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학기의 개강을 한 달 남겨놓은 삼월의 어느 날, 미라는 배낭을 매고 칼스루헤 역으로 나갔다. 답답하게 내려 앉은 하늘에선조만간 비라도 흩뿌릴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노란색 게시판을 여유있게 들여다 보았다.우선 목적지부터 죽 읽어 보았다. 베르린, 파리, 스톡홀름, 빈, 로마…. 모두 생소하면서도 친근한 이름들이었다.

한기를 실은 바람이 휙 불어 오자, 솜털이 가슬가슬 일어난 팔을 비비며 미라는 남쪽으로 가기로 순간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한시간 후에 이태리의 나폴리로 가는 기차가 눈에 띄었다. 응, 잘 맞아 떨어지는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담배를 꺼냈다.

여행이 주는 자유가, 지쳐 있는 스물여섯의 삶을 다시 구원해 줄 것으로 그녀는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늘 추구해 왔던,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나가는 삶이 어느샌가 그녀의 상전이 되어 그녀를 주도하고 있었고, 자신이 허덕이며 그 삶의 패턴에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고단함을 느꼈다. 주변의 기대에 부합하고,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상이 어째서 자신을피곤하게 만드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그 소식이 고단함을 몰고 왔는지, 아니면 그 전부터 이미 느끼고있었던 고단함인지 차분히 분석해 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작정일상에서의 탈피를 결심했다.

기차의 규칙적인 소리와 흔들림이 미라의 마음을 점점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선반 위로 눈을 주어, 단단하게 싼 배낭을쳐다보았다. 앞으로 한 달 간 그녀의 집이자 모든 것인 저 배낭만큼이나 가볍고 자유로운 삶을 만나기를 그녀는 고대하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구릉은 흐드러지는 과실수의 꽃으로 뒤덮혀 있었고, 그 위로 회색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다행이었다. 옅은 색조의 꽃무리가 비취같이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장관을 보았더라면, 자신은 아마도 지금쯤 울어 버렸을 거라고생각하였다. 언젠가 그런 광경을 보면서 달리는 차창에 머리를 대고 흐느끼던 기억이 났다. 찬란한 슬픔의 봄.

그녀는 가볍게 흔들리는 자주색 비닐쿠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몇몇의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길거나 짧은기간 동안, 격하거나 편안한 감정을 나눴던 그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는사실이 얼핏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차창 밖으로 어른거리는, 취할 듯한 꽃무리에 대한 느낌을 꼭 전해 주어야 할그 누구 하나가 없다는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기차가 스위스 국경을 통과할 무렵엔 바깥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점점 옅어지는 빛 속에 알프스의 계곡이 어렴풋이 펼쳐졌다.푸른 언덕 위로 소떼들이 점점이 서 있고, 완만한 구릉의 곡선을 따라 저 멀리 농가들이 한 줄로 다닥다닥 서캐같이 붙어 있었다.마치 인형의 집처럼 앙증맞은, 뾰족한 지붕을 한 가옥들의 바늘귀만한 창문에서 불빛이 점점이 스며나왔다. 이유 모를 그리움이오르르 솟았다.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 안에선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식탁에 옹기종이 모여 앉은 스위스 농가의 가족을 떠올리며 미라는 과자를 천천히 씹고 물을 병째로 마시는 것으로 저녁식사를대신했다.

기차가 이태리의 국경에 닿았을 때는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 있었다. 미라는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로갔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서서 양치질을 하고, 감질나게 졸졸 흐르는 물을 받아 대강 입가심을 하였다.

육인용 칸에는 이제 미라 혼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셋씩 마주보고 앉게 되어있는 좌석들을 전부 앞으로 당겨 붙여서 침대처럼만들어 놓고 슬리핑백을 풀었다. 이 기차는 밤 동안에는 정거하지 않으므로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통로에서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미닫이 유리문에 커튼을 꼼꼼히 치고 창문에도 막을 내렸다. 옆 칸에서 우당탕탕 좌석을 밀어서 붙이는 소리를들으며 불을 끄고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녀는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어둠 속의 규칙적인 소음과 진동을 나른하게 즐겼다. 문득 어머니의 자궁 속이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닥쳐 올 세상을 막연하고 무심하게 기다리던 태아시절을 추억하는 기분으로 그녀는 서서히 잠에빠져들었다.

옆칸에서 좌석을 미느라고 퉁탕거리는 소리에 미라는 잠에서 깼다. 차창을 가린 막의 틈새로 빼죽이 들여다보는 햇살을 쳐다보며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손에 집게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진작에 잠에서 깬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쾌활한 표정으로 인사하며,그녀가 건네준 인터레일 패스를 집게로 꾹 눌러 찍었다.

창의 막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 지나간 풍경에 비해서 좀 더 물이 오른 산야에는 물안개가성글게 앉았고, 그 사이로 황토빛 벽체에 납작한 지붕을 얹은 지중해식 농가들이 얌전하게 엎드려 있었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어제 기차를 탈 때에는 금방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고, 어제 밤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있었다. 그러나 미지에 대한 불안감이 새 아침을 맞으면서 호기심으로 바뀌어버렸는지, 더 이상 앉아 있기가 좀이 쑤셨다. 기차가 나폴리에 도착하는 저녁시간이 마치 영원같이 멀게 느껴졌다.

이때 지지지직하는 잡음이 나더니, 곧 로마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미라는 벌떡 일어나 배낭을 끌어내리고, 운동화의 끈을단단히 묶었다. 아까 피렌체를 지나칠 적에, 그녀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건물들이 멀리서 손짓하는 것을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강열한 결단력이 불끈 솟았다.

