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은 현대미술계에 있어 특별한 해이다. 매년 있는 바젤 아트페어(스위스), 격년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이태리), 5년주기의 카쎌 도쿠멘타(독일)와 10년에 한번씩 열리는 뮌스터 조각전(독일)이 겹치는 해이다.

세계 미술계의 시선이 유럽의 6월로집중되는 특별한 시기에 나는 한 무리의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모든 미술제에 참여하는 한편 유명한 현대 건축물을답사하려는 그룹이었다. 함께 다니며 건축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망설이던 나는 그들이 보내온 알찬 답사 프로그램에 탄복하여 수락하였다. 전공인들도 아닌데 그렇게 수준 높은 일정을 짜서 강행군을 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준비에 앞서 나는 내가 이 그룹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란 무엇일까 궁리해 보았다. 각 건축물에 대한 세부적인설명보다는, 건축물을 통하여 시대와 문화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는 능력을 일깨워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여행과답사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를 읽는 요령을 터득하시도록 유도하는 것을 나의 숙제로 삼았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하고 오는 일행과 늦은 저녁에 취리히 공항에서 조우했다. 내가 대체 어떤 사람들과 장장 열흘을 함께 보내게될지 불안감이 없지 않았는데 첫 만남에서 모두 선하게 웃어주어서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도 관장님의 인상이 온화한 것이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브레겐츠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전날 베니스를 관광한 일행에게 베니스에 대한 설명을 드렸다.

venedigplanklein.jpg베니스
베니스는 초기 중세시대인 6세기에 침략자의 위협을 피해서 바다 끝까지 도망온 농민들이 개펄을 억척으로 개간해서 세운 도시이다(백 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베니스엔 이백개에 가까운 운하가 실핏줄처럼 흐르고, 그 운하를 사백 여개의 다리가 또 연결하고있다). 고생을 할 망정 지배 받고는 살지 않겠다는 반골정신은 대를 물려 이어와서 베니스는 중세시대와 르네상스를 거치는 동안유럽에서 유일하게 종교권과 왕권의 지배를 받지 않은 자유도시가 되었다.

농민의 자손들은 항구도시를 이루어 해상을 업으로 삼는 기민한 적응력을 보이는 한편 땅을 끔찍하게 아끼고 알뜰하게 사용하는 옛전통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베니스라는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해 왔다. 이런 양면성, 전통과 자유라는 상반개념의 양면적성격은 도시의 구석구석에 끈끈하게 배어 있다. 이는 오늘날 도시를 점령해 버릴 듯 무서운 숫자로 몰려와 돈을 물 쓰듯 쓰는관광객들 틈바귀에서 자신들의 일상을 도도히 지켜내는 주민의 힘으로 나타난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용할 양식을 벌면서도 자신들의터전을 관광객의 편의에 맞추어 개발하지 않고, 관광객으로 하여금 주민들의 전통에 맞추어 살다 가도록 요구하는 지혜야말로 베니스의매력이자 관광객들이 이 도시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생명력은 끔찍하게 낡은 주택건물들에게서 풍긴다. 속고 속이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끈질기고 의연하게 일상을 유지해 온보통 사람들의 생명력이 동그랗게 닳아 버린 문틀에서, 바스라질 듯 낡아 삐걱이는 덧창문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다. 화려한 무대뒤에서, 풍상에 절은 가옥을 끝없이 보수하며,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낡아빠진 발코니에 빨간 제라늄을 가꾸며, 도도하게 일상을지켜내는 힘.

대낮에도 어두침침한, 주택가의 골목길은 베니스의 숨은 매력이다. 갑작스런 어두움에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면, 길의 폭에 비해서터무니없이 높이 솟은 건물들이 양쪽으로 이마를 마주하고 서서,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골목길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찰랑대며 물안개와 쪽배를 이고 있는 곳에서는 음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긴다. 여유롭게 물에 발을 담그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건물들은 관찰자의 기분에 따라 음탕하게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게 보이기도 하고, 낭만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서로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고옥들은 마치 한 줄에 끼워진 구슬목걸이처럼 사이좋게 이웃집에 기대어 서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건물마다 제각각 태어난 시대의 양식을 고집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자긍심 있는 개인주의자들이 어울려 만드는 전체의 조화랄까,연륜의 자존심이랄까, 자신의 문화를 긴 세월 동안 중단 없이 이어 올 수 있었던 행운아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venedigsanmarkoklein.jpg무대의 배경이 이렇게 단단하니 이 도시의 명품건축이 돋보이지 않을 수 없겠다.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롱”이라 칭찬한 산 마르코 광장은 바닷가에 면해 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실루엣이 범상치않음을 예감하고 미리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걸음을 떼다 보면 마치 천둥치는 소리가 나듯 산 마르코 광장이나온다. 광장을 꽉 메우고 있는 관광객들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들은 10세기 이래로 꾸준히 축조된 인류의문화유산으로서 산 마르코 광장을 빙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세건축의 보석이라 불리우는 산 마르코 성당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듯 다섯개의 원형지붕으로 이루어졌는데도어딘지 서양건축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11세기에 동양권의 비잔틴 양식으로 축조된 이후, 몇 백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외부와 내부의 장식을 마무리하는 바람에 서양권의 고딕양식이 다분히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안팍을 금빛찬란하게 꾸미고 걸작급 벽화와모자이크를 내장한 산 마르코 성당은 과연 베니스의 하이라이트라 불리울만 하다.

