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기에 남편과 함께 부엌 가구를 만들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임신중이었으므로 혼자 페인트칠을 하던 남편이 서랍 손잡이는무슨 색으로 칠하랴고 물었다. 나는 서랍이 일곱 개니까 무지개색 순서로

차례로 칠하라고 말했다. 이에 남편이 무지개색이 뭐냐고물었다. 나는 놀라서 넘어질 뻔하였다. 물리학 전공이 무지개색도 모르면 어떡하냐고오?

빨.주.노.초.파.남.보!

색을 다 칠하고 나서 남편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한국의 학교에선 이런 것도 배워? 아, 그럼 학교에서 이런 걸 배워야지이런 것도 안 배우면 독일 학교에선 도대체 뭘 배우냐? 남편이 큰 소리로 웃었다. 적외선과 자외선 파장 사이에 있는 색이 어찌일곱 개 뿐이겠냐? 거기 금을 그어 일곱 개라고 단정하고 이름을 붙이냐?

(나는 이 글을 쓰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중2 과정에 다니는 딸아이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너 학교에서 무지개색이 무슨무슨색인지 배웠어, 안 배웠어? 그걸 왜 배워야 하는데? 그거 모르면 하늘에 무지개 떴을 때 무지개인지 몰라 볼까봐? 깔깔깔.)

사회마다 “당연한 사실”이 각기 다르게 존재한다는 걸 그때 절실히 느꼈다. 최근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다.

근래에 나는 뮌헨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기자를 알게 되었다. 내가 독일의 역사청산에 관한 다큐멘타리 방송 제작에 참여할 때였다.나처럼 독일에 살고 있으면서 독일의 역사청산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각은 어떤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 방송에들어가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인터뷰를 할 여러 나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물색하고 섭외하던 중, 내가 언젠가 독일어로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 일본인 기자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정직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기때문에 딱이 이 방송건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라도 한번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 그때는 한창 일본이 독도 문제로 한국인의 속을긁을 때였다.

만나 보았더니 그는 예상대로 대단히 박식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청산의 행위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있었다. 나는 그를 방송에 참여시키는 것을 금방 포기하였다. 자칫 그가 독일인과 비교되어 단순무식하고 파렴치한 일본인의 전형으로그려질까 우려되어서였다. 나는 대중매체의 함정인 흑백논리를 경계하고 있었고 손쉽게 비교하는 싸구려 평가를 혐오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화통하게 마음이 통하는 이 사람이 어째서 한일관계에 관해서만 상반된 의견을 보이는지 그 이유가궁금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우리 한번 털어놓고 솔직하게 한일 양국의 관계에 대해서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하였다. 연일시끄러운 독도 문제만 봐도 그렇지, 한국과 일본은 둘 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데 이렇게 끊임없이 동문서답이오고가니 우리라도 그 연유를 알아보자고 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발견하는 자료에 의하면 독도는 틀림없는 한국 땅인데, 일본에서는 또 자신있게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니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듯하다. 서로 자기네 나라 식의 논리로 우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네 나라에서 가져온 자료를 가지고,우리 둘에게 익숙한 독일식 논리로서 이 자료들을 검토해 보자. 정말로 어느 나라의 어떤 자료가 정확한 것이고 어떤 자료가부정확한 것인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사해 보자. 만약에 독도가 일본 땅이 확실하다면 일본이 가져가야지 어쩌겠나?”

이런 목적으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화가중요하였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알고 싶어하는 욕구”와 “정직함”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두 번째 만남에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전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했던 연설을 프린트해 왔다. 그 내용에 대해 질문이 있다고하였다. 노 대통령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했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를 침략했다고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일본은 중국과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했지 한국과는 전쟁을 한 적이 없는데 왜 한국 대통령이 침략운운 하느냐는 거였다.

내가 한국인들은1904년의 한일의정서 이후 식민지 시대 전체를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본다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한일의정서에 이어한일합방은 조선의 정부의 승인을 받고 국제재판소에서 인정받은 합법적인 행위였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은 한국을침략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나서 “그 당시의 합법성을 한국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침략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로서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몇몇 한국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친일에 의한, 그리고 일본의 외교술에의한 외형적인 합법성을 한국 국민이 인정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시오, 남에게 아무 해꼬지도 하지 않고평화스럽게 살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나라 군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땅을 빼앗고 주권을 빼앗는 것이 침략이 아니면 무엇이겠소?그리고 그 당시의 국제재판소는 힘 센 아이들이 과자 나누어 먹는 클럽 아니었소?”

