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미라는 혼자서 밤외출을 하였다. 젖먹이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미라를 남편과 아이들이 억지로 밀었다. 시내에 있는자그마한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음 밑에 깔려 있는 낮은 음율이 그녀의 몸통을 울리고 지나갔다. 구석에 마련된간이무대에서, 머리를 허리까지 늘인 남자가 단정한 자켓차림으로 첼로의 줄을 고르고 있었다.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무대 뒤쪽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녀의망막에 습관처럼 붙어 있는 젖먹이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그녀는 오래간만에 자신의 음악과 다시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시작하였다.

입술에 묻은 카푸치노의 우유거품을 빨며 막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고개를 들어 어둑한 실내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 하나가 부분조명에 비추어 살짝 빛났다가 이내 사라졌다.그녀가 그 얼굴을 찾아 시선을 옮기는 사이에, 그녀의 탁자에 성큼 그림자가 드리웠다. 역광 때문에 사람의 형체만 보였지만 그녀는회색 머리와 온화한 표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중하게 몸을 숙여 탁자를 가리키며 뭐라고 물었고,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떠올랐다.

“미라, 뮌헨이 좁구나. 건강해? 아기도?”
“반가워, 파올로. 잘 지냈어? 내가 부쳐 준 검사결과는 받아 보았지?”
“그래, 고마워. 보내줘서 고맙다고, 또 출산을 축하한다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미라도 알잖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미라가 그의 안부를 묻자, 그는 자신의 삶은 여전하다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엘레나에게 살림을 합치자고 제안했는데 그녀가 거절했다고 그는 푸념했다.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다시 합치자고 했다는말에 미라는 엘레나의 거절이 당연하지 않느냐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들어도 그렇네. 사랑한다고 합치자고 하면 모를까, 서로 바람 피울 자유를 인정하려면 뭣하러 합쳐? 바람 피우기만 불편하게스리.”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파올로가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정색을 하더니, 그냥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자는 게 여자들눈에는 그렇게 이상한 일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엘레나는 사랑을 원하지 않느냐는 미라의 질문에, 파올로는 엘레나는 기댈 곳이필요한 여자라고 대답했다. 그가 엘레나에게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는 말이 불만스러워서 미라는 마침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해 박수를 치느라고 대화가 끊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악기의 음정을 맞추는 불협화음 사이로, 파올로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가 예약한 자리는 무대 정면의 좋은 위치였지만미라는 왜 그런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 사양했다. 그리고 저 때문에 파올로까지 무대 뒤에 앉는 것이 민망해서, 그냥 따로관람하자고 했다. 파올로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세상이 내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벌써 이해했어.”
몸을 돌리기 전에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마터면 나 같은 사람이 히피처럼 가족공동체를 이룰 뻔했으니, 더 할 말이 있겠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등을 돌렸고, 미라는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그가 자기 자리로 가서, 마시던 잔을 가지고 왔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는 순간 그녀가 재빠르게 말했다.
“파올로, 엘레나가 새 남자에게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와 줘. 네게로 오는 뒷문을 닫아 버려.”
그가 후딱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모로 꼬고 앉아서, 시선을 무대 위의 움직임에 비끌어 맨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인지 허밍으로 부르는 멜로디가 언뜻 들려오는 듯해서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소란이 잦아들면서 멜로디는 가냘프나마 점점 더분명하게 장내를 장악하였다. 몸집이 자그마하고 눈매가 순한 여성이 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입은 다물었으나 힘이 들어간콧날로 보아, 저 가느다란 선율은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임에 분명했다.

그녀가 한 발을 무대 위에 올려 놓는 것을 신호로 클라리넷과 아코데온, 피아노와 첼로가 불꽃을 튀기며 작열하였다. 반딧불같이여린 선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무방비상태로 열어 놓았던 가슴이 깜짝 놀라서 벌렁거렸다. 아까는 여리게 들렸던 목소리가 악기전부를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서 어느새 우렁차게 군림하였다. 미라는 숨을 죽였다. 뚜렷하게 두드러지던 사람의 목소리가 점차 첼로소리로 변하고, 클라리넷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면서 소리의 구별이 사라졌다. 하나의 소리로 통일된 파장은 거침없이 미라의몸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브라보!”
파올로가 소리쳤다. 작은 홀이라 사람 수가 많지 않아서 박수소리가 딱총소리처럼 산발적으로 들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미라는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막간을 이용해 종업원들이 탁자 사이를 돌며 주문을 받고 접시를 날라왔다. 주문했던 홍차와 초코렛크림이나왔다. 달콤한 크림이 몸속에 남아 있는 흥분과 섞이며 마음을 서서히 가라앉혀 주었다.

