인지그의 입술인지 아니면 물줄기인지, 무언가 뜨겁고도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미라의 몸 속에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가며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들은 비좁은 욕조 안에서 물줄기에 의지하여 서로의 육체를 샅샅이 탐험하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욕망에 쫓겨서 욕조를 나왔다. 미라가 수건으로 사샤의 몸에 동글동글 맺혀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사샤는큰 수건으로 그녀의 몸체를 감싸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는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내려 놓았다. 수건에 갇혀서반듯이 누운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정신을 놓듯이 눈을 감아 버렸다. 껍질이벗겨지듯 수건이 조금씩 열리며, 이번에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의 것이 확실한 손길과 입술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쓸고 지나갔다.그녀는 폭발할 것 같은 내열을 간신히 다스렸다.

그녀가 열에 달뜬 목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부탁해.”
“나 지금 너무 흥분해서… 하지만 해 볼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아직도 욕실 바닥에 떨어진 채로 있는 남방셔쓰의 윗주머니에서 작고 납작한 것을 꺼내왔다. 포장을 뜯고,쑥스러운 듯 돌아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손을 놀리며 그가 물었다.

“미라, 너 요즘 애인이 없다고 했으니 피임 안하고 있겠지?”
“응.”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의 단단한 몸은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몸과 장엄하게 하나로 합쳐졌다. 사샤의 몸 깊은 곳에 갇혀있던 비명소리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소리는 그녀의 몸통을 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서 해방되었다. 같은순간에 사샤가 토하는 신음소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갖혀 있던 비명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는 밤기차에서의 단정한 첫 키스,국경에서의 절박한 포옹을 떠올리며 손바닥으로 그의 등과 허리를 골고루 어루만졌다. 그의 허리가 그녀의 손을 얹은 채로 서서히파도를 타기 시작하였다. 울렁이는 파도를 따라 그녀 몸의 피가 절절 끓어올랐다.

몇번 가지 않아 파도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가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에서 썰물처럼 파도가 빠져나가는 것이 감지되었다.

“미안해, 미라.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는 몸을 빼서 욕실로 갔다. 혼자 남은 미라는 한순간 당황하였다. 처음에 얼핏 들었던 아쉬운 마음이 금방 사라져 버리고,사샤가 절망할까 봐 몹시 마음이 쓰였다. 끝이 어떻게 났건 그녀에게 있어서 황홀한 섹스였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팬티만 입고 침대로 돌아와 그녀 옆에 누웠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미안해.”
“아니야. 내게는 일생 최고의 굉장한 섹스였어.”
“네가 절정까지 못 갔잖아.”
“내가 너를 원한다고 그랬지 절정을 원한다고 그랬어? 아니야, 나는 무척 즐겼고 지금 대단히 만족스러워.”

그녀는 그의 배 위로 올라가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누웠다. 그가 그녀를 두 팔로 소중하게 감싸안았다. 어찌나 편안한지 미라는깜박 잠이 들었다.

그들의 살 사이에 흥건하게 배인 땀을 느끼고 미라는 눈을 떴다.

“어, 나 잤어?”
“응, 아주 잠깐. 천사처럼.”
“천사도 잠을 자나?”
“지금 보니까 그렇더라.”

둘은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줄 것을 남김없이 다 주고 난 사람들 특유의 친숙함으로 서로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호텔을나섰다.

비스듬하게 기울어가는 햇살 속에 옛도시 베로나가 빛나고 있었다. 중세시대부터 지어진 건물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폭이좁은 골목길을 그들은 걸어다녔다. 이천 년 전에 지어진 원형극장 아레나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원형으로 빙둘러진 돌계단그라디나타에 앉아서 밤에 촛불을 켜들고 오페라를 관람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사샤가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아레나보다는, 하얀 레이스커튼 사이로 화분들이 앙증맞게 놓여 있는 가정집 창문에 미라의 눈길이 더 자주 머물었다.