로마의 역은 바글거리는 인파의 열기로 훅훅 더운 기운을 뿜었다. 미라는 역전의 관광안내소를 찾아가서 줄을 서서 한참 기다린끝에, 간단한 관광지도를 얻고 유스호스텔로 가는 길을 물을 수 있었다.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오스텔로라고 이태리어로 또박또박반복하고도 미심쩍어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지도를 보여 주며 손짓발짓을 한 덕분에 제대로 찾아 내릴 수 있었다. 옆에 앉은사람과 큰 소리로 대화하던 운전사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미라를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유스호스텔에 들어서며 미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자리를 찾는 배낭족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만약에 자리가 없을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줄서서 기다리며 불안했던 것과는 달리 쉽게 침대를 배정받았다. 이층 침대 여섯 개가 놓인 널찍한 방에서, 지정된 침대를 찾아이불보를 씌워 놓고 밖으로 나왔다. 잠자리도 해결되었겠다 이제는 홀가분하게 로마를 즐기리라. 콧노래를 부르며 시내 쪽을 향하여걸었다.

냄새에 이끌려 길가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도자기 커피잔에 생크림을 얹어서 내오는 독일식과는 달리, 우유거품으로 머리를 얹은유리잔에 비추이는 카푸치노가 이색스러웠다. 향기가 입안 가득 그윽하였다. 그녀는 행복한 마음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번여행은 시작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군.

그녀가 입술에 묻은 카푸치노의 우유거품을 빨며 막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탁자에 성큼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심코 올려다본미라의 눈은, 몸매가 호리호리한 청년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가 놀랄 겨를도 없이 그는 정중하게 몸을 숙여 탁자를가리키며 빠른 말투로 뭐라고 물었고, 미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날랜 동작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미라는주머니 속의 지갑을 슬며시 만져 보았다.

그는 액센트가 있지만 유창한 영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객이냐, 로마엔 처음이냐, 혼자 왔느냐? 서글서글한 태도에 밉지않은 인상이었지만, 기습처럼 벌어진 상황에서 미라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가 폭포수처럼 말을 쏟는 동안 그녀는 어떻게 하면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만을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종업원이 지나가는 것을 기회로 미라가 말했다.
“이젠 가 봐야 돼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좀 더 당당하지 못하고 변명조로 나오는 것에 속으로 화를 냈다. 종업원이 오자 청년는 뜻밖에도 지갑을꺼내 들었고, 미라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이태리 말로 뭐라뭐라 떠들며 호기있게 지불하였다. 미라는 아연해서 그를 바라보았다.이태리에서는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해서 미라는 그를 향해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웃어 보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그는 재빨리 따라 일어나, 정중하게 의자를 잡아 주고, 문을 열어 주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미라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 척하더니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감아왔다. 피가 머리로 확 솟구쳐 올라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태리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더니 첫날부터 나의 전재산을도둑맞는 건 아닐까 싶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갑이 들어 있는 오른쪽 주머니에 그의 손이 닿기 전에 그녀는 얼핏 몸을 틀었다.

그 틈을 타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번개같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갑작스런 키스보다도, 그것으로그녀의 주의를 유도하면서 양쪽 주머니를 더듬기 시작하는 그의 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라는 쩔쩔매며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밀쳐냈다.

문득 그의 얼굴에 비장한 표정이 스쳤다. 그는 단호한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끌어당기더니 자기의 바지 앞섶에 대고 꾹 눌렀다.쇠뭉치처럼 단단한 그의 하체에 손이 닿는 순간 미라는 비로소 상황을 알아챘다. 그가 노리는 것이 그녀의 지갑이 아니라는 사실을깨닫자, 엉뚱하게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고 뒤미처 분노가 치솟았다.

비로소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달음에 유스호스텔까지 뛰어왔다. 훌렁훌렁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이 벌레라도 붙은 듯느물느물 불쾌했다. 그녀는 뺨을 손으로 마구 문질러 대며, 앞으로 이태리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볍고 자유스럽게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고 싶었던 자신감이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마음이 위축되어서, 일찌감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고 날 때마다 잠에서 깨면서 밤을 보냈다. 미라는 팔베개를 하고 반듯하게 누워서, 희끄므레하게 밝아오는 천장을바라보았다. 복도에서 사람이 오가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꾸만 움추려드는 기분을 달래기 위하여 오늘은 어디로갈까 머릿속으로 하루의 일정을 그려 보았다.

아, 판테온! 의기소침해진 마음에 선물이라도 주듯 그녀는 판테온을 떠올렸다. 판테온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을 한꺼번에모시는 신전으로 몸을 받았으나, 인연이 바뀌자 군말없이 유일신을 섬기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유연함 덕분에 파괴되지않고 오늘날까지 고이 보존이 될 수 있었던, 행운의 유적이었다.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었다고 하는 이 원형 신전을 직접 대면하고손으로 만져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라는 두 다리를 나란히 위로 들었다가 힘차게 내리는 반동으로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빠른 동작으로 옷을 갈아 입고 층계를 리듬 있게 뛰어내려갔다.

식당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아직 잠이 덜 깬 사람들의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독일의아침빵보다는 껍질이 부드러운 흰빵에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서 먹었다. 집을 떠나 온 이후 식사를 대강 때우다가, 빵이나마 따뜻한커피와 함께 구색을 맞춰 먹으니 속이 든든하였다.

판테온에 면한 로톤다 광장은 젊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바닥에 주저앉아 분수대에 등을 기대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사람, 주머니칼로 커다란 빵을 잘라 먹으며 아침 요기를 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미라는 곧장 판테온 앞으로 걸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견고한 돌을 둥그렇게 쌓아 올려 지은, 낡았지만 균형이 잘 잡힌건물에서는 범하지 못할 위엄이 묻어났다. 얼른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짐짓 느긋하게 외양을 감상한 후, 미라는 숨을크게 쉬며 육중하게 생긴 출입문을 밀었다.

