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회 이후로 미라는 파올로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사실 그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시종일관 단정했던 파올로의 태도는 그의 감정을 엿보일 만한 어떠한 허점도 남기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들은 연락처는커녕 서로 성씨도 모르는터였다.

그녀는 신문의 광고난을 습독하였다. “사람을 찾습니다.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에서 빨간 바지를 입었던 갈색 머리의…“로 시작하는 광고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지만, 파올로가 그녀를 찾는 광고는 없었다. 그날 공연하였던 그룹의 홈페이지의 방명록에도파올로는 그녀를 위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며칠 후에 한국인의 가야금 공연이 같은 문화센터에서 있었건만 파올로는 나타나지않았다. 파올로도 지금 그녀만큼 애태우며 그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시도하고 있으리라는 점에서 그녀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오늘은 연락이 올까 기대하며 이유 없는 설레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살사 공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았다. 파올로가 가끔 간다고 한 공연장이었기에, 초여름비가 며칠째 추적추적 오는 날 그녀는 일찌감치 서둘러 집안일을 끝내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부쩍 밤외출이 잦아진 그녀를 남편은 흘끗 한번 돌아보았을 뿐,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남편의 무관심이 이제는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모니터와 한 쌍으로, 화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며 미라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공연장에는 뜻밖에도 관람객용 좌석이 없이 무대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관람객들은 무대 주위에 서서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관람을 즐기는, 파티 분위기의 공연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함께 즐기러 온 사람들 틈에서 멀뚱하니 혼자 서 있기가 좀 민망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금발의 여자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자기도 혼자 왔는데, 분위기가 이러니 옆에서 함께 관람해도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둘은 금방 친해져서 마치 함께 온 친구들처럼 잡담하며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미라는음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그녀는 주위를 살피기에 바빴다.

공연이 끝나고 두 여자는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 대기업의 사무직에 근무한다는 금발의 여자에게 미라가 문득 물었다.
“사람을 찾고 싶은데, 회사 이름하고 사람 이름만 가지고도 찾는 방법이 있을까요? 성씨는 모르고.”
“가능해요. 보통 회사의 전화국 컴퓨터에는 이름만 입력해도 전화번호가 나오거든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자고 있는 식구들을 깨울세라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전화번호부책을 꺼내왔다. 유럽특허청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며칠 후, 남편과 아이들이 출근, 등교한 후 미라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서 전화교환원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미라는 이름을 대고, 공손히 용건을 말했다. 파올로를 찾고 못 찾고는 이제 전화교환원의 선심과 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떨렸다.

“죄송하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곳에 근무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성은 모르고 이름만 알아요. 방법이 있을까요?”
톡톡톡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무적이지만 성실하게 두 명의 성씨와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지체하다가는 또 망설이게 될 것이 두려워서 미라는 심호흡을 한 뒤 그 자리에서 첫 번째 전화번호를 눌렀다. 단 한번의 신호음이가자 수화기가 들려지고, 자기의 성을 대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는 정중하게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미라 킴입니다. 저는 지난 달에 가스타익 문화센터의 클레츠머 연주회에서 만났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라는 이 사람이 모른다고 할 경우에 쓰려고 생각해 놓았던 대답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아, 저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황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표현이었다. 미라는 안도하였다. 그를 찾아서 기쁜 마음보다, 그가 그녀를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안심이 되었다. 또 한번의 침묵이 흘렀다.
“제가 전해 드릴 물건이 있는데요. 유럽특허청 프론트에 맡겨 놓을 테니 찾아가시겠어요?”
“몇 시에 오시겠습니까? 프론트에서 연락 주시면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미라는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틀자 따스한 물이 온몸을 감싸내려갔다. 긴장이 풀리며배꼽에서부터 아스라히 전기가 올랐다. 파올로의 연락을 기다리던 지난 며칠 동안 그녀를 지배하였던 그리움이 수증기를 타고 뭉게뭉게피어올랐다.

실로 오랫만에 거울로 전신을 비춰 보며 로션을 듬뿍 짜서 온몸 구석구석에 발랐다. 몇년 동안 손길을 받지 못해 까끌하던 피부가촉촉히 젖어 들면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평소에 입을 일이 없어서 설합 뒤편에 박아 두었던 결이 고운 실크내의와, 처녀 때 즐겨입었던 하얀 치마를 꺼내 입으면서도 내내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낯선 여인이 아름다웠다.

은은한 색깔의 한지로 포장해 두었던 클레츠머 시디를 가방에 챙겨 넣고, 자전거로 집을 나섰다. 방금 감고 손질한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어 헝클어질까봐 조심조심 달렸다.

유럽특허청의 프론트는 밝고 널찍한 공간에 대형화초를 세워 놓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미라는 짐짓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정한제복 때문에 위압감을 주는 프론트 직원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그녀의 팔랑거리는 하얀 치마가 눈에 띄었는지 직원은 미리부터눈으로 그녀를 쫓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자연스러운 언성으로, 아무개씨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며 신분증을 꺼냈다. 직원은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더니, 약속한 사람이 금방 내려온다고 했다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친절하게 덧붙였다.

