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이미륵이란 사람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미륵은구한말 시대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게 쫓겨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독일로 왔다.

그는 고국에서 산 시간보다훨씬 긴 31년의 세월을 독일에서 공부하고 문학활동을 하며 보낸 후 독일의 공동묘지에 뼈를 묻었다. 처자가 살고 있는 한국을그리워하며 한국에서 보내 준 회색 두루마기를 늘 입었다는 그가 어째서 해방 후에도 고국땅을 한번도 밟아 보지 못했는지 그 이유는아무도 모른다.

그를 알았던 독일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에 대한 일화는 그의 독특한 지성과 해학을 보여 준다. 나치의 기세가 전유럽에등등하던 시절에 스웨덴을 여행하던 이미륵은 기차간에서 만난 독일인에게서 히틀러의 찬양을 한참이나 듣고나서 히틀러가 도대체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독일인이 당신은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기에 위대한 히틀러도 모르냐는 질문에 이미륵이서슴없이 나는 독일에서 왔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1967, 94쪽).

또 이미륵이 독일의 기차 안에서 만난 독일 노인과의 대화는 그의 번득이는 해학을 보여준다. 동양인 이미륵이 옆자리에 앉은 흑인과독일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독일 노인이 “너희 나라 말”로 대화해 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 독일어와 “너희나라 말” 딱 두 개의 언어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독일 촌부의 오만과 무지에 대해 이미륵은 이렇게부드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말”에도 독일어처럼 사투리가 있는데 우리는 각기 다른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소통이불가능해서 할 수 없이 독일어로 대화하는 거라고.

또한 그의 맑은 선비정신을 보여 주는 일화도 있다. 전쟁 직후에 이미륵이 목수에게서 나무상자를 맞추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튿날화폐개혁으로 인해 그 돈이 휴지가 되자 이미륵은 새 화폐로 상자값을 다시 지불했다고 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 흉흉한 인심 속에보기 드문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이유랑, 이미륵의 묘소를 다녀와서, 2003).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전혜린의 책을 읽으며 이미륵의 묘지를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고, 독일인들이 경탄한 그의 인품이 자랑스러웠고, 그의 기구한 인생이 가여워서 알지도 못하는 그가 막연히 그리웠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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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비석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나는 독일로 오게 되어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어느날 대학기숙사 위층에 사는독일학생이 나에게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빌려 주었다. 차분한 문체로 이해하기 쉽게 쓴, 한마디로 깔끔한 책이었다.안으로 고이는 동양인의 감성과 독일문학의 건조함이 우아하게 교배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독일에서 늙게 될 것이 점차로 확실해질 무렵에 나는 가족들과 함께 뮌헨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마음 속으로는항상 이미륵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다른 일로 바빠서 그의 묘지를 찾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연구차 잠시 뮌헨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여성이 내게 이미륵의 옛 비석을 탁본으로 뜨는 것을 한번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했다.이 여성의 전공은 동양 고건축이고 나의 전공은 서양 고건축이었으므로 우리는 각기 다른 방법론을 교환하며 서로 배우고 있던중이었다. 나는 기회다 싶어서 얼른 쫓아 나섰다. 나의 아이들의 나이가 내가 이미륵에 대해서 처음 읽었을 때의 나이가 되었을때였다.

하늘이 새파란 초가을 오후에 우리는 국화꽃을 사들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뮌헨 근교에 위치한 그래팰핑 묘지에 닿았다. 독일의공동묘지가 그렇듯이 자연 속에 깊숙히 들어앉은 묘지는 거대한 공원처럼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다. 가지를 깊숙히 드리운 아름드리 고목밑으로 각양각색의 비석들이 줄맞추어 도열해 있었고 그 주위는 화려한 화단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죽으나 사나 개성이 다른 인간들의집합지답게, 관 하나 들어갈 만큼의 한뼘 땅뙤기들도 이웃들과 뚜렷한 경계를 그으며 각기 다른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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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선박처럼 생긴 예배당이 떠 있는 호수를 몇 바퀴 돌다가 우리는 드디어 이미륵의 묘지를 찾아냈다. 최근에 한국 정부에서새로 세워 준 고급 비석과 석단 옆으로 아담한 고급 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이미륵의 묘지는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있어서 마치부지런한 후손이 돌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언제 누가 다녀갔는지 비석 옆에 있는 꽃병에는 생화가 말라 있었다. 우리는시든 꽃을 뽑아내고 새 국화를 꽂았다. 수도가에서 물을 길어와 나무와 잔디에 물도 주고 풀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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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동행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아참, 술 안 가지고 왔지요?”
“어어, 술이요?”
“어디서 살 수 없을까요?”

나는 난감했다. 묘지에서 왜 술을 찾는다지? 나는 한국에서 제사나 성묘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신성한 묘지에서의 음주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의 난처해하는 표정을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
“독일에서는 묘지에서 술 마시는 거 실례에 속하나 보죠?”
“아마 그럴 거 같은데요.”

이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독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독일의 고등학교 상급반에서는 전공을미리 정해서 전공과목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게 되어 있는데, 독일어가 딸리던 나는 그나마 숫자가 글자보다는 만만한 탓에 물리와수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이 과목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수는 전 학년에서 열 명밖에 안 되었으므로 우리 급우들은 전부 친하게 붙어다녔다.

