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친구가 우울하다길래 좀 웃겨 주려고 썼던 글입니다. 가뜩이나 날씨도 스산스러운데 우리같이 웃자고요.




일 탄!

나는 얼마 전에 남편하고 백화점에 갔다가 어깨에 끈이 달린 섹시한 원피스를 하나 보았다.

나: 나 이거 살까? 우리 춤 출 때 입으면 좋겠다, 그지?
남편: 글쎄, 이런 걸 네가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봐. 너 조금 있으면 할머니 된다?
나: 어, 그래? 그럼 꼭 사야겠군.

그렇게 해서 나는 회색의 나폴나폴하고 섹시한 원피스를 입고 춤을 배우러 갔다. 남편이 나를 쿡 찌르며 사람들이 내 옷을 칭찬을한다고 했다.

나: 거 봐. 옷걸이 좋은 할머니는 아무거나 다 입어도 된다니까?

남편에게 옷걸이라는 말을 직역해 줬더니 우스워서 죽으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노상 쓰는 말인데 내가 재치있게 지어낸 줄 안다.

어느날 한국에서 누가 검은 색조의 아름다운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어서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세상에! 나의 섹쉬 원피스랑 딱맞는 것이 아닌가? 고상한 색상이며 디자인이 나의 우아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원피스를 위하여 일부러 맞춘 것 같이 잘 어울렸다.어깨까지 다 드러난 상체에서 댄스홀의 조명을 받고 반짝이는 목걸이. 짐짓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찰랑이는 팔찌.

남편: 너 참 이쁘다! (게슴츠레…)
나: 그지? 만들어 준 사람이 나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라고 그랬어.
남편: 엉? 우우우…우하하하! 미모? 우하하하.

우리 신랑은 예으가 엄따!




이 탄!!

하루는 시내의 옷가게 앞에서 남편이 나를 쿡 찔렀다. 쇼윈도우에 걸린 하얀 원피스를 가리키며 나한테 잘 어울리겠다며 사라고하였다.

나: 예쁘긴 예쁜데…근데 이건 끈도 없이 가슴에 걸치는 거잖아? 언제는 나더러 할머니라더니?
남편: 옷걸이 좋은 할머니는 아무거나 다 입어도 된다며? 당신은 몸매가 이쁘잖아?
나: 아으, 그래도 저건 안 되요. 이쁘고 미운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가슴이 없어서 옷이 밑으로 줄줄 흐를 거라구.
남편: 그래? 언제는 자기 옷걸이 좋다더니…여자들은 복잡해. (중얼중얼)

나를 우습게 보길래 막 우겼더니 정말로 저렇게 무조건 다 믿을 줄이야? 앞으론 남편한테 뻥을 칠 땐 좀 조심해야겠다.




삼 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정식 댄스파티에 초대받았다. 정장을 하고 오면 좋겠다고 초대장에 쓰여있었다.남편은 넥타이가 없다고 자기는안 간다고 하였다. 나는 옷보다 춤이 더 중요하니까 그까짓 옷에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서 재미나게 놀자고 꼬셨다. 그날 입을적당한 옷을 내가 알아서 골라줄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장담하였다. 당신은 몸매가 늘씬하니까 까만 바지에 하얀 노타이만 걸쳐도분위기가 근사하다고 추켜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날이 와서, 내가 믿고 있던 까만 바지를 입어보던 남편이 비명을 질렀다. 단추가 잠기지 않는다고 했다.

나: (당황해서) 어, 그게 왜 안 맞아? 아버님 장례식 때 산 거잖아?
남편: (괜히 화를 내며) 그게 언제 일인데 그래? 벌써 오래 전의 일이잖아?
나: (상대가 화를 내니까 나도 심술기가 동해서) 삼 년 사이에 당신 배가 그렇게 나왔단 말야? 그거 심각한데?
남편: (시비조로) 심각하긴 뭐가 심각해?

남편이 청바지는 절대로 안 입겠다고 하였으므로 옷장을 다 뒤집어서 색상이고 스타일이고 상관없이 무조건 몸에 맞는 바지를 하나찾아냈다. 미색의 여름바지. 하얀 와이셔쓰랑 절대로 안 어울렸지만 나는 귀찮아서 그냥 멋있다고 그랬다.

내가 입으려고 했던 옷에도 문제가 있었다. 딱 달라붙는 천이어서 노브라의 가슴부분이 영 이상했다. 그런데 브라자가 어디 갔는지도대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에 한국에 갔을 때 아는 언니가 억지로 줘서 하고 다니다가 그냥 들고 온, 나의 유일한브라자였다. (그것은 나중에 우리 딸의 옷장에서 나왔다. 그때 걔는 가슴도 없었는데, 어허!)

