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치마에 하얀 교복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은 나의 등짝에 초여름 햇살이 따갑게 박힌다. 서툰 농사일이 힘들어서 나는 등에 손을대고 허리를 편다. 감자 이파리가 넘실거리며 바람을 불러와 얼굴을 식혀 준다. 바다같이 너른 들판 끄트머리에선 남학생들이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그들이 짓고 있는 막사가 초록빛 물결 위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인다. 딱이 가고 싶은 곳도 없으면서 나는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망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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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노역을 마치고 우리는 기다란 그림자를 밀며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는다. 비스듬히 쏘는 저녁 햇살 속에 초가집과 기와집이납작하게 엎드린 동네를 몇 개 지나는 사이에 동무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마지막 골목길은 나 혼자서 걷는다. 키가 껑충한남학생이 저 뒤에서 걷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한번도 뒤를 돌아본 적은 없지만, 우리 동네에 사는 그 남학생의 뺨에 흙이묻어 있고, 손바닥에는 못이 박혀 있다는 것까지 나는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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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포기한다. 공부 잘한다고 나를 귀애하시던 일본 선생님이 일본에 있는 큰회사에 나를 추천해 주겠다고 하신다. 나는 일본에 가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다가 귀싸대기를 맞는다. 아버지는 턱수염을 벌벌떨면서, 너는 정신대 소문도 듣지 못했느냐고 호통을 치신다. 일본에 가고 싶었던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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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선생님의 소개로 나는 경성에 있는 일본 회사에 취직한다. 나는 조선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자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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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내내 뺨에 흙을 묻히고 내 뒤를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오던 그 남학생이 저 앞에서 걷고 있다. 나를 향해 휙 돌아서는그의 가슴이 장롱 문짝처럼 눈앞을 막는다. 그는 내게 연달래 빛 손수건을 내민다. 나는 사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처음으로쳐다본 그의 뺨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것에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받고 만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인사도 못하고,고개를 숙인 채 그를 지나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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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래 우리는 만난다. 못이 박히지 않은 그의 손바닥이 찰떡처럼 보드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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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배우자 없는 조선여성들이 징집되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급하게 매파를 푼다. 나는 시골에 사는 청년과 얼굴도 보지 않고혼약을 맺는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에 나는 동네어귀에서 매일 서성거린다. 떠나기 전에 그의 뺨을 한번만 쳐다보고, 그의 손바닥을한번만 만져 보고 싶다. 부모님은 내가 시집가기 전에 정신대로 끌려갈까 봐 이제는 밖에도 못 나가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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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 후, 나는 신문에서 사진을 오려낸다. 위안부 출신의 조선여인들이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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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일그러진 신랑의 얼굴이 호롱불에 어른거린다. 딱딱하게 못이 박힌 손으로 동산같이 부른 내 배를 만지며 신랑은 소리도 내지않고 숨도 안 쉬면서 운다. 내일 아침이면 그는 멀리 떠난다. 나는 시집 온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열여덟 살 난 새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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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징용에 끌려가던 날 나는 정신을 잃는다. 며칠 후에 깨어나, 내 뱃속에서 움직이던 애기를 찾는다. 내 배보다 더 작은,벌거숭이 애기묘. 시어머니는 도회지에서 온 며느리가 부실하여 종손을 연달아 잃었다고 나를 미워하신다. 나는 죽을 수 있을 정도의기운만 차리면 죽을 결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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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추운 섬나라에서 석탄을 캐고 있다는 소식이 온다.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 때문에 나는 차마 죽지 못하고, 무서운 시댁을 뜨지도 못하고 지옥같은 십 년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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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흙이 묻지 않고, 손바닥이 보드라운 남자와 마주친다. 새벽의 우물가에 서린 물안개를 뚫고 갑자기 나타난 그의 가슴이 장롱문짝처럼 내 눈앞을 막아 선다. 나는 모로 비껴서서 깊숙히 고개를 숙인다. 그도 말없이 허리를 꺾는다. 나는 그의 뺨을 한번만쳐다보고, 그의 손바닥을 한번만 만져 보고 싶어서 물동이를 버리고 그를 따라간다. 신랑이 사할린 탄광에서 폭발사고로 죽었다는소문이 돌 무렵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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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생을 살아서 견뎌야 할 이유가 두 개로 늘었다. 공부 잘하는 내 애기를 나는 상급학교에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싶다. 뺨에 흙이 묻지 않고, 손바닥이 보드라운 남자가 독일에서 석탄을 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