파올로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남편과의 관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는지?”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말고 미라는 혀에서 녹고 있는 크림을 삼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들은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었다. 그녀도 남편도 방금 각자의 누에고치를 찢어 변화했지만, 그것은 지나간 그 고비를 간신히넘기기에나 족한 변화였다. 앞으로도 골목골목, 길이 굽이치는 곳마다 얼마나 많은 복병들이 새로이 나타나 그들의 관계를 위협하게될지 미지수였다. 그리고 바이러스처럼 다양하게 변종해가며 달려드는 복병에게 대응할 새로운 방정식을 구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다시 한번 공동의 언어를 찾을 수 있을지는 더욱 큰 미지수였다. 낯익은 바이러스가 옷만 갈아입고 나타나도 이들 부부는 마치 생전처음 보는 강적을 만난 것처럼 크게 당황해서 서로 부딪치며 허둥거렸다. 더구나 그들은 체면과 관습이라는, 사회가 나주어 준갑옷으로 무장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이라는 맨몸 하나로 버티기에는, 남편이나 그녀의 변함없는 아집이 자못 위태스러워보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어느새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변수인 방정식을 성립시키는 예술은 쉽지 않아서매력있는 사업이었다. 나중에 실패를 하더라도 우선은 몰두해서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사업이었다.

아직도 노력하는 중이라고 좀 우물쭈물하던 미라가 변명처럼 불쑥 되물었다.
“사랑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아?”
“알아.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미라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도 따라 웃었다.

“파올로, 너는 지금 내가 사랑을 위해 들이는 노력이 소모적이라고 생각하지? 사람은 그 정력을 보다 생산적인 일에 써야 한다고생각하지? 어떤 때는 나도 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한번 시작했으니까 그냥 타성으로 계속하는 걸지도 몰라.”
웃음을 머금고 가볍게 던진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며 미라는 난데없이 쓸쓸해 했다.

“아니, 미라. 보다 생산적인 일이 뭘까? 미라처럼 사랑에 투자하지 않는 나는 나의 시간과 정력을 어디에다가 쓰고 있나? 일을더 많이 하고, 돈을 더 많이 벌고, 지위를 더 높이는 일에? 문화생활에? 어떤 게 더 나은 일이라고 우열을 정할 수 있을까?”
파올로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쓸쓸한 그의 말투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연주자들이 다시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악단인 탓에 한 사람이 여러 악기를 다루었으므로 그들은 악기를 바꾸고 음정을골랐다. 연주자들끼리 서로 호흡을 맞추느라고, 클레츠머 음악에서 자주 나오는 대표적인 선율이 시험삼아 서너 마디 연주되었다.환희인지 애수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선율,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흥겹게도 또는 슬프게도 들리는 선율이었다.

그 선율과 공명하여 미라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삼십 년만에 처음으로 재회의 인사를 나누던모습이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미라가 아직도 가끔씩 눈물바람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 재회 직후에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라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금방 불타오를 종이장난감처럼위태스럽게 보이던 그 자동차가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고, 금방 무너질 듯 위태스럽게 보이던 두 사람이 아무런 후유증도 남기지 않은채, 각각 제 갈길로 무사히 돌아섰다는 것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닳아빠진 엽서의 그림처럼 아슬아슬한 두 사람의 뒷모습이너무나도 위태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십오 년이 지난 근자에 아버지가 고국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미라는 무슨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갑작스런 부고를 접했을 때 미라는 그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그냥 알았다.