브라자를 찾으려고 옷장을 마구 뒤집다가 구석에서 하르르 야시시한 옷을 하나 발견하였다. 십오 년쯤 전에 내 여동생이 나더러입던지 버리던지 하라고 자기가 안 입는 옷들을 잔뜩 보내준 적이 있는데 거기에 묻어온 옷이였다. 파자마 같기도 하고 파티복같기도 한 것이 하여튼 좀 특이해서 딸아이가 혹시 카니발 축제 때라도 장난삼아 입을라나 싶어서 버리지 않고 두었던 옷이었다.

내가 입어 보았더니 의외로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앞에 뭐가 하르르하니 달려서 브라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점이 있었다.

남편: (놀래서) 그거 입는다구? 잠옷바지처럼 생긴 댄스복도 있어? 파티장에서 그런 옷을 입는 사람은 세상에 당신 하나 밖에없을 걸?
나: 두고 봐. 내가 입으면 뭐든지 다 멋있어 보인다구.

화장을 정성들여 하고 예의 그 목걸이와 팔찌를 둘렀더니 그럴듯 해 보였다. 몹시 흡족했다.

파티는 즐거웠다. 대부분이 정장과 무도복 차림이었지만 나름대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면서도 정장은 피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평소처럼 청바지 차림인 사람들도 있었다. 내 옷은 특이해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봐도 그렇고 남들이 칭찬하는 바를봐도 그렇고 내 옷이 제일 멋진 것 같았다.

파티가 끝나고 내가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나: 오늘 파티에서 어떤 옷이 제일 예뻤어?
남편: 당신 옷.
나: 그 다음으론?
남편: 그 다음으론 한참 아무 것도 없어.
나: 한참 아무 것도 없는 것 다음으론?
남편: 아직도 한참 아무 것도 없어.

아이 좋아라. 앞으로는 파티에 갈 때마다 이 옷을 유니폼처럼 입으리라. 평생 파티복 걱정은 놓았구나. 그 굳은 돈으로 뭘 할까?




사 탄!!!!

크리스마스를 시댁에서 보내기로 하여 떠나기 전에 밀린 빨래와 집안청소를 하였다. 복도의 구석에 며칠 전부터 놓여있던 플라스틱봉지를 치우면서 보니까 고린내가 진동하는 양말이 한 켤레 들어 있었다. 아들아이가 스노우보드를 타면서 신었던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집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니. 양말을 우선 빨래통에 던져놓고 청소부터 마쳤다.

그런데 그 양말을 빨았는데도 빨래통에서 자꾸 고린내가 나는 것이었다. 으악, 내 파티복! 빨래통에 들어있던 내 파티복에 그고약한 양말냄새가 배었던 것이다. 당장에 빨지 않으면 이 고린내가 영원히 배일까 걱정이 되었다. 평생 입기로 작정한 옷인데…

나는 파티복을 세탁기에 넣고 돌돌 돌려서 깨끗하게 빨았다. 흐믓한 마음으로 널려고 하는데 질감도 좀 이상하고 크기도 좀 이상해진것 같았다. 자세히 보았더니, 으악, 줄었나 보다! 떨리는 동작으로 팔을 꿰어보려는데 실밥이 우두둑 터졌다. 정말로 팍 줄었다.아동복 크기로 줄었다.

매우 상심스러웠다. 공짜로 생긴 이 옷으로 앞으로 두고두고 큰돈을 절약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마치 로또에 당첨이되었다가 취소된 것처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오 탄!!!!!

시댁에 가면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와 대화하는 일이 고역이다. 우리 시어머니는 쉬지 않고 대화를 원하시는 분인데 안 그래도 말수가적은 남편은 시댁에 가면 말수가 더 줄어든다. 그래서 아들네의 생활이 궁금한 시어머니께 이런저런 썰렁한 얘기라도 끊임없이해드리는 건 나의 일이 되었다.

나중엔 하도 할 말이 없어서 내가 파티복을 잘못 빨아서 줄어든 얘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반색을 하시며 60년 전에당신이 입으셨던 댄스복을 내게 주겠다고 하셨다.

까만 플레어 치마였다. 천이 그런대로 고급스러웠고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나는 고맙다며 허리를 줄여서 잘 입겠다고 하였다. 그때시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셨다.

“허리 줄일 필요 없어. 나도 옛날에는 날씬했었다구. 예전의 내 몸매를 과소평가하지 마!”

나는 화낼까 웃을까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엔 웃으면서 그럼 허리를 안 줄이고 잘 입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내가 자는 방에 올라와서 입어 봤더니 치마가 엉덩이 밑으로 쑥 빠지려고 하였다. 나는 치마가 걸린 엉덩이를 하늘로쳐들고, 매트리스에 얼굴을 박고 킥킥 웃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날씬해도 그렇지, 키가 웬만한 독일장정보다 큰 분이 난장이 수준인 며느리의 허리랑 비교해서 자존심상하시다니. 같이 늙어가는 내가 예쁘기나 하면 말을 안 해.

(200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