마치 아껴 두었던 맛있는 음식을 꺼내 보는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을 향해 둥그렇게 뚫려 있는 구멍이 이 건물의 유일한창문이라니, 그리로 들어오는 빛이 얼마나 장엄할까? 큰비라도 올라치면, 지름이 9m나 되는 그 구멍을 통해 흰 대리석바닥으로그냥 쏟아지는 빗줄기 또한 장관이라지? 그러나 기가 약한 보슬비는 위로 빠져나가는 공기에 밀려서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흩어지고 만다지?

이상하게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힘차게 밀고 당겨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 동안에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이없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미라는 누구에겐가 물어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걸음을옮기다 말고 문득 멈춰섰다. 그 청년의 검은 머리를 보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그를 지나쳐, 외모나 분위기로 보아 이태리 남자가아닐 것이 분명한, 금발머리에 노르웨이 무늬의 세타를 입은 남자를 점찍었다.

그녀는 금발의 청년 앞으로 걸어가, 판테온의 문이 왜안 열리는 거냐고 영어로 물었다. 돌계단에 앉아서 싱글싱글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람 구경을 하고 있던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그래요?“하며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판테온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서 두리번거리더니, 좀 높이 걸려 있는 팻말을읽기 시작하였다. 당황했던 미라의 눈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팻말이었다. 보수공사 때문에 판테온의 내부관광이 내년까지금지되었다고 그가 설명해 주었다.

오오, 노우! 실망이 너무나 커서 미라는 낯선 사람 앞이라는 것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공연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서야 미라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로마에서 판테온이 가장 보고 싶었다는 말을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는 잠시머뭇거리더니, 트레비 분수를 아직 안 보았으면 같이 가 보지 않겠느냐고 위로하듯이 물었다. 수줍어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가자연스러워서 미라는 어제의 사건 이후 마음속에 다졌던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깜박 잊어 버리고, 선선히 그러자고 대답하였다.

판테온을 돌아서 걸어가면서 그는 자기 소개를 하였다. 사샤. 미라도 자신의 이름을 대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사샤? 어느나라 이름인가? 그녀의 무심한 질문에 그는 자신이 이태리인이라고 소개하였다. 미라는 깜짝 놀라 외쳤다.
“어머, 이태리? 이태리 사람이에요?”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춰 섰다. 그의 의아해 하는 얼굴에는 보일락말락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제의 일을얘기해 주었다. 그가 분명히 이태리인이 아니리라는 믿음에서 아까 그에게 말을 걸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공연히 미안한 표정을지었다.

그들은 그날 하루를 관광으로 함께 보냈다. 사샤는 시종일관 예의바르고 단정하게 행동했으므로, 미라의 경계는 어느새 저절로 풀어져버렸다. 그는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미라는여행지에서 바람처럼 스쳐가는 인연이 주는,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자유에매력을 느꼈다.

날이 저물어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시켜 놓고 마주앉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어두운 실내에서 주황빛 부분조명을 받아 그의 얼굴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 붉은 기가 도는 금빛 구렛나룻은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수려하고 선해 보였다.

“미라는 관광 온 건가?”
“그래, 사샤는?”
“출장 왔어. 가정이나 애인이 있는 다른 동료들은 내일 시간 맞춰서 올 거고, 나는 구경 좀 하려고 하루 먼저 왔어. “
“오호, 사샤는 애인이 없구나?”
“그러는 미라는 왜 혼자 다니지? 너도 역시?”
피자를 입에 넣다 말고 둘이서 깔깔 웃었다.
“미라, 너는 혼자인 것이 좋아?”
“응, 나는 지금 자유를 즐기고 있어.”
미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선선히 덧붙였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샘솟고 있는 사랑을 줄 데가 없는 게 좀 이상할 때도 있어.”
사샤가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드러나는 앞니가 가지런했다.
“네 말이 맞아, 미라. 왜냐하면 그것은 자꾸 퍼내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샘이거든.”

미라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기가 하려던 말을 귀로 들은 충격으로, 그녀의 표정이 웃음기의 잔영을 담은 채로 정지되었다. 그녀를 마주보며 온화하게 웃는 그의 눈이 마치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종업원이 와서 그릇을 치웠다. 사샤는 종업원에게 이태리어로 뭐라고 부탁을 하는 모양이었고, 실랑이를 하더니 좀 불쾌한 얼굴로계산을 하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영문을 모르는 미라는, 그가 그녀의 피자까지 지불하는 것을 보고 민망해졌다. 그가 원하지않았지만 아마도 종업원의 실수로 그가 그녀의 몫까지 함께 계산하게 된 것이라고 혼자서 짐작해 보았다.

그녀는 우연히 만나서 잠시 시간을 함께한 그가 그녀에게 저녁을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젯밤 치한의 불쾌한 경험이있지 않은가? 그녀가 지갑을 열어 보니 아뿔싸, 잔돈이 없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거슬러줄 수 있는가 물었다.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이 날을 옥신각신하면서 마무리짓고 싶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지갑을 도로 넣던 그녀의 눈에가방 한 구석에 얌전하게 접혀져 있는 손수건이 들어왔다. 그것은 미라가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늘 가지고다니던 것이었다. 그녀는 하얀 바탕에 진분홍의 줄이 가느다랗게 그어진 손수건을 꺼냈다.
“그럼 피자값 대신에 이거라도 받아.”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손수건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세타를 위로 걷어 그 밑에 입은 남방셔쓰의 윗주머니에 손수건을 챙기고는 손바닥으로 그 곳을 툭툭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였다. 불빛이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밤거리를 이번에는 말없이 걸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생각했다. 그와 주소를 교환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얼른 지워버렸다. 그녀가 한 달 후에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마도 그를까맣게 잊어버릴 터이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연락을 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면자신이 바라는 자유는 영원히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둘은 약간 과장스럽게 활짝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주었음을 서로 감사하며 그는 그녀에게 좋은 여행을빌었고, 그녀는 그에게 로마에서의 출장이 성공하기를 빌었다. 악수할 때 손을 조금 오래 주고 있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통상적인작별인사였다.

