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친구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식탁을 예쁜 낙엽으로 장식해 놓은 걸 보고 “아, 나도 모르는 새 가을이 다 지나가겠구나”싶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주말에 교외로 자연을 찾아 나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간 우리 가정에선 주말에 소풍을 가는 일이 드물었다. 아이들과 함께 가려니 항상 의견이 분분하고 몸이 굼떠서 지레 포기하게 되었고 나중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우리를 따라다닐 나이가 지났다는 걸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도 아이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우리 부부 중심으로 계획을 짜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렸다.

드디어 지난 주말에 우리 부부는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교외로 나갔다.남편과 둘이 전철에 탄 나는 참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고 가볍게 결정을 하고, 가볍게 길을 떠났다는사실이 퍽이나 대견스러웠다. 우리가 여태까지 굉장히 긴 시간을 아이들 위주로 살아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고, 드디어 우리도아이들에게서 해방이 되어 우리의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치 무슨 큰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아이들은 어차피 떠나는 존재들이야. 결국 내게 남는 건 저 이밖에없어.갑자기 남편이 무척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타인과 더불어 이렇게 깊고 그윽한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인생은 성공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갑자기 남편이 나에게 화를 냈다.남편의 표정과 말투에는 난데없이 나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화내는 이유를 묻는 나에게 남편은 이말저말 두서없이 둘러대며 서둘러 덮어두고 싶어했다. 나에게 말하기 싫은 것인지, 말할 수없는 것인지 난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문제일지도 몰랐다.

이런 일은 내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아주 가끔씩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가 나를 늘증오해왔다는 망상이 들며 마치 나의 존재가 부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힘으로 알아낼 수도, 해결할 수도 없이 나의 마음에깊은 상처만 주는 사건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절망했다. 외로움이 엄습했고, 내 삶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도 그와 둘이서 비둘기처럼 오손도손 늙을 기쁨에들떠 있던 것이 얼마나 가벼운 비누방울인지 실감이 났다. 한 달 내내 그에게 만족하고 행복하다가도 단 몇 초의 그의 표정하나에서 삶의 의지를 잃는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에서 인생의 큰 의미를 찾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 그가 특별히 부족한 인간이어서가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일이 원래 그렇게 허망한 일이로구나 싶었다. 아이들이건 파트너건 부모형제건 친구건, 끊임없이변형하는 존재끼리 기댄다는 일은 어제 본 구름을 다시 만나려고 찾아다니는 것 만큼이나 허망한 일이 아닐까?

그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기댈 것은 과연 있을까? 일? 과업? 이상? 그것도 아니다. 평생 그 어느 사업보다 내가 가장 큰 공을들인 자식사업에서도 지금 막 툭툭 손을 털며 시원해 하는 판이 아닌가?

이때 바람이 휙 불었다. 눈부신 햇살 속에 낙엽이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아, 저거다. 내가 기댈 것은 한 줌의낙엽, 한 순간의 바람냄새, 밤하늘에 총총한 별, 수줍게 서걱이는 갈대 한 포기. 내가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하는 한 아무도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든든한 나의 재산.

바로 그 순간, 남편이 나를 보고 씩 웃어 보였다. 새파란 하늘에 몽글몽글 피어나는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삼은 탓에 선해 보이는미소였다.

어, 저게 이제 와서 웃어? 그래 봐라, 엎질러진 물이지.

나는 습관적으로 앵돌아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공교롭게도 지금 막 든든한 나의 재산을 확인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진 판이라 굳이 화를 내자니 표정관리가 좀 수고스러웠다.

아으, 저걸 또 용서해 줘? 파란 하늘 때문에? 하얀 구름 때문에? 억울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날씨 덕분에 너그러워진 쪽으로 무게를 실어주기로 했다. 며칠을 달달 볶고 풀어지나 지금 그냥 풀어지나 달라지는것은 어차피 하나도 없다는 것은 지난 20년이 증명하는 바였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량하게 굴 것이고 그러다가 또언젠가는 내 뒤통수를 칠 것이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연이 선물하는 화려한 오늘을 구원하는 것이 내게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깨닫는 것은 중년의 특권일 것이다.

슬며시 쳐다봤더니 그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웃어보였다. 낯익은 미소,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나의 재산목록 1호가 되기도 하는 그 미소가 나의 변치 않는 재산인 가을 하늘과 겹쳐졌다.

스스로 늘 변화하는 인간들이 주고 받는 눈빛 역시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형상이렸다. 구름이 변한다고 자꾸 서운해하면 나만 손해 아닌가? 상대방이 짓는 단 몇 초 간의 표정으로 그 사람이 내게 해 준 공을 잊고, 내가 평생 공들여 쌓은 관계의진정성을 의심한다면 나는 기분의 노예가 되어 항상 서운해하며 살겠지?

그날 우리는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호수 두 개를 빙돌았다. 암머제와 뵈르트제라고 하는 호수인데 중간에 커피도 마시고 점심도 먹으며 느긋하게 달렸다. 평평한 길만 달리니까 너무 심심해서 “산이 끼지 않는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 여행이 아니다”라는 공감하에 “안덱스”라는맥주로 유명한 수도원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덕분에 평지에선 볼 수 없었던 산동네들이 계절 속에 물드는 모습을 볼 수있어서 행복했다.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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