그와 나 사이에는 많은 “개념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일제시대는 다수의 한국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한 “문화말살과 수탈의 시대”지만 그가 생각하는 일제시대는 다수의 한국인의 지지를 받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가국제재판소에서 승인받은 일본의 합법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나는 한국 황제의 명으로 헤이그에 갔다가 외교권이 없는 국가의대표라 하여 발언권도 얻지 못하고 자결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를 하였다. 즉 힘에 밀려서 주권을 강제로 빼앗긴 것이지 결코 우리국민이나 정부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자진해서 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나는 그가 믿을 만한 근거를 찾아서제시하였다.

그가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바탕으로 내게 질문을 했을 때 내가 그의 자질과 진실성을 믿고 성실하게 답변했듯이 그도 나의말을 믿어 주었다. 한일합방을 한국 국민도 한국 정부도 결코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일본 정부의 내선일체를 한국 국민들이 영광으로받아들인 게 아니라 치욕으로 여겨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는 내 말을 믿어 주었다.

그가 이 사실을 믿고나서부터는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다음 번에 만났을 때 그는 그간 일본에서 인편으로 급조한 책을몇 권 들고 왔다. 나의 말이 맞다는 전제 하에 조사를 해서 그 분야의 전문서적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한일의 역사를 사실대로다루고 있는, 몇몇 일본 학자들에 의해 오래 전에 쓰여진 이 서적들은 일반인들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반적인 시사 상식이 나보다 많은, 이 노련한 기자는 일본과 독일에서 찾아낸 전문서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쌓아갔다.그 과정에참여하며 나는 내용적으로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고하는 패턴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더욱 큰 수확이었다.

어느 날 그는 그가 연재하고 있는 일본의 일간지에 올릴 칼럼을 준비하고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 일본인들이라면 진보와 보수를막론하고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러일전쟁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였다. 일본인에게 러일전쟁은, 보잘것 없던 유색인종 일본이백인계 러시아에게 싸움을 걸어서 이김으로써 세계사의 무대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할아버지가 러일전쟁에 참전하였으므로 러일전쟁에 대한 그의 감정은 개인적으로도 각별하였다.

그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나는 그때 마침 돈 버느라고 한창 바쁠 때였으나 그의 칼럼을 순위 일 번으로 정하고 기꺼이 그를위해 시간을 할애하였다. 한국에서 러일전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그를 위해서 나는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에서각각 러일전쟁에 대한 칼럼을 찾아서 번역해 주고 설명해 주었다. 집중적인 대화와 질문을 통해서 그의 의견에 대한 논리성을검토하고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를 설득하려고 들지 않았다. 상대의 의견을 전적으로 인정하되 나의 의견 또한솔직하게 피력했을 뿐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견해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칼럼은 결코 한국인인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먼 앞날을 내다보고 지순한 정성을 다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 달 가량 연락을 끊었다. 그는 러일전쟁에 대한 연재 3편이 다 끝날 때까지 나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고싶지 않다고 하였다. 행여 무의식 중에라도 나의 영향을 받을까 우려가 된다고 하였다.

연재가 끝난 후 그는 칼럼 3편을 자동 번역기를 이용하여 한글로 번역해서 내게 이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그는자신의 칼럼을 한줄한줄 독일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의 글은 러일전쟁 참전용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유품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에 있어서 러일전쟁의 역사적 의미를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경험들을 들어가며 되새겼다. 그리고는 어째서 한국 대통령이 한국도 아닌 다른 나라들과 벌인 전쟁 때문에노골적으로 일본을 공격하는지 의아해했던 일, 그리고 한국인인 나에게서 그 이유를 설명 들었던 일을 적었다.