다리 위에서, 분홍빛으로 변해 가는 하늘에 떠 있는 베키오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저녁의 농염한 태양빛이 성벽을 비추고 꺾이어수면 위로 떨어져 번득였다. 성벽 저쪽으로 평화스러운 소도시의 견고한 집들이,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이 차려 놓은 저녁 식탁이,김이 오르는 욕조가 저절로 감지되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레스토랑을 기웃거리다가 그들은 시내구경을 나온 방송국 동료들을 만났다. 지난 번에 바티칸에서 만났던사람들이었다. 남자들은 서로 어깨를 안으며 인사했고, 미라에게는 정중하고 반갑게 손을 주었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한 동료가 길가의 구멍가게에서 복권을 샀다. 사샤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거 맞으면 주세페는 아마 부자가 될 거야.”
“행운을 빈다가 이태리 말로 뭐야, 사샤?”
“부에나 포르투나.”

미라는 주세페에게 부에나 포르투나라고 말하며 방긋 웃었다. 주세페는 만면에 웃음 지으며 그라치에, 몰테 그라치에라고 큰 소리로대답하였다.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묻는 것을 꺼리는 독일사람과는 달리, 사샤의 동료들은 미라와 사샤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자연스럽게이야기하였다. 사샤를 다시 만나서 무척 반갑겠다, 너의 전공이 건축이라면 이태리에서 공부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등 인간적인 관심을표했다.

식사가 끝난 후 동료들과 헤어진 그들은 강변으로 나갔다. 다리 위에 서서, 수면에 반사되는 도시의 영롱한 불빛을 바라보았다.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이 총총 떠 있었다. 이때 아레나에서 꿈결같이 감미로운 아리아가 밤공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녀는무너지듯 그의 가슴에 기대어 아리아를 경청하였다. 익숙한 선율이 하마 끊길 듯 그녀를 애태우며 종내 이어졌다. 모든 것이 다갖추어진 완벽한 순간이었다. 주위와 마음이 일체가 되는 이 완벽한 순간에 사샤가 그녀를 요구했다면 그녀는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치마를 걷어 올리고, 별이 떨어지는 밤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사샤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미라, 우리 계속해서 사귈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징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독일에 일자리를 알아보겠어.”

뜻하지 않은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고, 목이 메었다. 그도 말을 멈추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마워, 사샤. 내가 이태리로 공부하러 올 수도 있어. 독일이나 이태리나 내게 외국이긴 마찬가지니까.”

사샤는 그녀의 이마에 자기의 이마를 대고 물었다.
“너는 공부를 마치면 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정말로 그런지 잠깐 생각해 본 후, 그녀는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응, 그러고 싶어.”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스스로에게 설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엄마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여간해선 감정 표시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같이 살 적에 미라는 어머니를 늘 어려워했다. 여린 피부를 이태리타올로박박 밀어주는 어머니의 손힘을 어린 미라는 얌전하게 참았다. 어머니가 아낌없이 사다 주는 동화책과 참고서를 벗삼아 단칸방에서 늘혼자 지내며 그녀는 어머니가 험한 일을 해서 그녀를 공부시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고맙게 생각했다.

피아노에 소질이 없는 그녀는하얀 바탕에 빨간 페인트로 피아노라고 팻말을 써붙인 동네 피아노집에 다니는 일을 혐오했지만,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그 집에가서 연습하는 일을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다 커서 만난 모녀간에 정붙일 시간은 없었지만 고마움과 대견함이 이를 대신했다.

미라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독일로 이주한 아버지에게 미라를 보냈다. 어머니의 힘으로는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다는생각에서였다.

외국생활도 두려웠고,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어려웠지만 미라는 한번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지않았다. 그녀 형편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외국유학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고맙게 생각했고, 그 보답으로 공부를열심히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다른 도시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녀는 아버지의 집을 나왔고,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학자금융자과 아르바이트로 경제적으로도 독립하였다.

그녀는 독일에 와서야 출생의 비밀을 알았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짧은 사랑을 나눈 사이였고, 그녀를 길러준할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홀로 떠돌던 어머니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할머니가 문간방에서 그녀를 받았다는 사실은그녀도 할머니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임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사랑은 짧았지만 대단히 격렬했을 것이라고 미라는 혼자서 상상해 보았다. 어머니가 잃었다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하지못했지만, 그렇게 낳은 자식인 자신이 어머니를 고마워하고 존경할 뿐 뜨거운 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라는 죄의식을 느꼈다.함께 살면서도 어머니를 늘 어려워하고 남몰래 할머니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이 미안했고, 어머니가 가여웠다.

그녀는 배낭 여행을 떠나오기 며칠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라는 까치발을 들어 사샤의 입술을 찾았다.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라는 그에게 깊고 다정한 키스를 하였다. 입술을떼고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안은 자세로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짐짓 명랑하게 말했다.

