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날씨가 화창해서 모모를 만나러 유치원에 가는 길이 유난히 행복하다. 물이 많을 때는 뽀얀 옥색으로, 물이 줄면 맑은 초록으로반짝이는 이자 강을 따라 단풍이 지고낙엽이 날리는 오솔길을 자전거로 달리자면 내가 돈을 받고 이 일을 하는 게 미안할 정도이다.

오늘도 모모는 피곤한 상을 하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벙글벙글 웃었다. 유치원에선 모모의사심 없는 미소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직 젖살도 안 떨어진 세살박이들이 기저귀를 차고 뒤뚱거리며 이 세상에 열심히 적응하는모습이 얼마나애틋하고 감동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뒷마당에서 아이들을 차례로 목마 태워 자두를 하나씩 따게 한 후, 자두 한 알을 아이들 숫자 만큼 등분하여 나눠먹임으로써 서로나누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치원 선생님의 느린 템포도 나에겐 감동스럽다. 선생님이 설거지하는 법이나 청소하는 법을 무슨 신성한의식이나치루듯이 고요하게 시범을 보이면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구경한다. 막상 하라면 아이들이 어찌나 못하고 딴짓을 하는지나는 막 도와주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한다. 선생님들은 세월아 가거라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조언을 줄 뿐이다.

지난 시간에는 선생님이 아이들 숫자만큼 색색의 줄을 가지고 와서 그것 하나 가지고 아이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오래 놀았는지모른다. 줄을 만져 보며 그 느낌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바닥에 길게 늘여 놓고 줄을 따라 조심조심 밟고 다니기도 했다. 물질이흔한 세상에서 별것 아닌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며 상상력을 깨워주고 환상을 심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까지덩달아 부자가 되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은 크는 속도도 다르고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늦된 것인지, 성격 탓인지, 지능 탓인지, 집안의 습관인지, 혹은장애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모모 말고도 경미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또 있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눈치챘을 정도다.

아이들은 친구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가릴 줄 모른다. 그냥 다 다를 뿐이다. 아이들은 간혹 내게 묻는다.모모가 더 크면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모모가 더 크면 신발을 혼자 신을 수 있느냐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지 않다'‘고대답한다. 아이들은 왜 그런지 묻지 않는다. 그냥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기저귀를 찬 두살 반짜리 아기가 뒤뚱뒤뚱 모모의 신발을가져와 신겨주려고 애를 써서 나는 오늘 눈물이 나려고 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율동시간의 많은 놀이들이 점차 모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에 맞춰 자유스럽게 뛰어다니다가 신호를 받으면 약속한 장소로 모이는 놀이가 있는데, 요즘은 모모가 있는 곳이 자주 목적지가된다. 다른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나는 모모를 스케이트 보드에 눕혀서 밀고 다닌다. 이때 속도가 너무 빠르면 모모가 불안해하고너무 느리면 심심해한다. 신호소리가 나서 아이들이 모모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 때는 아이들이 흥분해서 모모 위로 엎어지거나 모모를밟지 않도록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모모를 스케이트 보드로 밀거나 내가 안고 뛸 수 없는 놀이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 모모에겐 앉아서 하는 역할이 맡겨진다. 드럼을두드리는 일이다. 모모가 명령을 내리는 대장이 되는 셈이다. 모모의 드럼소리에 맞춰 뛰는 아이들은 아직 때가 안 묻어서 그런지모모의 대장 역할을 샘내지않는다. 잘 뛰는 놈은 뛰고, 못 뛰는 놈은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당연하고 공정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합리적인 노동분담인데도, 힘에 따른 서열에 익숙한 어른인 나의 눈에는 이런 일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오늘 나는 더욱 특별한 경험을 했다. 율동시간 전에 운동복으로 갈아입을 때의 일이다. 나는 모모의 옷을 먼저 갈아입힌 후, 다른아이들을 도와주느라고 모모를 잠시 바닥에 눕혀 놓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아이들이 모모가 누워 있는곳으로 슬금슬금 모여들더니 모모 옆에 눕기 시작했다. 나란히 서서 기다리는 대신에 나란히 누워서 기다리니 모모는 장애가 없는 사람이랑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모모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세살박이 아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했는가? 개인의 결함이 드러나지 않는 방법을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현명한 공생의 법칙을 실현하지 않았나? 물론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겠지만 이것을 보는 내 마음 속에선 인간에 대한신뢰심과 함께 슬픔이 솟았다. 이런 아이들을 어른들이 망가뜨리고 있구나. 이런 아이들었던 우리 어른들이 이렇게 망가졌구나.

모모가 갑자기 손을 뻗어 아이들을 만졌다. 아이들은엎치고 겹치게 누운 채로 모모를 마주 쓰다듬기 시작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모모가 갑자기 손을 뻗쳐 아무나만지는 것이 무서워서모모 옆에 앉지 않으려고 울던 아이들이었다. 웬 조화일까? 그동안 아이들은 갑자기 손을 뻗치는 모모의 행동에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것을알아냈음이 분명하다. 서로 안다는 것, 서로 습관이 든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과 통하는가 보다. 그를 믿고 그의 특성을 인정한후에는 그를 따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는가 보다.

(요샛말로 ‘‘자뻑기'‘가 있는 내 생각으론 나의 한국엄마식 돌보기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모모를휠체어에 앉혀두지 않는다. 안고 다니거나 같이 누워서 논다. 그래야 모모가 보거나, 배우거나, 놀 때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고생각하기 때문이다.또한 나는 한국식으로 업어 키우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모모를 많이 쓰다듬는 편인데, 어떤 때는다른 아이들이 부러운지 자기 머리를 쑥 들이밀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적응하는 상황의 수혜자는 어쩌면 모모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모가 다른 아이들의 우호적인태도를 감지하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모모는 자신을 직접 돌봐주는 사람 하나만 잘해 주면 항상 만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꼬마들이 이 상황의수혜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모모 덕분에 잠시나마 상생의 본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경험은 훗날, 이들이 차가운경쟁사회에내동댕이쳐진 후에도, 남과 자신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날 것이다. 남과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감정의 소모가적어 실력발휘에 거침이 없을 것이다. 남과 자신에 대해 너그럽다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자 사회의 힘이 아닐까?

어스름이 서려 빛이 살짝 바랜 저녁공기를 가르며 나는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오늘은 모모가 행복해 보였다고 생각했다. 모모는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모모가 행복할 수 있는 곳에 사는 내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리?


(모모에 대한 첫 글 ‘‘휠체어에 앉은 아기'‘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독일의 모든 유치원에서 장애아 통합교육을 하는 건 아니다. 아주 소수이며 아직 실험단계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