나의 설명을 듣고 그는 일본이 코끼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러시아니 중국이니 하는 목표만 쳐다보며 가느라고 자신의 둔한발밑에 짓밟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코끼리에 비유하였다. 아니, 그 당시의 일본 치정자들은 이를 알기는 알았다. 그래서치밀하게 조약과 국제적 승인으로 뒷마무리를 하였다. 오늘의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의 승리에만 촛점을 맞출 뿐 그 당시 한국에 일어난일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모르고, 그래서 한국인의 분노를 이해조차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일본인들이 과거의 일본 치정자들보다더 코끼리스럽게 퇴보한 현상이라고 그는 꼬집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지난 일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하는 사죄는코끼리의 인사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일합방의 기초가 된 한일의정서의 불법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중립 선언을 한 한국에 무장한 일본군대가 들어와서 반대하는한국인들을 유괴하거나 제거해버리고 몇 명의 친일 한국인에게서 서명을 받은 조약은 불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국제재판소가 그런한일의정서를 합법으로 인정한 것은 서구인들의 인종차별에 요인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일차대전 때 독일이 프랑스로 출전하기위하여 중립국인 벨기에를 허락 없이 무장으로 통과한 일이 국제재판소에서 단죄 받은 경우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행한동일한 짓을 국제재판소에서 방임한 이유는, 문명권 바깥의 저 먼, 후진적인 동양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에 있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칼럼을 소개하였다. 그는 조선일보 칼럼을 반박하는 데에 많은지면을 할애하였다.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는 러일전쟁 당시에 종군기자로서 활동하며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린 미국인 잭 런던의기사를 대거 인용하였다. 잭 런던의 기사를 통해서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 즉 제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는 한국의 무능한치정자와 비겁한 국민들의 상이 전세계에 부각되었다고 했다. 그런 사실은 나중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을 때 아무도 이의를제기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며, 조선일보 칼럼니스트는 그 당시 한국인들의 무기력함에 분노하고 있었다. 일본인 기자는 이조선일보 칼럼니스트가 조상의 무능을 탓하는 것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썼다. 일본인들이 한일합방을 정당화할 때 항상 하는 말이기때문이란다.

일본인 기자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잭 런던과 같은 시기에 한국에 머물렀던 독일인 종군기자 고트베르그의 기사를 인용하였다.고트베르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민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군들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일본군에게 피해를 주었다고한다. 잭 런던과 고트베르그는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 머무르면서 이같이 다른 기사를 썼다. 일본인 기자는 잭 런던이 한국민의약점에유난히 집착한 것을 두고, 잭 런던이 약육강식이라는 그 당시의 시대철학을 대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전쟁에 진 독일 민족은 (약육강식의 진화론적 원리에 입각하여) 몰락해서 싸다고 말한 유명한 독일인이 60년 전에 있었다. 그런 말에 귀를 빌려주는사람이 이제는 이 나라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나는 오랜 세월을 독일에 살고 있다.“라고 히틀러를 인용하는 문장과 함께그는 연재를 끝맺었다.

그의 칼럼을 다 읽고 나서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믿지만죄과를 묻는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공정하게 죄과를 가려내어 공평한 상벌을 하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실을 아는 것으로써과거를 청산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앎이 사죄와 보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이유를 묻는 그에게 나는 대답하였다.

“일본이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국민은 역사로부터 배울 기회를 도둑맞았다. 일제시대를 통해서배운 “힘만 강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이 된다”는 믿음이 대를 물고 이어 내려와 우리는 쿠데타와 군사독재를 반복하여 겪었다.우리 국민이 맨주먹으로 가까스로 쟁취한 오늘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피를 먹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이 민주주의가소중한 만큼 나는 불안하다. 과거에 있었던 불의에 대한 확실한 판결과 상벌이 없는 한 “승자는 곧 정의”라는 믿음이 근절되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은 점점 잘 살고 있다. 어느날 한국이 가난한 이웃 나라를, 또는 외국인 노동자를 힘과 돈으로억누르면서도 이를 당연한 일로 안다면 이는 분명히 우리가 그릇된 역사에서 배운 탓이다.”

시간이 늦었다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복도에서 운동화 끈을 매느라 몸을 숙였다가 일으키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고말했다.
“사죄와 보상으로 가는 역사청산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일순 분위기가 무거워 나는 딴청을 피우며 우스개소리처럼 가볍게말했다.
“일전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적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사실은 제가 무척 당황했어요.”

그도 따라 웃으면서 지금생각하면 자기도 참 부끄럽다며 두 손으로 뺨을 감싸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근거로 제가 그 일을 잘 알 것이라고 기대하셨지요?”

정말 한참 생각한 후에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일은 우리에게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저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었어요.”

아아, 빨.주.노.초.파.남.보!



에필로그

몇 달 후에 그가 연락했다. 그는 그간 조사한, 독도에 관한 일본의 여론을 내게 전해 주었다. 일본의 국수우익파들조차도 독도가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리라고 자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제적인 영토분쟁에선 그 땅이 그간 어느 나라에의해 관할되고 수비되어 왔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므로 일본은 아마도 승산이 없을 거라고 하였다.

한국 국민들이독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 계속해서 우리 땅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한국 정부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서 끊임 없이 가꾸고조사하는 한편 외국의 기관이나 출판사에 독도의 표기와 국적을 바로잡는 서신을 꾸준히 보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잊을만하면 불쑥불쑥 신경을 긁어대는 일본에 휘둘려 흥분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독도를 지키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2005년 6월)