환희인지 애수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클레츠머 선율 속에서 미라는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 엄마로서 딸을 온전하게 사랑하고,여자로서 아버지 한 사람만을 원없이 사랑하고 간 어머니는 세속적으로 실패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을망정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을구현하고 간 사람이었다. 클레츠머 선율을 통해 들리는 어머니의 인생은 이제는 미라의 귀에 슬프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미라 자기만은 어머니의 노래가 흥겹기도 했었다는 것을 알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확고한 선으로 이어주며 미라는 뜻밖에도 자신의 자존심이 회복되는 희열을 맛보았다. 마지막출산과 함께 폐경을 맞는 여자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수정되는 순간의 축복을 확인하는 일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돌아가서 불행의 씨앗을 제거한 후에 다시 한번 의기양양하게 살아 보이는 것처럼 희극적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물통을넘쳐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되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물이 넘쳐 흐르며 물레방아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물레방아는 미라의 가슴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퍼올렸다. 그와 함께 연민의 그림자인 죄의식도 함께 따라 올라와 물에 휩쓸려떠내려가 버렸다.

가슴 속에 평생 품고 있었던 축축한 기운이 사라진 자리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바늘구멍만큼 작고깊은 상처에 새살이라도 돋으려는지 스멀스멀 가렵기 시작했다. 언제 들여다 보아도 늘 새로이 재생하던 동그란 피딱지도 어느새 말라떨어졌는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미라는 남편과 함께 춤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남자를 믿고 그의 리드에 따를 만큼스스로를 믿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고도 없이 천둥이 치듯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흥겨운 축제 음악에선 휘파람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났다. 그런가 했더니 어느샌가 꿈꾸듯 감미롭고 나른한 선율이 한정 없이 이어졌다. 한국의 농악 같기도 하고 서양의 재즈 같기도 한 신비한 음이 첼로의활에서 길게 뽑혀져 나왔다. 뿌리가 뽑힌, 자유로운 영혼들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섞이고 변해온 클레츠머를 듣고 있자면, 사랑의슬픔이 곧 사랑의 축제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증발해서 사라져 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 요란한 박수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미라는 작년 오월에 천둥 치던 밤하늘로 날아가던클레즈머의 선율을 떠올렸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파올로가 갑자기 말했다.

“작년에 미라는 갑자기 내 인생 안으로 들어왔다가 갑자기 나가버렸어. 그 일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내가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랑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미라가 활짝 웃으며 맞받았다.
“사랑을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실천을 해요, 실천을.”

그녀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미국에는 언제 갈 것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파올로가 심상하게 대답했다.
“미국? 크리스티 만나러? 글쎄, 아직 계획이 없는데. 크리스티가 그걸 원하는지도 모르고.”
미라는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되어 떼를 쓰듯 소리쳤다.
“뭘 아직도 몰라? 네가 네 마음을 잘 아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파올로는 당황했는지 잠자코 있었다. 미라는 얼핏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를 낮췄다.
“파올로, 인생은 그렇게 심사숙고를 해야 할 만큼 위대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무슨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잃을 것이 그렇게많지는 않아. 잃을까 봐 겁내는 것에 비해서 정작 잃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연주자들이 주섬주섬 악기를 챙겼다. 파올로가 미라에게 좀 더 앉았다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미라는 젖이 점점 불어와서 신경이쓰였으므로, 그만 가 봐야겠다고 대답했다. 파올로는 그녀에게 앞으로 친구로서 종종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미라는 활짝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다 말고 갑자기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금방 한 말을번복했다.
“어, 파올로, 이제는 안 되겠다. 너를 만나러 나오려면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하던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이젠 그러기 싫거든.미안.”

파올로는 고개부터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더니 다시 갸웃하며 물었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떳떳해도 그런가?”
“그래.”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화장실에 다녀 오는 사이에 그는 악단의 시디를 사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조금부끄러워하면서, 출산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전철역을 향하여 함께 걸었다.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떼었다.
“파올로, 오늘 너한테 무슨 말을 해 주려고 하는데… 들을래?”
“물론이지.”
“네가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라는 건 내가 언젠가 말한 적 있지? 나는 지금 섹스에 대해서 말하려고 해. 너는 내가 만난 남자들중에서 가장 몸과 테크닉이 좋은 남자였어. 난 네가 이걸 알았으면 좋겠어.”

파올로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오, 미라. 하지만 미라는 절정을…”
“내가 절정을 맞지 못한 건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었어. 나한테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의 감동이 바로 절정이야. 그런데우리는 그게 아니었잖아?”