돌아서던 그가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그녀가엉겹결에 받아들자 그는 매우 예의바른 말투로 그녀의 주소를 부탁해도 될는지를 물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수첩을꺼내어 이름과 주소를 적어 북 찢어주며, 편지하겠노라고 묻지도 않은 소리를 먼저 했다. 명함에는 이태리 국영 TV방송국의카메라맨이라고 적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유스호스텔로 걸어 들어가는 미라의 마음이 복잡했다. 봄바람처럼 가벼운 만남인 줄 알았는데 뒤끝이 징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에 로마를 떠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날 많이 걸어 몸이 피곤했던 것에 비해서 잠이 쉬이 들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과 홀가분한 마음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가벼운만남 후에 잠까지 설치는 자신에 대해서 화도 좀 났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아침이 활짝밝았다.

가만히 누워서 어제 하루를 돌아보았다. 충만한 시간이었고 멋진 만남이었다고 미라는 점수를 매겼다.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자리를지키고 앉은 아련한 애수를 너그러이 방치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미련이던 아쉬움이던,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댓가려니 여겼다.날짜 지난 수첩을 넘기듯, 사샤라는 제목이 붙은 추억의 장을 마음속으로 넘겼다. 새로운 페이지가 그녀를 말갛게 쳐다보고 있었다.오늘은 또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썰물 빠지듯 우우 몰려나가는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서 미라는 약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그녀가 출입문을 막 통과했을 때였다.

“하이!”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 어제의 그 사샤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미라의 표정에서 놀라움에 뒤이어 곧 반가움이 실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소 수줍어하는 몸짓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양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굿모닝, 미라!”
미라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사샤! 언제부터 기다렸어?”
“한 시간밖에 안 기다렸어. 유스호스텔은 문 여는 시간이 일정하니까 내가 밤새도록 여기 서 있을 필요가 없었지.”

사샤는 일을 시작할 때까지 시간의 여유가 좀 있어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서 왔노라고 아까보다는 당당하게 말했다. 미라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자유스럽고 자신있는 영혼이 있다니.
“미라는 오늘 무엇을 할 계획이었지?”
“바티칸 박물관이랑 베드로 성당을 보려고 했어.”
“나도 거기서 일하는데… 우선 그리로 가자.”

그는 이튿날에 교황 집전으로 거행되는 종교행사를 중계방송하기 위하여 출장 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베드로 성당의 “성스러운문”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다가 사반 세기마다 딱 한 번씩 열리는데, 그 해는 예수 부활 1950주년을 맞아 특별히, 추가로열리는 것이라 했다.

시간이 넉넉했으므로 두 사람은 도시를 구경하며 천천히 바티칸으로 향했다. 로마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어서, 아무렇게나다녀도 황토색으로 빛나는 유적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났다. 미라가 강의실에서, 또는 도서관에서 사진으로만 보며 숫자와 연대를 외우던건물들이 마치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모퉁이만 돌아가면 불쑥불쑥 나타났다. 세월의 힘으로 무장한 고건물들은 빛나는 아침 햇살의지원사격을 받아 미라의 시선을 사정없이 사로잡았다. 빛나는 태양, 아름다운 도시, 기분 좋은 길벗을 가진 미라는 완벽한 행복감을느꼈다.

바티칸 박물관 앞에 도착하자 작별인사 대신에 사샤가 물었다.
“오늘 저녁에 또 만날 수 있을까?”
미라는 선선히 대답하였다.
“좋아.”
시간 약속을 한 후 사샤는 두 발을 얌전히 모으고 서서, 그녀의 양뺨에 차례로 키스를 하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활짝 웃다가 서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바티칸 박물관은 대지 전체가 통째로 예술작품이자 최고의 권세 속에 꽃피어난, 인류의 보물창고였다. 미라는 예술과 부의 집합앞에서 소름이 끼치는 전율과 함께 구토증을 느꼈다.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하며 그녀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의 정신이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나른한 오후에 셔터를 내린 어두운 미술사 강의실에서 끄덕끄덕 졸며 슬라이드로 보았던 조각품과 그림들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빛나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으로 만났던 라오콘 석상이 지금 그녀를 알아보고, 금방이라도 땀을 뚝뚝 흘리며 고함을 지를 것같았다. 그의 단단한 근육은 그를 칭칭 감고 있는 뱀의 허리를 금새 툭하고 끊어 버릴 것 같이 생동감이 있었다. 살아 있는생물체 사이에서만 가능한 교감을 주고 받으며, 미라는 지금 이 작품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벅차왔다. 옛날에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동질감이, 인종과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그녀에게로 왔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라는 미켈란젤로의 천장벽화와 만났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상상력을 꿰뚫는 화가의 통찰력에 감탄하며,그녀는 4년 동안이나 누운 자세로 신이 들려 이 벽화를 그렸다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특히 천장 중앙에 그려진 천지창조에서미라는 눈을 떼지 못했다. 신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묘사가 기가막혔다. 미라의 눈에는 저 두 개의 손끝을 통해서 흐르는 생명의 정기가 보이는 듯하였다. 이 장면이 엉뚱하게도 에로틱하다는생각이 들면서 문득 하네스가 생각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네스는 그녀와 한 집에 살고 있는 대학생었다. 함께 사는 학생들은 둘 다 남학생이었다. 원래는 물리과 남학생만 셋이 살던주거공동체였는데, 그 중 한 학생이 이른 결혼을 해서 이사 나가자 방이 하나 비게 되었다. 여자가 드문 공대에서 남학생들과생활하는 일에 익숙한 미라가 그 방을 쓰겠다고 선뜻 지원하였고, 여러 명의 후보를 놓고 고르고 있던 그 남학생들은 맨발로 방을보러 온 자그마한 동양 여학생을 기꺼이 택하였던 것이다.