산 마르코 성당의 옆으로 두칼레 궁전이 바다를 향해 테라스처럼 열린 소광장을 호령하듯 서 있다. 두칼레 궁전은 베니스지방에서고딕양식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큼 출충한 건축작품이다. 궁전건축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의도는 외벽을장식하는 분홍색의 부드러운 돌빛과 함께 예술작품으로 순화되고 승화되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화려한 빛갈을 띈 캄파닐레 시계탑이 100 m의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에 걸쳐 축조, 보수되어오며 베니스의 상징으로서 자리 잡은 이 시계탑이 100년 전에 하루 아침에 이유 없이 무너져 버린 이변이 발생하였다. 원자재를그대로 사용하여 본래의 축조방법으로 다시 세워지긴 했지만 천년 전에 돌을 쌓았던 손길의 온기를 이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아쉽지만, 캄파닐레 시계탑에 마련된 전망대로 올라가자면 이 탑이 견고하게 새로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실핏줄처럼 섬세하게 골목을 휘돌아 흐르는 운하를 위에서 내려다 볼 기대에 가득 차서 전망대에 오른 사람이라면 실망할 것이다.암만 보아도 실핏줄 운하는 온데간데없고, 볼로냐같이 전형적인 이태리식 옛 도시가 붉은 기와를 보이며 얌전히 엎드려 있을 것이다.골목길 대신에 존재하는 베니스의 운하는 건물에 가려서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르코 광장은 저녁에 다시 가보면 훨씬 더 운치가 있을 것이다. 무섭게 붐비던 인파와 비둘기떼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한적한광장은 석양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나고, 어디선가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면 몇쌍의 남녀가 그 선율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출지도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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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iceilredentoreklein.jpg팔라디오**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면 그리스의 신전을 닮은 하얀 석조건물들이 아드리아 해의 새파란 물결 위에 백조처럼 떠 있는 것이보인다. 산 조르죠 마조레 교회, 레 치텔레, 일 레덴토레 교회는 16세기 건축가 팔라디오의 작품이다.

지구상의 건축가로서는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딴 “팔라디아니즘”이라는 한 사조의 창시자가 된 팔라디오는 실력으로 운명을 개척한사람이다. 공사판의 일개 석공으로 일하던 팔라디오는 당대의 유명한 지성인이자 재력가의 눈에 띄어 29세의 나이에 뒤늦게 인문주의교육을 접하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베니스에도 다섯 개의 작품을 남겼다.

팔라디오의 건축물에서는 가로, 세로, 높이가 우연에 의해 정해지지 않았다. 우주의 원리를 밝히기 위한 염원으로 모든 분야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던 숫자의 신봉설은 르네상스의 모태인 고대 그리스문화의 산물이다.

고대 그리스시대였던 기원전 6세기 때의 석학 피타고라스는 귀에 들리는 음의 높낮이를 눈에 보이는 길이로서 측정할 수 있음을발견하였다. 가는 줄을 팽팽하게 걸어놓고 튕기면 음이 울린다. 이때 줄의 길이를 반으로 줄여놓고 튕기면 한 옥타브 높아진 소리가난다. 이는 줄의 길이가 1/2로 줄면서 진동수가 그의 역수인 2배로 늘어나서 생기는 물리적 현상이다. 또 줄의 길이를2/3으로 비율로 줄이면 진동수가 3/2로 늘어나면서 5도음정(Quinte 예를 들면 도에서 솔)의 차이가 나고, 줄의 길이를3/4으로 줄이면 진동수가 4/3으로 늘어서 4도음정(Quarte 예를 들면 도에서 파)의 차이가 난다. 이 Oktave,Quinte, Quarte는 고대 그리스 음계조직을 구성하는 기본 삼요소이다.

우주의 법칙을 밝히는 일이 최대 관심사였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수학은 곧 철학이었으며, 수학의 기본숫자인 1, 2, 3,4가 조합되어 이루는 비율이 음악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이 숫자를 이용한 비례(예를 들어 1:2, 3:4, 2:3,1:4)가 세상만물을 형성하는 신비로운 조화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이런 철학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활을 꾀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인 팔라디오의 지침이 되었다. 팔라디오는 그시대의 건축가로서는 드물게도 자신의 이론을 책으로 남겼다. 그가 유럽 대륙을 넘어 해외에까지 명성을 날린 데에는 이런 필적의힘을 무시할 수 없다.

(이 글에서 베니스에 대한 설명은 제가 소설방에 시리즈로 올리는 “물안개의 집, 5장 격정”에 나오는 묘사와 일부 중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