어느날 나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서 달걀 노른자를 날로 왕창 깨 넣고 분말설탕을 잔뜩 넣어서 달콤하고 고소한 독주 만드는 법을배워서 첫 작품을 학교에 한 병 들고 갔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우리들 열 명은 학교 맞은 편에 있는 공동묘지로 다같이 몰려가서돌아가며 병나팔을 불었다. 그리고는 알딸딸 기분이 좋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수업을 받고는 그 일을 잊어 버렸다.

지인이 공동묘지에서 술 얘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생각난 그 일화는 뒤늦게 나의 가슴을 쓸게 하였다. 그 당시는 철이 없어서아무것도 몰랐었는데 이제 내가 학부모가 되어서 생각하니,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망 나와 공동묘지에 가서 직접 만든 술을 돌려마시다 들켜서 중징계라도 받는다면 나는 부모로서 저거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 걱정 꽤나 했을 것이다.

“그럼 그만 두죠. 이미륵 박사님이 서운하시겠다.”
술에 대한 나의 소극적인 태도에 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 세운 비석 뒤 쪽으로 애초의 옛 비석이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자연석에 이미륵의 본명(이의경)이 한자로 판각된, 아주수수하고 소박한 비석이었다. 최근에 묘자리를 넓히고 고급 비석을 눈에 띄게 새로 세웠기에 망정이지, 글씨가 마모되어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비석만 하나 덩그라니놓여 있었다면 초행길에 이미륵의 묘지를 찾는 일은 불가능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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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이 묘사한 그 모습으로 묘지를 지키고 있는 옛 비석을 보자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내 스스로가 외국에서오랜 시간 살고 보니 이제는 그의 인생이 내가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기구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가 늘 고향을그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두는 곳이 고향일진데 그는 독일에서 독일인들의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알차고 맑게 잘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옛 비석을 물과 솔로 깨끗이 닦고 묵을 갈았다. 지인은 각종 곡식이 든 무명주머니들을 차례로 묵에 적셔 비석을 덮은한지에 살짝살짝 눌러가며 탁본을 떴다. 처음 보는 작업이 신기해서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손길을 주목하였다. 그녀가 경건한자세로 익숙하게 손을 놀리면서 가끔씩 고인에게 말을 건내는 것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박사님, 이렇게 깨끗하게 닦아 드리니시원하시죠? 그간 적적하셨어요? 한국말은 오래간만에 들어보시죠?

이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이상한 냄새가 살짝 내 코를 스쳤다. 그녀가 언제 향을 피워 놓았는지 하얀 연기가 한줄기 피어오르고있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나에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나의 것이면서도 내게는 낯설어져 버린 여러가지 것들이 한꺼번에고여올라 꽉 차버린 물통에 마지막 한 방울로 떨어져 내린 물방울로서 그 향내는 나를 넘쳐나게 만들었다.

확실히 증명된 사실만믿을 뿐 귀신이라든가 영혼을 믿지 않는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미륵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초월하고 세계인으로 살았던 이미륵이 그래도 한국인 후손이 온 것을 알아보고 특별히 더욱 반길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그가 독일에서 한국식으로 예를 받는 것을 쑥스럽게 여기기는 커녕 기뻐할 것 같은 마음이 강열하게 들었다.

나는 갑자기 술을 꼭 구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들어서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지인에게 술을 사오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한숨을놓는 기색이었다. 일요일이라 근처의 가게도 문을 닫았고 어디서 술을 살 수 있을지 몰랐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면 주유소가나온다는 말만 믿고 무작정 혼자서 걸어갔다. 초가을의 뙤약볕을 받으며 걸어 거의 한 시간 후에야 나는 주유소 매점에서 샴페인과과자를 사서 돌아왔다.

우리는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예를 올렸다. 술을 묘지에 골고루 뿌려 드리고 우리도 한잔씩 마셨다. 그간 독일친구들의맹숭맹숭한 방문을 받아온 고인이 오래간만에 고향사람들이 올리는 술을 받고 흐믓해하는 것이 내 마음으로 전해졌다. 아기를 낳고독일병원에서 주는 뻑뻑한 빵을 당연하게 잘만 먹던 내게 한국친구가 끓여다 준 미역국이 얼마나 맛있었는지가 갑자기 생각났다.고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그가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자주 오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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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마터면 술도 못 드릴 뻔한 것이 미안해서 우리는 한번 더 갔다. 이번에는 붉은 포도주와 과자를 넉넉하게 미리 챙겼다.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우리는 우산을 받고 향을 피우고 술을 올렸다. 지난 번에 조금밖에 못 드린 게 미안해서 술도듬뿍듬뿍 뿌려드렸다.

비바람이 너무 심하게 쳐서 우리는 호수 옆에 있는 예배당으로 갔다. 깊숙히 드리운 처마 밑에는 사람이앉으라고 벤치도 놓여 있었다. 거기에 앉아서 우리는 요란한 비소리를 들으며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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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예배당. 호수 위에 배 모양으로 지어져서 요단강을 넘어가는 느낌을 준다.

나는 일 때문에 만난 그 지인에게 언니라고 부를까 말까 망설였다. 서로 알게 된지 십오 년이 넘었고 이제는 마음을 터놓고개인적인 얘기를 나누는 사이라서 나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 독일생활에 길들여 폐쇄된 내정서가 그것을 막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경계를 허물고 그렇게 엉기는 것을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남의속도 모르고 나뭇잎들이 비바람에 자글자글 흔들리며 나를 자꾸 재촉했다. 나만큼 독일에 오래 산 이미륵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2006년 4월)

이미륵 박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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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랑, 이미륵의 묘소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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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랑, <무던이>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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