“사샤, 우린 이제부터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겠지? 우리 약속하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사귀게 되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없이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알려주기로. 네게 새 여자친구가 생기면 둘이서 나를 방문해도 좋아.”
“좋아, 미라. 너도 새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사람이랑 이태리로 놀러 와. 그러나 우선은 내가 너를 만나러 독일로 갈 거야.그때까진 기다려 줘.”

뜨거운 것이 목을 막아서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하였다.
“나 너를 기다릴 거야. 아주 오랜 시간이라도.”

아레나에서 아리아가 가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이 미라에겐 결혼식의 축가처럼 들렸다. 평생을 약속하는 결혼식은 아니었으나,하루살이식 교제를 청산하고 짧은 앞날이나마 앞날을 약속하는 영혼의 결혼식. 미라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더듬어만지작거렸다.

영혼의 결혼식을 마친 사람들답게 충만한 기운이 넘쳐서,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이별의 그림자에 점점 더 짙게 드리워져서 그들은말없이 걸었다. 문득, 그녀가 영혼의 결혼식이라고 믿고 있는 이 예식이 사실은 이별식을 달리 포장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생각이 들었다. 이별을 견디기 위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라는 그녀의 옆에서 바위처럼 침묵하고 있는 사샤도 같은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궁금했지만 쳐다보지 못했다.

산산한 밤공기에 노출되었던 그녀의 피부에서밤의 냄새가 났다.

그들이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먼저 취침 준비를 마친 그는 이불을 덮고 반듯하게누워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그녀가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았다. 미라는 옆자리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잘자라고 인사하였다.

“부에나 노타!”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그녀가 몸을 돌려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그는 그녀를 감은 팔에 서서히 힘을 주어 그녀를자신에게 밀착시키며 입술을 열고 기다렸다. 미라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그에게로 침투하였다. 그는 그녀를 억세게 감은팔에서 힘을 빼지 않은 채로 그녀의 공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공격자는 미라 자신이지만 행위의 주체는 오로지 그의 단단한팔이라는 아이러니를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혀와 혀가 나긋하게 소통하며 정기를 주고 받았다. 그의 몸 속에서 발전된 전력이 혓바늘을 통해 그녀의 몸으로 들어와 배꼽을 지나발끝까지 찌르르 흘렀다. 정신이 아스라히 혼미해지며 그녀의 몸은 잃어버린 반쪽을 맞아들일 채비를 저절로 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알았는지 그녀를 힘차게 감고 있던 팔이 스르르 힘을 빼며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녀는 그가 준비완료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그를타고 올라 앉았다. 그녀의 몸 속에서 서로의 비명소리가 은밀하게 교환되었다.

그녀가 움직이려다 말고 정지하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그에게서 내려와, 얌전히 누워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가 말없이 피임준비를 마칠 때까지.

눈꺼풀 뒤의 어둠 속에서 한껏 예민해진 그녀의 촉각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벅지를 스치는 것이 감지되었다. 뒤이어무언가 뜨겁고도 촉촉한 것이 그녀를 집요하게 자극하여 그녀를 단숨에 흥분상태로 몰고 갔다. 정신을 잃을 지경에 다다랐을 때,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올라탔다. 뿌듯한 충족감이 그녀의 몸을 가득 채웠다. 욕망이 인도하는 대로 그녀는 파도를 타기시작하였다.

파도가 단 몇 번도 일렁이기 전에 그가 그녀 밑에서 폭발하였다. 그의 억눌린 신음소리에 그녀는 얼핏 그를 내려다 보았다.그녀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얼굴이 천상의 희열과 고통을 한꺼번에 견디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사샤는 지금 황홀경을거니는구나, 나와 한 몸인 사샤가. 이러한 연상은 순간적인 연쇄반응을 일으켜 그녀의 몸 가장 깊은 곳, 그의 몸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그 곳에서 또 다른 폭발을 야기하였다. 미라는 전신으로 뜨겁게 퍼지는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가늘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욕실에서 돌아오며 그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미라…너도 가졌던 거… 맞아? “
“응, 네가 내 안에서 절정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어.”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미라. “
“사샤.”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자 마약같이 잠이 밀려왔다. 그의 숨소리가 대번에 고르게 되는 것을 들으며 미라도 곧 깊은 잠에빠져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함께 보내는 첫 밤이자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채로. 그러나 상대방이 그사실을 그날 밤에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서로를 향하는 눈길이 간절했으므로.