함께 기거하는 남학생들은 그녀보다 나이도 어렸거니와 이성에 대해서 관심도 경험도 없는, 공부벌레 모범생들이었다. 미라는 그들과함께 요리를 하고 설거지나 청소 문제로 다투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녀 역시 그들을 이성으로 특별히 눈여겨본적은 없었다.

하네스가 처음으로 미라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은 언젠가 그녀가 비에 젖은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덜덜 떨며 집에 돌아왔을 때, 부엌에서 스프를 끓이고 있던 그를 발견했을 때였다.

매일매일 가슴이 뛰던 어느 날, 미라는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공원으로 갔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이국에서봄을 앓는 미라의 가슴은 대상이 모호한 그리움으로 뜨겁게 불타올라서 금방 터질 것만 같았다.

비가 청승맞게 내리는 어스름한공원은 한적했다. 조용한 곳을 찾아 몸을 뉘였다. 비가 오는 날 풀밭이 되고 싶다는 오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차갑게 젖어오는 옷을 통해 몸이 식어갈 수록 마음은 점점 편안해졌다. 자신이 풀밭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몸 위로 불투명하게떠 있는 하늘과 합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이 완전하게 젖어 버리자 미라는 자신이 풀밭의 일부라고 믿게 되었다. 풀밭의눈으로 보는 나무는 위대하게 높았고, 풀밭의 눈으로 보는 하늘은 경건하게 깊었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인기척이 났다. 어려 보이는 청년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도 비를 맞고 있었다. 미라를바라보는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눈으로 인사를 하였다. 지나치려다 말고 그가 말을 걸었다.

“춥지 않으세요?”
“조금.”
“왜 그러고 계세요?”
“풀밭이 되고 싶어서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는 작별인사를 하며,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감기 뒤끝이라 오늘은 못하겠다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라는 그에게 좋은저녁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저만큼 멀어져 가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가 폐렴에 걸리실까봐… 너무 오래 계시지는 마세요.”
“네, 고마워요.”
그가 다시 멀어지자 미라는 한기를 느꼈다. 훌훌 털고 일어나는 마음이 사뭇 가뿐했다.

자전거 위에서 맞바람을 맞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아다다다 부딪치며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들었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다. 얼른 욕실로 가서 젖은 옷을 몸에서 떼어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였다. 속은 여전히허전하였다.

부엌에는 더운 김이 서려 있었다. 하네스가 혼자서 토마토 스프를 끓이고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로 부엌으로 들어서는 미라를 흘낏보더니, 한 그릇 더 퍼서 아무 소리 없이 그녀 앞으로 밀어 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속이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순식간에따스하게 풀렸다.

비가 오는 날 그 자신을 위해서 토마토 스프를 끓이는 그가 위대하게 보였다. 미라는 결혼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비오는 날 서로 뜨거운 스프를 퍼 주는 것.

나중에, 그가 미라에게 수줍게 프로포즈했을 때, 그녀는 그때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퇴짜를 놓았다.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어느 겨울 밤에, 함께 사는 다른 남학생 라이너는 집에 없었고, 미라와 하네스만 부엌에 앉아 있었다.이런저런 일상적인 내용으로 도라도란 대화하던 중에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는 한번도 여자친구가 없었는데, 이젠 경험해 보고 싶어졌어. 상대가 너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은 마치 “스파게티 국수는 소금을 넣고 삶아야 해”하는 것처럼 심상하게 들렸다. 내용도 사랑의 고백치고 삭막하다 못해오만하기까지 하였고, 또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어투가 구애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아보았다. 그녀는미안한 마음으로 그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첫 여자를 찾고 있는 그와 마지막 남자를 찾고 있는 그녀는 서로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그는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들은 테마를 바꿨다.

이튿날 미라는 욕실에서 무엇인가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하였다. 높이 달려 있어서 키가 작은 미라의 얼굴만 간신히 비추던 거울이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상반신 전체를 편안하게 비추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누군가가 거울을 낮게 고쳐 달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날 그녀가 복도에서 하네스를 만났을 때, 고개짓으로 욕실을 가리키며 “네가 그랬어?” 하고 묻자 그가 씩웃었다. 미라가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쑥스럽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삶에서 배경에 불과한 하네스가 갑자기 천지창조의 심오한 그림과 겹쳐지며 떠오르자 그녀는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닿을락말락아슬아슬한 육체적 접촉을 통해서 영혼을 불어넣는 거룩한 상징 앞에서 하필이면 하네스의 존재가 상기된 일은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미라는 박물관을 나오면서 천지창조가 담긴 엽서를 한 장 샀다.