그가 정색을 하고 항의했다.
“잠깐만, 미라. 나는 미라에게 단순히 육체적 호기심만을 느낀 건 아니었어.”
“알아, 그건 나도 그랬어. 하지만 우리가 그날 함께한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한몸이 되고 싶다는 염원이 아니었어.그렇지?”

그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글쎄, 영원까지야…”
“그때 나는 끝까지 한번 가 보고 싶었어. 우리의 만남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어. 난 한 번만이라도 사샤를따라가 보고 싶었거든. 파올로, 너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까 나의 절정 여부로서 너의 능력을 판정하지 말아 줘. 너와의섹스가 훌륭했다는 내 말을 믿어 줘.”

파올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침묵이 예상 외로 길고 무거웠으므로 미라도 조용히 곁을 지켰다. 드디어 그가 머뭇거리더니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미라, 나도 오늘 미라에게 무슨 얘기를 해 주지. 이거 알아? 내가 지난 십 년간 남자의 능력을 상실했었다는 걸?”
그들 바로 옆으로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미라가 겨우 대답했다.
“아니, 몰랐어.”
“내가 미라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미라는 아마 상상하지 못할 거야.”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니. 그렇게도 능숙하게 자신의 몸을 다루고 쾌락을 주었던 파올로가 다른 여자에게는 남성으로조차 존재하지않았다니.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
“믿을 수 없어, 미라? 나의 실체란 대체 어느 것일까? 미라가 만났던 파올로일까, 아니면 엘레나가 만났던 파올로일까?”

미라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남편의 등에 얼굴을 묻었을 때, 그의 마른 등을 통해 들리던 남편의 고백이 떠올랐다. 파올로의남성을 당당하게 확인시켜 준 자신은 남편을 불능 직전까지 몰고 갔던 여자였다. 나의 실체는 대체 어느 것일까라는 파올로의 질문을미라는 스스로에게 하였다. 그들은 말없이 각자 자기 생각에 빠져들었다.

“파올로, 사랑은 나의 실체와 너의 실체가 만나는 것이 아니야. 나를 둘러싼 물안개와 너를 둘러싼 물안개가 만나는 거야. 나의물안개에는 내가 이제까지 만나온 모든 사랑과 상처가 녹아 있어. 너의 물안개에는 너의 경험이 녹아 있고.”
파올로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은 허상끼리 만나는 거라고?”
“나의 물안개는 너의 물안개와 유일한 방법으로 화합하고 반응해. 나의 물안개가 네가 아닌 다른 물안개를 만났을 때 화합하고반응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나는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다른 여자로 변신했어. 나는 똑똑하게 따지는 여자도 되었다가,순하게 받아주는 여자가 되기도 했어. 나의 실체가 바뀐 게 아니라, 나의 물안개가 각각 다르게 반응해서 그런 거야.”

또 한번 침묵이 흘렀다. 그가 꿈을 꾸듯이 중얼거렸다.
“나의 물안개와 크리스티의 물안개는 어떻게 반응할까?”
미라는 대답이 궁해서 짐짓 농담조로 받았다.
“글쎄, 그건 너의 물안개에 달렸겠지. 네 물안개가 마음을 열고 순수하게 풀어지면, 크리스티의 물안개도 부드럽게 화합하겠지.하지만 네 물안개가 뒷문을 열어 놓고 재고 따지기 시작하면, 크리스티의 물안개도 딱딱하게 얼어붙겠지.”
파올로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전철역 입구에 닿았다. 파올로를 실은 에스칼레이터가 윙 소리를 내며 아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라는 옆의 층계로 뛰어내려갔다. 그가 에스칼레이터 위에서 회색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를 보고 웃었다. 그녀는 먼저 내려가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야하는 그들은 출구가 갈라지는 곳에서 마주보고 섰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그녀에게문화센터 앞까지 바래다 주고 싶다고 급하게 말했다. 그도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전철에서 내려서 문화센터의 처마 밑을 나란히 걸었다. 아카시아 나무가 정면에서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그들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파올로, 내가 여기서 비를 피하고 있는 걸 보고 네가 되돌아 왔을 적에, 그때 너는 크리스티 생각을 했지?”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때 처마 밑에 서 있던 사람이 늘씬한 금발의 여인이었다면, 나는 빗길을 되돌아 오지 않았을 거야.”
“나도 그래. 네 음성에 있는 이태리어 억양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찾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때 너를 찾았던 게 아니라사샤를 찾았던 거야. 추억이 주는 힘이 내게 필요할 때였으니까.”