그녀의 몸을 꼭 안고 있는 남의 살을 느끼고 부시시 눈을 떠 보니, 그녀의 시야 가득히 그의 얼굴이 떠 있었다. 그는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본 조르노! 잘 잤어, 미라?”
“본 조르노!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그는 대답 대신에 이불 밑에서 그녀의 알몸을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몸 전체를 손바닥에 기억시켜려는 듯 천천히 천천히더듬어 나갔다. 그의 애틋한 눈빛과 그의 간절한 손길에서 미라는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오늘 아침에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이라는 것을. 오늘 그들에게 닥쳐올 이별에 대비하여.

그의 손길에 멍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데 뭉게구름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자 미라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오늘 하루는 절대로 무기력하게 보내서는 안 되는 날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쳤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앉아서 그의 팔을당겨서 일으켜 앉혔다. 마주앉은 그의 눈에 살그머니 손을 대면서 그녀가 말했다.

“우리 기억하자.”

그는 영문을 모르는 채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귓불을, 목덜미를, 어깨를, 가슴을, 무릎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만졌다.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겠다는 집념으로 그녀는 그의 몸을 샅샅이 자신의 손과 눈을 통해 뇌리에 저장하고자애썼다.

정성스러운 그녀의 예식에 그는 경건한 태도로 동참하였다. 그녀의 예식이 끝나자 그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 속에 담았다.껍질이 유난히 얇은 달걀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그의 손이 닿았던자리마다 피부 밑에 그의 손바닥의 감촉을 각인시켰다.

“미라, 이제 너의 전부를 석 달 동안은 기억할 수 있겠어.”
“오오, 겨우 석 달만? 나는 너를 평생 기억하려고 하는데?”
“나는 너를 석 달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어.”
그가 씩 웃으며 그녀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미라, 나는 석 달이 지나기 전에 너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겠어. 싫어?”
그들은 장난치는 강아지들처럼 갸르릉거리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상황 판단을 잘못한 그의 심볼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동시에 눈치채고 깔깔 웃으며 서둘러 침대를 탈출하였다.서로 옷을 찾아서 건네주고 단추를 채워 주었다.

그들은 호텔 근처에 있는, 작은 광장에 면한 카페로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출근하는 주민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지나다녔다.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코르네토는 버터 냄새를 풍기며 식욕을 자극하였다. 늘 그랬듯이 그는 작은 잔에 든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였고그녀는 우유 거품이 풍성한 카푸치노를 주문하였다.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담소하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사샤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미라는 입술에 묻은 카푸치노의 우유거품을 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흘끗보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에게 불 붙인 담배를 건네 주려던 손을 내렸다. 양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잡고 윗 몸을탁자 위로 기울여, 마주앉은 그녀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는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의 의도를 알아채는 미라의 얼굴이 그를마중 나왔다. 대번에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도 망설이지 않고 격렬하게 화답하였다.

번개같이 짧고 강열한키스를 끝내고 그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그녀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키스의 감촉이 아쉽게 남아 있는 입술로 첫모금을 빨며 그녀가 개구장이처럼 씩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는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다.

사샤의 일터인 축구장으로 갔다. 사샤는 미라를 촬영석으로 데리고 갔다. 혈기가 왕성한 이태리인의 축구경기는 처음부터 끝까지열광의 도가니였지만 미라의 신경은 온통 사샤에게로만 쏠렸다.

그가 일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입을 꾹 다물고 렌즈를 쏘아보며,천둥이 쳐도 변하지 않을 것같이 표정을 고정시킨 그의 얼굴은 엄청난 집중력을 담아, 마치 도자기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카메라가그의 몸의 일부인 듯 보였고, 한치의 오차도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완벽하게 계획된 안무같았다. 파란 하늘을배경으로 그의 얼굴은 도자기같이 빛났고, 그의 금발은 바람에 나부꼈다.

미라는 그가 집중해서 일하는 모습이 어제 밤 그가 옷을 벗었던 모습보다 더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을 눈치채기라도했는지 그가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녀는 숨이 멎을 것처럼 감격하였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에게 넋을 놓고 반해있는 찰라, 그 주인공이 화면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 듯이 자랑스러웠다.