그 많던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베드로 광장은 비스듬하게 비치는 저녁해를 받고 있었다. 광장을 돌아가며 빙 둘러친 기둥들과, 그위에 우뚝 선 석상들이 뚜렷한 명암으로 반짝였다. 광장을 둥그렇게 휘돌아치던 기둥들이 베드로 성당 건물 앞에 와서는 갑자기빨려들어가듯 직선으로 열을 이루었다. 그 덕분에 성당 건물이 더욱 웅장하게 강조돼 보였다. 광장의 형태는 원형과 정사각형을붙여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타원형과 사다리꼴형의 합성이라는 것을 미라는 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다. 타원형과 사다리꼴로인해 원근법이 과장되어서, 그 앞에 선 인간에게 광장의 폭이 더욱 깊게 보이는 착시현상은, 광장을 설계한 베르니니가 의도한바였다. 르네상스의 업적인 원근법을 회화가 아닌 도시 공간에 이용한 성공작 앞에서 미라는 차곡차곡 축적되어 온 문화의 힘을느꼈다.

뒤에서 “하이!” 하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샤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친숙한 친구들끼리 하는 몸짓으로 그녀는 그를향해 얼굴을 들었고, 그는 그녀의 뺨에 차례로 입술을 댔다.

“오늘 어땠어? 일은 잘 되었어?”
“응, 좋았어. 관광은 재미있었어?”
“굉장히 멋졌어. 하지만 교회가 너무 부자인 것에 모순감을 느꼈어.”

그들은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라, 너는 종교가 있니?”
“아니. 원래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지금은 종교가 없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그렇게 된 계기가 독일문학이라니아이러니하지?”
그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얼른 물었다.
“헤르만 헤세?”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따라 웃었다.
“나도 헤세를 좋아해. 하지만 나는 성당에서 성호를 그을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지.”
그들은 서로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미라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죽기 직전에는 기독교로 되돌아야 해. 할머니랑 하늘나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거든.”
사샤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녀는 딴청을 하며 웃었다.

저녁을 함께 먹었다. 스파게티 접시를 물리자 향긋한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사샤는 윗주머니에서 새 담배갑을 꺼내서 셀로판지를뜯었다. 톡 쳐 뽑아서 미라에게 권하고 자기도 빼 물었다. 익숙한 솜씨로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 주는 그의 손이 가볍게떨리면서, 담배를 든 그녀의 손에 닿을락말락하였다. 미라는 어제 내내 그가 그녀의 담배를 얻어 피웠다는 사실을 무심코 기억했다.

“내가 사샤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걸로 해도 돼?”
“고마워, 하지만 내 식사값은 출장비에서 나오거든.”
“그럼 내 것은 내가 낼게.”
“그러지 말고 이따가 아이스크림이나 사 줘.”

독일에서 따로 계산하는 일에 익숙한 미라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런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입을다물었다. 계산을 할 때 그는 종업원에게 무언가를 부탁했고,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서를 써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계산서를 보여 주며 설명하였다. 그가 두 사람 몫을 지불했으나, 직장에 출장비 명목으로 제출할 계산서에는 그의 식사값 일인분치만 적혀 있었다. 그녀는 로마의 피자집에서 사샤와 종업원 사이에 일어났던 실랑이의 원인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그들은 바티칸을 비껴서 흐르는 테베레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노을이 수면으로 번져 있었다. 갈색의 물이유장하게 흐르는 강변에는 많은 연인들이 쌍쌍으로 거닐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점점 짙어져 가고 있는 어스름 속에서 두 사람은반짝이는 수면에 눈길을 주며 말없이 걸었다.

이때 우연처럼 그의 손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바람결처럼 가벼운 스침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감쌌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앞만 보고 걸었다. 몇발짝을 그렇게 걷다가 사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그녀를내려다보았다. 그녀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멈춰 섰다. 몸에서 수분이 증발하고, 오금이 저려왔다.

마른 벼락이라도 칠 것 같은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보일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를 잡았던 손을 빼더니, 주먹을쥐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그녀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는 갑자기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이번에는 당당하게 그녀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그가 수줍게 말했다.
“믿어지지 않게 행복해.”
그가 앞만 보며 말했으므로 그녀도 그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앞만 보았다.

그녀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것을 신호로 그들은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걷기 시작하였다. 그바람에 그들의 사이를 오가던 마른 번개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마치 오래 사귄 사이처럼 서로의 온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어느새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 있었다.

그날 밤 유스호스텔에 돌아온 미라는 시간이 늦었는데도 침실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휴게실로 내려갔다. 휴게실에서는 여러 대륙에서온 젊은이들이 엽서를 쓰거나 책을 읽기도 했고, 삼삼오오 모여서 여행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미라는 그들과 어울려 웃고떠들다가 밤이 깊어서야 침대에 들었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이튿날 아침에 미라는 일찌감치 짐을 다 꾸려서 둘러매고 나섰다. 약속대로 사샤가 유스호스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반겨주었다. 그는 그녀의 배낭을 벗겨서 자기 어깨에 매고 끈의 길이를 조절하였다. 그들은 익숙하게 서로 손을 찾아서 잡았다.

그는 그가 일하는 장소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베드로 광장 앞쪽에 복잡하게 생긴 안테나를 얹은 마이크로 버스가 이태리국영방송국의 마크를 달고 서 있었다. 촬영할 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하던 너덧 명의 동료들이 사샤와 미라를 보자 반색을 했다.

행사가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미라는 혼자서 로마 시내로 나왔다. 그날은 로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 명소를몇 군데 더 구경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막상 혼자가 되고 보니 관광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붐비는 거리에 망연히 서 있던미라는 담배 가게에 들어가서 작은 공책 한 권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샀다.