제복의 직원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파올로의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서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파란 와이셔쓰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남자가 에스칼레이터에서 내려서 빠른 걸음으로 이편을 향해걸어왔다. 회색 머리. 그 사이 그의 생김새를 잊어 버렸는지 혹은 다른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그녀에게는 생소한 사람이었다.그러나 반가워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그가 파올로라는 것을 알았다.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하이!”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노라고 그는 영어로 말했다. 그가 직장에서 여러 나라 말을 동시에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미라는 빙그레 웃었다. 그제서야 그는 황급하게 독일어로 인사하며 그녀를 프론트 옆에 붙은직원용 카페로 인도하였다. 간간이 아는 사람에게 목례하며 파올로는 그녀에게 매우 정중한 몸짓으로 문을 열어 주고, 자리로인도하고, 의자를 빼 주었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마주앉았다. 잠시 바라보고 있으려니, 비로소 그날 밤의 그의 눈매가 되살아났다. 작렬하는 천둥번개와광란의 폭풍우가 없어도 그의 분위기는 첫 번째의 만남과 변함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잊었으면서도 그녀가 그간 그리워한 것은 바로그 온화한 표정과 조용한 분위기였다. 수없이 상상하고 고대하던 순간을 맞아 그녀는 침묵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가방에서 클레츠머시디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이것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그날 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완벽하게 마무리한다는 뜻에서요.”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와 시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 보고, 다시 한번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는 와이셔쓰 윗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사무실과 집의 전화번호가 얌전한필체로 적혀져 있었다. 미라는 자신의 전화를 받고 나서 그 쪽지를 준비해 둔 그의 진심을 알 것 같아서 감격하였다.

미라는 자신이 결혼을 해서 십대의 아이가 둘이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날 밤에는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하지 않았었다는 말을 덧붙이자 파올로는 웃는 얼굴을 끄덕여 줌으로써 이해한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는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사실보다도 그녀의 나이가 청소년 아이들을 가질 만큼 많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감히 나이를 묻지는 않았다. 그는 현재 부인과별거상태라는 것, 그러나 부인과 완전히 헤어지지 않은 모호한 관계라는 이야기를 했으며, 미라 역시 어떤 모호한 관계인지 묻지않았다.

그녀가 자신은 지금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자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결혼반지를 안 끼고 계셨군요. 제가 당신이 미혼일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어려 보이신 탓도 있지만, 당신 손가락에 반지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언제 그런 걸 눈여겨 보았나 싶어서 미라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무안했는지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 세상에서 부부관계만큼 어려운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녀가 좀 머뭇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모순적이라서 그런 거겠지요. 갚지 못할 것이 뻔한 부도수표를 남발하며, 희생을 선불로 요구하는 제도 아닌가요?”
그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상체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눈에 웃음기가 살짝 깃들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세워서, 끝이 맞닿은 지붕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통나무 두 개가 든든하게 기대기 위해선 서로 맞닿는 부분을 오목볼록으로 깎아내야 해요. 그래야 단단하게 맞물려 힘을 받을 수있지요. 자신의 일부를 깎아내는 희생은 평생을 내다보고 하는 투자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평생 보장되나요?”

파올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어느 한 편이 마음이 변해서 몸을 빼면 기대어 있던 상대는 그대로 거꾸러지지겠군요. 게다가 깎아냈던 곳에 상처가 남는다는 말씀이지요?”

미라가 마주 웃어 보이자 그가 부드럽게 반문했다.
“결혼한 두 사람이 꼭 기대어 서야 합니까? 서로 독립해서 각자 따로 서 있는 관계도 있지 않습니까?”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공동의 사업이 있을 경우에는 힘을 합치기 위해서 서로 기대야하겠죠. 그리고 공동의 사업이 없이 각자 따로서 있을 거면 요즘 세상에 뭣하러 결혼할까요? 자유스럽게 동거하다가 가볍게 헤어지는 방법도 있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 그는 유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 뜸을 들인 후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마음이 변해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빼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예, 그래요.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역시 온화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그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이 말했다.
“저는 아이들이 있는 평범한 가정의 일상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습니다.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과 맞바꿀 용의가 있습니다.”
미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지만, 결론이 없는 얘기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화학자 출신인 그는 유럽특허청에서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었다. 근래에 메스콤을 대대로 탄 사건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그 당시에 그가 견뎌야 했던 정치적인 압력을 언급할 때에 그의 온화한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가셨지만 그의 말투는 여전히 침착했다.

삼십분 가량 지난 후, 그가 근무 중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미라가 더 이상 그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겠다고말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오 분만 더 앉아 있자고 하였다. 그는 그녀를 다시 보기를 원한다며 그녀의 눈을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일락말락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서로 연락하기로 막연하게 약속하고, 그들은일어섰다.

안 보는 척하면서 그들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는 프론트 직원 앞에서 그들은 약간 긴 악수를 나눴고, 그는 그녀를 문까지 정중하게 배웅하였다. 그녀가 자전거 위에서 흘끗 뒤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미 들어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