경기가 끝났다. 그가 카메라를 끄고 그녀에게로 와서 환하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뒷정리가 끝난다며 가더니 동료들에게 떠밀려서금방 돌아왔다. 그녀가 그날 떠나는 것을 아는 동료들이 그에게 뒷정리는 그만 두고 빨리 가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그들에게 가서 한 사람씩 악수를 하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주세페가 악수를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부에나 포르투나! 그리고는사샤에게로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사샤의 어깨를 억세게 잡고 흔들었다. 부에나 포르투나!

사샤와 미라는 번잡한 경기장을 뒷문을 통해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손을 잡고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샤, 너 일하는 모습이 참 멋졌어.”
“그래? 고마워.”
“그리고 참 섹시했어.”
“하하하, 일하는 모습이 섹시하다고? 나 지골로 아니야, 카메라맨이야.”
“아냐, 사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은 항상 섹시하게 보여. 어떤 일을 하던.”
“그런 줄도 모르고 어제 밤에 괜히 애썼네. 내가 어제 너한테 섹시하게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어어, 사샤. 너는 어제 밤에도 무척 섹시했어. 어젯밤에도 열심히…했…”

그녀가 얼굴이 발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마주서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다시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미라는 배도 고프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샤는 그녀가 밤차를 타고 먼 길을 가려면 저녁식사를 해야 한다고우겼다. 사샤는 그녀를 위해서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시키고 싶어했고, 미라는 식욕이 없었지만 그가 권하는 대로 많이 먹었다.그가 서둘러 계산을 하였다. 이번에는 종업원에게 출장 계산서 건으로 부탁을 하지도 않은 채 그냥 지불하였다. 그녀가 고맙다는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알았다는 표시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역으로 가서, 보관함에서 그녀의 배낭을 꺼냈다. 그가 배낭을 둘러메고 앞장섰다. 그들은 역사에 들어와서부터는 서로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회피하고 있었다. 그가 앞장서 걷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며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눈이마주쳤다. 마음이 돌아선 사람에게 사랑을 구걸하듯이 간절한 눈빛이 서로 교차되었다. 둘 다 화석처럼 굳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미라가 흑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싸안았다. 미라는 이제는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끄덕였다. 손을 잡고 플랫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둘 다 극도로 조심하면서.

기차가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 사샤가 따라 올라와서 배낭을 창가의 빈 자리에 얹어 놓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므로 그들은 다시밖으로 나왔다.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그냥 얼싸안고 서 있었다. 미라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앞으로는 이몸이 그리울 때 어떻게 하면 되나 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담배 피울래?”
“아니, 키스해 줘, 사샤.”

그들은 까칠하게 메마른 입술로 키스를 오래오래 나눴다. 그것은 이 순간 한몸임을 서로 확인하는 마지막 예식이었다. 상대방의속살을 나의 속살에 기억해 두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에게 입술을 맡긴 채로 미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미라가 계속 흐느끼는데도그는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흘렀다.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그가 그녀를 놓아 주었다.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 그녀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사랑해, 사샤.”

거의 동시에 그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사랑해, 미라.”

기차의 문이 이내 닫혔다. 미라는 얼른 복도로 가서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따라와 서 있다가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그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기차가 곧 떠나지 않는 바람에 그녀는 한참동안 그의 손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갑자기그가 손을 빼냈다. 어, 왜 그래, 사샤? 나는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녀는 그가 야속해서 큰 소리로 울음을터뜨렸다. 아,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빼앗긴 두 손을 그대로 든 채로 사샤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외쳤다. 그녀는 소리내어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열려 있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센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 그녀는 울음을 그친 후에도, 차가운 바람을온 얼굴로 맞으며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딸꾹질이 멎기를 기다려 객실로 들어갔다.

육인용 칸이 그새 다 차 있었다. 미라가 미닫이문을 열려고 손잡이에 손을 대자, 문 옆에 앉은 사람이 얼른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고맙다고 하자 그는 당황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외면하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모두들 급하게 다리를 오무려 주었다. 의자 위에 얹어 두었던 배낭을 그녀가 선반에 올리려고 하자, 옆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올려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이 사람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금 있다가 승무원이 문을 열었다. 미라가 인터레일 패스를 건네주었고 그는 그녀의 표에 꾹 구멍을 내고 돌려주면서 유달리정중하게 인사하였다. 그라치에, 부에나 노타!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얼른 몸을 돌려 나갔다. 다른 사람들의 표는검사하지 않은 채로. 미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상당히 오랜 시간을 창가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사샤와그녀의 이별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진동이 머리 속에서 심하게 증폭되었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고맙게도금새 잠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잠에서 깨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갑자기 욱하고 올라왔다. 그녀는 후닥닥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변기에 머리를 박고, 그날 저녁에 먹었던 음식을 고스란히 다 토해 내었다. 속이 좀 편안해졌다.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왔다.