미라는 카페에 앉아서, 사샤를 만난 일화를 단숨에 써내려갔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썼다가 줄을 그어 지우고,어쩌면 벌써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썼다. 그러다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문득 자신이 없어져서 그 문장도 북북 그어 버렸다.그녀는 공책을 접고, 연갈색의 카푸치노를 마시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손가방에서 뜨게질감을 꺼냈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지루하거나 쑥스럽게 느껴질 때, 몸은 쉬고 싶은데 마음이 산란할 때에 손에 무언가 할 일을 쥐어 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그녀는 대바늘을 수평으로 들어 눈 앞에 흔들어 보았다. 조금만 더 뜨면 그녀의 양말 한 켤레가 완성될 것이다. 남자 것에 비해크기가 작은 것이 꼭 아기 양말 같다고 생각했다. 문득 고등학교 급우였던 남학생이 공부시간에 뜨게질을 해서 그녀에게 선물했던,뒤꿈치가 오그라진 양말이 생각나서 미라는 빙그레 웃었다.

베드로 광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공원을 지났다. 풀밭에는 얌전한 자태의 잔잔한 들꽃들이 햇살 속에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그녀는 들꽃을 꺾어 풀잎으로 묶어서, 한 손에 들어가는,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제 눈에도 예쁘게 보이는 꽃다발에 만족해서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춤추는 스텝으로 경쾌하게 뛰어갔다.

베드로 광장의 입구에 구름같이 몰려있는 군중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무슨 표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그녀는 혹시 미리 예매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샤가일하면서 얼마나 그녀를 찾을까, 여기서 어긋나면 다시는 그를 찾을 도리가 없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미라는 그가 그날저녁에 북이태리 어딘가에 있다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줄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 많은 인파가 서서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무사히 베드로광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저 멀리 높은 단이 보이고, 방송국 카메라 두대와 복잡한 기계들이 부산하게 돌아가는 것이보였다. 미라는 행여 만나지 못할세라 조바심 치던 뒤끝이라 어찌나 반갑던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카메라를 잡고 있던 사샤가 그녀를 먼저 발견하고 팔을 흔들었다. 그는 카메라를 내버려 두고 단 아래로 성큼 뛰어내려왔다. 그녀는손에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는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마워. 참 예쁘다.”
그의 웃는 얼굴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환하게 빛났다.

행사가 끝난 후에 그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녀는 베드로 성당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콧노래가 나오며 공연히 마음이들떠서 그녀는 천천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날렵한 걸음으로 뛰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가 궁금해졌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단 위에서 카메라를 잡고 있던 사샤가 큰 동작으로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어리둥절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다시 팔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미라는 방송카메라가 그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군중 속에 파묻힌 그녀를 단숨에 잡아내기란 불가능할 텐데, 필시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카메라로 뒤쫓고 있었으리라. 서로 너무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기가 보일 것 같지도 않은 기분에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보이자, 그는 다시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무엇에홀린듯한 기분으로 몇 걸음을 떼어 놓다가 미심쩍어 다시 한번 뒤돌아보자, 그가 다시 팔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가 두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해 마구 휘젓는 것이 보였다.

와글거리던 광장이 조용해지며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백 년 전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은 스위스 경비대가 병풍처럼 뒤를지켰고, 화려하거나 우아한 제복의 사제들이 순서에 맞춰서 오고 갔다. 교황이 인자한 자태를 나타내자 군중들이 “바바!바바!“하며 열광하였다. 마치 그리웠던 아버지를 대하듯 교황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분위기가 얼마나 경외스럽고 순정스러운지, 미라는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엄숙과 열광이 교차하는 예식은, 교황을 선두로 하는 행렬이 군중 속을 가르고 지나가는것으로 막을 내렸다.

행사가 끝나고 군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광장에서 미라는 사샤와 다시 만났다. 그와 함께 밤기차를 타고 북이태리로 올라가기위해서였다. 그는 북이태리 끝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미라는 그가 내릴 역 조금 못 미쳐서 위치한 베니스에서 내리기로 한것이다. 일을 마친 그는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고 그녀 역시 말수가 적었다. 피곤하지 않느냐, 오늘 행사는 좋았느냐는 등의상투적인 인사를 잠시 나누고는 말없이 걸었다.

역전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시켜 놓고 마주앉았다. 미라는 식탁 한가운데 놓여 있는 양념바구니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그자리에 자신의 두 손을 나란히 얹으며 사샤를 향해 소리 없이 웃었다. 잠깐 의아해 하던 사샤는 역시 미소로 응답하며 두 손을뻗어 그녀의 손을 소중하다는 듯 감쌌다. 종업원이 피자접시를 들고 와서 헛기침을 할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세로 눈을 맞추고있었다.

“사샤, 이번 식사는 내가 계산하게 해 줘. 남자만 항상 돈 내는 거 옳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야, 미라. 마지막으로…”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농담을 하며 좀 더 우길 작정이었던 미라도 덩달아 입을다물었다. 그가 계산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라치에.

밤새도록 이태리 반도를 타고 올라가는 기차는 붐비지 않았다. 육인용 칸 하나를 단둘이서 차지하고 앉았다. 도시를 벗어난 창밖은칠흑처럼 깜깜해서 창유리에는 희미한 전등불이 반사되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하였다. 그는 자신의마지막 여자친구에게서 거절당한 사연을 유머스럽게 얘기해 주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자친구로부터 해방된 후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라, 정말로 너는 자유와 고독을 즐기고 있니? 사랑을 줄 대상이 없는 것이 허전하지 않니?”
“허전할 때도 있었는데, 이번에 너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유스러운 싱글로 살고 싶어.”
“뭐? 내가 그렇게 나쁜 남자란 말이야?”
사샤가 장난스럽게 항의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미라는 잠시 웃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주어졌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어. 우리가 이렇게 부담 없이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건, 지금우리가 둘 다 자유로운 상태라서 그런 거잖아?”
“그건 그래.”
“그리고 말이야, 사샤, 날이 밝아 기차가 베니스에 닿으면 끝나 버리는 관계인줄 알기 때문에 우리 지금 마음 놓고 순수할 수있는 거 아니…야?”

