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바빠도, 바쁘다는 생각을 고질병처럼 달고 다니며 매사에 허둥대는 것이 나의 큰 단점이다. 시간낭비라는 생각에서 미루고 미루던 끝에 부인과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예상보다 일찍 끝난 날,

나는 시간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

제트기처럼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내 망막에 어떤 모습이 얼핏 비쳤다가 사라졌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머리속으로 그장면을 되새겨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전동도 아니고, 손으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발로조금씩 밀어서 앞으로 나가는 형국이었다.

몸은 빠르고 생각은 느린 내가 그 장면을 재연했을 때, 나는 반대방향으로 지나간 그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걸기대하지도 않았다. 무심코 뒤를 돌았더니, 그 할아버지의 속도가 어찌나 느렸던지 그는 한 블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부지런히발을 놀리고 있었다.

어떡하나? 어디로 가시는지는 몰라도 저 속도로는 어림도 없을텐데. 그런데 내가 가서 도와드린다고 하면, 혹시 자존심이 상해 하시지는 않을까?

좀 망설이던 나는 할아버지 쪽으로 걸음을 뗐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안 하면 실수도 안 하겠지만, 그 대신 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실수를 감수하고 뭔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제가 밀어 드려도 될까요? 마침 방향이 같고, 제가 시간도 많거든요.”
맨날 거짓말만 하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그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무척 좋아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밀며 블록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어느 방향으로 갈까를 물었고, 할아버지는 길을 손으로 가리키거나 고개를 끄덕이며알려 주었다. 휠체어의 등받이에 적혀 있는 양로원의 주소는 우리가 가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어디 딴 데로 가는중일 수도 있기에, 나는 할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여 가자는 대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

삼십 분도 더 걸려서 당도한 사거리에서 갑자기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맥을 놓았다. 나는 난감했다. 이를 어쩐다? 핸드폰이라도 가져왔으면 양로원에 전화라도 해 볼 수 있으련만.

마침 근처에 경찰서가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경찰서에 가서 물어 봐도 괜찮겠어요?”

어디로 데려다 준다더니 경찰에 인계하나 하고 오해할까 봐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럼, 그럼, 경찰서에 물어야지.” 대답했다.

문이 굳게 닫힌 경찰서의 초인종을 눌렀더니 들어오라는 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휠체어가 있어서 못 들어간다고 했더니, 밖에서는신고를 받지 않으니 무조건 들어와서 신고하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당신이 좀 나와 보란말야! 난 신고할 것도 없고, 단지 전화 한 통만 부탁하려고 하는 거니까 당신이 나오란 말야!

결국 경찰관이 밖으로 나와서 서류를 작성을 한 후 (독일사람! 미치겠다!), 양로원에 전화를 걸어서 문의해 주었다. 이 할아버지는치매 환자니 양로원으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양로원은 아까 내가 할아버지를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은곳이었다. 그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니! 뜻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땐 마음이 여유로웠는데, 치매 걸린 사람의 말을 믿고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또 그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바보같이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경찰관이 내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할아버지를 경찰에 맡기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할아버지의 정신상태가 지금 얼마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 놓고, 집에서 동떨어진 곳으로데리고 와선 경찰서에 넘겨주고 뺑소니친다고 오해할까 봐였다.

물론 할아버지가 오해를 한다고 해서 내게 손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늙어가는 할아버지의세상을 조금 더 삭막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바쁘다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내 인생에 영광이 있을 일은 없지않은가?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휠체어를 돌려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난 하는 짓이 매사에 왜 이렇게 어벙할까 싶어서 약간 슬펐다.

이때, 아까 경찰서에서는 자기 이름도 모르던 할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며 “먼 길이지?” 하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할아버지의얼굴에서 미안한 표정과 함께 얼핏 만족한 표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사업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만족감이연상되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난히 어벙한 사람을 만나서, 다른 날보다 유난히 긴 산보를 했다고 만족해 하는 듯한 인상이들었다.

나의 망상일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내가 관여한, 어떤 사람의 오늘 하루가 성공한 날이었다고 생각하니, 내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할아버지는 내일이면 오늘의 성공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많이 남지 않은 여생을 하루씩, 이렇게 성공적으로 채워나간다면그의 현재 입장에선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기를 나는 진심으로 빌었다.

내 발걸음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조금 더 쾌적한 산보를 위해서 좀 돌아가더라도 큰 길을 피해서 걸었다.

드디어 양로원에 도착했다. 지적으로 생긴 젊은 남자 직원이 나와서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를 맞았다.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은 그는할아버지께 “오늘 저 분을 먼 곳까지 유인했다면서요?” 하고 농담을 했다. 나는 데이트를 마친 후에연인에게 인사하듯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오늘 참 즐거웠어요. 고맙습니다.” 하고 작별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나의 발걸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오늘 큰 사업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지옥을 생각하며 “바보들이 만드는 천국”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빨간치마 작사 작곡).

지옥 속의 천국, 이단어는 내가 한 유태인 할머니의 강연을 들었을 때 떠올렸던 단어이다. 이차대전 와중에 유럽대륙횡단 기차가 폭격을 맞자, 기차에 탔던 승객들이 며칠 동안이나 한 방공호에 피신하며 겪었던 일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적국과 아국 출신의승객 스무 명이, 몇 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다같이 살겠다는 각오로 힘을 합쳐 마지막 빵 한조각, 마지막 물 한방울을 나눠 마시며 모두 생명을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삶의 어떤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방공호 안에서의 협동은 아마도 어느 한 사람이 제안하고 또 한 사람이 동조함으로써 시작된 일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어쩌면 위기감에서 서로 죽이고 죽느라고 다 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못 될지언정 동조하는 사람축에만이라도 든다면, 내 개인의 의지만으로도 지옥 속의 천국을 구현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어쩜 나는 내 생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평화가 흔들려서 매일같이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곳곳에서 시한폭탄째깍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우려했던 일이 조금 더 빨리 일어날지도 모른다. 환경 오염과 에너지 고갈에 의한 지구의 파탄이오기도 전에, 인간들이 그것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약육강식의 본능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오일전쟁이 그일례이고, 그 뒤를 잇는 종교전쟁의 이면에는 강대국들의 이권다툼이 숨어 있다.

내가 겨울의 실내온도를 19도 이하로 유지하고,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는 것만으로 이 엄청난 지옥화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런 와중에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옥 속에서 천국을 구현하는 일, 단 하나 뿐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내일도 나만큼 어벙한 사람을 만나서하루의 천국을 구현하기를 기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를 하며 가족들에게 나의 어벙함을 자랑했더니 남편이 나를 놀렸다.
“당신 실수했네에. 할아버지는 경찰차 타고 귀가하고 싶었을 걸? 내일은 좀 덜 어벙한 사람을 만나서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게 해 주세요 하고 지금쯤 기도하고 계실지도 몰라.”

어어? 구런가?


(200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