이튿날 아침에 프랑스의 니스에 닿았다. 날씨가 꾸무룩했다. 미라는 자신의 몸이 단단히 고장났다는 것을 알았다. 두통과 복통그리고 편도염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겠는데, 한쪽 발목이 심하게 붓고 아파서 거동이 불편했다.

어디 한적한 곳에 앉아서 몸과마음을 쉬고 싶어서 곧장 해변으로 나갔다. 미라는 무거운 배낭을 매고 절뚝거리며 걷다가,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있는 곳을발견하였다.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파도가 철썩이는 시퍼런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니스의 바다, 나폴리의 바다, 그와함께 한 바다. 어제 이후로 눈물보가 터졌는지 툭하면 눈물이 돌았지만 혼자가 된 미라는 이제는 울지 않았다.

미라는 니스에서 모나코, 칸느와 마르세이유를 거치며 남불의 해안을 돌았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강행군을 하였다. 자유와 고독을 맛보겠다고 의기충천하게 떠나온 이튿날부터 남자만사귀다가, 그와 헤어진 후유증을 앓으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니,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앞으로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삶이 가능하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믿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어느 날엔 바닷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배낭을 등에 진 채로 넘어지기도 하였고, 어느 날엔 일어나 걸을 수 없어서 그냥 바닷가 바위위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였다. 잘 정돈된 그녀의 방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예쁘게 화장하고 가벼운옷차림을 한 여인들을 보면 미라는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꿈같이 느껴졌다.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미라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배낭을 질질 끌며 역으로 갔다. 기차 시간표를 보면서 가장 멀리 있는 목적지를찾았다. 기차 안에 갖혀서 억지로라도 쉬기 위해서였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가 몇 시간 후에 있었다.

근 서른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드디어 리스본에 도착했다. 미라는 남은 일 주일을 바닷가의 언덕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에서 보내기로하였다. 이제 더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것, 다른 목적지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줄은 미처 몰랐다.

포르투갈은 모든 것이 느리고 고요하게 움직이는 나라였다. 습관대로 아침 일곱시에 기상한 미라는 아침 식사가 아홉 시 이후에나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다. 그렇게 늦게 일어나서 관광은 언제들 하나? 그리고 일은? 날이 훤하게 밝았는데도 유스호스텔 전체가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유령의 집처럼 조용했다.

모든 사람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모든 것이 천천히 돌아가는 나라. 아무도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는 나라. 길가는 행인의 표정이 온화한 나라. 이곳이야말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헤어짐의 아픔을치료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스호스텔 근처의 바닷가에서 보냈다. 들꽃이 피어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바다로 가는 샛길이나왔다. 들꽃을 볼 때마다 미라는 사샤를 위하여 꽃다발을 만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를 간절히부르면, 그녀를 위해 빵을 썰고 있는 사샤를 만날 것 같은 망상에 몸을 떨기도 하였다. 그의 식탁에 매일 아침 작은 꽃다발을바치고 싶다는 소원을 담은 시를 써서, 바닷가 모래톱에 묻었다. 이튿날 그 자리에 가 보면, 파도가 들락거리며 간밤에 자기가그녀의 시를 가져가서 사샤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했다.

날씨가 오락가락하던 어느 날, 미라는 비키니 차림으로 모래밭에 누워 있었다. 수영하기엔 아직 이른 철이었지만 바닷가에는 일광욕을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꼭 사샤의 온기같이 느껴졌다.

해와 구름이 숨바꼭질을 하고, 바닷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으나 미라는 눈을 꼭 감고솜털이 바람에 거슬리며 일제히 일어나는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돋으며 온몸에 한꺼번에 소름이돋았다. 미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비가 더욱 세게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흠뻑 젖어 모래밭의 일부가 될때까지 사샤의 손바닥으로 다독여지고 싶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그녀가 눈을 떠 보니 늙수르게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다. 미라는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오만하면서도 비굴한 표정은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용건을 짐작하게 하였다.