갑자기 목이 잠겼는지 마지막 단어가 뚝 끊어졌다가 가까스로 이어졌다. 연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녀와 생각이 같다는 것을표시하던 그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얼굴은 웃을지 울을지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양뺨에 살그머니 닿았다. 그가 당기기도 전에 미라는 자석에 끌리듯 스스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금발이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보며 미라는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봄바람처럼 가벼운입맞춤이었다. 눈을 뜨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가 눈을 다시 감는 것을 보며 그녀도 눈을 감았고,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을 때그녀의 입술은 개화하는 꽃잎처럼 벌어져서 그를 맞아들였다.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고, 혼이 육체를 떠나 허공에서그네들을 무심히 구경하였다.

사샤는 정열적이었으나 단정했다. 긴 키스로 인해 그녀의 몸은 후끈 달아 올랐으나, 그의 손은 그녀의 뺨을 소중히 감싼 채 그녀의얼굴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단정히 마주보고 앉은 자세로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창밖에 동이훤하게 터올 때까지.

베니스로 들어가며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나, 선반에서 그녀의 배낭을 내려 주었다. 그들은나란히 앉아 앞만 응시하며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섰다.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미라는두 손을 내밀어 그의 양뺨에 살며시 대고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잠시 놀라는 듯하던 그는 순순히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려 그녀를다소곳이 받아들였다. 부드러운 그의 영접을 받으며 그녀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덜컹하며 기차가 멎었다. 그녀는 꿈에서 깨어나듯 그에게서 떨어졌다. 배낭을 집으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그가 먼저 배낭을들어올렸다. 그녀는 말없이 뒤로 돌아, 배낭을 걸쳐받을 자세를 하고 섰다. 갑자기 그는 단호한 몸짓으로 자신의 어깨에 배낭을짊어졌다. 놀라서 쳐다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며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플랫홈에 발이 닿자마자 그들은 황급하게 서로를 찾아 꽉 부둥켜 안았다.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않을 때까지 그러고 서 있었다. 돌아보면 기차가 되돌아 올까봐 겁내는 사람들처럼.

대기에는 비릿하고 상큼한 바다냄새가 배어있었다. 새벽 여섯시의 베니스는 벌써 잠에서 깨어나서, 조금만 있으면 사정없이 들이닥칠수많은 인파를 맞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방금 구운 코르네토 냄새가 진동하였다. 그들은 작은 카페의 높은탁자에 팔을 얹고 서서, 껍질이 바삭바삭하고 버터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코르네토를 먹고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를 마셨다.

그가 그녀의 담배에 성냥불을 붙여 주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애무하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들은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운명으로부터 단 몇 시간이라도 흥정해 낸 것을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듯이. 방금 기차에서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었지만, 그가 따라 내린 순간부터 그들은 적극적인 결정에 의해서 연인이 된것이다. 단 몇 시간뿐일망정.

베니스의 대중교통 수단인 배를 탔다. 미라와 사샤는 갑판 위에서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서서, 바다가 몸을 푸는 광경을구경하였다. 뽀얀 물안개 속에서 베니스가 태어나고 있었다. 인간의 눈길이 닿기 직전에 도시의 실루엣을 가까스로 물 위로 밀어낸바다는 이제 막 태반을 밀어내려고 붉게 상기되어 용을 쓰고 있었다. 도시는 태고적부터 그 자리에 떠 있었던 척하며 시침을뗐지만, 갓태어난 생명의 신비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긴장이 극에 달한 불덩이가 막 터져 오르는 순간, 미라와 사샤는 동시에고개를 돌려 시선을 얽었고 미라는 갑자기 오금이 저려서 그만 주저앉고 싶었다.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잠자리가 다 찼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도시여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 얻기가어렵다는 것이다. 그녀는 닷새 뒤로, 삼 일 간 예약하였다. 그때까지 그녀는 관광객이 덜 붐빌 것으로 예상되는 소도시들을돌아보기로 하였다. 기차시간표를 보니, 비잔틴 건축의 도시 라벤나로 가는 기차가 사샤가 타야 할 기차 조금 후에 있었다.

사샤의 기차 시간에 맞춰 그들은 역으로 나갔다. 플랫홈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서 그의 기차를 기다렸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일터였다. 가슴이 바작바작 탔다. 고마워, 즐거웠어, 몸 건강해, 행복하기 바래. 애써 덤덤한 말투로, 그러나 더듬거리며 서로작별인사를 하였다.

“미라, 베니스의 유스호스텔로 전화할게.”
“고마워.”
그리고는 긴 침묵.

기차가 바로 옆으로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정열이 싸늘하게 식어 버린 마지막 키스를나눴다. 그가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 어쩌면 베니스로 너를 만나러 올지도 몰라.”
“어떻게?”
“어쩌면.”

그가 기차에 올라 탔다. 미라는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고는 얼른 발길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눈물을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두어 걸음을 떼어 놓는데 문득 이제는 그를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다시 돌아섰다. 그는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쪽을 보며 앉아 있었다. 창 앞으로 다가가서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웃음을지어 보였다. 기차 출발 시간이 몇 분 더 남았음을 옆눈으로 확인하며 미라는 담배를 두 대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그가 말없이 일어나 승강구로 왔다. 불 붙인 담배를 건네며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기차 위에 서서,그녀는 플랫홈에 서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한 순간도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녀는 마지막 인사로 미소를선물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도 간간이 웃는 표정을 지으려다가는 그만두곤 하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녀는 황급히 까치발을 들었고, 그는 머리를 깊숙히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문이닫히기 직전에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났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쾅 닫혀 버리고,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두사람은 꼼짝도 안하고 서서, 서로를 가만히 응시한 채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