그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미라는 내게서 사샤를 보았다고 생각하나? 남편의 모습을 본 건 아니고?”
“응?”
“나는 미라의 남편이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그렇지 않나?”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미라의 머릿속에선 그녀가 그간 파올로와 나누었던 대화와 남편과 나누었던 대화가어지럽게 교차하였다. 정말로 누구와 했던 대화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참 후 그녀의 입에서 망설이듯이 천천히 대답이 나왔다.
“그래, 그렇구나.”
“미라가 예전에 남편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녀는 아직도 생각에 잠겨서 꿈속에서 말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히 사샤의 열정이었어. 오오, 맙소사. 내가 사샤의 열정을 가지고 하네스의옛모습을 사랑했던 거라고?”
미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속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구나. 그가너그럽게 말했다.
“결국 추억이 미라를 구해준 셈이군. 내가 미라의 행복찾기에 매체가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 미라가 좋아한 건 나의 실체가아니라, 미라의 마음이 만들어낸 나의 물안개였지만.”

미라는 공연히 울고 싶어졌다. 나는 사랑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뒤져서, 내가 반할 만한 요소들을 찾아내어, 그걸로물안개를 만들어서 그에게 뒤집어 씌운 거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발로 땅을 툭툭 차기 시작했다.
“파올로, 만약에 너의 말이 맞는다면 나는 네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 너를 이용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물안개처럼 부드럽게 밤공기 속에 섞였다.
“우리는 추억을 만든 거야. 크리스티와 사샤의 추억같은.”
미라는 마음이 벅차서 침묵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밤이 많이 늦었는데 이제 그만 전철을 타고 가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고 싶어했다. 아직 할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

백여 년 전에 지어진 도시형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골목길은, 도보도 너르고 가로등도 밝아서 밤산책을 하기에 쾌적했다. 밤이꽤 깊었는데도 따스하게 빛을 내보내는 창문이 많았다.

파올로가 나직나직하게 말했다.
“미라, 나처럼 자식이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사는 이유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보게 되지. 미라와 내가 만든 추억이사샤와 크리스티의 추억처럼 언젠가 다른 삶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는 것 같아.”

미라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감격을 달리 표시할 길이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가슴 속에각인되어 그녀를 지켜주는 사샤의 흔적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생각 속으로 파올로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나의 가슴 속에도 사샤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응?”

그녀는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미라를 만나지 못했으면, 나도 사랑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뭐? 네가 사랑을 찾았다고 지금 말했어?”
그는 먼 곳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무언가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게 될지도 몰라.”

마치 독백처럼 중얼거렸으므로 그녀는 마침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구별하느라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녀는 그 말의 진의가무엇인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느꼈으므로 그냥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나도 파올로의 행복찾기에 매체가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

소공원 위에 떠 있는 밤공기에선 서리 내리기 직전의 국화꽃 냄새가 났다. 색깔 맞춰 공원을 빙 두르고 앉은 키 작은 국화들이가로등의 불빛을 향하여 창백한 얼굴을 반짝 쳐들고 있었다. 국화처럼 얼굴을 들어 미라는 파올로에게서 마지막으로 사샤의 키스를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미라는 병아리처럼 입을 벌리는 아기에게 퉁퉁 불은 젖을 물렸다. 아기의 입술이 닿기도 전에 젖이 방울방울 솟았다.가슴에서 수압이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라는 아기의 갈증은 그리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추억이 잉태한아기였으므로.

“사샤, 네가 만들어준 아기야. 너와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아기야.”

아기는 결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젖을 빨며, 자기가 가진 그리움은 수정되기 훨씬 이전에 마음속에 심어진, 고유한 갈증이라고주장했다.