그녀는 후딱 일어나 앉으며단호한 어조로 “노!” 라고 대답했다. 그는 혹시 미라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런가 싶었는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그녀의앞가슴을 슬쩍 만졌다.

일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의 의도를 처음부터 알아채고 경계를 하고 있던 미라는 옆에 벗어두었던 가죽 샌들을 집어 들고 그의 맨 종아리를 마구 패면서 바락바락 신경질을 부렸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그는 겁먹은강아지처럼 담박 꼬리를 내렸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이며, 손으로 비는 시늉까지 하면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제서야 분노에이어 모멸감이 밀려왔다.

*

유스호스텔의 장기투숙객 중에는 일종의 도피와 은둔의 기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경쟁을 포기한 사람들 특유의더듬이로, 미라가 이베리아 반도의 끄트머리까지 찾아 온 이유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도 바닷가로 나가곤하는 미라가 관광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동병상련의 정으로 미라에게 접근하였고, 미라도 이들에게마음을 열었다.

밤이면 그들은 바닷가에 나가 모닥불을 피우고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 병에 달린 동그란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서, 어깨 위로맵시있게 쳐들고 꿀꺽꿀꺽 마시고는 옆 사람에게 돌렸다. 몇 리터짜리 커다란 유리병에 들은 붉은 포도주는 색깔만큼이나 맛이강열했다. 젊음의 아픔에 타는 붉은 얼굴들이, 활활 타는 모닥불에 비추어 더욱 붉게 보였다. 미라의 눈에는 그 얼굴들이 모두사샤의 얼굴로 보였다.

일 주일이 그렇게 지나고 이제 미라가 독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되었다. 한 사람씩 미라를 안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이란 청년이그녀에게 말했다. 그 이태리 녀석이 독일로 너를 만나러 오지 않으면 내게 연락해라. 내가 가서 그 녀석을 패 줄게. 시드니청년이 받았다. 아니야, 내게 연락해라. 내가 그 대신 너에게 갈게. 미라는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들이농담일지언정 이렇게 일이 안 될 경우를 얘기하는 것에 비해서, 여자들은 사샤와 잘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프랑스에서 기차를 갈아 타고 독일로 돌아왔다. 미라는 긴 시간을 기차 안에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노상 꾸벅꾸벅 졸면서보냈다. 꿈을 꾸면 꼭 사샤가 보였다. 리스본의 모닥불 앞에 사샤가 앉아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사샤가 파리의 아가씨를정열적으로 애무하는 모습이 불빛에 어찌나 선연하게 비치던지 미라는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인터레일 패스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날 새벽에 미라는 칼스루헤 역에 도착하였다. 낯익은 경치가 차창으로 스쳐가는 상황이 미라에게는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반복되었던 그녀의 일상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기차에서 내려서 미라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역 안에 있는 카페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우유거품 대신에 생크림을 얹어주는 독일식 카푸치노를 주문하였다. 더운 물이 항상 나오고, 돈을 안 내고도 커피를 항상 마실 수 있는 집이 몇 분 거리 안에있었지만 미라는 마지막 아침을 여행자처럼 장식하고 싶었다. 그녀는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으며, 사샤가 그녀의 입술에 대주었던 마지막 담배를 생각했다.

미라는 일부러 전차를 타지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길에는 수없이 많은 행인들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바지런히 직장으로 향하는 걸음걸이의 빠른 속도에 미라는 질려 버렸다. 그녀는 자신을 추월하는 독일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바라보았다. 나도 저랬었지,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집 앞에 있는 빵집에서 주먹만한 아침빵을 세 사람이 먹을 만큼 샀다. 낯익은 빵 냄새, 고향의 냄새.

함께 사는 남학생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집안이 조용했다. 한 달 간 비워 놓았던 그녀의 방에선 낯선 먼지 냄새가 났다. 방에배낭만 들여놓고 다시 나와서 부엌으로 갔다. 빵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 놓다가, 누군가 물컵에 꽂아 놓은 하얀 프리지아를발견하였다. 꽃향기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컵에 기대어 놓은, 하얀 종이를 접어서 만든 카드엔 딱 한 단어가 쓰여져 있었다.

웰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