*

어느 날 그녀는 전보같이 짧은 이메일을 받았다. “파올로는 크리스티를 만났다”라고 딱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미라가 그에게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미국에 다녀왔다는 그에게 그녀는 서로 사랑을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크리스티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확인하고, 고백하고 왔다고 했다. 크리스티도 그를 사랑하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요즘 마치 첫사랑에 빠진십대의 소년같이 아무 일도 못하고 크리스티의 생각만 한다며 민망스러워했다.

미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어때?”
“내 나이에?”
“그럴 수록 더욱.”
그가 침묵했으므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침만 꿀꺽 삼켰다.

며칠 후 파올로가 풀이 죽어서 전화를 했다. 미국에 다시 다녀오고 싶은데, 크리스티가 너무 바쁘다고 석 달 후에 오라고 했다는것이다. 그러면 석 달 후에 가면 되지 않느냐는 미라의 무심한 말에 그는 펄쩍 뛰었다.
“안 돼. 나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어.”

미라는 삼십 년이나 기다린 사람이 석 달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놀리려다가, 지금 파올로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진지하게 의논했다.
“무슨 수가 없을까, 파올로? 주말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낼 수 없대?”
“환자밖에 볼 수 없대. 이거 원, 내가 환자로 변장할 수도 없고.”
“그래, 그거다, 파올로. 병원에 전화해서 닥터 크리스티에게 진료 신청을 해.”

그의 침울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살짝 서렸다.
“그래, 나는 가명으로 신청할 테다. 크리스티가 아무것도 모르고 진료실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놀라서 기절하게. “
“그래, 너는 심장이 아프다며 진찰대 위에 웃통 벗고 누워 있는 거야. 사랑병을 앓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잖아? 진찰하는 데적어도 삼십 분 정도는 걸리지 않나?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아쉬운대로 괜찮지 않아?”

파올로는 혹시나 싶었는지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미라, 나는 지금 농담하는 거야.”
미라 역시 진지하게 받았다.
“파올로, 나는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에이, 어떻게 정말로 그래? 크리스티가 얼마나 나를 실없이 보겠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크리스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녀를 정말로 삼십 분만 만나고 오게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럼 어때? 너는 최선을 다한 거잖아? 평생 손해 보지 않고, 잃은 것 없이 살아서 너는 행복했어?”
“그래도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록 더욱.”

그녀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드디어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시간이 많지 않아. 누구나 시간이 많지 않아. 사랑의 열병을 앓아 보지 못한 채로 죽으면 좋겠어?”
언젠가 그녀가 그에게 하려다가 꿀꺽 삼켜 버렸던 말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금방 답장을 쓰는 버릇이 있는 파올로가 그녀의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미라는그가 미국에 갔을 거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믿어 버렸다. 골목길의 가로등 밑에서 소음에 섞여 불투명하게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생각났다. 나도 언젠가는 무언가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게 될지도 몰라.

미라는 공연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이자 강변의 수목은 가을빛으로 처연했다. 가을에도 진초록 물을 먹은 잔디위에 샛노랑과 빨강의 낙엽이 난데없이 흩어졌고, 이들은 비스듬히 빗겨가는 아침 햇살을 받아 비현실적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의폭포는 그날따라 유난히 콸콸거리며, 거센 거품으로 물안개를 피워 올렸다. 뮌헨은 날이 맑았지만 알프스 계곡엔 간밤에 비라도왔는지 물이 조금은 탁하게 불어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폭포에게 말을 걸었다.

하이, 사샤? 화났어? 아니지? 비가 와서 그냥 기분이 나쁜 거지? 사샤, 천상의 행복이 짧게나마 우리같이 평범한 인간들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줘서 고마워. 그때의 사랑을 기억하고 또 기대하며,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줘서고마워.

언젠가 사샤에게 말해 주려고 남겨 두었던 수많은 말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갇혀서 몸부림을 쳤다. 그가 알지 못하고 간 많은사연들이 안타까워서 미라는 가슴이 뻐근했다. 그녀가 할머니에게 하지 못한 말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빙빙 돌다가 가슴 속에서 답답하게 엉켰다.

낙엽을 금가루처럼 몰고 다니는 바람이 그녀의 가슴에 둥그렇게 구멍을 내고 지나가며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것들은 말로표현되기 이전에 이미 주고받은 열정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녀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녀의 가슴 속을 드나들던열정이라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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